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인치 이하의 앨범이 주로 제작되면서 앨범 내에 수록되는 곡수가 제한적이었던 1960년대 이전, 즉 1920년대 이후 40여 년간의 한국대중음악계는 1958년부터 12인치 LP가 본격적으로 제작되면서 많은 신진 가수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다.
또한 12인치 LP시대의 등장은 대중음악 자체가 산업규모로 진화하는 계기로 작용되면서 보다 많은 음반제작사의 등장까지 이끌어냈다. 1960년대 대중가요계의 특징은 21세기에 들어서며 K-POP으로 불리는 현재의 대중가요 필드와 매우 흡사한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시기 적잖은 가수들이 미국과 유럽을 향한 해외 진출을 이뤘으며, 월등한 실력을 지닌 솔로 가수와 여러 장르에 걸쳐서 듀엣 이상의 그룹들의 활동도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음악적 구성에 있어서도 자연스럽게 이전의 대중가요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최초의 시도와 결과물들이 쏟아졌던 시기였다.
또한 6.25 전쟁 전후로 미8군 무대에 섰던 가수들이 1961년에 이르러 일반무대에도 자연스럽게 진출하게 되면서 보다 많은 대중들이 대중음악의 즐거움에 빠져 들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활동하던 가수들은 대개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노래를 그대로 부르거나 번안하는 수준에 그치는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점차 뮤지션으로서의 감각을 키워 나온 1960년대 주요 가수들은 1964년 최초의 밴드와 최초의 포크 앨범, 최초의 록 앨범 등을 발표하면서 장르의 다양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촌향도의 사회분위기를 반영하듯 노래가사도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졌고, 도시의 구체적 인물과 공간을 포함한 밝고 명랑한 노래와 군 관련 노래까지 대중들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한 편으로 어두웠던 대중음악의 흐름도 나타났던 시기가 바로 1960년대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방송윤리심의위원회와 한국예술윤리위원회를 통해서 발매된 모든 음반은 사전심의를 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대중음악은 숱한 억압과 통제 속에서도 새로운 생명력을 보여줬다.
1966년 박춘석이 최초의 스테레오 음반을 발표했으며, 1968년 신중현은 펄시스터즈의 히트를 시작으로 자신만의 사단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국 뉴욕에서 바바리 코트를 입고 장발을 휘날리며 한대수가 귀국을 했으며, 트윈폴리오는 달콤한 포크 멜로디로 젊은이들에게 대중가요의 매력을 유감없이 전달했다.
또한 1969년 섹시 아이콘 김추자의 등장을 이어 당시 세계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클리프 리차드(Cliff Richard)가 내한을 하면서 대중가요계는 보다 풍성한 흐름으로 1970년대를 맞이하고 있었다.이처럼 1960년대 한국대중가요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장르와 대형 가수가 등장했으며, 산업적 규모로까지 성장하면서 기성세대가 주도하던 이전의 판도를 청년세대로 옮기는 기반을 마련한 시기였다.
1961년 6살의 나이에 제작된 하춘화의 데뷔음반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어린이가수의 솔로 앨범이다. 솔로 앨범에 대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았던 당시에 모든 수록곡을 한 명의 가수, 그것도 어린이가 그 주인공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61년 동화예술학원에서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시작했던 하춘화는 기타를 치던 8살 김영환과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9살 정선과 함께 ‘학원의 3대 영재’로 불렸다. 이들에 대한 소문이 가요계에 퍼져 나가자 극장 쇼를 운영하던 단장들이 이들을 데뷔시키고자 혈안이 되었다.
세 어린이의 첫 무대였던 서울 종로4가의 천일극장에는 밀려드는 관객의 출입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리고 성공적인 공연을 마친 이후 보컬리스트 하춘화에게 음반 취입의 기회가 찾아왔다.
1962년 하춘화와 계약을 맺었던 아세아레코드는 가나다레코드 레이블을 새롭게 창립해서 8곡을 동시 녹음했으며, 1,000장의 10인치 LP [하춘화 가요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이 앨범 내에 수록된 첫 트랙 ‘효녀 심청 되오리다(일명 춘화의 노래)’는 지금 들어도 매우 유쾌하게 시작된다.
