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둥이의 길, 경운기와 점삼이 성(하)](783)
ㅡ소병화 6년 후 작가ㅡ
전남체고에 가입학하여 합숙을 거의 다 마쳐 가던 중에 입학식을 치르지도 못하고 병증이 난 아버지에게 끌려와 경운기 앞에 서있었던 점삼이 성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해 농사를 짓다말고 서울로 도망쳐 버린 점삼이 성이 피땀으로 모아둔 돈을 막둥이의 대학 첫등록금으로 내어놓을 때 심정은 또 어땠을까?
어릴적에 뒷둑골 밭을 통해 산몬당에 올라서서 ''막둥아! 니는 공부를 잘헌께로 어떻게든지간에 참고 버텨서 공부를 계속하거라! 나는 중장비를 배워와서 이 산을 개발해서 니가 하고 싶어하는 목장을 하자''고 했던 점삼이 성의 말이 어제 일처럼 쟁쟁하게 들린다. 방위를 받으면서 자기 쓸 돈도 없는 지경에 1984년 당시 건국대학교 등록금 67만원과 교련복, 책 등을 다 사고도 통장에 8만원을 보험처럼 넣어두고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80만을 송금해 주었다.
1977년 2월 말, 펴진 햇살이 칼날같은 뒷둑골 바람을 잠재우고 나른한 오후를 만들어내던 봄방학 끝무렵이었다. 승주군 해룡면 신대리 481번지, 대지 250여평의 우리집 마당에 경운기가 뚝 서있었다. 동네 정중앙에 있는 정남향의 본체는 큰정제(부엌)에서 연결된 큰방과 가운뎃방, 작은정제에서 연결된 작은방과 뒷간 방으로 이루어졌다. 골목으로 난 대문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솟을대문이 사라지고 파란 철제대문으로 단정되었다. 마당 왼쪽에는 1953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심었다는 서른살이 넘은 감나무, 내가 관리하던 키작은 암감나무를 점삼이 성이 관리하던 숫감나무가 두 발거리를 두고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쌍감나무 옆 빈터는 오후면 앞집 대나무밭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엄마전용 텃밭이 무성했다. 그 대밭은 할머니가 돌아가시 전에 늘 몬당길 시야를 가린다고 타박을 했던 곳이었다. 텃밭 옆에는 숨바꼭질을 할 때 아무도 찾지 못하게 숨어 내려갔던 물빛이 보이지 않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을 바라보고 외쪽문이 나 있는 창고와 창고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창고 2층에는 점삼이 성과 나의 비밀장소가 있었다. 술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밀주를 숨겨 놓았던 창고, 밀주 단속을 나온 세무서 직원이 집안을 뒤지기도 전에 창고문 앞에 미리 가 서서 큰대자로 팔을 벌려 가로 막으면서 ''여기는 없다''고 했다는 옛날 창고가 있었다. 그 벽을 잇대어 누에를 치려고 새 창고가 양문형 양철문을 중앙으로 크게 지어졌다.
솟을대문에 붙어있던 사랑방와 통시(변소)를 없애고 대문과 장독대를 넓혔다. 커다란 똥통시 옹기항아리가 새로 지은 창고벽에서 대밭 쪽으로 덧이어 지어진 널다란 새 변소로 옮겨졌다. 창고 끝과 대밭 사이에는 외양간이 돼지막으로 바뀌었다. 엄마가 시집오기 전부터 있었다는 큰 개복숭아 나무가 우뚝 서 대밭으로 이어졌다. 나의 두번째 무섬증은 대밭에서 시작했다. 네살 때부터 뒷방 앞에 놓여진 소변통에 가기도 전에 마당에다 오줌을 갈겨댔다. 잠든 할머니를 꼭 깨워서 뒷배로 세워둔 후에야 소변통까지 접근했다. 두려움의 대상인 짙검은 머리카락같은 대밭이 어른들 머리 높이에서 넓게 펼쳐져 있었다.
토끼장이 넓은 뒤안에 있었고, 큰정제 뒷문으로 돌아 장꼬방으로 이어졌다. 장꼬방에서 창고벽까지 25미터쯤 되었고, 중학교 때 창고벽에 분필로 양궁표적을 그려두고 야구공을 던지며 투수연습을 했었다.
마당 한가운데에 느닷없이 덩그러니 놓여져 있던 대동경운기는 감나무를 지붕삼았다. 경운기가 어떻게 옮겨져 왔는지는 기억이 없다. 곧바로 풀죽은 점삼이 성이 집으로 돌아와 경운기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 쟁(장난)스럽던 점삼이 성이 풀이 죽어서 말없이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있자니 그동안 나를 찔벅거리던 버릇은 아예 사라진 듯했다. 그때처럼 점삼이 성이 진지했던 적은 없었다. 고독한 철학자의 모습이었다.
조례초등학교에서 신월마을로 이음하는 길역할을 하는 보가 조례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을 담아두어 깊고 넓은 물놀이터를 만들었고 점삼이 성은 그곳의 제왕이었다. 나도 헤엄치기를 거기에서 형에게 배웠다. 신통방통한 형은 손더듬이질을 하여 붕어를 잡는 것은 물론 자라까지 잡아냈다. 한번은 형을 따라 조례저수지를 헤엄쳐 가로지르다가 저~ 세상으로 갈 뻔한 적도 있었다. 조례저수지 상류쪽에 흙이 쌓여서 낮았기 망정이지 3분의 2쯤에서 체력이 방전된 4학년 어린아이를 죽일뻔한 맹랑한 형이었다.
