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군산 등산을 통해 또 하나의 삼국지 영웅 황충과 하후연을 만난 난 삼국지가 배출한 최대의 스타 제갈공명이 잠든 무후묘로 간다. 공명은 삼국지에서 유비를 보좌하는 조연으로 나오지만, 유비보다 더 재미와 스릴을 느끼게 해 주는 주인공 같은 사람이다. 삼국지는 유·관·장의 도원결의로 시작해 그들이 주인공처럼 등장하지만 공명이 없는 삼국지는 재미없는 역사이야기일 뿐이다.
▶ 정군산에서 무후묘 가는 길
무후묘는 정군산 북측 성채에서 1km가 좀 넘는 거리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정군산에서 산길을 내려오다 보면 왼쪽으로 무후묘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인다. 입장료 50원이며 반표는 25원으로 다른 곳에 비해 무척 저렴하다. 勉县이라는 지역은 워낙 험한 진령산맥을 넘어와야 하고 청두에서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아 싼 걸까?
▶ 무후묘 배치도
공명은 오장원에서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가 누운 안식처는 그의 유언에 따라 勉县의 정군산 기슭에 마련한 무후묘(武侯墓)다. 하늘을 읽고 세상의 흐름을 이해한 공명이지만, 공명도 제 죽음만은 어찌하지 못하고 이곳에 잠들었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무후묘가 무척 많지만 모두 사당이라는 의미의 묘(廟)를 쓰는 곳이고 덤이라는 묘(墓)를 사용하는 곳은 勉县 정군산 무후묘가 유일한 곳이다. 공명의 무덤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진위가 논란이 분분하다. 하지만, 최근에 이곳이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 이유는, 제갈량이 <주역(周易)>에 밝았다는 것은 제갈량이 개발한 '팔진도(八陣圖)'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이 무덤에 세워진 오래된 측백나무의 배열을 보면 팔괘와 관련이 있고, 건물의 배치도도 팔괘의 원리에 따라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공명은 죽으며 자신의 시신을 정군산에 묻고 머리는 북으로 해달라고 유언을 남겼을까? 당시에는 도성(즉, 청두)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고, 날씨마저 영하의 날씨가 없으므로 시체가 빨리 부패하며, 위나라와 적대관계에서 방비를 강화해야 할 판인데 제갈량의 장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곳 한중과 가까운 정군산에 안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곳은 생전에 공명이 군사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둔전도 일구었던 곳으로 공명은 군사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지냈던 이곳에서의 시절이 가장 행복하고 무척 그리웠나 보다. 그리고 이곳에서 못 다한 북벌의 꿈을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었던 모양이다.
▶ 무후묘 광장에 있는 제갈량 입상
▶ 기단에 새겨진 부조
무후묘 앞 광장엔 공명을 석상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양 눈이 위로 찟어진 얼굴의 생김새가 무슨 폭력배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곳이 공명이 묻힌 유일한 무덤인데 삼국지의 활약에 걸맞는 얼굴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석상 좌대엔 공명이 삼고초려를 하며 찾아온 유비를 만나 융중대책을 알려주는 장면을 새긴 부조가 있는데 공명과 유비가 처음 만날 당시 공명이 겨우 27살임에도 환갑도 더 넘은 노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런 걸 만든 석공이나 勉县 관리들은 도대체 삼국지를 읽어 봤는지 궁금하다.
▶ 무후묘 입구(외산문)
입구엔 사자상 두 마리가 무후묘를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가게나 집, 유명한 유적지에서는 사자상이 있는데 잡스러운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대개 암수 두 마리가 있는데 암사자는 오른발로 새끼를 깔고 있고, 숫사자는 오른발에 '여의주(如意珠)'를 깔고 있다. 때로는 해태가 있는 경우도 있는데, 해태는 양의 돌연변이로서 바르지 못한 사람이 들어가게 되면 뿔로 들이받는다고 한다.
입장권을 사 무후묘 안으로 들어간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씨임에도 무후묘에는 구경 온 사람이 꽤 보인다. 깃발을 든 사람을 따라가는 관람객들이 많이 보이는 걸 보니 단체 관광객이 많은 것 같다.