“제가 하춘화에요. 금년에 7살입니다. 노래라는 것은 우리 생활에 있어서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꼭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나이어린 제가 여러분의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퍽 걱정이 됩니다. 아무튼 한 번 불러보겠어요.”라는 그녀의 앙증맞은 인사말이 첫 트랙으로 자리하고 있다.
1991년까지 1,260회라는 최다 공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던 하춘화의 10인치 데뷔앨범은 대중음악사의 이정표를 제시한 기념비적인 존재가치를 지닌다. 또한 이 앨범에는 ‘부산항 부루스’, ‘비개인 서울거리’, ‘대구역 떠나는 완행열차’, ‘목초항 탱고’ 등 특정 지역을 상징하는 노래가 많이 수록된 것도 특이하다.
지금 소개하는 ‘아빠는 마도로스’는 그녀의 나이 10살인 1965년에 부른 노래로 엄밀히 하춘화의 최초 히트곡이라 할 수 있다. 이 앨범은 최정자의 ‘월남에서 보내주신 오빠의 편지’와 안다성의 ‘풍운아 흑우도령‘을 타이틀로 해서 발표된 앨범으로 정씨스터즈, 은방울자매 등의 노래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에서 하춘화는 ’아빠는 마도로스‘ 외에 ’눈물의 일기‘도 함께 수록했다. 이후 그녀의 정규 1집 음반은 1971년에 발표되었으며, 이 앨범에서 ‘물새 한 마리’가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 하춘화는 음반을 발표한 가수로서 본격적인 인기몰이를 시작했다.
그녀가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작곡가 겸 가수 고봉산과 함께 ‘영감타령’을 새롭게 편곡해서 발표한 ‘잘했군 잘했어’로 이 때 그녀의 나이 불과 열여섯 살, 일신여상 2학년 때의 일이다.
1960년 미8군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여성듀엣 김치켓(Kimchi Kats)은 작곡가 박춘석에 의해 픽업되어 10인치 독집 LP ‘김치켓 히트집’을 발표하며 공식 데뷔했다. 이들은 1959년 아시아 최초로 미국 라스베가스에 진출한 김시스터즈에 이어 1963년 일본, 홍콩, 필리핀, 대만을 거쳐서 미국에 진출했다.
당시 라스베가스 최고의 무대였던 스타 더스트 호텔을 주 무대로 활동했던 이들은 ‘동양에서 온 매혹적인 스타일과 용모의 여성그룹’으로 칭해지며 커다란 이슈를 이끌었다. 지금 소개하는 앨범은 김치켓이 해외 진출을 앞두고 1962년에 발표한 독집음반 [검은 상처의 부루스]이다. 이 음반은 한국대중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음반으로 민간 레이블에서 최초로 제작한 12인치 LP라는 점에서 가치와 역사성을 지닌다.
1면에 수록된 6곡은 모두 번안곡이다. 타이틀곡 ‘검은 상처의 부루스’는 세계적인 테너 색서폰 주자이자 ‘Danny Boy’로 유명한 실 오스틴(Sil austin)의 곡으로 세련된 리메이크가 정겨운 곡이다.가창적인 측면을 떠나서 원곡인 ‘Broken Promises’에 대한 번안을 ‘깨어진 약속’으로 직역하지 않고, ‘검은 상처의 부루스’로 번안한 감각은 매우 낭만적이라 할 수 있다. 2면은 박춘석의 창작곡 ‘눈물의 자장가’ 등 4곡과 번안곡 2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가수 최초로 미국 라스베가스에 진출했던 걸그룹이 김시스터즈라면 국내 최초로 유럽에 진출했던 가수는 서울음대 출신 1호 여가수인 릴리화(한국이름. 최정환)이다. 지금의 대중은 물론 전문가들에게도 생소할 수 있는 가수 릴리화는 대학 3학년 때인 1959년, 당시 주한서독대사 헬쯔의 양녀가 되어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그해 연말 독일 하이텔베르그시가 주최한 국제유학생경연대회에 참가했던 릴리화는 한국고전무용과 민요를 선보이며 세계 각국에서 참여한 160여명의 경쟁자를 제치고 최고상을 수상했다. 이에 1964년 6월 세계적인 레이블 필립스레코드와 전속계약을 체결했던 그녀는 서구적인 팝 음악과 한국의 민요, 그리고 클래식을 넘나드는 폭넓은 가창력을 바탕으로 ‘동양의 별’이라는 찬사를 받아내며 활동했다.
