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과 미실(美室)의 여성적 권력 발생의 배경
- 화랑도의 원화(源花)제도의 발생 배경은 신라 왕권계승의 안전장치 -
- 고려시대 충렬왕과 충선왕의 숙비 계승은 몽골 아닌 신라 풍속의 영향 -
- 포석사에서 옥진(玉珍) 여신상이 법흥왕 신상보다 먼저 참배된 비밀 -
MBC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美室) 김씨는 진흥왕을 비롯 여러 세대 왕들의 후궁으로 등장한다.
그러한 배경을 드라마에서는 그녀의 정치적 역량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그녀의 미모와 성적 기교 즉 미색(美色)을 바탕으로
신라 왕실의 개방적 성풍속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풍속은 금나라와 몽골(원)에 이어 고려시대 충렬왕과 그의 아들 충선왕 대에도 있었다.
그러나 충렬왕 - 충선왕대의 부자를 관계한 숙비의 일을 '원나라 풍속'이라고 알려져 온
그동안의 인식들은 사실상 신라 풍속의 영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 글에서 논하려 한다. 특히 그것은 신라의 여성적 권력 발생과도 관계가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원화(源花)로서 화랑도를 통솔한다.
신라에서 미실과 같은 여성적 권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원화제도의 역사적 배경에서
가능했으며, 특히 불교 이전 신라 고유의 여신 신화적 배경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많은 할애를 하고 있는 미실(美室)에 관한 내용은
<화랑세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남당 박창화의 필사본인 <화랑세기>는 상당히 알려진 편이다.
반면에 박창화가 남긴 그 외 80여권의 유작들은 아직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지만,
<화랑세기>의 영향은 결국 박창화의 다른 유작들의 내용들도 주목을 끌게 될 것이다.
박창화의 유작들에 대하여서는 단순히 '소설'로 치부하거나 그의 <화랑세기>와 같은 역사서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신라사 이해에 새로운 촉발의 영향은
분명히 만들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창화가 남긴 유작들의 진서 여부가 그의 <화랑세기>보다 더 많이 제기될지도 모른다.
특히 삼국시대의 지역 비정들이 기존의 사서들에 비하여 탈한반도를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면은 일제식민지하의 민족주의가 개입되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박창화의 유작들에서 보여주는 내용들은 분명 지금까지 고려시대 정치와 종교에
편향되어 있던 사료들에 비하여 보다 신라적인 문화와 풍속을 전해주는 사실들은 대단히 주목된다.
19세기 단재 신채호의 저서들에 인용된 고문헌들에서 보듯이 일제 식민지 기간 수많은 우리의
역사 문헌 사료들이 사라진 것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것들이 단지 불태워졌을 것이라기보다 일본으로 밀반출되어 어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일제 식민지 기간 박창화가 일본 궁내성의 도서 촉탁으로서
여러 사료들을 접했을 가능성과 함께 그로 인한 <화랑세기> 필사본이라든지
80여권의 그의 유작들이 씌어진 배경을 추측하게 하는 충분한 배경이 된다.
아마도 박창화는 단순히 사서를 베끼다간 법적인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 때문에
인용자료 등을 생략하고 가지고 나올 수 없는 사료들을 읽으면서 그 내용들을 남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베껴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화랑세기>와 나머지 그의 적지 않은 양의 유작들에 실려 있는 역사적 새로운 사실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노력이 단지 '소설'을 쓰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려 - 조선시대를 거치는 불교문화와 유교문화의 1천년 역사가 그 이전 신라문화의
신선 풍류적이고도 신국적 내용이 배제되어 왔다는 점은 한반도 역사 문헌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드러내지 못한 면이 있었을지 모른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비하여 <화랑세기>가 훨씬 개방적인 성풍속을 보여주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워 사료를 개방하거나 공론화하지 못한 것은 고려시대 불교문화와
조선시대 유교문화 그리고 일본의 신도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신라의 '神國의 道'가 일본의 황실의 역사적 배경과 그 종교인 신도(神道) 이미지에 끼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신라의 오리지날 분위기를 묘사한 <화랑세기>와 같은 사료들은 일본인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감추어지거나 숨겨졌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미실과 선덕여왕의 등극의 배경에는 신라의 독특한 정치 신화적 배경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서 성적 풍속의 역사는 그렇게 청렴 일변도의 역사가 아니었다.
"여자의 웃음이 담장을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말로 압축되는 안방 규수문화라든지
남존여비만 해도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적 경향이었다.
불교를 국교로 강화했던 고려시대에도 남녀문제는 대단히 개방적이고 호탕했던 사실들이
허다하다 다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보여주는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내용들이
사회문화적 배경을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화랑세기>에 묘사되는 미실(美室)이 원화로서 색공을 펴거나 여러 왕들의 후궁으로
대물림을 하는 현상은 결코 우리 역사에서 외람된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에도 일어났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이 글에서 지적해 두고자 한다.
선대 왕의 후궁이 후대 왕의 후궁으로 다시 대물림하는 경우는 <화랑세기>의 미실(美室) 외에도
박창화의 유작들에 나타난다는 것을 살펴보겠다.
박창화의 유작 가운데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A.D.126 - A.D.158)에 따르면
다파나(多波那)의 임금이 죽고 삼(彡) 임금이 즉위했을 때 다파나의 왕비가 다시 삼 임금을
남편으로 삼기를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파나국은 석탈해가 신라로 오기 이전에 살았던 나라였다.
多波那君薨 而無嗣 其妃 請奉 尼今爲夫
惠后許之 命水路大師 裝船百艘 而送之
다파나군이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그 왕비가 삼(彡) 임금의 부인이 되기를 청하였다.
혜후가 그것을 허락하여 수로대사에게 명하여 백 척의 배를 치장하여 그 배편으로 보냈다.