▶ 외산문에서 내산문으로 가는 길
▶ 조벽에 새겨진 충무
안으로 들어가면 무후묘라는 문이 또 나오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사당이 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조벽이 서 있는데 그 조벽에 충무(忠武)라는 글이 써있다. 원래 '충(忠)'이라는 단어는 '충성'이라는 말이 아니고 '남에게 진심으로서 대하는 마음'이란다. 그래서 공자도 그의 가르침을 '충서(忠恕) 뿐이다.'라고 했다. '남에게 진심으로 대하고(忠), 남을 포용하는 마음(恕)을 가진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군주를 '진심'으로서 대하는 것은 곧 백성을 진심으로서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바로 '충'이라는 것이다. 공명이 죽자 정군산에 공명을 장사지내며 촉한의 황제 유선이 공명에게 내린 시호가 충무후(忠武候)라 충무라는 글자를 새겨 놓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순신장군이 전사하자 선조가 이순신장군에게 내린 시호가 충무이고 지금도 우리는 이순신장군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으로 부르는데.
▶ 내산문
유비가 죽은 후 유비의 뜻을 받들어 그의 아들인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5차에 걸친 북벌에 나섰다가 234년 오장원에서 과로가 누적되어 54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 공명의 유언에 따라 이곳 정군산 기슭에 묻혔고 그때까지 승상 무향후라 불리던 공명에게 후주 유선이 충무후란 시호를 내림으로 공명을 모신 사당의 이름이 무후사가 된 것이라 한다. 勉县의 무후사는 중국에서 가장 먼저 세운 무후사라 한다. 대개 무후사라 하면 청두의 무후사를 생각하겠지만, 가장 '원조'이고, 촉한 황실에서 직접 세운 것은 바로 이 곳이다. 후주(後主) 유선은 경요(景耀)6년(263) 봄에 조서를 내려 제갈량의 사당을 세우고 그를 직접 위로하였다. 제갈량은 유선에겐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항상 국가의 중대 사안이 발생되면 일의 대소 구분 없이 제갈량에게 자문을 구할 정도로 의존하던 공명이 곁에 없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상심하겠는가? 이곳 무후사는 그런 후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또한, 무후사 돌문 앞길은 검문관에서 바로 이어지는 길로 검문관을 통과한 사람은 반드시 무후사 앞길을 지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무후사 앞길을 지나면서 제갈량의 나라를 걱정하고 공평무사한 마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 내산문 내 삼고초려 벽화
▶ 내산문 내 유비의 유언을 받는 공명을 그린 벽화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그림 두 점이 있는데 하나는 삼고초려를 하기 위해 공명의 초막을 찾는 모습이고 또 하나는 백제성에서 유비가 죽음을 앞두고 공명에게 유언을 남기는 모습이다.
▶ 공명의 사당
사당 문을 들어가면 정면 건물에 삼대유재(三代遺才)란 편액이 걸려있는데 이는 공명이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三代의 현인들과 비견된다는 의미다. 오른쪽에는 공명의 명성이 우주에 까지 드리웠다는 명수우주(名垂宇宙)라는 편액도 보인다.
▶ 사당 내 공명 좌상
사당 정면에는 제갈량이 깃털부채를 들고 온화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원래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병법 24편이다. 하지만, 제갈량이 깃털 부채로 바꾼 것에 대해선 전해 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공명이 길을 나서는데 온 동네의 거위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거위들이 지나가고 공명의 옷에는 거위 깃털이 남자 손재간이 좋은 황씨 부인은 부채 학우선을 만들어 공명에게 주고 이 깃털부채 학우선이 공명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좌우에 시립하고 있는 사람은 관흥(關興)과 장포(張包)다. 왼쪽의 얼굴 가무잡잡하고 창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장비의 아들 장포이고, 오른쪽의 희끄무레하고 언월도를 들고 있는 사람이 관우의 아들 관흥이다. 대개 제갈량이 신뢰하는 장수라면 조운이나, 장익, 마대 정도일텐데 왜 하필이면 관흥과 장포인가?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제갈량과 유비가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나이 차가 스무 살 이상으로 부자의 나이 차라도 거의 손색이 없는 나이 차이다. 관우와 장비는 촉한 무장의 상징이며, 유비의 형제들이다. 제갈량이 아무리 유비와 수어지교를 맺었더라도 그 세대가 떨어져있는 사람이다. 관우나 장비를 세우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그래서 그 아들인 관흥과 장포를 세운 것이다.
