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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가끔 이런 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별
내 히드나무의 어린 싹을 꺾었네
가을은 지금 저물고
그대는 가슴에 간직하는가
우리들 다시 이 땅 위에서
또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니
세월의 향기여, 히드나무의 어린 싹이여
그리고… 그리고
그대 내가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가슴을 파고 간직하여 주시옵기를
- Guillaume Apolinaire(1880~1918)
이렇게 나는 그녀의 편지 속 한 편의 시에도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군 생활을 버텨갔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받고 개울가에 앉아 있었다.
개울에 가랑잎을 띄우면 가랑잎은 그 개울을 따라 자꾸만 나를 떠나간다. 왠지 떠나는 가랑잎을 바라보며 나는 안타까움에 눈을 떼지 못하지만 가랑잎은 금세 내 시야에서 영영 사라지고 만다.
그녀는 편지에서 말했다. “성, 나 있지 먼데... 아주 먼데로 가고 싶어.” 그 말을 들으니 그녀가 마치 개울물을 따라 떠나는 가랑잎 같았다. 정말 그녀는 나를 기다리다 지쳐서 가랑잎처럼 가랑잎처럼 아주 먼데로 떠나고 싶은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은 한없이 허무하였다.
그녀가 가랑잎이라면 나는 그녀를 싣고 떠나는 개울물이 되고 싶었다. 가랑잎은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일까.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를 싣고 갈 수 만 있다면 어디까지든 그녀가 가고 싶어 하는 곳으로 나도 흘러가고 싶었다.
그녀가 적어 보내준 ‘이별’이라는 시의 섬세하고 진한 감각이 내게 가랑잎을 띄우게 하던 그 날의 기억이여, “세월의 향기여 히드나무의 어린 싹이여...” 이별은 그렇게 슬프면서도 신선한 것일까. 그녀는 왜 이별이라는 시를 내게 보내 준 것일까. 아, 차라리 우리가 이대로 영원히 별이 되어 만난다면 우리들은 세월의 무한한 향기를 느끼며 살 수 있을 텐데.
아직 한 오라기조차 내 사랑은 그대 외에는 바쳐지지 않았노라.
이렇게 그대 가슴에만 묻혀버리고 싶은 까닭은... 그대 가슴 말고는 내가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거늘.
기다림은 그대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가졌던 찬란한 아픔. 그래서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노라. 그대와 나의 세월은 향기로웠다고(1978. 1. 9.).
신,
벌써 밤이 깊었어. 어두운 하늘에 별이 가득하다. 밝고 환한 별, 어두운 별, 멀리 있는 별, 가까운 별. 오늘은 일곱 개 별과 카시오페아도 밝게 빛나고 온통 하늘은 은가루를 뿌린 것 같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는 우리들의 별도 있을 텐데... 어둠속에서 내 작은 유성은 그대 곁으로 떨어져가고, 부드러운 바람결에 아카시아꽃 향기가 진하게 풍겨온다.
그런데 뻐꾹새는 밤에도 우는가보다. 고요한 어둠을 뚫고 들리던 뻐꾹새소리를 아까도 들었던 것 같은데... 저 새는 누구를 그려서 저렇게 우는 것일까, 어디선가 풀벌레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언젠가 신의 편지에는 겨울밤을 지새우는 귀뚜라미 이야기가 적혀 있었지. “이 추운 밤까지 지탱한 삶의 찬가일까, 저들은 따뜻한 날이 올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한 마리 풀벌레도 생(生)을 위한 의지는 이렇듯 끝없고 강렬한데 하물며 우리들의 생은 어둡거나 쓸쓸할 수 없다”고 말했었지. 그날 밤 나는 신의 편지를 몇 번이고 읽어보며 가슴 속에 뜨거운 생의 의지를 느꼈었다.
신,
주번 근무를 하다가 문득 라디오를 켜고 가곡을 들었다. 그렇게도 못 견디게 듣고 싶었던 우리 가곡을. 신은 얼마 전에 김규환곡 「기다림」을 들었다고 했었지. 오늘 나는 김성태곡 「동심초」를 들었어. 첫 소절만 들어도 아련한 추억과 함께 간절한 그리움이 온몸을 사로잡는 그 곡을 만든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감성을 지녔기에 그토록 듣는 이의 마음을 전율케 하는 것일까, 참고 참다가 나는 마침내 2절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들으며 눈시울이 젖고 말았어.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어둠을 향하여 흐르는 그 선율이 온통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어.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정말 어느새 그렇게 세월이 흐른 것일까.
오늘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4년째 되는 날, 어릴 때 보던 그대로 아카시아꽃들은 설움에 겨운 나를 두고 서서히 지고 있어.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왜 그렇게 해마다 아버지를 기다렸을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에 돌아갈 때 나는 그 분이 그리웠어.