아버지가 몸이 아파서 개구리를 닳여 드시던 때가 있었다. 동네 아이들에게 한마리당 1원씩 쳐주며 개구리를 잡아오게 할 때, 형은 다른 형들 4명이 잡는 양을 잡아왔다. 조례초등학교와 순천공고 사이에는 온통 논이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가면 나는 개구리가 있을 만한 곳, 찔레꽃 덤블이 우거진 곳을 작대로 쿡쿡 찔러서 쫓아내면 뛰어나오는 개구리들을 점삼이 성이 족족 잡아내는 2인1조 형태의 알바였다. 겁이나서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는 나에게 온갖 협박을 하여 가까이까지 접근시켰고, 내가 무서운 화사(꽃뱀)를 밟아 놀라 기절 직전에 이른 적도 있었다. 그 뱀이 논두렁 구멍으로 숨어들면 잽싸게 꼬리를 잡고서 나를 부른다. 그 꼬리를 나에게 맡기고 기어이 구멍을 넓혀서 뱀을 잡아내는 점삼이 성이 너무 싫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낚시를 좋아하는 성은 나를 이리꼬시고 저리꼬셔서 데리고 가 고기가 도망간다고 아무 말도 못하게 했다. 심심해서 내가 무심코 던진 돌 때문에 모든 고기가 도망가서 고기를 못잡았노라고 눈물을 빼게 했다. 숙제부터 해놓고 놀겠다는 막둥이에게 ''인생이 공부가 다가 아니다. 남자가 놀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 책을 덮게 만들어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녔다.
반강제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이발소 김상모 성님에게 복싱도 배우게 했다. 가끔 담력 훈련을 한답시고 성들의 뒷그림자를 따라 올라가 봤던 삼부레 고갯길 오른쪽의 공동묘지에는 나중에 금당고등학교가 덩그러니 들어섰다. 성들의 담력훈련은 상비마을 근처에 있는 나병환자 마을을 어둠속에 다녀오게 했는데 그 길에도 나를 데리고 다녔다.
점삼이 성은 복싱만 잘한 게 아니었다. 육상도 뛰어났지만 특히 철봉의 귀재였다. 철봉 위에서 온갖 묘기들을 선보여 주었다. 성이 시키는대로 따라하다가 죽을 뻔한 사건이 저수지 수영사건 말고도 많았다. 높게 걸린 그네를 학교 전체에서 제일 높게 뛰었던 성은 어느날 나에게 자기는 그네를 한바퀴 팽 돌았다고 했다. 서너 바퀴는 연달아 도는게 기본이라면서 믿지 않는 내 앞에서 한바퀴를 돌아 보여주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의 몸무게로 원심력 계산해 보아도 당연히 무리한 시도였다. 얼마나 기를 죽이며 놀려대던지 결국 성이 보는 앞에서 도전하게 되었다. 한바퀴는 커녕 맨 꼭대지 정점을 넘어서기 직전에, 몸이 거꾸로 직각이 되어 공중에서 정지되더니 철렁하면서 꿈속에서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발판에서 발이 분리 되었고, 급전직하의 판국에서 그나마 꽉잡은 손이 철재 줄에서 밀리면서 손바닥이 벗겨지고 모래밭에 떨어져 눈앞이 노오란 경험을 하게 만들었다. 그 뿐인가? 그네에서 멀리뛰기를 할 때는 저학년인 나는 엉덩이를 발판에 얹어서 굴렸다가 뛰어내리던 때였다. 형은 발판에서 발을 굴리다가 그네와 분리되어 멀리 뛰어내렸다. 약을 올리며 해보라고 했고, 용심을 내어 시도하다가 모래밭 밖 운동장에 떨어져 무릎과 얼굴을 깍았다.
국기게양대 국기봉 꼭지를 잡는 시합을 하다가 손재삼이는 도망을 치고, 나만 이 교장님께 걸려서 교장실에서 큰 옥편을 두 손에 받치고 벌을 섰던 일도 이미 성이 시범을 보여준 탓이었다. 교실을 짓다만 옆면에 벽돌이 엇갈려 빼죽하게 나와 있었고, 그것을 발디딤으로하여 옥상까지 올라가는 시범도 성이 보여준 것이었다.
달이 밝은 초여름 밤 나에게 참외밭용 후레쉬를 들어 비추게 하고, 감나무 가지에 호롱불을 서너개를 걸어놓고 멀쩡한 경운기를 완전히 분해해 놓고서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라고 윽박지르며 조립을 했다. 늦은 밤까지 나에게 다시 분해와 조립을 강요했다. 며칠을 풀죽어 말없이 지내기에 이제 철들었나 싶다가 문득 밀려왔던 두려움이 현실이 되었다. 딱 세 줄로 쓰여진 편지 한 장만 남겨두고 점삼이 성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동생아!
니는 꼭 공부 열심히 하거라.
성이 돈 많이 벌어서 오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