▶ 촉서에 있는 제갈량전을 쓴 목간
옆 벽면에는 제갈량전이 목간(木簡)에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선주와 후주를 제외하고 <촉서>에서 따로 전(傳)이 있는 것은 제갈량이 유일하다. 혹자는 '제갈량이 진수(陳壽 : <삼국지>의 저자)의 아버지인 진식(陳寔)을 죽였으므로 제갈량을 나쁘게 썼다.'고 말하지만, 진수도 역사가다. 물론 역사라는 것이 100% 진실로 쓸 수는 없지만, 역사가는 전대(前代)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예로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은 궁형(宮刑 : 생식기를 도려내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역사서를 만든 걸 보면 자신의 고통이나 아픔보다도 역사를 써야한다는 그들만의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진수가 그런 제갈량을 '사사로운 원한'에 폄하하였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 출사표 목간
그리고 맞은편에는 <전(前)·후(後)출사표(出師表)>가 있다. <전출사표>는 역사서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애석하게 <후출사표>는 역사서에 없다. 다만, 양(梁)나라의 태자 소통(蕭統)이 지은 <문선(文選)>에 <후출사표>가 있는데, 이것에 대한 위작(僞作)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지만 당대의 군사적 대치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출사표>의 문체와 <후출사표>의 문체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어쨌든 이 명문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하고 있다.
臣本布衣 躬耕於南陽 (신본포의 궁경어남양)
신은 본디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 갈던 사람으로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侯 (가전성명어난세 불구문달어제후)
난세에 생명이나 보전할 뿐 제후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는데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선제불이신비천 경자왕굴)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굽히시고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
세 번이나 신의 초려를 찾으시어 신에게 당시의 세상사를 하문하셨습니다.
由是感激 遂許先帝以驅馳(유시감격 수허선제이구치)
이에 감격하여 신은 선제께 견마의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출사표에서 공명이 쓴 대로 공명은 삼고초려의 감동을 잊지 않고 주군을 위해 평생을 달리다 오장원의 별이 되어 이곳에 잠들은 것이다.
▶ 제갈량 무덤과 비각
▶ 비각 내에 있는 공명의 비석
이제 공명의 사당을 나와 공명의 무덤으로 간다. 무덤 앞에는 비각이 있고 그 안에 있는 석비엔 한승상제갈충무후지묘(漢丞相忠武侯之墓)라 쓰여 있다. 이 석비는 명나라 만력 갑오년(1594년) 가을인 9월에 섬서 안찰사 김릉조라는 사람이 세웠다고 한다.
▶ 제갈량 무덤
묘지 크기는 겨우 관 하나만 들어갈 정도로 소박하게 부탁했고 묻을 때 평소 입었던 옷으로 하고 절대로 무덤 안에 다른 것은 일체 넣지 말며 무덤엔 기와도 올리지 말고 담도 쌓지 말고 일체의 재물도 넣지 말라고 유언했다. 뤄양의 관우묘는 몸도 없이 머리만 묻었는데도 그 크기가 작은 산만 했고 랑중의 장비도 몸도 없고 머리만 묻었는데 무후묘보다도 더 크다. 공명은 죽어서도 무덤을 소박하고 작게 만들었다. 한 세상을 광풍과도 같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제갈공명은 여기에 잠들었다. 하늘 우러러 천기를 읽었고 천 리 밖의 일도 예측했으며 미래의 모습을 언제나 그려냈다. 그의 결정은 늘 옳았고 모든 사람이 칭송했다. 하늘의 이치를 따랐으며 역행하는 일이 없었다. 또, 죽어서까지도 공명만큼 깨끗한 사람도 드물다.
