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디자인, GT 라인 트림, 그리고 그립 컨트롤. 신형 3기통 가솔린 엔진을 제외한다면 2008 마이너체인지의 거의 모든 변화가 이 한 대에 모두 담겨 있다.
진화 혹은 체질개선. 어느 쪽이라도 상관없다. 최근 푸조를 보고 있노라면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PSA(푸조 시트로엥 그룹)는 다른 유럽 메이커에 비해 마지막까지 유럽 시장을 고집한 메이커다. 90년대 초 미국 시장에서 철수한 푸조는 안방과도 같은 유럽 시장에 안주했다. 모델 라인업이 소형 해치백 중심이 되다 보니 중형차 이상 프리미엄 시장에서 독일 라이벌에 뒤처졌다. 전세계적으로 급성장하는 SUV 시장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무엇보다도 큰 실책이었다. 해치백과 왜건의 인기가 높은 유럽에서 SUV는 오랫동안 니치마켓이었으니 말이다.
미쓰비시와 손잡고 부랴부랴 아웃랜더 베이스의 4007(2007년)을 선보였을 때는 이미 시장에 경쟁차들이 넘쳐나는 상황. 늦기는 했지만 PSA 역시 시장 흐름에 맞추어 라인업을 강화하기로 했다. 해치백에 지상고를 높이는 수준이었던 크로스오버 모델을 뜯어고쳐 조금 더 SUV에 가깝게 다듬었고 2세대 3008로 SUV 고객들의 눈높이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SUV 라인업 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푸조 2013년 등장한 2008은 사실 해치백을 조금 변형시킨 크로스오버다. 일반적으로 유럽산 소형차들은 해치백이 기본. 여기에 왜건을 더하고 해외 시장을 위해 세단형이 추가되는 정도가 보디 베리에이션의 일반적인 패턴이다. 하지만 이 차가 등장했을 때는 세계적으로 SUV 수요가 넘쳐나던 시기였다. 그래서 208SW(스테이션 왜건)의 역할을 크로스오버 2008로 대신하기로 했다.
당시 푸조는 2005년 1007을 시작으로 4007, 3008 등 중간에 00을 넣은 네 자리 숫자 크로스오버 모델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미쓰비시와 공동개발한 4007은 네바퀴굴림 선택이 가능한 푸조의 첫 본격 SUV. 반면 보다 작은 3008과 2008은 푸조 플랫폼에서 독자개발했다.
2008은 디자인부터 208과 차별화했다. 헤드램프는 308처럼 아래쪽에 돌기를 넣었고 그릴 디자인도 달리했다. 여전히 소형 해치백 실루엣이지만 전고를 10mm 높였고 범퍼 프로텍터와 루프레일 등 오프로더 감성도 더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SUV와 왜건 중간 정도의 크로스오버였다.
결과적으로 2008은 SUV 인기에 편승하는 데 성공했다. 데뷔 이듬해 20만 대를 넘겼고 2015년에만 23만1,000대가 팔려나갔다. 프랑스 뮐루즈 공장에서는 첫해 310대였던 2008의 하루 생산대수를 2년 뒤 두 배가 넘는 760대로 늘려 잡아야 했다. 3년 만에 누적판매 58만 대라는 성공을 손에 넣은 푸조는 조금 이른 마이너체인지로 상품성을 강화하기로 했다. 10년 전 연간 10만 대 수준에 머물렀던 유럽 B세그먼트 SUV 시장은 2012년을 기점으로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더니 2015년 즈음에는 연간 100만 대 수준으로 급성장했다. 유럽 주요 시장 중에서도 소형 SUV에 가장 열광하는 것이 다름 아닌 프랑스였다.
2008은 조금 더 SUV에 가깝게 디자인을 바꾸고 신형 엔진과 그립 컨트롤 등으로 가치를 끌어올렸다. 2008은 이번 변화를 통해 조금 더 SUV에 가깝게 디자인을 바꾸고 신형 엔진과 그립 컨트롤 등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더했다. 디자인 변화의 핵심은 프론트 그릴. 사이즈를 키우고 수직으로 세워 노즈에서 약간 돌출되게 손보았다. 아울러 보닛 양옆에 두드러진 경계선으로 얼굴의 인상이 한층 강해졌다. 그 밖의 달라진 부분은 사실 그리 많지 않지만 실제 느껴지는 변화의 폭은 의외로 크다. 푸조에서는 샤프해졌다고 주장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와일드해진 느낌. 구형이 해치백이나 왜건을 다듬은 크로스오버 인상이었다면 신형은 보다 SUV에 가까워 보인다. 쌍까풀 하나로 미인이 된 것 마냥 무척이나 효율적인 변신인 셈이다.
