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앉은뱅이 장애인으로 고난을 딛고 서울대와 미국 유학을 거쳐 교수가 된 김인강 교수의 감동적인 인간승리 이야기를 실어봅니다. 그의 삶의 이야기와 신앙에 대해 이홍렬 씨와의 대화와 간증을 들으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고난을 딛고 일어나는 승리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고등과학원(KIAS) 김인강 교수가 만난 하나님’
그가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으나 너무 가난하여 치료시기를 놓쳤고, 그 후유증 때문에 앉은뱅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인강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혼자 힘으로 설 수 없었기에 기어 다녔다. 비료부대 위에 엎드려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로는 부대를 잡아끌며 흙바닥 위를 다니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혀를 찼다.
보는 사람마다 이 아이는 곧 거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모는 새벽부터 과수원으로 일하러 나가고 형과 누나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홀로 방안에 누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혼자 잠들다 깨어났을 때 적막함과 침묵이 밀려왔다. 어린 마음에 고독이 무엇인지 외로움을 어떻게 견뎌나가야 하는 지를 스스로 터득했다.
친구라고는 어린 병아리들과 강아지들, 봄이면 찾아와주는 벌과 이름 모를 새들, 그리고 마당에 지천으로 피던 작은 꽃들이 전부였다. 벌레 한 마리를 잡아놓고 꼬꼬꼬하며 닭들을 불러 모았다. 닭들은 전혀 이 아이를 경계하지 않았고 자기들과 같은 동료로 인정해 주었다.
어미 닭은 하루 종일 지켜봐도 일어서지 못하고 마당을 기어 다니며 벌레를 잡아다주는 인강이를 보고 병아리들과 같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식구 중 누군가의 생일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닭을 잡아 밥상에 올렸다. 친구로 지냈던 닭이 밥상에 오르면 인강이는 슬퍼서 먹지 못했다.
인강의 아버지는 고된 노동과 힘든 삶을 달래려고 저녁이면 술에 취해 가족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두 다리가 성해도 살아가기 힘든 세상에 걷지도 못하는 자식을 보고 보나마나 거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아들의 장애를 부끄러워하며, 술을 마신 날이면, ‘저런 쓸모없는 놈 지금 갖다버려. 당장 땅에 파묻어 버려’라며 폭력을 휘둘렀고, 어머니는 눈물로 지샜다. 몇 년이 흘러 9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어머니 등에 업혀 교장실에 갔으나 혼자서는 서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일언지하에 입학을 거절당했다.
차가운 날씨에 눈물을 흘리며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인강이의 언 발을 감싸주며 “아가야 춥지?” 라며 따뜻하게 물었다.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쌓였던 가슴의 응어리를 포근하게 녹여주었다.
논산군 연무읍 마전리의 시골 집은 하루 종일 찾아오는 사람이라곤 갈치장수 아줌마와 우편배달부가 전부였다. 어머니는 그 사람들을 붙들고 땅이 꺼져라 눈물을 뿌리며 탄식했다. “이 녀석이 밥이나 먹고 살아야 할 텐데. 내가 죽고 나면 이 아이는 어떻게 하나.”
그 말은 김인강의 마음과 영혼에 비수처럼 꽂혔다. 그때부터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나선형의 깊고 어두운 구멍에 빠지는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김인강은 11세에 집을 떠나 재활원에 들어갔다. 인강이에게 주어진 당면과제는 앉은뱅이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하나는 휠체어를 타고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굳은 다리를 펴고 보조기구를 연결하여 목발을 집고 걷는 것이었다. 전자는 쉬운 길이었지만 후자를 선택하는 것은 형극의 길이었다. 후자를 선택했다. 10년 동안 앉아서만 지내다 보니 근육과 뼈는 오그라들어서 펴지지 않았다.
치료사 두 명이 붙들고 인정사정없이 무지막지한 힘으로 다리를 펴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울고불고 소리를 지르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김인강은 200만 년 전 최초로 직립보행을 한 인간 종이었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로 태어났다.