공명의 무덤 앞에 서니 마음이 울적해진다.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공명의 투시력과 리더쉽,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에 적합한 결정을 내리는 공명을 보며 제갈공명학을 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이곳에 무덤을 만들라고 유언을 남긴 이유는 공명이 주군으로 모신 유비의 유지를 자기 힘으로 다하지 못하고 죽은 원통함의 표현일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과 유업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움에 고향 땅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살아생전 사심없이 유비만을 생각하고 평생을 살다 저세상으로 갔지만, 죽어서도 주군만을 생각하며 잠들어 있다. 정말 이런 사람 흔치 않다. 이런 사람 곁에 하나 있다면, 천하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또한 머리를 북쪽으로 해 달라고 유언했지만, 실제로는 머리는 서쪽을 향하고 다리가 동쪽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장안이 바로 동쪽에 있어 벌떡 일어나면 바로 장안을 볼 수 있기 때문인가? 북쪽으로 머리를 두게 해달라고 한 것은 공명이 얼마나 북벌에 대한 염원이 컸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죽은 후에도 위나라를 노려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청두에서 한중가는 길목에 군산이 있다
이곳 정군산 자락은 북벌을 꿈꾸며 선제 유비가 살았을 때 함께 베이스캠프를 차리기 위해 한중을 치려고 올라올 때 승리를 하며 조조가 한중을 포기하고 물러난 곳이기도 하다. 더구나 부근에 있는 양평관은 촉한에서 또 장안에서 남북을 오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에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되는 곳이다. 이곳에 무덤을 만들어 달라는 의미는 지나다니는 사람 모두 살펴보겠는 의미인가? 한중이라는 곳에서 중원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북쪽이나 동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정말 험한 산길인 진령산맥을 다섯 차례나 넘어 다녔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나는 버스 타고 한 번만 넘어왔는데도 녹초가 되었는데 공명은 모두 네 번 왕복에 다섯 번째 오장원으로 갈 때는 살아서 갔으나 마지막 돌아오는 길은 죽어서 시신이 돌아왔다.
▶ 봉분 옆에서 자라는 황과수
봉분 옆으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이 나무 이름이 황과수(黃瓜樹)라 한다. 공명의 부인인 황부인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살아서 다 못한 부부의 정을 죽어서 남편의 무덤에 나무의 몸을 빌어 다시 태어나 무덤 가까이 지키며 자라고 있다고 한다. 얼마나 지극한 사랑 이야기인가! 우리가 몰랐던 제갈량과 황씨 부인의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겠는가? 사랑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서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사당내 공명 좌상
제갈량의 무덤을 돌아 나오려니까 자꾸 눈길이 머물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묘소를 둘러본 후 사당에 참배를 한다. 공명의 사당에 향을 올리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 향을 세 개를 공손히 앞에 들고 무릎을 꿇고 눈을 감으니 눈앞에 공명의 모습이 보인다. 공명 앞에서 소원을 빌었다. 단순히 '흥미'나 '호기심'으로 소원을 빈 것은 아니었다. 정말 간절하게 빌고 싶었던 소원이 있었던 것이 있었다. '저에게 당신의 지혜 십분의 일만 주십시오.'
▶ 침궁
▶ 침궁내 위패
무후묘 옆엔 선생지풍(先生之風)이란 현판이 걸린 작은 전각이 보인다. 이곳은 공명의 풍격을 기리는 곳으로 안에는 공명의 흉상과 함께 그를 왕으로 추대한 위패가 놓여 있는데 안내문에는 이곳을 공명의 침궁(寢宮)이라 소개하고 있다.