릴리화는 독일, 덴마크,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와 영국의 BBC방송에 정기적으로 출연했을 정도로 한국대중음악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던 선구자로 기록되고 있다. 1964년 한국흥행을 통해 발표했던 12곡이 수록된 릴리화의 1집은 그녀의 존재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국내 발매 음반이다.
해방이후 미군들의 여흥을 위해 탄생되었던 미8군 무대는 국내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미군 무대를 통해 등장했던 수많은 8군 가수들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내 대중음악계에 큰 변화의 축을 담당했다. 1955년 8군 사령부가 일본에서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소속 군인과 군무원들의 여흥을 위한 쇼 무대가 확대되었다.
당시 미군이 한국 연예인들의 쇼 공연단에 지불하는 금액은 한국의 연간 수출 총액과 맞먹는 120만 달러에 육박했다. 수많은 쇼 단체가 난립하며 클럽 수가 300여 곳에 육박하자 1957년 8군 쇼 무대에 한국 연예인들의 공급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연예기획사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최초의 용역업체는 ‘미8군 쇼의 대부’로 군림했던 베니 김(김영순)이 설립한 화양흥업이었다. 베니김의 3남매는 ‘연안부두’를 히트시킨 김트리오이며, 그의 부인은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불렀던 이해연이다. 화양흥업을 이어서 유니버셜, 삼진, 공영, 대영 등이 등장하면서 8군 무대의 운영은 체계를 잡게 되었다.
이렇듯 활성화가 되다보니, 경쟁을 통한 쇼 프로그램 전체를 선발하는 오디션 제도까지 등장하게 된다. 6개월마다 등급 재조정 오디션이 진행되었는데, 이 오디션을 통과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함 이상이었다.
음악수준에 따라 AA, A, B, C로 등급이 매겨져 개런티가 차등 지불되었다. 미8군 가수들의 일반 무대의 진출은 1961년 한명숙의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시작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결국 미8군 무대에서 뮤지션으로서의 감각을 키운 1960년대 가수들은 일반 무대에 오르며 보다 대중적인 결로 이어질 수 있었던 셈이다.
제목이 참 흥미롭다. 김현아의 [일요일은 안돼요] 앨범. 일요일에는 무엇이 안되는 걸까. 앨범의 자켓에서 독특한 글귀가 눈에 띈다. ‘韓國의 카니 후랜시스’라는 문구와 남성중창단 블루벨즈의 ‘부루벨스 하모니’라는 이질적인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일요일은 참으세요’라는 번안곡으로도 알려진 이 곡은 외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 영화 주제가상을 받았던 1960년 그리스에서 제작된 영화 ‘Never On Sunday’의 주제곡을 원곡으로 핸리 맨시니(Henry Mancini)와 나나 무스꾸리(Nana Mouskouri)의 버전으로 친숙한 노래이기도 하다.
김현아에 대한 설명을 돕기 위해서 미8군 무대와 관련된 1960년대 초반의 상황을 조금 덧붙인다. 8군 무대에서 특히 인기를 얻었던 1960년대 초반의 프로젝트 팀이 있다. ‘락앤키즈(Lock & Key)’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이 팀은 키보이스와 송영란이 주축이 되었던 프로젝트로써, ‘봄비’로 잘 알려진 박인수는 락앤키즈의 객원가수로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락앤키즈라는 그룹명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존재한다. 송영란이 잠겨있는 열쇠통(Lock)이었고, 그 열쇠통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Key)는 키보이스의 음악이라는 의미를 뜻한다. ‘한국 최초의 록그룹으로 인정받는 키보이스는 8군 쇼 가수들을 공급하는 업체였던 '대영'에 소속되면서 8군 무대에 진입할 수 있었다.