- <婆娑尼師今記(파사이사금기> -
다파나국의 왕비가 대물림하는 과정에서 신라의 파사 이사금 시대에 혜후(惠后)가
그것을 축복하기 위하여 치장한 배 1백 척을 보냈다는 기사이다.
이것은 개인일이 아니라 혜후에게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풍속적인 동시에 다파나국이
신라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왕의 아내는 후(后)로 표현하고 있으며, 다파나국의 왕의 아내는 비(妃)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서도 신라는 황제국가로 표현된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는 신라의 임금을 내도록 '帝'로 표현된 것도 그 일관성이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신라의 임금에게 '폐하'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배경을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에 나오는 파사 이사금의 혜후(惠后)는 다파나국에서 온 석탈해의 딸이라는데서
다파나국의 왕비가 그 왕실의 '태후'의 위치에 있는 신라의 혜후(惠后)의 허락하에
왕비를 대물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진흥왕(540~576 재위) 때의 미실(美室) 현상은 이미 4백년 전의 파사이사금(婆娑尼師, 126 - 158)
때에도 존재했던 고대 신라와 그 예속국들의 성풍속 문화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왕비 대물림 현상은 파사이사금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박창화의 <祗摩紀(지마기)>(29년- 33년>에 보인다. 동복이부의 동생이 태자인 형을 모함하여
유배 보내고 형의 왕후인 문개(文介)를 물려받는 장면이 나온다.
즉 형인 한석(汗昔) 태자의 부인이었던 문개(文介)는 한석(汗昔)의 동생 한국(汗國)의
부인이 되는 과정에서 형을 유배 보내지 않아도 한국(汗國)이 그녀와 합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 시대의 풍속으로 형수가 동생과 관계를 할 수 있다는
개방적 성풍속을 보여주고 있다.
七月 聞鷄徒將作亂 流汗昔太子 于駒令 以其妻文介妻汗國 國與昔同母 而昔爲上子
國爲彡今子 國欲娶文介 讒其兄 于彡今 流之 走抱文介 曰 “今日方得 嫂爲吾妻”
文介曰 “汝兄雖在 吾爲汝相合 又何讒 而流之” 國曰 “潛而通之 不如妻而棄之”
文介不忍 送昔流涕鳴咽 而國强命婢女 洗淚粧飾 而行吉 時人歌之曰
“兄卽仁 弟卽暴多 情婦亦有淚 淚幾斗 黃山江水 摠是淚”
7월 계도가 장차 난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한석(汗昔)태자를 구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 때문에 그 처 문개(文介)를 한국(汗國)에게 시집보냈다.
한국과 한석은 같은 어머니의 자식인데, 한석은 지마(祗摩) 임금의 아들이고, 한국은 삼(니)금의 아들이다.
한국은 문개에게 장가들기를 원하여, 그 형을 삼(니)금에게 참소하여 유배를 보냈다.
문개를 안고 마차에 함께 달리며 말하기를 “오늘 이제 형수를 얻어 나의 처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문개가 말하기를 “너의 형이 비록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 네가 서로 합하면 되는데,
어찌 형을 참소하여 유배를 보내는가?”라고 하였다.
한국이 말하기를 “숨어서 간통하는 것은 처로 삼은 뒤에 버리는 것과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문개가 참지 못하였다. 한석을 보내고 소리 내어 목이 메도록 울었다.
이에 한국이 하녀를 보내 문개에게 눈물을 씻게 하고 장식을 하게 하여 문개와 결혼식을 올리도록 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노래하여 말하기를 “형은 인자한데 동생은 사납기가 이를 데 없다.
정부(문개)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니 눈물이 몇 말인가. 황산강의 물이 모두 이 눈물이다”라고 하였다.
이 뿐만이 아니라 진흥왕의 미실보다 더욱 강력하게 왕후 자신이 대물림을 하는 것이
왕후 자신의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을 박창화의 <祗摩紀(지마기)>(29년- 33년) 말미에 나온다.
지마(祗摩) 이사금의 왕후인 애후(愛后)가 전임 임금의 왕후에서 새 임금의 왕후가 되면서
선도들에게 당당히 호통치며 '새로운 남편이 전남편보다 10배 낫다'고 거드름을 피우는가 하면
그녀 자신을 '복이 많은 천자(天子)'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그녀의 권세는 가히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美室) 이상의 것이었다.
픽션이 가미된 드라마 <선덕여왕> 스토리와는 달리 <화랑세기>에서는 오히려 미실(美室)은
권력적이지도 않고 전혀 잔인하지도 않는 인물이다.
실제로 여걸 왕후는 지마(祗摩) 이사금의 애후(愛后)에게서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애후(愛后)는 연회에서 그녀의 새 남편인 왕에게 춤을 추게 명하는 것은 물론 왕을 이끌고
일어나면서 그날밤은 전남편의 사당에 가서 잘것이라고 호언하기까지 하고 있다.
그렇게 애후(愛后)의 새 남편인 왕은 그의 아버지인 선왕의 사당에 가서 잠을 자겠다는
애후를 따라 함께 수레를 타고 가는 장면은 드라마 <선덕여왕>의 미실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역사적 전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十二月 行先今大祭 愛后體肥 而娠滿 鈍於行步 上爲手扶而上 后乃依上而坐
諸仙羅拜后 謂諸仙曰 “汝等看我新夫 勝前夫十倍 我腹如此脹高 宜知我多福天子也”
諸仙皆拜 賀獻酒后 遂與上大醉 樂甚而歌 命上起舞 太子亦舞 祭半 后忽引上 而起
“吾往汝父祠宿” 上不得已遂幷輦而出
12월 선금(선왕)을 위한 큰 제사를 지내는 날 애후가 임신으로 몸이 불어 행보가 둔하여졌다.
왕이 손을 잡아 위로 오르는 것을 도왔다. 애후가 이에 왕을 의지하여 자리에 앉았다.
모든 선도들이 벌이어 애후에게 절을 하였다.
