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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아래 글의 필자는 명리학자 김태규이다. 일전에 카페를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박학다식하지만 현학적이지 않다.
특히 경제관련 분석이 돋보인다. 글을 읽기 쉽게 자연스럽게 편하게 쓴다. (딱딱하고 경직된) 사회과학적 분석 방식이 아니더라도
사회현상을 더 잘 풀어내고 있어 꼬박꼬박 그의 글을 읽는 편이다. 아래 글(全文)이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이 글을 소개하는 이유는 최근 펴낸 『한자.한문인문학으로본 한국사회대관』의 글 중 1편과 2편의 글들이 사회과학적인 분석 틀에
기반하여 사회현상을 바라본데 반해 아래 글은 개인의 경험에 바탕하되 1편과 2편 글에서 밝힌 사회현상을 더 쉽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제목인 "선진국이 되긴 되었는데 그게 참! : 대가가 너무 커"도 책의 冒頭 글의 핵심을 그대로 잘 나타내었다.
그림도표는 『한국사회대관』에서 뽑아 편집자가 첨부한 것이다.
다만 그의 글 중에서 자신이 집대성하여 정립했다는 자연운명학(명리학)적 해석에는 동의하지 않음을 밝혀둔다.
아래 글의 필자는 수묵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다. 작품 하나도 첨부한다.
-------------------------------------------------------------------------------------------------------------------------------------- 선진국이 되긴 되었는데 그게 참!
예전엔 아이들을 방목했는데
시간을 거슬러 가보자. 집집마다 아이들이 적게는 셋, 많으면 여덟이었다. 아빠는 논밭에 나갔고 엄마는 집안 살림하느라 정말이지 겨를이 없었다. 먹고 살기 바빴고 먹여 살리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育兒(육아)는 어떻게? 하겠지만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저희들끼리 놀았다. 맏형이나 큰 누나가 데리고 다니거나 아니면 옆집 형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다녔다.
아이들 역시 놀지만은 않았다. 이런저런 할 일이 정말 많았다. 20 여리 떨어진 학교 다녀오면 가방 휙-던져두고 친구들과 함께 개천에 가서 가제나 우렁이 잡으러 가고 산딸기 따먹으러 산으로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그건 농땡이 치는 것이고 각자의 주어진 몫을 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안전 문제에 대해선 거의 걱정할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동네 마을 모든 아줌마들이 혈연에 관계없이 이모였으며 남자들은 삼촌이었다. 저녁이 되어 아이가 보이지 않아도 주변에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사실 놀다가 다치는 개구쟁이 말고는 안전이란 문제가 없었다. 교통사고나 유괴, 실종 사건 같은 무서운 일 따윈 거의 없었다.
나 호호당의 기억
나 호호당은 부산에서 자랐으니 도시 출신이다. 하지만 동네 테두리 안에서 동네 형 동생들과 늘 함께 다녔고 놀았기에 위험한 일이 없었다. 가장 즐거운 일은 윗동네와의 ‘전쟁’이었다. 우리 동네 아이가 그쪽으로 놀러 갔다가 얻어맞거나 삥을 뜯기면,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면 동네 형들이 윗동네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그야말로 흥분과 스릴이 넘치는 전쟁, 또는 전쟁놀이야말로 가장 신나는 일이었다. 가끔 날아온 돌이나 막대기에 맞아 다치기도 했지만 그 보상으로 영웅 대접을 받곤 했다. 참전용사 대접.
평소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엄마가 집밖으로 나와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곤 했다. 다소 떨어져 있어도 누군가 내게 와서 너희 엄마 너 찾던데, 빨리 가봐! 하고 알려줬다. 여름이면 땀 뻘뻘 흘리면서 밤늦도록 놀았다. 당시 부산은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섬유업체나 여타 공장들에서 일을 했기에 위험한 지역, 이른바 우범지대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 사창가도 많았다. 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폐지나 폐품을 주어 망태기에 넣고 다니는 껄렁한 양아치들도 많았다. 공장 지대 이면엔 판잣집들이 즐비했고 여기저기에서 성폭력 사건 정도는 다반사였다.
동네 아이들은 하지만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철저하게 교육을 받아서 위험한 곳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일단 우리 동네에서 멀었기에 가질 않았다. 특히 영도다리 건너갔다가 납치되면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수가 있다면서 늘 주의를 받곤 했다.
영도다리 건너 영도 섬 쪽은 공포의 지대였다. 그 동네 아이들 역시 사납고 용맹했으며 또 교활했다. 영화 ‘친구’는 바로 그 영도 섬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런가 하면 고아원 아이들도 무서웠다. 나중에 범죄를 저지른 끝에 소년원에 많이 끌려갔다. 온 부산 시내에 사나운 거지들도 많았고 부랑자들도 많았으며 폐인이 된 상이용사들이 돈을 뜯고 돌아 다녔다.
하지만 그냥 일반 동네 테두리 안에선 대단히 안전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풀어놓고 지냈다. 시골은 더더욱 放牧(방목)했다. 아이들은 그런대로 밥만 먹여주면 절로 자랐다. 소나 염소나 아이들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과거 시절의 얘기를 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감이 오셨을 것이라 본다.