‘꿈에 본 내 고향’으로 잘 알려진 1세대 가수 송달협의 딸인 송영란은 윤복희와 함께 투 스쿼럴스의 멤버로 8군 무대에서 특히 인기를 얻었던 가수다. 일각에서는 송영란의 어머니가 당시에 윤복희의 개런티를 착복해서 윤복희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송영란은 키보이스와 함께 8군 무대가 아닌 일반무대에도 서게 되지만, 얼마 후 일본으로 떠나고 만다. 이 때 락앤키즈는 전미라와 김현아가 그 자리를 이으며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활동 당시 김현아는 무대에서 ‘Where The Boys Are’, ‘Who's Sorry Now’, ‘Beautiful Brown Eyes’ 등 카니 프란시스(Connie Francis)의 노래를 주로 부르며 ‘한국의 카니 후랜시스’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김현아는 1969년 포클로버스의 유주용, 윤복희 부부가 주축이 된 코리언 키튼즈의 2기 멤버로 합류해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활동을 하며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대한민국 외, 특히 동남아시아와 미국 지역에서 히트를 기록한 최초의 대중가요로 손꼽히는 노래이다.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남자가 여러 여자들의 유혹을 뿌리치고, 사랑했던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아주 밝고 정직한 내용으로 국내 최초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던 노래가 바로 ‘노란 샤쓰의 사나이’다.
패티 페이지(Patti Page)와 냇 킹 콜(Nat King Cole) 등 동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보컬리스트와 비슷한 허스키 보이스를 상징했던 한명숙의 이 노래는 8군 음악의 시대를 예고한 곡으로 3차례나 재발매된 노래이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학사 가수라는 타이틀을 지닌 가수 최희준과 남성사중창단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블루벨즈의 데뷔앨범이기도 한 스플릿 앨범에 최초로 수록되었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장르적으로 스윙재즈와 컨트리 앤 웨스턴을 뒤섞은 음악으로 1961년 비너스레코드의 창립 작품을 기획 중이던 작곡가 손석우에 의해 완성되었다.
원곡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비트있는 곡이 아닌 느리고 짙은 감성의 블루스 곡이었다. 그래서인지 최초에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당시에 음반 도매상들의 반응은 “가수가 부른 노래가 맞느냐? 목소리가 쉰 것처럼 너무 이상하다.”는 반응으로 무더기 반품사태를 빚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 노래가 커다란 인기를 얻으면서 전국의 남성들이 노란 샤쓰를 즐겨 입는 열풍으로까지 이어졌다. 1962년 내한공연을 진행했던 세계적인 샹송가수 이베트 지로(Yvette Giraud) 역시 이 노래를 한국어로 취입했으며, NHK의 초청으로 일본 동경에서 한명숙의 공연이 열린 이후 일본 가수 마무라 미츠코도 ‘노란 샤스의 사나이’를 정식 취입하기도 했다.
공연 무대는 물론 대중화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던 1960년대 초반에 8군 무대는 가수들에게 꿈의 무대였다. 그 당시 송민영, 이봉조, 패티김, 윤복희, 한명숙, 현미 등 1950년대까지 주로 악단 지휘자와 함께 활동하던 가수들은 8군 무대에서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1964년 동양방송이 문을 열면서 이봉조는 동양악단의 지휘자가 되었고, 자신과 같이 활동하던 가수들을 전속가수의 길로 인도했다. 그 중에는 윤복희와 정훈희, 현미 등 최고의 여가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영화음악의 대부’로 통하는 이봉조는 이들 가운데 현미와 오랜 인연을 지니게 된다.
이봉조가 애지중지하며 현미에게 전달한 ‘밤안개’는 8군 가수들의 전성시대를 견인한 히트곡이자 그녀의 데뷔곡이며, 한국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자리잡고 있다. ‘밤안개’는 1962년 어느 날, 이봉조가 냇 킹 콜의 ‘It's Lonesome Old Town'을 듣고 휴대용 전자 오르간으로 편곡해서 현미에게 전해 주었던 곡이다.
‘밤안개’라고 번안되어 수록된 10인치 음반에는 각 면마다 4곡씩 8곡이 수록되어 있었다. 손석우가 창작한 5곡 외에 일본에서 귀국하며 최초의 창작곡을 선사한 길옥윤의 ‘내 사랑아’, 그리고 이봉조가 편곡한 ‘밤안개’와 ‘슬픈 거리를’이 추가되어 있다.
앨범 녹음을 마친 현미는 한명숙 등과 함께 제주도 공연 길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현지에서 공연비를 사기당하면서 2주일간 현지에 머무르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녀의 데뷔앨범은 열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느 곳을 가도 ‘밤안개’가 울려 퍼지고 있었던 것.
인기를 실감한 소속사는 ‘당신의 행복을 빌겠어요’를 메인 넘버로 내세웠던 기존 초반의 타이틀곡을 ‘밤안개’로 수정해서 재반을 내놓았고, 이 앨범은 순식간에 5만장이 넘게 팔려나가며 대박을 터트리게 되었다.