애후가 선도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나의 새로운 남편을 바라보아라. 전남편보다 열배는 더 낫다.
나의 배가 이처럼 부른 것은 마땅히 내가 복이 많은 천자(天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도의 무리들이 모두 절을 하였다. 축하하여 애후에게 술을 바쳤다.
드디어 왕과 더불어 크게 취하였는데 심히 즐거워 노래를 부르고, 왕에게 일어나 춤추도록 명하고
태자 역시 춤을 추게 했다. 제사의 절반쯤 이르렀을 때 애후가 홀연히 왕을 이끌고 일어났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사당에 가서 잘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이 부득이 함께 수레를 타고 나가기에 이르렀다.
박창화가 남긴 유작에 나타나는 이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때 애후(愛后)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대범한 여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흥왕 때에 이미 혼인한 경력이 있던 미실이 진흥왕의 후궁이 된 것도 특이하다.
그러한 미실이 다시 풍월주 세종전군의 아내로서 진흥왕의 맏아들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
풍월주 설화랑과도 관계를 유지했던 이른바 '미실 현상'은 애후(愛后)에게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신라의 풍속은 고려시대 충렬왕 충선왕대의 숙비(淑妃) 김씨에게서 그리고 정비인
원나라 공주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는 면에서 <화랑세기>나 박창화의 다른 유작들의 내용들이
신라의 성풍속을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라고만 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고려시대 충렬왕의 숙비(淑昌院妃) 또한 신라 진흥왕의 미실(美室)처럼 기혼자가 후궁이 된다.
숙비는 충렬왕의 숙비가 되기 전 일찍이 진사 최문(崔文)과 혼인한 바 있었다.
충렬왕의 숙비로 들인 것은 태자시절의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이었다.
그런데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아버지 빈전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숙비와 눈이 맞았고,
얼마 후 그녀의 오빠인 김문연(金文衍)의 집에 들렀다가 그녀와 사적인 관계를 갖고
곧 충선왕 자신의 숙비로 들인다. 아버지의 숙비를 아들 임금이 대물림을 시킨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부자 임금을 대를 이어 모시게 된 숙비 김씨가 수월관음도를
발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신라의 미실이 신선풍류도의 종교적 원화(源花)가 되고자 진흥왕을 설득하여
그뜻을 이루었던 것을 떠올리기라도 하는듯이 수월관음도를 발원한 숙비 자신의
내면적인 종교사상적 배경을 엿보게 한다.
KBS1 역사추적 <최대 고려불화 수월관음도의 특별한 귀환>에서 그 수월관음도를 그리는 일을
발원한 고려 충렬왕 숙비였다가 다시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의 숙비가 된 현상을
'몽골풍속'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고려사절요>의 기록을 바탕하고 있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그러한 숙비의 대물림 풍속이
신라의 '애후 현상' 또는 '미실 현상'의 연장선에서 해석한다.
이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아래에서 다시 다룰 것이다.
종교만 불교적으로 표현되었을 뿐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를 보면 신라시대의 미실과 같은
원화(源花)의 종교적 위치와 바다의 해신으로서 여신 숭배의 예술과 그 신앙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충선왕의 숙비가 발원하여 조성된 수월관음도 일본. 카가미 신사 소장
고려시대의 여러 수월관음도에서 신라의 원화(源花)의 권위와 이미지가 남아 있다.
필자의 앞선 글들에서 논했지만, 수월관음도 앞의 선재동자는 여신 신화적 태양숭배시대에서
박혁거세나 김알지, 주몽, 김수로왕 등 어린 아기 왕이 태양의 여신에 의하여 태어나는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포함되어 있다.
왕비나 후궁이 대물림을 한다는 것은 종교적으로 왕이 윤회 환생한다는 의미가
부여되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의식에서 아비와 아들을 각각 숙비로서 모셔야 했던 그녀는
수월관음도를 발원하였을 것이다.
숙비는 자신 스스로 신라의 원화(源花)의 후예라고 할 관음여신의 현현으로 상징하고
충렬왕의 아들 충선왕은 충렬왕이 다시 환생한 '선재동자'가 되어 자신을 숙비로
계속 맞이하는 상황을 종교적으로 타당성을 부여려 했을 것이다.
센프란시스코에서 전시되어 '동양의 모나리자'로 극찬을 받았던 숙비 발원의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때 왜구가 약탈해 간 것으로 일본 카가미 신사에 그동안 소장되어 왔는데
잠시 이번에 한국의 통도사에 전시된 바 있다.
이 수월관음도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서 구도의 길을 떠나 당나라 유학을 했던
의상대사가 보았다는 조음동 보타낙가산의 신라 상인의 관음상을 모델로 한 것으로 생각된다.
상하이 인근의 주산(舟山) 군도의 섬에 있는 보타낙가산의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에 모셔진
관음상은 신라상인이 제일 먼저 모신 관음상의 내력을 가지고 있다.
신라상인이 당나라 오대산에서 조성한 관음상을 싣고 귀국하려 출발하던 중 주산군도 인근의
암초인 신라초에 좌초하여 그 암초에 모셔두었던 그 관음상을 나중에 다른 사람이
그곳 보타낙가산에 사찰을 짓고 옮겨 봉안한 것이 그곳의 관음대사성상(觀音大士聖像)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나중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신라상인의 관음상을 봉안했던 내용은 남송(南宋:1127~1279)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를 방문하고 남긴 그의 <선화봉사고려도경>(1124년 간행)에도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보다 140여년 더 늦게 나타나는 같은 내용의 사실을 담은 내용을
일본인들은 일본 승려 에가쿠(慧諤)가 세운 것으로 왜곡해왔다.
