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사학을 넘어 동양 최대 사학이라 불리던 선인 재단. 1965년에 설립된 선인 학원은 설립 초창기부터 설립자 백인엽의 학교 운영상의 문제로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다가 결국 1994년 3월에 시·공립화 되었다. 이렇게 석 줄로 요약하자니 한가롭게 여겨지기까지 하지만, 사실 선인 학원이 시·공립으로 전환되기까지의 29년 동안에는 정말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이 짧은 지면에서 그 세세한 사항들을 다 전하지는 못하겠지만 선인 학원의 시·공립화는 재단 내 교직원과 학생들 그리고 인천 시민들의 줄기찬 요구와 오랜 염원이 이루어 낸 결실이자, 인천의 사학 비리가 종지부를 찍고 교육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965년 백인엽이 세운 사학, 학교수 만 15개 선인 학원은 1965년 인천광역시 남구에 설립되었던 학교 법인이다. 우리나라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 장군의 친동생이었던, 또 그 역시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던 백인엽이 세운 재단이다. 백인엽은 1964년 10월부터 1981년 3월 사이 남구 도화동 235의 1번지 등, 여덟 필지의 대지 16만 3700여 평에 연면적 4만3천897평의 인천대 교사(校舍) 등 모두 8개의 교사를 85억 원을 들여 건축하였다. 백인엽은 1958년 8월, 인천의 작은 사학 재단이었던 성광학원을 인수한 후 1965년 3월, 학원 명칭을 ‘선인’으로 바꾸고 이사장이 됐다. 또 산하 학교의 교명을 가족, 형제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인천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선인 재단의 학교 규모는 정말 대단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모두 15개의 학교에 학생 3만6천400여 명에 이르는, 그야말로 동양 최대의 사학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하고 인구수가 100만 명을 넘어선 1981년, 선인 학원의 중·고등학교 재학생 수는 인천시 전체 중·고교 재학생 수의 23%, 인천시 사립 중·고교 재학생 수의 47%를 차지했다. 그만큼 인천 교육에서 선인 학원의 비중은 막대했다. | ▲1970년 4월 공사를 시작해 1973년 9월 모습을 드러낸 선인체육관. 장충체육관의 3배 규모였으며, 동양 최대 규모로 지어져 '맘모스 체육관'으로 더 많이 불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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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 학원은 1965년 재단 설립 이후 2개 대학, 11개 중·고등학교, 1개 초등학교, 1개 유치원 등 모두 15개 학교로 확장되었다. 이에 해당하는 학교들은 인천대, 인천전문대(인천공업전문대학과 인천체육전문대학 통합, 1981), 인화여고, 선화여상, 선인고, 운봉공고, 운산기계공고, 항도실업학교, 항도상업기술학교, 인천체육고, 인화여중, 선화여중, 선인중, 효열초, 진흥유치원 등이다. 학교의 이름도 앞서 말했듯이 ‘선인’의 경우는 백선엽의 ‘선’과 백인엽의 ‘인’에서 따왔으며, 각 이름에 ‘화’ 자를 붙여 ‘선화’와 ‘인화’를, 어머니의 이름에서 ‘효열’을, 백선엽의 호에서 ‘운산’을, 백인엽의 호에서 ‘운봉’을 따와 교명을 지었다. ‘진흥’은 백인엽의 아들 이름이다.선인 학원이 들어선 인천 도화동 일대는 해발 152m의 ‘부처산’이었다. 이 일대에는 중국인 공동묘지와 월남한 피란민들의 판잣집이 들어차 있었다. 백인엽은 이곳에 학교를 짓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전을 반대하는 주민이 있으면 그 집 한 채만 남긴 채 주변을 깎아 절벽을 위의 집을 만들거나, 마을 한가운데 집을 사들인 후 반쯤 부숴 유령의 집을 만든 다음 인근 주민들이 불안에 떨다가 헐값에 집을 팔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또 부지 확장 과정에서 중국인의 공동묘지를 불도저로 밀어 버려 이것이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당시 파헤쳐진 중국인 묘지에서는 시신에 금가락지 등이 그렇게 많이 끼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초등학생들이나 