‘밤안개’, 이 한곡을 통해서 현미는 하루아침에 신데렐라가 되었고, 이봉조는 대중가요 사상 역사적인 작곡가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또 그렇게 깊어갔으며, 현미의 현재는 인연에 대한 회환과 그리움으로 번져 있는 듯 하다.
풍류객 현인은 성악을 전공한 그답게 기존 가수들의 창법과 다른 특유의 떨림과 호탕한 발성법이 특징이다. 그의 창법은 한 때 어린 아이들까지 흉내를 내는 등 전국민들에게 회자되기도 했었다. 부산 영도 출신으로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면서 가수로 성공한 현인은 이국적인 외모와 함께 5개 국어에 능통한 인텔리 가수였다.
현인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더불어 민족의 애환을 어루만지는 대중가요는 물론 월드 뮤직을 최초로 이 땅에 수혈했던 국민가수로 기억된다. 스포츠와 음악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학창시절 밴드부에서 일본의 대중가요나 미국의 포크 송을 트럼펫으로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우에노 음악 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그는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클래식 음악 이론보다 미국의 재즈나 프랑스의 샹송을 즐겨 들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 각국의 대중가요가 크게 유행하던 때였으며, 이러한 환경을 연인은 충분히 활용했다.
방송국에 드나들며 각국의 최신 음악 정보나 악보를 구해 열심히 익혔으며, 대중가요와 월드뮤직의 조화를 위해 무던한 노력을 더했다. 지금도 애창되는 라틴송 ‘베사메무초’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직접 작곡한 탱고 리듬의 ‘서울야곡’이 그렇듯 현인은 50~60년대에 각국의 노래를 한국대중에게 수혈했던 이 방면의 선구자다. 도미도레코드에서 10인치 LP로 발표된 ‘현인 샨숑(샹송)집 1집’은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물이다.
1960년대 대중음악의 특징 중 하나는 오디오의 급성장을 들 수 있다. 유성반 시대에서 본격적인 LP 레코드 시대로 전환하는 새로운 물결이 1958년부터 시작되었다. 라디오 전파 역시 AM에서 FM이라는 보다 좋은 음질로 전환했다.
남성중창단의 등장은 멜로디보다 화성을 중시하는 당시의 변화를 의미한다. 또한 1960년대 대중가요는 21세기 현재의 대중음악계의 모습과 여러 부분에서 닮은 점이 많다. 특히 해외 진출과 남성 중창단의 활약적인 면에서 이 점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브라운 아이드 소울과 SG 워너비 등 3~4인조의 중창단이 크게 인기를 얻었던 21세기와 비슷하게 1960년대에는 남성 사중창단의 최대 전성기로 기록되고 있다. 더해서 최희준과 위키리 등이 모여서 결성된 포 클로버스와 같이 대형 가수들이 하나의 그룹 안에서 공존하거나, 활동 이후에는 대표적인 솔로 가수로 진화하는 등의 비슷한 사례가 꽤 된다.
1960년대 남성 사중창단은 블루벨즈와 멜로톤쿼텟, 쟈니 브라더스, 봉봉 사중창단, 아리랑 브라더스, 마일스톤즈 순으로 연이어 등장했으며, 이들은 모두 어김없이 히트와 큰 인기를 동시에 누렸다. 특히 블루벨즈와 쟈니 브라더스, 봉봉 사중창단의 삼각 인기경쟁은 세금을 얼마나 냈느냐를 놓고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치열했다.
남성 중창단의 흐름은 이후 1970년대를 맞이하면서 트윈폴리오와 코코 브라더스, 투에이스 등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남성 그룹과 뚜아에무아, 라나에로스포처럼 혼성 듀엣의 등장으로 자연스럽게 번져갔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며 아침저녁으로 스피커를 통해 학교와 동네 마다 울려 퍼졌던 대표적인 건전가요인 ‘새마을노래’를 부른 이들이 바로 블루벨즈다. 블루벨즈가 활동하던 당시 건전가요의 보급은 국가 정책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진행되던 개혁운동이었다.
이 ‘건전가요 부르기 운동’에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참여했던 그룹 역시 블루벨즈였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검은장갑’, ‘정든 그 노래’, ‘그리운 고향’, ‘냉면’, ‘즐거운 잔치날’등은 건전가요에만 중심을 잡지 않았던 블루벨즈의 히트곡들이다.