카가미 신사에 소장되어 있는 수월관음도는 그 역사적 배경이나 그 그림이 모두
신라시대의 종교와 풍속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수월관음도에 대한 기록을 19세기 초에 남긴 이노 타다타카의 <측량일기>(1812년)에 의하면,
이 관음도는 1310년에 충선왕의 왕비였던 숙비가 발원하고, 김우문, 이계, 임순 등
8명의 궁정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그러나 만들어진지 100년도 안되어 왜구에 의하여 약탈된 뒤 1391년 승려 료우켄이
지금의 카가미 신사에 진상했다는 것이다.
신라 때의 '애후'나 '미실' 그리고 고려 때의 숙비 현상의 후궁 대물림 현상은 종교적 차원에서
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수월관음도의 감상 배경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단지 수월관음도의 '미모'를 예술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배경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분명 숙비가 발원하여 조영한 수월관음도는 숙비를 닮도록 그렸을 것이다.
숙비의 용모는 신라의 미실처럼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미실의 동생 미생공이 풍월주에 오르는 등 권력적으로 득세하듯이 숙비의 오빠인 김문연(金文衍)은
출중했던 가문에 비하여 그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여동생이 충렬왕의 숙비(숙창원비)에
봉해지자 갑자기 정2품 자리인 첨의시랑찬성사에 봉해지졌다.
충렬왕의 뒤를 이어 그녀가 다시 충선왕의 숙비로 봉해지자
김문연은 언양군에 봉해지기까지 하는 것도 숙비와 미실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두 여자 모두 미색을 지닌 외에 포악했거나 스스로 정치적 권력을 휘둘렀다는 기록은 없다.
이들 두 여인 모두 가문은 출중한 최고위 귀족층이었다.
숙비는 김양감(金良鑑)의 딸인데 김양감은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서 고려 고종 때에
거란족을 물리치고 시중(侍中)의 자리에 오른 김취려(1172-1234)의 손자이다.
미실이 신라의 왕실 가문의 후손이었던 것처럼 숙비 김씨가 고려시대의 주요 가문의
여성이라는 것에서도 일치한다.
숙비 김씨의 후궁 대물림 현상은 단지 충선왕의 일순간의 부도덕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에 이어진 원나라 풍습에 연관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대로 그보다 더 멀리 이러한 '왕실의 후궁 세습' 풍속은
신라 왕실의 풍속을 원나라가 이어받은 것으로 필자는 해석한다.
그 근거는 '미실 현상'의 풍속을 가졌던 신라 왕실의 후예가 세웠던 금나라를 몽골 즉 원나라가
정복하면서 그 금나라의 풍속을 이어받은 원나라의 풍속이 고려 충선왕대에 '재도입된
후궁 대물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충선왕(1308~13 재위)의 뒤를 이어 27대 충숙왕(1332~1339 재위)의 부인이었던
원나라 공주 백안홀도공주는 충숙왕의 의붓아들 충혜왕(고려 28대 1339~44 재위)에게
겁탈당했다든지 충혜왕의 비 역련진반공주는 신하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던 것도
신라의 미실(美室)의 행적과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화랑세기>의 신라사의 내용이 신라의 역사를 색정의 역사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시대 왕가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충선왕의 이러한 '부도덕한 행위'는 신하의 성토가 있었으나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은
신라의 '미실 현상'의 문화적 상속의 잔재가 고려왕실에서도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미실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화랑세기>는 고려시대 인종 23년(1145)경 공찬되었던
<삼국사기> 기록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고려 왕실에서는 신라 왕실의 풍속을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왕후 대물림 현상은 고려의 임금들에게 시집온 원나라 황제의 공주들이
정치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발휘한 배경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왕실의 기록자들은 그와같은 부도덕한 사실을 본래는
'신라의 풍속'이었을 것이라고 한다면 책임이 돌아올 수도 있고 신라에 대한 배격심에서도
그 근거를 남기기를 꺼려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 사실을 '원나라 풍속'으로 표현했을 수 있으며, <고려사>를 쓴 조선왕조의 사관들은
유교적 윤리 가치관에서 또한 이러한 풍속이 우리의 조상들의 풍속이라고 쓰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의 숙비와 관계를 맺고 그녀를 자신의 숙비로 대물림한 사실 대하여서
그 시기에도 강력히 거부반응을 일으킨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저 유명한 고려시대 문인 우탁(禹倬·1263년~1342년)이었다.
그는 종6품의 감찰규정으로 당시 궁중의 '젊은 피'에 해당했던 신진관리였다.
아무도 감히 충선왕의 그러한 부도덕한 행위에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을 때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의 숙비와 사통했다는 사실을 알고 우탁은 곧바로 소복을 입고 도끼를 들고
짚방석을 멘채 어전에 나가 임금을 꾸짖는 상소를 올렸다.
그길로 그는 초야로 돌아가 성리학을 연마하는 선비가 되었다.
우탁의 성품을 드러내는 유명한 시가 그의 <탄로가(歎盧歌)>이다.
그 내용은 흔히 우탁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막지 못하는 것을 한탄한 것으로 해석하여 왔지만,
필자의 해석은 다르다.
충렬왕의 숙비를 그 아들 충선왕이 대물림하여 차지한 사실을 우탁이 막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탄식하여 풍자한 시로 풀이한다.
나는 우탁의 '탄로가(歎盧歌)'가 충선왕의 부도덕성이 탄로난 '탄로가(綻露歌 )'의
풍자적 표현이라고 풀이한다.
우탁은 충선왕의 행태가 나라가 늙어가고 있는 것으로 탄식했을 것이다.
<탄로가(歎盧歌)>
우탁(禹倬)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엔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렸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이러한 고려의 충선왕 때 숙비 계승 현상이 신라 때의 '미실의 후예'라는 것은
몽골에서 사용된 공주의 칭호에서 또 다른 '신라 풍속의 징후'를 필자는 찾아낸다.
충렬왕(1236- 1308)이 1274년 연경에 입경하여 원나라에 굴종하여
원나라 세조의 딸과 결혼했는데 충렬왕의 장목왕후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그 공주의 이름이 '홀도로게리미실'이었다.