가엾은 어머니는 언제나 문을 열어주며 지금 오니 하고 말씀하실 뿐 아무런 책망도 질책도 없으셨지. 나는 그때 가장 아버지가 그리웠어. 내가 술에 취해 밤늦게 돌아가면 방문을 박차고 나와서 내 뺨을 후려갈기며 이 어린놈의 자식이 어디서 술 처먹고 정신 못 차리고 다니느냐 하시며 몽둥이를 휘둘러 나를 때려주실 아버지가 가장 그리웠어.
아, 나는 그때 얼마나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싶었던가, 죽도록 나를 패주실 그 아버지의 몽둥이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그러면 나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잘못했다고 빌고, 아버지는 나를 와락 끌어안고 그래도 자식이라고 품어 주셨을 거야. 아, 나는 늘 이맘때면 잃어버린 아버지의 그 품안이 그리웠어.
신,
오늘처럼 아름다운 밤에는 은하수 곁을 빠르게 흐르다 지는 유성을 눈동자에 담아도 보고, 꽃향기에 취하여 노래를 부르다가 하얗게 밤을 지새워도 좋을 것 같아.
밤은 갈수록 고요하고 찬이슬이 내리는 속에서 아카시아꽃잎들이 벌써 떨어지고 있지만 신이 내 옆에 없기 때문일까, 저 꽃이 지는 것이 더욱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신의 머리맡에 한 송이 곱게 핀 꽃이라도 되고 싶다. 아니 신이 날마다 그렇게 오고가는 길에 한 그루 가로수라도 되고 싶다. 하늘로 치솟는 분수의 하얀 물줄기를 그대와 같이 보고 싶다. 분수가 애타게 그리워.
신은 기억하지?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 해 여의도의 바람 불던 광장과 달맞이꽃, 풀벌레 소리가 영롱하던 저녁의 하굣길과 가랑비가 내리던 날 신도림동의 골목길. 내게 있어 그 모든 것들이 정답고 소중했던 것은 오로지 신이 옆에 있기 때문이었다.
비 개인 여의도광장에서 포도주와 떡과 비스킷을 꺼내놓고 혼자만의 제사를 지낸다고 엉뚱한 짓을 하던 나를 신은 아주 재미있다는 웃어가며 바라보았었지.
우리들이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신의 말 한마디에 나는 눈물이 흐르고, 이젠 떠나야 한다고 하던 신을 보낼 수 없어 그 광장보다도 공허한 가슴을 어떻게 할지 몰라 자학하던 기억이 난다. 그 광장에는 아직도 달맞이꽃이 피고 있을까, 영등포로타리에는 지금도 하얀 분수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을까.
그러나 신, 이제 나는 자학하고 싶지 않아. 오히려 한없는 안식과 사랑의 기쁨을 갖고 싶어. 이렇게 허전할 때 말해줘. 신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는다고. 이 세상이 아무리 공허하고, 살아가는 모든 일들이 고통과 슬픔일 수밖에 없다하여도 그대는 나를 기다릴 수 있다고. 시련과 아픔이 우리를 비켜가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사랑하면 무섭지 않아. 내 손을 잡아줘. 그러면 나는 열심히 열심히 광장을 가로질러 그대에게로 달려갈 거야.
신,
깊고 깊은 눈동자로 젊음과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대가 가진 지성(知性)과 신앙을 나도 갖고 싶고, 그대가 겪는 고통과 비애와 아픔까지도 나는 즐겨 사랑하고 싶다. 우리의 꿈은 아직도 푸르고 아름다우며, 우리의 밤은 이렇게 헤어져 있어도 진실과 소망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고 말하고 싶어.
그날의 죽을 듯 안타깝던 별리를 생각하면
어느 하늘 아래 다시 한 번
그대 안고 목 놓아 명읍(鳴泣)하려마는
그러므로 오오 나의 마음의 보배여 하늘이여
저 임종의 날에도 고이 간직하고 가리니
나의 생애는 그대의 애달픈 사모(思慕)이었음을
(유치환 시 ‘사모’)
어머니는 지금쯤 제상(祭床) 앞에 그린 듯 앉아 계시겠지... (1978. 5. 26.)
성(聖),
나 성이 지치지 않게 편지할게. 성도 날 변함없이 대해줘. 이 피곤한 세상에서 내가 쉴 곳도 성의 품안이고 성이 쉴 곳도 내 곁에서야 만 해. 고통스럽던 며칠이 지나고 다시 난 힘을 찾았어. 더욱 성을 사랑하고 지켜나갈 용기를...
고전 춘향이보다도 더 聖만을 사랑하며 기다릴게. 총명과 미모가 없어도 성을 사랑하는 마음하나로 성의 마음을 지키고 싶어. 성은 더욱 책 열심히 읽고 임무에 성실하고 건강하길 바래.
나를 선택하였으면
모든 것을 허용하라.
그것이 설령
죽음에 이르는 길일지라도...
이 두려운 말을 가슴과 의지로 받들겠어. 성은 나를 이 명령에 부족함 없이 사랑하리라 믿고. 우리들의 사랑은 한 쪽의 슬픈 일방통행이어서 안 되고, 때가 되면 떨어지는 낙엽이어서도 안 되고, 순간의 아름다움에 빛나는 유성이라도 안 되고, 다만 촛불처럼 남지 않고 다 타버리고 마는 사랑이어야 해.