중학생들은 이를 차지하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부처산으로 가서 서로 옥신각신하며 가락지를 갖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 ▲2013년 8월 3일, 이 일대 재개발을 위해 폭파 해체된 선인체육관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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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서울 다음으로 인천에서 고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면서 추첨에 의해 학교를 배정받는 상황이 되자, 학부모와 학생들은 선인 학원 소속 학교에 배정을 받을까봐 매우 불안해했다. 그만큼 학교에 대한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로 유명한 김중미 작가 또한 인화여중에 배정을 받았는데, 당시를 회고하는 그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원하지 않는 학교에 배정을 받아 어렵사리 학교생활을 시작하면서 오히려 문학에 대한 창작열을 더욱 불태웠다고 한다. 꼭 선인 재단 내의 학교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으나, 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선인 학원 소속의 학교에 배정받는 것을 그다지 원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80년 초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은 집권 초 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선인 학원의 비리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문교부 감사에 따르면 선인 학원에서는 1979년 1월부터 약 9천900여 명을 부정한 방법으로 편입학하게 했고 기부금 61억 원 중 상당액을 백인엽이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백인엽은 업무상 횡령으로 밝혀진 재산을 양도·헌납하겠다는 서약서를 1981년 3월 21일 검찰에 제출하였고, 다음날인 3월 22일엔 ‘선인 학원 국가 헌납서’를 제출했다. 선인 학원과 산하 학교 15개를 헌납하고 선인 학원 이사장직을 사임하겠다고 서명한 것이다. 결국 선인 학원 이사회는 1981년 4월 6일 선인 학원을 국가에 헌납하는 안을 정식으로 채택해 이사 전원 찬성으로 의결했다. 이렇게 백인엽의 구속과 선인 학원의 국가 헌납에 이어 이사가 전원 사퇴함으로써 20여 년간 파행으로 운영된 선인 학원은 정상화의 길로 들어서는 수순을 밟는 듯했다. 그러나 그해 8월, 형 백선엽이 선인 학원의 관선 이사로 선임하면서 결국 당시 이규호 문교부 장관에 의해 추진되고 있던 선인 학원의 국·공립화 논의는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한편 1986년 10월 21일 ‘재단 정상화 투쟁위원회’를 구성한 인천대 학생들이 백인엽 퇴진과 보직 교수 총사퇴 등을 요구하며 사위를 벌이다가 체육관에서 축구부 학생들과 대규모 폭력 사태를 벌이게 된다. 이는 재학생 5천명 중 약 3천500명이 모인 인천대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결국 10월 31일 문교부는 당일 학교 휴교령을 내렸는데, 특정 대학 내의 문제로 휴교령이 내려진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당시 5명의 학생이 구속되고 4명의 교수가 징계위에 회부되었으며 10명의 학생은 정학 처분이 내려졌고, 백인엽은 두 번째 퇴진을 하게 되었다. 휴교령은 무려 53일이 지난 뒤에야 해제됐다.이후 1986년 12월 31일 문교부는 선인 학원의 이사장과 인사를 전원 사퇴시키고 문교부 추천 4인과 백인엽 추천 4인으로 새롭게 이사회를 구성했다. 새롭게 임명된 박재규 인천대 학장과 신임 이사장인 신능순 전 경기도 교육감은 인천대와 선인 학원의 정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89년 인천대가 종합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선인 학원 내 학교들의 교육 환경을 개선하고 자율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백인엽은 이들의 노력을 다시 무력화시키며 ‘운봉 연구소’를 설치하여 선인 학원 운영에 다시 개입하기 시작했다.