'미실'이 처음부터 그녀의 이름에 우연히 붙어 있었던 이름의 일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후대의 기록자들이 신라의 '미실'을 의식하여 붙인 이름은 아니었을까?
이 내용을 기록한 사람들은 조선왕조 초기의 사람들이었다.
원나라가 망하고 조선왕조 때에 기록한 <고려사>에서 제국대장공주로 부르기도 했던
'홀도로게리미실'의 한자 표기를 몽골어 발음을 따라 '忽都魯揭里迷失(홀도로게리미실)'로
표기하고 있다.
'미실'의 한자를 신라의 '미실(美室)'과 같은 한자로 표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왕비의 이름을 '잃어버렸다'는 의미의 '迷失'로 표현한 것은 심상치 않다.
원나라 공주 이름을 '迷失(미실)'로 표현한 것은
어딘가 명예로운 내용이 아닌 풍자적인 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고려시대 '미실'은 신라 때의 정치력도 막강했던 '미실(美室) 대물림'의 영향을 받은
금나라의 왕실 풍속을 이어받은 원나라 공주의 이름에 그렇게 '홀도로게리미실'이라는 '미실'을
덧붙인 결과는 아니었을까? 몽골의 원나라는 금나라 지역에서 일어났다.
<고려사>를 기록한 조선시대 사관(史官)이 신라의 '미실(美室)'을 의식한 것은
그 당시에도 <화랑세기>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충렬왕 부인으로 원나라 공주 이름에 '미실'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만큼 충선왕 왕비였던
원나라 공주 계국대장공주 역시 개가시키려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즉 충렬왕이 원나라 조정에 의하여 하야되고 1298년 1월에 충선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충선왕의 왕비 계국대장공주의 무고로 7개월만인 그해 8월에 충선왕이
왕위에서 쫓겨나 8월에 다시 충렬왕으로 교체되었다.
충렬왕은 충선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10촌 종제인 서흥후 전에게
자신의 왕위를 계승시키려는 음모를 꾸몄다.
충선의 왕비 계국대장공주가 가담하고 있는 그 음모에서 계국대장공주 자신은
충선이 제거되고 나면 왕이 될 서흥후 전에게 개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왕후의 대물림 즉 '미실 현상'은 원나라 종속하의 고려시대에 복합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만큼 왕실 귀족 가문의 풍속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미실에 대한 '후궁 대물림' 내용은
김대문의 집안이 화랑의 집안이었고 그 화랑들의 최고 지도자인
역대 풍월주들의 세기를 다루면서 그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는 내용에 포함되어 있다.
김대문의 가문은 540년 화랑도가 설치된 이래 681년 폐지될 때까지 1세 풍월주 위화랑,
4세 이화랑, 12세 보리공, 20세 예원공, 28세 오기공 등 모두 다섯 명의 풍월주가 나온 집안이었다.
그것은 풍월주가 세습적 영향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동시에
미실이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에 '후궁 대물림'이 되었던 현상은 풍월주들과의 관계에서
세습적 '대물림 현상'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실은 5세 풍월주 사다함에서 시작해서, 세종전군, 설원랑, 보종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풍월주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법흥왕 7년(520년)에 공식적으로 율령 반포된 골품제도 이전부터 내려온
신라의 선도성모 여신 숭배 등 모계혈통의 대원신통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실의 부친은 2세 풍월주였던 미진부(未珍夫)이며 그 모친은 묘도궁주였다.
미진부의 선조는 내물왕으로 김알지 김씨 후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손'이라는 말에는 신라시대에 있어서
다분히 여성적 혈통인 '모계' 혈통의 의미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사가에서 혼인한 바가 있는 여인이라도 왕의 후궁으로 들이거나
아버지의 후궁이 다시 후대의 왕의 후궁으로 세습되는 것에는 그 모계적 혈통 배경이
왕의 권위를 오히려 높혀주는 신라 성골의 '대원신통'의 권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玉珍)이 영실랑과 혼인한 바가 있지만,
법흥왕이 후궁으로 들인 것에서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충렬왕의 숙비(淑昌院妃)가 일찍이 진사 최문(崔文)과 혼인한 바 있었으나
충렬왕이 그의 숙비로 들인 것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숙비의 오빠인 김문연이 충렬왕에 의하여 언양군에 오르기까지 하듯이
미실이 진흥왕의 후궁이 되자 미실의 할아버지 아시공(阿時公)은 진흥왕에 의하여
2대 풍월주를 거쳐 최고 관등인 대각간에까지 오르기도 한다.
가문은 특히 '외가댁'의 모계적 혈통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실의 어머니 묘도궁주의 아버지 즉 미실의 외할아버지 영실공은 법흥왕의 누이인
보현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성골이다.
<화랑세기> 보리공 풍월주 기록에서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궁주는
미실의 할아버지 아시공과 함께 미실의 호신(護神)으로 삼았다고 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의 할어버지 아시공과 미실의 외할머니인 옥진은 법흥왕상과 함께
포석사(鮑石祠)에 신상으로 모셔지고 있었으며 풍월주 세종공과 하종공이 미실의 뜻에 따라
그들 세 신상들 가운데 옥진 신상에 가장 먼저 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 따라 포석사(鮑石祠)는 미실 즉 원화(源花)와 관련된
풍류 선도적 신사였다고 필자는 추측한다.
이러한 전후맥락을 놓고 보면 <화랑세기>에서 미실이 거하던 곳을
'해궁(海宮)이라 했다는 것에서 그 해궁이 포석사와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전복으로 상징되는 성적 상징을 가지고 있는 포석정의 곡수거(曲水渠)는
미실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포석정과 전복에 대해서는 필자의 앞선 글 <포석정의 전복모양은 신라인들의 바다여신 숭배 흔적> 에서 충분히 논했다.