인강이는 공부에서는 늘 1등을 했고 선생님의 추천으로 대전 중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는 입학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받아 장학금을 받고 충남고에 배정받았다. 다른 학생들은 밤늦게 까지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을 하지만 일찍 귀가해 혼자 공부했다.
공부방이 없어서 TV가 크게 틀어져 있는 방 한구석에서 밥상을 놓고 공부를 했다.
공부만 한 것이 아니었다. 형과 누나들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잎새>, <어린 왕자> 그리고 한국단편소설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위대한 개츠미>, <노인과 바다>를 영어소설로 읽어 나갔다.
지지거리는 고물 TV를 두드려가며 AFKN뉴스를 청취했다. 언젠가 화학시험을 보고 채점답안지를 받아보니 오답 처리된 문제가 아무래도 이상했다. 다시 풀어보니 오답이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과 토론 끝에 선생님이 “네가 맞다”고 수긍하셨다. 그러나 이미 채점이 끝난 상태이므로 선생님은 김인강의 점수만 고쳐주겠다고 했다. “그건 공평하지 않습니다. 우리 학년 전체의 채점을 다시 해주세요.”라고 주장했다.
선생님은 화를 냈지만, 결국 다시 채점해서 모든 학생들의 점수를 바로 잡았다. 김인강의 정의로운 마음은 병원에서 수술을 앞두고 응급실로 실려 온 의료보호대상자를 병원이 매몰차게 쫓아낸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어느 가장이 암에 걸린 부인을 업고 병원에 왔으나 병원에서는 접수조차 거절했다. 김인강은 의사에서 왜 저 위중한 사람을 치료해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저 아줌마의 상태로 봐서 별로 가망이 없고 저런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하다 죽으면 분명 병원비 떼먹고 몰래 도망가는 경우다”라고 말했다.
김인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어 누워 있던 병상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나와 버렸다. 그는 충남고에서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다. 다른 친구들은 술 마시고 미팅하느라 바빴지만 술, 담배, 미팅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켰다.
어느 비 오는 날 수업을 마치고 비를 흠뻑 맞으며 귀가하는 데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두 손으로 목발을 짚고 무거운 가방까지 걸쳤으니 비 오는 날은 물에 빠진 새앙쥐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혼자 쓰고 가세요.”라고 말했으나 그 누나는 끝까지 같이 가겠다고 우겼다. 그러면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 투로 대답했다.
“아마 지금 옆에 계신 분보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더 생각했을 겁니다.”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김인강은 자신의 존재와 살아야 하는 목적에 대해 셀 수없이 하나님께 물었던 것이었다. 성경공부를 권하는 선배누나의 인도로 이때부터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음생활을 하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3학년 초, 목발을 짚고 무거운 가방을 맨 채 너무 많이 걷다 보니 갈비뼈와 폐가 부딪쳐 폐에 큰 구멍이 났다. 의사는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폐가 파열되어 심장마비로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의사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 지 따지고 싶었다. 그래서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 지 하나님께 먼저 물어봐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병원을 나왔다.
어머니와 같이 기도원에 올라가 한 구석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는 기도대신 원망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하신가요? 항상 아프기만 하고...
아무 쓸모없는 나 같은 자가 살아있는 게 하나님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제 그만 나 데려가 주세요.” 치유된다는 소망도 없고 왜 내가 사는 지에 대한 응답도 없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 아니냐고 따지고 또 따졌다. 그때 문득 등 뒤에서 누군가의 찬송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 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날선 검 하나가 심장 한가운데 들어와 박히는 듯했다.
갑자가 눈물이 터져 나왔다. 빳빳하게 서 있던 자아가 툭하고 꺾이면서 회개가 터져 나왔다. 울고 울고 그리고 또 울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롬9:20).
그는 그 시간에 나처럼 연약한 이웃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한 해 동안 병상에 있다가 복학한 후 교수가 될 꿈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기도하는 법, 성경 읽는 법, 고통가운데 찬양하는 법을 알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 앞에 잘 보이고 세상 앞에서 명예롭게 살고자 하는 코람문도(Coram Mundo)의 삶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구하는 코람데오(Coram Deo)의 삶을 살고자 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0).