인테리어는 유럽 소형차답게 간소하지만 구석구석 공간활용 능력이 돋보인다. i콕핏이라 불리는 계기판 레이아웃으로 작은 공간에 계기판과 조작 스위치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했다. 요즘 푸조차들의 특징인 작은 스티어링 휠은 처음에는 장난감이나 게임 조종간처럼 느껴지지만 재빠른 조작에 어울릴 뿐 아니라 공간활용 면에서도 유리하다. 작은 스티어링 사이로 들여다보아야 하므로 콤팩트한 계기판은 기본. GT 라인은 마이너체인지를 통해 더해진 트림인데 푸조 퍼포먼스를 대표하는 GT 혈통은 아니지만 시트, 파킹레버의 붉은색 스티칭과 계기판, 도어 트림의 빨간색 장식선으로 멋스러움을 더해준다.
엔진은 직렬 4기통 1.6L의 직분사 디젤인 블루HDi. 99마력의 최고출력과 25.9kg·m의 최대토크를 내며 스타트&스톱을 장비해 유로6 기준을 만족시킨다. 배기 매니폴드 바로 뒤에 SCR 촉매와 분진필터를 하나의 유닛으로 묶어 배치했고 요소수(AdBlue) 분사장치도 달았다. 선택적 촉매정화 시스템(SCR)은 요소수를 사용해 조금 더 번거롭고 비싸기 때문에 중형 이상의 디젤에 주로 사용하지만 푸조는 소형차에도 이 장치를 사용해 날로 까다로워지는 배출가스 기준을 만족시켰다. 지난해 스페인에서 열렸던 프레스 행사에서 푸조는 폭스바겐 디젤 사태를 무척이나 의식해서인지 자신들은 실제 주행상황에서 테스트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모습이었다.
이번에 시승한 2008 GT 라인은 본지에서 한 달 전 다루었던 2008 얼루어와 동일한 엔진에 트림만 다르다. 그런데 굳이 다시 시승한 것은 트림 말고도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기 때문. 바로 신형 2008의 핵심 장비인 그립 컨트롤이다.
적당한 성능과 뛰어난 연비의 조화 시승차에 얹힌 1.6L 직분사 디젤 블루HDi 엔진은 이미 다양한 출력 세팅으로 여러 모델에 서 실력을 검증받은 유닛이다. 99마력, 25.9kg·m의 출력과 토크는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 없지만 2008의 콤팩트한 차체에는 딱 적당한 힘이다. 2008의 디젤 라인업은 75/100/120의 세 가지 버전이 있기 때문에 성능으로는 딱 중간. 이 엔진은 실용영역에서 부족하지 않게 차체를 이끌고 연비와 경제성, 배출가스 면에서는 동급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스타트&스톱으로 정지상태에서 굳이 엔진을 멈추지 않더라도 디젤 특유의 소음이 그리 거슬리지 않는다. 소형차 디젤도 이제 NVH 대응에 적잖이 신경 쓴다는 느낌이 들었다.
변속기는 아이신과 공동개발한 EAT6가 아니라 수동 기반 싱글클러치 자동변속기(현재는 MCP보다는 ETG나 ECG로 부른다)다. 비교적 싼 가격에 좋은 연비와 편의성을 양립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싱글클러치 특유의 울컥거리는 변속감은 한국 시장에서 환영받기가 힘든 것이 현실. 요즘 대세인 듀얼클러치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푸조 관계자는 가격과 유지비라고 간결하게 답했다. 소형차와 수동변속기 비중이 큰 프랑스 기준에서 듀얼클러치 변속기는 B세그먼트에 지나친 장비인 모양이다.