미실의 할아버지 아시공과 외할머니 옥진 그리고 그 옥진이 후궁으로서 모신 법흥왕을
신상으로 모셨다는 면에서 포석사는 미실과 관련된 곳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포석사에 모셔진 이들 세 신상들 가운데 가장 중심은 옥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법흥왕이 옥진을 후궁으로 삼았으면서도 그녀를 '신으로 여겼다'는 기록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으며 포석사 참배자들이 법흥왕보다 옥진신상에 먼저 절을 하는 내용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미실의 집안의 모계적 조상이 더 높게 숭상된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포석사와 관련한 이러한 사실은 진흥왕이 다시 원화(源花) 제도를 복원시키고
미실을 그 원화(源花) 자리에 앉혔던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원화(源花)로 봉해진 미실의 조상과 관련된 세 인물들이 포석사에 신상으로 모셔지고
그 중에도 미실의 외할머니 옥신 신상을 최상위에서 참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옥진은 화랑도의 첫번째 풍월주인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이었다는 것에서도 포석사는
원화에 연관한 화랑도와 관련이 있는 사당이라고 필자는 추정한다.
포석정 즉 포석사는 그런 면에서 화랑도와 원화 그리고 선도성모 신화에서
신라인들의 중요한 성지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진흥왕에 의하여 원화로 봉해진 미실의 '조상'은 외가댁 중심으로 평가 숭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미실의 조모인 옥진궁주는 왕의 딸이라는 권위보다 화랑도의 최고 지도자인
제1세 풍월주인 위화랑 딸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원화로 등장한 미실은 2세 풍월주인 미진부의 딸이었다는 점이
그녀의 외할머니인 옥진의 아버지는 1세 풍월주인 위화랑이었다 것에 더해진 것이다.
위화랑은 진골로서 이찬에 오른 인물이지만, 그의 딸 옥진이 포석사에 신상으로 모셔진 것은
진흥왕에 의하여 원화제도가 다시 복원되어 미실이 그 원화 자리로 봉해졌기 때문에
미실의 모계적 외할머니가 신상으로 추증된 것으로 보인다.
남성 왕의 등극에서 그 왕의 남성 조상들의 추증현상을 신라에서는 여성의 등극으로
그 여성의 모계 조상들이 추증되고 신상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법흥왕 때 만들어졌던 원화(源花: 남자 화랑의 기원인 여성 화랑 최고 지도자)가
폐지된 이래 29년만에 진흥왕이 미실을 후궁으로 맞이하던 날 미실을 원화의 자리에
다시 복원시킨 것에서 미실은 단지 여러 세대 왕들의 '후궁'으로서 그 위치를 평가되는 것보다는
'복원된 원화'의 위치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포석사에 왜 세 신상이 모셔져 있었으며 그 중에도 옥진 신상이 가장 최고 신상으로
참배되었는지 그 수수께끼는 풀려지게 된 것이다.
신라에는 왕의 '세기' 계보보다 화랑의 주인인 풍월주 세기 즉 '화랑세기'가 더욱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그 계보적 내용은 여성 혈통 계승이 신국(神國)의 피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에서 피는 모계의 길을 따라 흐르고 있는 것이다.
포석정의 곡수거는 산천 대자연의 어머니의 피를 의미하는 구곡유수(九曲流水)의 축소판인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석조이다.
그 유상곡수(流觴曲水)에 흐르는 물은 대자연 어머니의 핏줄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며,
그 어머니 신에 바쳐져 흐르는 술잔은 <도화원기(桃花源記)>의 복숭아꽃처럼 원화(源花)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원화(源花)로 복원된 미실의 모계적 가문의 혈통이
포석사에 모셔진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신라의 모든 최고 지배자의 내용은 여성적 계보를 중심한
'화랑세기'를 바탕하고 있다는 것에서 <화랑세기>는 사실상 신라시대의 진정한 실록인
'신라실록'의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미실의 가문에 대한 내용에서 어느 왕의 후손보다는 풍월주를 포함한 화랑들의 최고 신분인
원화(源花)의 모계적 혈통에서 찾아진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과 가깝게 나오는 설원랑의 조상 계보에도
여성 조상이 강조된 것을 볼 수 있다.
설월랑은 진골귀족도 아닌 미천한 가문으로 두품조자 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설원랑을 낳은 아버지 설생은 그 어미 즉 설원랑의 할머니가 습비부촌의
설씨 가문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그 어미의 성을 따라 설씨가 되었다는 내용이 부각되어
<화랑세기>에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실은 사다함과 사랑하는 사이었는데 사다함이 전장에 나간 사이
미실은 세종과 관계를 하고 그 부인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 당시에 남자가 전쟁에 나간 뒤에 남은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은 하나의 풍속적 현상이었던 것을 설월랑의 집안 내력에서도 볼 수 있다.
설원랑의 아버지 설생은 용모가 출중했다. 그가 모시던 구리지의 부인은 금진낭주였다.
구리지가 전장으로 나간 틈에 구리지의 여인 금진낭주는 설생과 관계를 가져 설원을 낳았다.
미실의 행태에 금진낭주의 행위가 반복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미실이 5대 풍월주 사다함과 사랑하는 사이였다. 사다함이 풍월주로서 부제 설원랑을
부제로 삼아 가야정벌을 간 사이 미실은 세종전군의 부인이 되었던 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닌
지소태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 태후가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아들 세종 전군(殿君: 왕이나 태후의 아들)에게 부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세종이 미실을 선택한 것이다.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에 의하여 그녀의 아들 세종전군의 아내가 된 미실은
진흥왕의 후궁이기도 하다는 것은 지소태후의 '쌍 며느리'이기도 한 모양새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미실을 단지 여자로서 '후궁'으로 보는 입장이 아닌
'원화(源花)'라는 종교적 위상에서 파악되어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즉 '원화(源花)'는 무속적 입장에서 보면 국무(國巫)에 해당되어 모든 왕실의
성적 관계의 살아 있는 최고 신위의 자리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통 무속에서 무당이 성적 관계가 하나의 무속적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면은
이러한 신라의 풍류 풍속에서 남아진 것이리라 생각된다.