서울대를 전체 차석으로 졸업하고 미국버클리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경(SK전신)으로부터 해외장학금을 받았고, 버클리대학에서는 학비면제와 월 1천 달러의 생활비를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 앉은뱅이로 땅바닥을 기어 다니던 김인강을 보고 장차 거지가 될 것이라고 저주했지만, 하나님은 위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찬란한 미래로 길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1:27-29).
버클리대학은 미국에서 눈이 많이 오지 않고 자유분방한 학풍을 가진 명문대학이다. 나체주의자 학생이 강의실에 발가벗고 들어와 강의를 듣고 매년 나체 마라톤대회가 개최되는 학교였다.
기숙사복도에서는 여학생이 샤워실에서 아래만 가리고 불쑥 나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김인강은 이러한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고 위상수학 분야에서 강한 버클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아버지가 처음 미국에 오시게 되었다. 난생 처음 타는 비행기에서 아버지에게 기내식은 그야말로 처음 먹어보는 특별식이었다. 한국인 스튜어디스에게 사정사정해서 기내식을 연거푸 두 번 먹었다. 세 번 째 달라고 했을 때 거절당한 것은 당연했다.
한국인 스튜어디스가 다른 통로로 가고 외국인 스튜어디스가 지나가자 손짓 발짓 부탁해서 한 번 더 기내식을 먹었다고 한다. 그는 버클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로 돌아와 카이스트교수와 서울 대 교수를 거쳐 현재는 고등과학원 (KIAS)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2007년에는 40세 이하의 과학자에게 주는 ‘젊은 과학자 상’을 받았다. 보통학생이 일곱 살에 들어가는 초등학교에 입학조차 못하고 열한 살이 될 때까지 집에만 있다가 어머니 등에 업혀 재활원에 들어갔지만 하나님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요18:7)라는 말씀대로 그를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앞세워 주셨다.
카이스트 교수로 있을 때 병원에 입원한 노쇠한 아버지를 주님께 인도하였다. 막노동에 자식들 뒷바라지 하신 아버지의 영혼구원을 위해 울부짖었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상처를 준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한 후 주님 품에 안기셨다.
일찍부터 사색에 길들여져 있고, 사색을 즐기며 살아가는 자는 금광을 얻은 자와 같다. 고아들이 세계역사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확실한 통계가 있다. 스위스 정신의학자에 의하면 부모 잃은 고아가 세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고통에 대한 경험은 생을 살아가는데 놀라운 창조력을 발휘하고 뛰어난 역량을 나타낸다. 고아나 사생아출신으로 알렉산더대왕, 시저, 루이14세, 히틀러, 레닌, 스탈린, 모세, 마호메트, 사르트르, 공자, 루소, 데카르트, 파스칼, 다빈치, 바하, 루소, 까뮈, 단테, 톨스토이, 볼테르, 도스또에프스키, 오프라 윈프리 등을 들 수 있다.
사색의 긍정적인 에너지(Solitude power)를 활성화하는 자는 내면으로부터 샘솟는 광채와 창의적인 에너지를 갖게 된다. 21세기형 아름다운 인간은 사색형 인간이다. 괴테는 “인간은 사회에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영감을 얻는 것은 오직 고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고 했다.
피카소는 “사색(Solitude)없이는 중요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혼자라는 것은 절망의 시간이 아니라 창조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릴케는 “당신은 당신의 사색을 사랑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교육은 사색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한다.
다양한 능력이 요구되는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힘을 갖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인강은 가장 어린 나이에 스스로 고독가운데 사색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하나님은 놀라운 계획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버클리로 유학 온 지 1년쯤 지났을 때, 독일에서 첼로를 전공하는 자매와 편지로 교제하기 시작했다. 그 자매는 겸손하고 착한 마음을 가진 자매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5년간 편지로 서로의 심정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하나님과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고 슬하에 남매를 두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죄인 취급할 때,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시며 당신이 하실 일을 계획하셨다.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질그릇이 되게 하신 것이며 나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을 나타내려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