핸들링 성능은 푸조 기준으로 부드럽고 나긋나긋하다. 푸조는 한때 소형 FF 핸들링에서 톱클래스에 손꼽혔지만 최근에는 승차감 쪽에 무게를 두는 추세다. 고객 취향을 무시할 수 없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 대신 노면충격을 잘 잡아 승차감이 전보다 좋아졌다. 무게중심이 높은 보디 성격상 롤링은 해치백 208이나 308에 비해 큰 편. 급코너에서 약간 휘청거리는 듯하면서도 끈끈하게 버티는 모습이 푸조답다.
국내에는 디젤뿐이고 가솔린 버전은 수입되지 않는다. 한국은 가솔린은 미국, 디젤은 유럽 기준을 따르다 보니 북미에 수출되지 않는 유럽산 가솔린 모델을 수입하기 어려운 구조. 다행히 기자는 1년 전 스페인에서 있었던 신형 2008 론칭 행사에서 2008 가솔린을 타볼 기회가 있었다.
3기통 엔진의 가장 간단한 접근법은 4기통 2.0L에서 1기통을 잘라낸 1.5L다. 하지만 푸조는 조금 더 작은 EB 엔진을 만들었다. 2012년에 208을 통해 선보인 이 소형 가솔린 엔진은 1.0~1.2L 배기량에 자연흡기와 터보의 다양한 버전이 있다. 1.2L 110마력형은 토크감이 두텁지 않지만 넓은 토크밴드 덕분에 한결 부드럽고 매끈한 느낌을 받았다. 조건은 어른 두 명에 수트케이스 두 개를 실은 상태. 처음에 액셀 페달을 밟았을 때는 금세 힘이 빠질 것처럼 빈약해 보였지만 터보의 과급을 받는 3기통 엔진은 경사로가 길게 이어진 산길에서도 숨을 헐떡이지 않고 의외로 힘차게 달렸다. 이 정도 성능에 L당 14km를 달린다면 디젤과의 사이에서 무척이나 고민이 될 듯했다. 국내에 수입되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웠다.
그립 컨트롤, 간이 시스템 그 이상 푸조가 2008 글로벌 론칭 행사에서 공들인 또 한 가지 부분은 그립 컨트롤이었다. 자동차를 구입할 때에는 용도와 가격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한다. 예를 들어 일본의 홋카이도처럼 눈이 많은 곳에서는 경차라고 해도 네바퀴굴림이 기본.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4WD는 거추장스러울 때가 많다. 성능 좋은 4WD 시스템은 어떤 상황에서도 뛰어난 트랙션을 제공하는 대신 그만큼 값이 비싸고 매일같이 연료를 낭비한다. 한두 달의 유용함을 위해 열 달의 불편함을 감수할 것인가는 결국 소비자가 판단할 몫.
푸조는 조금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 B세그먼트 소형 SUV인 2008에 굳이 4WD를 넣는 대신 보다 정교한 트랙션 컨트롤 시스템으로 2WD의 단점을 보완했다. 앞바퀴굴림의 간편함과 높은 경제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미끄러운 노면에서 어느 정도 트랙션을 확보해줄 비장의 무기다. 사실 이와 비슷한 장비들은 이미 다양하게 존재한다. 푸조는 FF 구동계에 맞추어 시스템을 최적화해 그립 컨트롤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얼루어 이상의 트림에 선택 가능하며 자동과 수동변속기에서 모두 고를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모드는 스탠더드/스노/머드/샌드/ESP 오프의 다섯 가지. 좌우 그립 차이가 큰 노면에서 차를 출발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운 모래 위에서 헛바퀴를 굴리며 구덩이를 만드는 일도 줄여준다.
푸조가 현지에서 준비해 두었던 테스트 장소는 골프장 한쪽 구석에 마련된 작은 모래밭이었다. 짧은 코스였지만 건조한 고운 모래는 두바퀴굴림으로 섣불리 공략하기 어려운 난코스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샌드 모드로 맞춘 2008은 간단히 출발해 속도를 붙였다. 그저 액셀 페달을 밟는 것만으로 두 바퀴의 회전을 제어해 나아가는 모습이 믿음직했다.
2008은 이번 마이너체인지를 통해 조금 더 그럴듯한 SUV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SUV 고객 대부분이 도심을 주로 달린다지만 SUV의 가치는 포장도로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드러나기 마련. 그립 컨트롤은 4WD가 부담스러우면서도 가끔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장비다. 네바퀴굴림만 못해도 FF의 한계는 충분히 넘을 수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2008은 더욱 매력적인 존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