지소태후는 아들 진흥왕과 또 다른 아들 세종이 미실과 관련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일은 지소태후의 결재하에 이루어졌다는 것에서도 미실이 세종의 아내가 된 풍속은
모계적 영향권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실이 사다함을 사랑하는 일과 세종전군의 아내가 되는 일 그리고 그 세종의 형제인
진흥왕의 후궁이 되는 일은 모두 '원화(源花)'의 권위와 지위의 역할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이 영실랑의 부인으로 법흥왕 '후궁'이 되었는데 법흥왕은 그 옥진을
'신으로 여겼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필자의 해석을 입증하고 있다.
미실은 세종의 아내로서 그리고 진흥왕 후궁으로 지소태후에 의하여 조성되고 있었다는 것은
이러한 종교적 무속의 '원화(源花)'라는 위치에서 그 해석이 가능하다.
진흥왕이 원화 제도를 복원하면서 미실을 원화로 세우던 날 밤에 미실과 합환했다는 기록은
다분히 무속적 음양풍류도의 종교적 '원화(源花 또는 原花)'의 제의적인 축제의식의 형태를
띄고 있다.
<화랑세기>는 그날밤의 장면에서 모든 낭도들이 밤늦게 유화들과 유희를 즐기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에 연호를 대창(大昌)이라 하였다.
이날 밤, 제(진흥왕)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에서 합환하였다.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가득찼는데,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의 물을 끓어 오르게 하였다. 제와 원화가 함께 난간에 다달아 구경하였다.
낭도들이 각기 한 명씩의 유화를 이끌고서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때마다 만세소리가 진동하였다.
진흥왕은 매우 크게 기뻐하여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이리 말했다.
"저들도 각기 자웅이고 너와 나도 또한 자웅이다" 하였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품에 파고들며 말하기를
"비록 숙모(사도부인)의 존귀함이라도 이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玉珍: 미실의 외할머니로서
포석사에 신상으로 모셔졌다)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화랑세기> 세종공 편 -
진흥왕과 미실이 후궁으로서 그리고 원화가 된 미실이 가졌던 무속적 지위를 필두로
모든 화랑들이 유화들과 축제를 여는 장면은 다분히 성적인 음양신의 푸닥거리 형태를 띄고 있다.
신라의 신화적 숭배에는 해신과 산신 그리고 지신 숭배의 다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해궁(海宮)과 산궁(山宮)에 대하여 '지궁((地宮)'에 해당하는 것이
왕이 통치하는 궁궐이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실이 머물던 궁이 해궁(海宮)이었다.
박창화의 다른 유작들에서 '산궁(山宮)'이 따로 표현되어 나온다.
<화랑세기> 11세 하종공 편에 미실과 그녀의 남편 세종공이 해궁(海宮)에 살며
해신에게 세종공의 아비 하종공의 장수를 비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이종욱 교수는 이러한 신라의 해궁(海宮)을 안압지 인근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여신을 대신한 미실이 거하던 해궁(海宮)처럼 사당으로는 해당(海堂)이 있었다.
해당은 바다에 임하는 곳에 설치하여 바다의 신에게 기원하는 사당의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불노초를 구하기 위하여 동쪽 바다 건너 봉래산을 찾아갈 때
그 당시의 진나라 최고 여덟 신선(八仙)들이 함께 떠났다는 자리에 오늘날까지 그 팔선들이
제사를 하고 지나갔다고 하여 팔선과해당(八仙過海堂)이라는 사당이 지어져 있다.
<봉래팔선각관광안내서>(산동성 등주시 1990) 참고.
신국(神國)은 종교적으로 다른 나라의 황제의 종속국이 될 수가 없다.
신국(神國)은 그 자체가 제국보다 더 상위의 신의 나라임을 의미한다.
남성인 황제보다도 여신인 해신과 산신과 지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풍수는 이러한 고대 신라시대의 풍류도적인 대자연을 어머니의 몸으로 본
신화적인 우주관에서 나온 것이다.
신국(神國)은 여신을 중심하고 있는 대자연을 숭배하는 자주적인 나라이며 선덕여왕의
생전 왕호가 성조황고(聖祖皇姑)인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여신적인 칭호이다.
앞서 논한대로 혜후가 자신을 '天子'로 표현한 것은 취기에서 일어난 떠벌림이 아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임금을 '폐하'라고 불러 황제국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화랑세기>에서
임금을 '帝'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의미의 신국(神國)에서 나온 것이다.
'帝'는 본래 무속적 신왕을 의미한다.
화랑들이 낭장결의를 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것은 신들린 신의 명령에 의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무당들이 신들려 작두를 타는 것은 이러한 낭장결의의 화랑들의 신들림의 한 단면으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선도는 해신과 산신 그리고 지신과 소통하는 것으로서 화랑은 언제든지
대자연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는 '선재동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신라의 십화랑(十花郞)은 팔선녀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금강산 상팔담이란 팔선녀가 목욕하던 선녀탕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 선녀탕은 바다의 축소판을 의미한다.
금강산의 다른 명칭인 봉래산으로 불노초를 찾아 나섰다는 진시황 때의 팔선(八仙) 신선과
바다의 해당(海堂)은 고려시대 묘청의 서경천도 사상에도 나타난다.
그들 팔선녀가 상팔담에 찾아왔을까?
묘청은 신라의 선불(仙佛) 정신을 바탕으로 서경을 팔선의 이상향으로 정하고 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건원(建元)하여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였다.
특히 서경에 임원궁(林原宮)을 짓고 팔성당(八聖堂)을 세웠던 것은 신라의 '임해전(臨海殿)'을
비롯한 미실의 해궁과 원화를 중심한 신선풍류도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필자에게 묘청(妙淸)의 그 이름은 바다와 관련한 신선 의식이 강조된 것으로 풀이된다.