또한 60년대 서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를 많이 불렀던 블루벨즈의 ‘열두 냥짜리 인생’도 드라마의 주제가다. 엄밀히 ‘열두 냥짜리 인생’은 노동자들에 의해 구전으로 전해지던 노래로써 극작가 김희창이 채보하고 개사해서 드라마 주제가로 사용한 것이다.
또한 ‘열두 냥짜리 인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아카펠라 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블루벨즈의 결성은 작곡가 손석우의 기획으로 시작되었다. 손석우는 1960년대 세계 대중음악의 흐름을 주도했던 미국에서는 남성 보컬 그룹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국내에서도 남성합창단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을 갖았다고 한다.
그는 에임스 브라더스(Ames Brothers)를 롤모델로 KBS전속 신인가수였던 서양훈과 서울 음대생으로 극장 쇼 무대의 가수로 활약했던 현양, 그리고 현양의 대구 계성고 동창인 무역회사원 김천악, 신인가수 박일호, 이렇게 4명으로 구성된 남성 보컬 팀을 구성했다. 그룹명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맑고 희망차게 음악세계를 펼치라’는 의미와 스코틀랜드 지방에 서식하는 ‘젊음을 상징하는 꽃’ 이름에서 착안해서 ‘푸른 종’, 즉 ‘블루벨즈’로 손석우가 직접 작명했다.
그러나 블루벨즈가 처음 대중 앞에 등장했을 때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블루벨즈의 노래가 방송을 타고 흘러나오자 “사내들이 군가나 명곡을 불러야지 유행가를 합창으로 불러도 괜찮은 것이냐?”, “사람 웃기는 짓”이라는 강한 거부반응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찰나 블루벨즈는 1960년 3월, 국도극장의 쇼 무대에 서게 되었다.
멤버들은 무대복으로 검정 턱시도를 입고 잔뜩 긴장한 채 나란히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남성사중창단의 등장은 그 자체로 진풍경이었다. 그러나 이 날 무대는 성공적이었고, 이들은 곧 자신들만의 팬층을 형성하게 된다.
당시 블루벨즈의 팬들은 대부분 교육수준이 높은 엘리트층의 여성들이었다. 블루벨즈는 전성기를 훨씬 지난 1987년에 오리지널 멤버인 박일호, 서양훈, 김천악, 현양을 멤버로 재결성해서 기념 음반 [블루벨즈/내 인생 후회는 없지만]을 발표하기도 했다.
인기 TV프로그램인 ‘전국노래자랑’의 초대 MC이자, 유명 가수였던 위키리의 사망 소식으로 2015년 2월에 다시금 회자되었던 그룹 포 클로버스는 1963년에 결성된 4인조 보컬 합창단이자 최초의 노래 동아리였다.
이들의 결성은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그 흐름을 연장하게 되는 음악동아리 ‘청개구리’와 ‘맷돌’, ‘참새를 태운 잠수함’의 등장을 가능하게 만든 기폭제였다. 또한 트로트 일색으로 흐르던 1960년대 초반, 여러 장르와 형식을 파괴한 새로운 시스템이 도용되기 시작한 대중가요의 새로운 개척의 시기에 이들은 멜로디와 화음의 전면에 내세우며 성공을 거둔 그룹이었다.
포 클로버스는 최초 보컬 그룹의 결성을 염두에 두고 모였지만, 멤버 모두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중창단 결성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노래모임으로 의기투합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최희준과 유주용, 박형준, 위키리로 구성되었던 포 클로버스는 멤버 전원이 학사 출신이라는 포인트를 지닌 매력적인 조합으로 60년대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부여하는데 큰 공헌을 남겼다.
냇 킹 콜의 목소리를 흉내를 내며 인기를 모았던 최희준과 ‘한국의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라는 찬사를 받았던 유주용, 페리 코모(Perry Como)의 미성을 닮은 박형준, 바비 다린(Bobby Darin)을 연상시킨 위키리 등 유명 팝가수와 빗댄 마케팅 역시 성공적이었던 그룹 포 클로버스는 블루벨즈와 함께 에임스 브라더스를 답습한 그룹으로도 알려졌었다.
