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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을 배웁니다. : 박조준 목사 ( 15: 1-11 )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본문 중에 10절 말씀에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사람을 꼽으라면 여러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을 지적하라면 저는 서슴지 않고 사도 바울을 꼽겠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요, 위대한 목회자요, 위대한 학자요, 위대한 전도자요, 위대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 신앙의 근거를 설명하였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세상에 기독교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사실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론이나 당위성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고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게바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고, 오백여 신도들에게 일시에 보이셨고,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고, 모든 사도에게 보이셨고, 맨 나중에는 바울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돌아봅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고백했습니다. “사실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부족한 사람이라 사도라 칭함을 받는 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의 자기 자신이 있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감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모습을 배웠으면 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정직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약점이나 단점을 가려 보려고 애씁니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넉넉한 것처럼 살려고 노력합니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유식한 것처럼 보이려고 애씁니다. 얼굴에 자신 없는 사람일수록 화장을 짙게 합니다. 약한 사람일수록 강한 것처럼 보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 특히 지도자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인의 전기를 읽어보세요. 그 사람의 훌륭한 점, 좋은 점, 잘한 일만을 부각시키고 잘못한 일, 실수한 일은 덮어 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위인을 신격화시키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의 잘못한 점, 약점을 적나라하게 내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나 약점을 조금이라도 변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는 그것을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함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잘못을 시인하기를 싫어하고 또는 잘못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때 곧 이를 시인하고 시정할 줄 압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는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었는데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위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나라는 비교적 안정이 되고 자신이 직접 일선에 나가서 전쟁을 지휘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전에서 좀 쉴 수도, 낮잠도 잘 수 있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바쁘게 뛰어다니고 전쟁할 때는 그런 유혹이 없었는데 좀 한가해지다 보니까 다윗에게 유혹이 들어와서 자기 부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의 나라 왕들은 그 자신이 법이니까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지도 않았고 다소 마음에 가책을 받게 될 때 우리아를 격전지에 내보내어 전사하게 함으로 그의 죄는 자연스럽게 은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속일 수 있고, 사람의 눈을 가리울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나단을 통해서 알아들으리만큼 말을 했지만, 처음에는 남의 일처럼 생각했었는데 나단 선지가 직접으로 지적하니까 그 자리에서 다윗이 고꾸라지고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위대한 성군이 되게 한 비결입니다. 사람이 잘못할 수 있습니다.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헤롯 왕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가졌을 때 세례 요한이 그 잘못을 지적했지만 인정하지 않고 시끄럽다고 감옥에 가두고 종래는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그래서 충이 먹어 죽는 것이 그의 말로(末路)였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둘째, 바울은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기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가슴 아파하고 회개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이 회개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으로 인정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며, 또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일 때는 당연하게 생각해서 가편 투표를 했고 모든 회중에서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대하여 심히 격분해서 외국의 성에까지 찾아가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일을 한 것이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무서운 죄를 범한 것인가를 알고 중심으로부터 회개하였습니다. 그는 옛 사람의 인격의 파멸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면으로 말하면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빌립보서 3장 4절 이하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 못하지 않은 선천적인 소질과 다른 사람이 부러울 것이 없는 후천적인 환경을 가졌습니다.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나 그 당시 최고의 석학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든 조건과 환경이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서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용납되는 사람입니까? 자기를 정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상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귀하게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히고, 아프게 하고 실망을 준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자신이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많은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밑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돼지 키우는 데 가서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울 지경이 되었으니 그 형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자기 자신의 처량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이러다가는 여기서 주려 죽겠구나’하며 자기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심각하게 깨달았습니다.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서 돌아가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돌아오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그 심령이 산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바울에게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후에 용감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는 일은 무슨 일이든지 담대하게 과감하게 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여 ‘변절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을 겁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께로부터 받은 복음 전파의 사명이 있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를 왜 세상에 보내셨나 하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밀레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을 불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24절에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했습니다. 이 얼마나 담대한 선언입니까?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생명을 내놓고 일하는 사람 앞에는 겁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깡패 생활하던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싸움해서 누가 이기느냐 하는 것은 힘이 얼마나 세고 기술이 얼마나 좋으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은 목숨 내걸고 싸우는 사람이 이긴다고 합니다. 목숨 내놓고 덤비는 사람 앞에는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에 감히 덤비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처럼 담대했습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서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 위해 생명을 내놓으니까 그렇게 담대해진 것입니다. 사명에 충실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더구나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처럼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성령을 충만히 받은 후에는 능력을 얻어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과 베드로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넷째, 바울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위대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충성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든지 주님을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했습니다. 바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본문에서 솔직히 말하는 것처럼 그는 모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 것을 말합니다. “나는 심히 고역을 했으며 감옥에도 더 많이 갇혔고 매는 수없이 맞았으며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유대 사람들로부터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스물 네 시간 동안을 아득한 바다 위에서 헤매었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 강물의 위험과 도둑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노동과 고역에 시달리며 여러 번 밤을 새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이런 수고 속에서 바울은 관제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완전히 헌신한 것입니다. 한 방울의 기름도 남기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온전히 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수고하고 많은 일을 하고도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간증한 것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일꾼이요, 충성스러운 종이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습니까?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다섯째,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사랑하고 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로 하여금 충성된 일꾼이 되게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충성되게 일했던지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 보면 바울의 대답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자연히 헌신이 따릅니다.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하는 수고가 짜증스러운 것이거나 짐이 되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고역이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삼일 기도회에 나오셔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이 시간에 참석하시는 것이 얼마나 고생스럽겠어요?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뜨거워서 이 시간을 기다리다가 오시니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습니까? 이 시간이 얼마나 좋습니까? 사랑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구원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그리스도인의 충성의 동기입니다.
요한일서 5장 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습니까? 그렇다면 구원 얻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지키는 계명은 무거울 수가 없습니다. 고역이 아닙니다. 바울은 언제나 주님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힘든 것, 어려운 것을 모르고 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섯째, 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올라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내려가야만 합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지식이 많은 대학교수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권세가 있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도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돈이 많은 부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같이 겸손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육신을 내세우자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이든지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다 해로 여겼습니다.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왜요?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버릴 마음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아름다운 덕이 여러 가지 있지만 겸손의 덕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일곱째, 바울은 감사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 구주로 받아들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 보면 “내게 힘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나는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보셔서 내게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할 만해서 맡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신실하게 보셔서 귀한 직분을 맡긴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 같은 사람이지만 우리 주님의 은혜가 풍성해서 나를 의롭다 인정해서 구원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에 감격해서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수고했다고 할지라도 이것 역시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지식이 많은 분, 권력의 자리에 계신 분, 많은 재산이 있는 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까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와 감격으로 우리의 여생을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합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