묘(妙)는 흔히 부석사의 선묘(善妙) 신화 등에서 보듯이 바다와 관련한 여신적인 이름이며,
묘청(妙淸)의 청(淸)은 심청(沈淸, 깊고 푸른 바다의 여신)의 '淸'으로
바다의 여신 이미지를 가진다.
그런 묘청이 지었던 서경의 궁궐 이름이 임원궁(林原宮)이다.
임원궁(林原宮)은 신라의 해신에 대한 임해전(臨海殿)을 원화(原花)의 산궁(山宮)을 의식하여
임원궁(林原宮)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대왕이 바다의 신룡이 되겠다고 했던 것이나 그가 세웠던 서라벌의
임해전(臨海殿)은 단순한 유원지가 아닌 해신과 소통하는 '임해궁'의 의미로
그렇게 임해전(臨海殿)이라는 이름으로 궁전 아닌 신전을 세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임해(臨海)는 미실이 거했던 해궁과 같은 원화(源花)의 역할에서
그 종교 신화적 의미가 통해 있었을 것이다.
임해전(臨海殿)은 그런 면에서 '해당(海堂)'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추정이다.
묘청이 임원궁(林原宮)과 함께 지은 여덟 신선을 모시는 사당인 팔성당(八聖堂)의 첫번째 신선을
호궁백두악태백선인(護國白頭嶽太白仙人)을 강조하고 있다.
팔성이란 전국 산천의 산신과 해신 및 지신을 기본적으로 바탕하고 있을 것이다.
신라 화랑도의 십화랑(十花郞) 또한 전국적으로 나뉘어 신라의 산천과 바다를
각각 맡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540년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으면서 폐지되었던 원화제도는
진흥왕 29년(568년)에 미실을 원화(源花)에 봉함으로써 폐지된지 29년만에 부활된다.
그것은 풍월주 출신 화랑들을 원화(源花)보다 하위에 두고
원화(源花)가 화랑들의 최고 통수권자가 된 것으로 나타난다.
원화제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얼마나 국가적 중요성을 띄었는가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開國(개국)'이라는 연호를 '大昌(대창)'으로 바꾼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팔선을 통괄하는 최고 위치에 원화(源花)가 있었다는 것은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원화(源花)의 자리에 있고 그 아래 십화랑들을 지휘하는 천명공주가
화모(花母) 역할로 표현되어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원화(源花)가 된 미실은 남편 세종을 상선(上仙)에 임명하고
문노를 아선(亞仙)의 자리에 세운다.
그 다음에 설원랑과 비보랑에게 각각 좌우방의 봉사화랑에 임명하고 그녀의 동생 미생에게
전방봉사화랑의 자리에 앉힌다.
드라마 <선덕여왕> 에서 미실이 화랑들의 최고 지도자들을 휘어잡는 힘은
이러한 산신과 해신 및 지신의 여신 신화적 종교심을 바탕한 원화(源花) 제도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첫장면에서 낭장결의로 여러 화랑들이 할복을 하는 장면은 단지 뛰어난 한 여자 미실의
힘만이 아니라는 이러한 신라의 신국(神國)의 종교 신화적 배경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어린 덕만(나중에 선덕여왕이 된다) 역의 남지현
연기는 헤리포터의 아역들보다 뛰어났다.
따라서 여성 권력이 발생한 원화제도의 기원은 신라의 신국이상에서 찾아야 한다.
불국사의 불국(佛國)은 불교 이전의 신국(神國)을 불교화한 표현이며, 불국토란 신국토의 개념을
바탕하고 있다.
산천경계의 어머니 여신들의 나라의 도를 따르는 화랑들의 선도(仙道)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자가 원화를 맡아 화랑들을 통솔하는 그 기능적 배경은 <화랑세기>에서 진흥왕에게 원화제도의
복원을 요청할 때 미실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왕이 변고가 생겼을 때 남성 풍월주가 화랑들을 총괄하면 권력 계승에 위험이
따를 수가 있다는 것이며, 왕을 모시는 원화가 화랑들을 총괄해야 한다는 취지를 설명하자
진흥왕이 미실의 말을 따른 것을 볼 수 있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할 때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봄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源花)로 받들지 않는가" 하였다. 설원랑 등이 ... 미실은 이에 왕을
설득하여 "옛날 선제(先帝)들은 첩을 원화 ... 총첩(寵妾)을 낭도로 하여금
받들게 하여 함께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습니다. ... 첩은 폐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고 있습니다. 아직 ... 없습니다. 세종이 낭도를 많이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만약 첩이 ... 변고가 있으면 첩이 원컨대 스스로 원화가 되어 낭도를
모두 거느리는 것 ... ... 기쁘게 여겨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았으며,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花母)로 삼았다. (<화랑세기 세종공 편)
이렇게 볼 때 원화의 기능적 역할은 왕의 변고를 막기 위한 배경이 있다고 필자는 해석한다.
미실이 진골출신이어서 성골출신이어야 하는 왕후는 못되었지만, 그 권력은 왕후나 같다고
<화랑세기>는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선덕여왕처럼 미실이 성골출신이었다면 여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여성인 미실의 권력은 이러한 근원적인 화랑도의 원화(源花)제도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신라의 여신숭배의 신화적 배경의 신국의 힘을 바탕하고 있기도 했다.
화랑도란 화랑과 낭도 즉 장교와 병사를 통털어 일컬으며 그 최고 총괄 지휘자가 원화였던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사병들은 물론 화랑대 출신의 모든 국군 장교들의 최고 지휘권을
여성 통수권자가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국토를 대자연 어머니의 것으로 표현한 신국의 이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원화제도의 영향은 신라에 최초로 선덕여왕이 등극하는 배경이 되었다,
원화(源花)제도는 신국토(神國土)의 국토개념에서 삼한통일 의식이 나온 것이며,
선덕여왕은 김춘추와 김유신을 등용하여 장차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