| ▲1980년대 선인학원에 있던 인천대 학생들을 자발적으로 학내 민주화 투쟁에 참여했다.(사진제공 디지털인천남구문화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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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진통을 겪은 뒤 1994년 3월 시․공립으로 전환 1992년 1월 20일, 인천 중앙감리교회에서 ‘선인 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 시민의 모임 준비위원회(이하 시민모임)’가 결성되었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던 정부에서는 선인 학원의 철저한 종합 감사를 방침으로 정해 4월 17일 감사팀을 인천대에 보냈다. 시민모임은 ‘선인 학원의 정상화를 위한 인천 시민 10만 인 서명 운동’을 벌였으며 한 달여 만에 7만 명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또 선인 학원 정상화를 위한 인천 시민 결의 대회를 열었고, 선인 학원 각급 학교 졸업생의 공동성명서 발표도 진행했으며, 자체 조사를 통해 백인엽이 재단 기금을 불법으로 인출한 사실도 밝혀냈다. 결국 1992년 6월 10일 교육부는 선인 학원의 이사 7명을 해임하고 관선 이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새 이사진은 6월 11일 첫 이사회를 열어 학원 정상화 대책을 마련했는데 마침 당시 MBC의 시사 프로그램인 에서 선인 학원 사태가 보도되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보도는 그때까지 선인 학원 사태에 대해 잘 몰랐던 인천 시민들을 각성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선인 학원 정상화를 바라는 서명 운동은 더 광범위하게 전개됐다. 이런 여론에 힘입어 마침내 백인엽은 1993년 6월, 선인 학원의 공립화를 조건으로, 설립자로서의 권한 일체를 인천직할시장에게 기증한다는 내용의 기증서를 당시 최기선 인천직할시장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선인 학원에서 운영하던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전문대 등 13개의 학교와 인천대는 1994년 3월 1일자로 시·공립으로 전환되었다.
인천 교육계의 큰 역할하며 수 많은 선인 출신 배출 공립화 전환 이후 선인고는 건물을 새로 짓고 교육청 이하 전 교직원이 학교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으며 2017년부터는 과학중점학교로 지정되어 차별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진학 지도에 힘쓰고 있다. 또 선화여상(’69)은 인천비즈니스고(’09)로, 과거 ‘도봉산’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던 3개의 전문계열 학교인 항도실고(’82)는 전자공고(’96)를 거쳐 인천전자마이스터고(’10)로, 운봉공고(’71)는 인천하이텍고(’12), 운산공고(’78)는 도화기계공고(’04)로 교명을 바꾸고 모두 교육과정 특성화에 앞장서며 학사 운영에 주력하고 있다. 인천대학교는 1994년 시립화가 된 후 송도로 캠퍼스를 이전하여 2013년부터 국립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인천에 살면서 마흔을 넘긴 사람들 중 선인 재단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전무후무한 규모로 약 30년 가까이 인천 교육계에서 큰 역할을 해왔던 선인 학원은 아쉽게도 그 양적 규모에 비해 질적 수준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해 여러 차례 파행과 개선을 거듭해 오다가 결국 시∙공립화가 전격 이루어지면서 영욕의 역사에 매듭을 짓게 되었다. 학교 운영상의 많은 문제가 있긴 했으나 선인 학원은 우리 인천 교육의 분명한 한 축을 차지했던, 그래서 더욱 인천 시민들에게는 아프지만 돌아보아야 할 대상이다. 또 긍정과 부정의 평가를 차치하고 우리 인천 교육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차원에서라도 그 공과에 대해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직까지 인천을 비롯한 사회 각계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선인 학원 출신의 수많은 시민들이 있고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어 온 선인 학원의 역할과 순기능에 대해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선인 재단과 관련된 다소 우울한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중∙고등학교 시절 선인 학원에서 십대를 보냈던 당시의 학생들을 만나 재단 운영에 가려진, 그러나 그들의 즐겁고 좋았던 학교생활의 추억들을 이 지면을 통해 다시 실어보고 싶다.
글․사진 이동구 인천 광성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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