▶ 군자인야란 현판이 걸린 비각
▶ 비각 내 비석
군자인야(君子人也)라 쓴 현판이 걸린 비각 내에는 '한승상제갈무후진묘(漢丞相諸葛武侯眞墓)'란 비석이 있다. 청나라 가경제(嘉慶帝) 때 이곳에 마윤강(馬允剛)이라고 하는 새 지현이 부임하였는데 날씨가 화창하던 어느 날, 수행원과 가족을 대동하고 무후묘로 놀러와 묘 주위를 몇 바퀴 돌고는 갑자기 흥분하더니 나침반을 꺼내어 이리 저리 측량해 보고 아무래도 이곳이 진짜 제갈량의 묘가 아닌 듯하다며 인부를 시켜 제갈량의 묘를 파헤치려 하자 원로들과 선비들이 간곡히 말렸으니 말을 듣지 않는다. 묘를 파헤치자 제갈량 제사 때에만 나타난다는 청명조(淸明鳥)가 날아와 구슬피 울고 인부들이 다시 한 자 깊이쯤 파 들어가자 광풍과 함께 사발만한 우박이 떨어져 그의 가마가 우박에 맞아 박살이 나고 덮개는 광풍에 감겨 하늘 멀리 날아간다. 그럼에도 다시 세 자쯤 파자 분묘 안에서 천지를 흔드는 거대한 소리가 울리고 옆으로 누운 석비(石碑)옆으로 한 자루의 서늘한 빛을 발하는 보검이 꽂혀 있었는데 보검 칼자루에는 敢掘吾墓者, 利劍決不留情(감히 나의 묘를 파는 자에게 날카로운 검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란 글자가 새겨 있었다. 석비와 보검에 새겨진 글자를 본 마지현은 놀라 기절해 쓰러지진다. 그 날 밤, 마지현은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장팔사모를 든 장비와 청룡언월도를 든 관우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눈을 부라리며, “이 담도 큰 개같이 못된 관리 놈이 결국 승상의 묘를 파려하였으니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소리치며 장비가 장팔사모로 그의 얼굴을 향해 찌르는 순간, 마지현은 머리를 옆으로 틀어 피했으나 그만 “꽝”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부딪쳐 깨어난 후 비로소 깨달은 마지현은 수하에게 명을 내려 즉시 무후묘를 원상 복구시킨다.
▶ 만고소운당으로 오르는 계단
▶ 만고소운당
제갈량 묘 뒤쪽 수화문(垂花門)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올라가 본다. 계단 끝엔 만고운소당(萬古雲霄堂)이란 현판이 붙은 정자가 있다. 만고운소는 한문시간에 배웠던 杜甫가 제갈공명을 그린 漢詩, <蜀相>에서 따온 것이다.
諸葛大名垂宇宙 宗臣遺像肅凊高 <제갈대명수우주 종신유상수청고>
제갈 승상의 큰 명성, 온 우주에 드리우고, 종신으로서 남긴 초상, 맑고 푸르도다.
三分割據紆籌策 萬古雲霄一羽毛 <삼분할거우주책 만고운소일우모>
천하를 삼분하는 큰 계책, 만고에 하늘을 나는 봉황의 모습.
伯仲之間見伊呂 指揮若定失蕭曹<백중지간견이여 지휘약정실소조>
재주는 이윤과 여상에 견줄 만하니, 승상의 지휘대로 되었다면 소하와 조참만 못했겠는가.
運移漢祚終難服 志決身殲軍務勞<운이한상종난복 지결신섬군무로>
국운이 이미 한나라를 떠나니 끝내 회복키 어려워, 뜻 품었으되 군무에 과로로, 몸이 먼저 죽는구나
▶ 사촉정
또, 이곳에서 좌측으로 좀 더 올라가면 정자엔 사촉정(思蜀亭)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공명의 혼이 이곳에 올라 멀리 청두(成都)의 황제와 못 다 이룬 촉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던 모양이다.
▶ 분경원 입구
▶ 분경원 내 연못
▶ 분경원 회랑에 걸린 속도
정자를 보고 내려와 분경원(盆景園)란 글씨가 쓰여 진 동그란 작은 문 안으로 들어가니 대나무와 돌로 만든 정원이 보이고 한쪽 회랑 벽에 제갈량의 활약을 그린 속도(續圖)가 그려져 있다.
▶ 공명의 어린시절
▶ 황부인과 공명의 혼례
▶ 삼고초려
▶ 유비와 천하삼분지계를 이야기하는 공명
▶ 장판파 전투
▶ 주유와 적벽대전을 논의하는 공명
▶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조조가 도망치는 모습
▶ 형주 입성
▶ 주유 문상
▶ 경제 발전에 힘쓰는 공명
▶ 정군산 전투
▶ 유비의 한중왕 등극
▶ 유비의 유언을 받드는 공명
▶ 후주 유선의 촉한 황제 등극
▶ 북벌에 나서는 공명
▶ 칠종칠금
분경원 내 건물 안에는 제갈량의 일생을 표현한 미니어처가 건물 안을 가득 채우고 있어 마치 제갈량 전을 보는 듯하다.
▶ 악루
제갈량 묘를 막 나오려는데 악루(樂樓)가 보인다. 이곳은 청명제 때 제갈량을 추모하는 음악회가 열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