저출산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의 저출산, 심각하다. 수십 년에 걸쳐 막대한 돈을 풀어도 저출산 추세는 변함이 없고 더욱 나빠지고 있다. 부모들은 모두 직장에 나가거나 일을 하는 터라 아이들을 돌봐줄 수가 없다, 여성들 역시 자신의 일을 하면서 캐리어 우먼이 되려 하고 수입이 부족해서 나가서 일을 한다. 그러니 집에서 아이들을 키울 시간이 없다. 그런데 예전처럼 아이들을 放牧(방목)할 수도 없다. 게다가 시부모와 함께 살지도 않고 동네 아줌마들과 아저씨들이 이모 노릇 삼촌 노릇을 해주지도 않는다. 아파트에 살면서 옆집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판국에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저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가 사실상의 託兒所(탁아소) 노릇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간혹 선생님들이 아이를 학대하는 바람에 난리가 나곤 한다. 이젠 중학교 역시 사춘기의 이상한 아이들, 어디로 튈 지 알 수 없는 학생들을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수업이란 게 그저 아이들을 붙잡아 놓는 게 전부이다. 교실에서 졸고 있든 만화책을 보든 그건 신경 쓸 일도 아니다. 敎師(교사)가 교사가 아니다. 배울 마음이 없으니 가르치지도 못 한다. 행동불량이라 훈육을 할 수도 없다. 팰 수도 없고 야단치면 언어 폭행이고 학대가 된다. 아이들은 그런 사정을 훤히 꿰고 있다.
배달민족의 씨가 말라가고 있으니
이를 전체적으로 볼 것 같으면 대한민국 전체가 집단적으로 번식을 삼가고 있고 심하게 말하면 장기에 걸쳐 자율적으로 씨를 말려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종족보존의 본능을 압도하는 사회적 압력이 존재하기에 예산을 늘린다고 저출산 기조가 반전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無望(무망)! 모든 젊은이들은 도시로 그리고 수도권으로 몰려든다. 그들을 새에 비유할 것 같으면 수도권엔 그들이 알을 낳고 키울 둥지가 끔찍하게 비싸서 마련할 수가 없다.
최근 젊은이들은 나름 사치하게 자랐다. 물론 이런 표현은 나 호호당의 어린 시절과 비교할 때 그렇다는 얘기이다. 가난하게 자란 부모들이 마치 한풀이라도 하듯 최선을 다해서 극진하게 키워주었기 때문이다. 모두 왕자이고 공주님들이다. 그런데 정작 사회에 나와 보니 환영해주는 분위기가 아니다. 우선 괜찮은 일자리가 태부족이다. 급여가 적은 곳은 외노자들이 하고 있다. 이에 만족할 만한 수입이 되지 않다 보니 인간적인 생활, 왕자와 공주로서의 품위를 지키면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연애는 해도 결혼은 무리이다.
알을 낳을 둥지조차 마련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결혼까지. 설령 부모님들이 뒷받침을 해 줘서 결혼한다 해도 왕자와 공주는 시종과 시녀들이 곁에 있어야 하건만 ‘셀프’로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니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아이까지 낳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한다. 최소한 保姆(보모)와 파출부 정도는 채용할 수 있어야 할 거 아닌가! 그러자니 또 돈이다.
젊은 남편은 워라벨을 갖고 취미생활에 돈을 쓰고 싶은데 아이를 낳으면 그 순간 용돈이 1/10로 줄어든다. 젊은 아내들은 자신의 캐리어 관리, 피부 관리, 멋을 부리고 꾸미는 일, 친구들과의 교제를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싶은데 아이를 낳으면 그 순간 모든 것이 망가지고 친구들 사이에서 실종 선고를 받는다.
모든 흐름이 아이를 낳지 말라는 쪽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다.
출산률이 유지되는 나라들을 보니
물론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OECD 국가 대부분이 그렇다. 그런데 그 중에서 그나마 출산율이 제법 유지되는 나라들이 있으니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그렇다. 그 나라들의 특징을 보면 커뮤니티, 즉 마을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뉴욕이나 런던, 로마나 피렌체 등의 대도시를 빼면 소규모 공동체가 여전히 살아있고 작동하고 있다. 모든 구성원이 동네 삼촌이고 할아버지, 이모와 고모 그리고 할머니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니 아이들을 낳고 풀어 키우는 일, 즉 방목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동사무소에 가면 영어로 커뮤니티 센터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말장난이고 시늉이다. 서로 모르는 사이이고 어지간한 일은 인터넷으로 처리하고 또 그렇게 하라고 권유한다. 얼굴을 익힐 시간이 아예 없다. 얼굴도 모르는 사이건만 무슨 커뮤니티? 옆집 사람도 모르는 판국에 어떻게 커뮤니티가 성립할 수 있으랴! 우리는 “微粒子(미립자) 사회”가 되고 말았다.
IT 강국, 비대면의 미립자 사회
우리 대한민국은 소위 IT 강국이다. 달리 표현하면 익명의 사회이고 비대면의 사회이다. 인터넷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회란 얘기이다. 좋은 점도 많지만 참으로 외로운 사회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사회안전망이 가장 약한 나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안전망이라 하면 정부나 국가가 나서서 이런저런 센터를 짓고 지원을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겠지만 그런 건 사실 최후의 안전망이고 안전망의 기본은 가족이고 동네 커뮤니티가 바로 사회안전망의 근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사회는 실직하거나 큰 병에 걸리면 봐줄 사람이 사실상 없는 살벌한 사회, 믿을 놈이라곤 나 스스로밖에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올 해 초 가족의 해체와 사회안전망이란 글을 썼는데 참조하시길.)
선진국의 대가가 너무 커서
그렇다,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고 크다. 저출산으로 배달민족의 씨를 자율적으로 말려가고 있다, 가족은 해체된 지 오래라서 살면서 기댈 곳이라곤 스스로 혼자밖에 없다. 정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공무원을 늘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우리는 수십 년간 진보! 진보! 발전! 발전! 외치다가 어느덧 우리는 이상한 곳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할까? 오래 전 국운의 바닥이 되면 어떻게 될까 했더니 이런 모습들을 보게 된다.
이럴 줄이야 정말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까?
(출처 : https://hohodang.tistory.com/ [희희락락호호당])
첫댓글 깊이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