성에게 만족할 만큼의 사랑을 주고 싶어. 정부(情婦)의 사랑과 아내의 헌신까지 그러한 사랑을 주고 싶어. 성은 아버지의 관용과 애인의 뜨거움과 또한 자상함으로 나를 품어줘. 지금처럼 이렇게 추울 때 내 손을 잡아주면서. 아니 지금까지도 행복해. 더 원하지 않겠어. 다만 사랑해. 넘치도록... (1979. 9. 24.)
이렇게 유성에 대한 추억과 글은 많았고, 유성의 노래를 언젠가는 가곡으로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군 시절에 써두었던 「유성의 노래」 역시 이미 쓰여진 시이기 때문에 곡을 붙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여러 번 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이 시는 거의 10번 이상 수정되었다. 그 중 일부는 이러하였다.
유성(流星)의 노래
너는 모르리라.
내 모든 생(生)을 활활 불태워
남김없이 너에게 바친 후에
이루어질 수 없는 내 슬픈 사랑을 안고
더없이 찬란하게 숨져가고 싶음을
천리만리 아득한 공간을 헤치고 날아
저 광활한 대지에 무수한 꽃잎 되어 흩날리고 싶음을
아, 나는 좀 더 오래 살고 싶었노라.
열정어린 참사랑을 님의 품에 안기우고
부시도록 어여쁘게 빛나고 싶었노라.
꿈이여 사랑이여, 그 아름다웠던 날의 행복이여
한 순간 지나버린 빛으로 깨어지는 아픔이여
고요히 빛을 거두며 나는 떠나리라.
부디 들꽃이 섬세한 호흡을 내쉬던 살여울가에
너를 그리다/ 너를 그리다 불타버린 내 몸을 묻어다오.
영원히 너의 곁에서/ 너의 곁에서 쉬리라.
유성(流星)의 노래
어두운 밤하늘에/ 한 떨기 별꽃으로 피었다가
한순간 빛을 내며 사라지는 것이 내 운명인가요.
그대만을 그리워하다/ 지쳐버린 나는 이제 떠나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이 길
천리만리 아득한 공간을 헤치고 날아서
저 광활한 대지에/ 무수한 꽃잎으로 흩날리다
깨이지 않는 동토에 묻혀 잠들지라도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할거에요.
아, 나는 좀 더 오래 살고 싶었어요.
열정가득 참사랑을 님의 품에 안기우고
부시도록 어여쁘게 빛나고 싶었어요.
고요히 빛을 거두며/ 나는 떠나렵니다.
부디 들꽃이 섬세한 호흡을 내쉬던 살여울가에
그대를 그리다/ 불타버린 내 몸을 묻어주세요.
영원히 그대 곁에서/ 그대 곁에서 쉬고 싶어요.
그러나 이 노래는 화자(話者)가 의인화(擬人化)된 유성이기 때문에 여성(女性)으로 해야 할지 남성(男性)으로 해야 할지도 고민스러웠고, 또한 시의 내용도 결말부분이 너무 비극적인데다 듣는 이의 정서를 고려할 때 이 시를 가곡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부적합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좀 더 순화된(?) 가사로 수정되었고 최종 가사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유성(流星)의 노래
어두운 밤하늘에~/ 한 떨~기 별꽃으로 피었다가
한순간 빛을 내며 사라지는 것이 내 운명인가
그대만~을 그리워하다/ 지쳐 버~린 나는 떠나네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
천리만리 아득한 공간을 헤치고 날아서
저 광활한 대지에/ 꽃잎처~럼 흩날리다
깨~이지 않는 동토에 묻혀 잠~들지라도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하리라
(간주)
그대만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날들은 꿈이었던가
아름다운 별밭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님이여
지금은 찾을 수 없는/ 잃어버린 슬픈 님이여
고요히 빛을 거두며/ 나는 떠~나리라
부디 들꽃이 섬세한/ 호흡을 내쉬던 살여울가에
나를 묻어다오.
영원히 그대 곁에서/ 그대 곁에서 쉬리라
하지만 멜로디가 문제였다. 특히 “부디 들꽃이 섬세한 호흡을 내쉬던 살여울가에 나를 묻어다오.” 하는 부분은 정형화된 것도 아니고 글자 수가 많아서 어려웠다. 하지만 이 부분의 일부 시어(詩語)를 뺀다면 시의 구성과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가 반감될 것 같아서 수정할 수 없었다.
결국 수차례 거듭된 수정과 전후 멜로디와의 조화를 고려하여 이 가곡은 2023년 8월 25일 완성되었고, 같은 해 12월 29일 구광일작곡가와 채보를 마쳤으며, 2025년 1월 22일이 되어서야 장동인작곡가에 의해 피아노3단악보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성악가의 가창녹음은 하지 못하였다.
https://youtu.be/nEFpD1WN1X0?si=lIo6yt5D6j_kUJs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