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얼마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결심 공판이 열렸다.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판사는 사건의 경위와 판단한 내용에 대하여 매우 자세히 설명하였다. 1시간 50분 가량의 시간 동안 설명이 이루어지고 나서 판사는 박근혜 씨에게 24년 정도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1시간 50분 동안의 설명은 판사가 자신이 왜 그렇게 결정할 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그것은 판사 자신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마음의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24년의 삶을 빼앗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판사가 되려면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판사가 존경 받는 직업은 맞다.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일은 정말 많은 고민 속에서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나는 자동차 운전 학원 검정원으로 최종 면허 시험에서 심판을 보고 있다. 이것은 판사들의 일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나름대로 많은 고민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 피의자가 판사가 판결할 때 그 앞에서 떠는 것처럼, 운전 면허 수험생도 검정원의 판결 앞에서 떤다. 나도 검정원 시험을 볼 때 도로 주행 시험을 보았다. 운전을 20년 넘게 했는데도, 검정원 앞에서 떨었다. 시험이라는 것은 큰 시험이든 작은 시험이든 떨리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불합격 판정을 내린 사람들에게도 왜 불합격이 되었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것이 도리이기도 하지만 검정원 자신도 마음의 부담을 줄이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수험생은 불합격이 되면 격한 감정이 앞서기 때문에 판정 내용에 대한 것은 잘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결국 자신을 떨어진 것은 자신의 실력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합격 판정을 내린 검정원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은 원래 그런 것이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무슨 죄가 있냐? 인간을 이렇게 만드신 하나님이 잘못이지.'
판사도 인간인지라 법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의 인정을 베풀 수는 있다. 일심에서 징역 10년을 받은 사람도 항소하면, 2심 재판관들은 인정을 베풀어서 5년으로 감형시켜 주기도 한다. 운전 면허 시험도 마찬가지이다. 첫 시험은 엄격하게 본다. 떨어진 사람들은 슬픔과 실망 속에서 돌아간다. 자신을 잘 추스리는 사람도 있고 서운한 마음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두 번 째 시험에 임하는 수험자를 대했을 때 아무래도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듯이, 이 세상에서 운전 시험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로 주행 몇 시간 연습을 하고 도로 주행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운전을 25년한 나 역시도 아직 도로 주행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없다. 그래서 법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너그러움을 발휘한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 그런데 자기가 만든 세상을 심판하시는 일이 쉬운 일인가? 자기가 만든 작품을 무너뜨리는 것은 곧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운전 면허 시험에서 수험생들을 떨어뜨리는 것도 힘들다. 우리 학원에 와서 배우고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을 떨어뜨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눈물과 슬픔을 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된다. 하나님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멸망 시켜야 할 사람들 중에서 죄값을 대신 치루고 사신 사람들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눈물과 고통, 애처로움으로 탄생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통과 지혜를 통하여 살려내신 사람들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살려 내신 사람들을 귀하여 여기시고 항상 관심을 가지신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는 어느 날 한 수험생을 측은히 여겨 합격시켜 주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시험 때 크고 작은 실수를 했지만 감점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도로 주행 도중 신호를 위반하는 일이 벌어졌다. 신호 위반은 바로 실격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수험생에게 신호를 위반하면 안되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러자 수험생이 자신은 신호 위반을 하지 않았다고 대드는 것이었다. 사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특징이 있다. 자신의 잘못을 보지 않으려고 하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 주행 시험 과정은 블랙박스로 촬영이 되고 있었다. '나는 그건 네가 그렇게 느끼는 것일 뿐이다. 내가 보는 눈이 정확하다.'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번 봐 줄 테니 다른 소리 말아라.'라고 입을 막았다. 계속 도전을 했으면 블랙 박스 영상을 보여 주며 위반 사실을 드러내고 실격을 시켰을 것이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교회는 자신이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모든 열매에는 맛과 향이 있다. 교회는 교회로서의 맛과 향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맛과 향은 겸손과 찬송과 감사와 영광 돌림이다. 이것이 없으면 겉모양은 교회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멸하시는 것다. 바울은 성도의 멸망을 과감하게 말한다. 아무런 맛과 향이 없는 과일은 버려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