1963년 대한극장에서 펼쳐졌던 패티 페이지의 내한공연 당시에는 한국가수를 대표해서 찬조 출연했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던 포 클로버스는 2장의 음반을 남겼다. 신세기 레코드에서 발매된 1964년 [포 클로버스와 본본 사중창단]과 1967년 [별빛 속의 러브레터]다.
이 음반들은 모두 구하기 힘든 희귀음반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 수준의 음악성을 담보한 명반으로 기록되고 있다. 특히 1집 앨범은 동시대의 남성중창단의 인기를 함께 이끌었던 봉봉사중창단과의 스플릿 음반으로 총 12곡이 수록된 이 음반의 타이틀곡은 위키리가 부른 '저녁 한때의 목장 풍경'이다.
1면은 포 클로버스 멤버 4명이 부른 6곡이 자리하고 있으며, 2면은 '까만 눈동자의 그 아가씨' 등 봉봉사중창단의 노래 6곡이 수록되어 있다.
쟈나 브라더스는 아름다운 화음뿐만 아니라 전문 무용수를 뺨치는 율동까지 곁들인 경쾌한 무대 매너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인기 그룹이었다. 쟈니 브라더스는 예그린 악단의 멤버를 중심으로 결성된 그룹으로 1962년 새롭게 개국한 동아방송 노래자랑 연말결선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데뷔했다.
그룹 이름이 없던 이들은 자신들의 지도해준 전석환의 별명 ‘쟈니’를 따서 쟈니 브라더스로 이름을 정하고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1962년 MBC가 주최한 동대문운동장의 ‘5ㆍ16혁명 1주년 기념 콩쿠르대회’는 ‘쟈니 브라더스’라는 공식이름으로 대중들 앞에, 선 첫 무대였다. ‘황화의 골짜기’와 흑인 영가를 부르는 신출내기 보컬그룹의 흥겨운 무대에 대상의 영예가 안겨지며 수많은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63년 동아방송 중창 콩쿠르에서도 최우수상의 영예를 얻어냈다. 쟈니 브라더스의 전속무대는 워커힐 호텔 무대로, 무대가 돌아가는 회전기능이 있는 최첨단 시설을 자랑했다. 이하 내용은 멤버들의 회고에 의한 당시 무대의 풍경이다.
“워커힐 무대에 처음 선 날, 미처 노래 가사를 외우질 못했어요. 가사를 쪽지에 써서 마이크 앞에 붙여놓고 컨닝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조종실에서 뭘 잘못했는지 갑자기 마이크가 밑으로 슬슬 내려가더군요. 그래서 저희 4명도 마이크를 따라 내려가면서 결국 바닥에 엎드려서 노래를 하게 됐죠. 관객들은 저희가 웃기려고 일부러 그러는 줄 알고 박장대소 하더라고요.” 쟈니 브라더스의 인기는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마포 사는 황부자’에 이어 영화주제가 ‘빨간 마후라’가 공전의 히트를 하며 정상의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영화 ‘빨간 마후라’는 공군 전투기가 하늘을 나는 장면과 시원한 활주로, 빨간 머플러가 컬러 필름으로 표현돼 관객을 압도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300만 명이었는데 서울 명보극장에서만 25만 명을 동원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
영화와 더불어 쟈니 브라더스가 부른 주제가는 동남아 및 일본에까지 소개된 최초의 한국 대중가요로 평가된다. 이 노래는 공군의 요청으로 반나절 만에 급조되어 완성된 노래지만, 여전히 공군을 상징하는 노래로 남아있다
‘빨간마후라’는 50년이 지난 현재까지 대만 공군가로 불리고 있으며, 대만 사람들은 이 노래를 자국의 군가로 알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리퀘스트를 잇고 있다. ‘방앗간 집 둘째 딸’, ‘니가 잘나 일색이냐’, ‘아빠의 청춘’ 등 히트 퍼레이드로 황금기를 누렸던 쟈니 브라더스는 인기 최정상이던 1968년 TBC ‘쇼쇼쇼’에서 고별 공연을 갖고 해체했다.
1962년 7월 7일에 결성된 봉봉 사중창단의 오리지널 멤버는 예그린 악단이 해체되면서 한국민속가극단에 함께 입단한 김성진, 이계현, 김유생, 현삼열 등 4명이다. 봉봉 사중창단의 초기 음악은 가난과 전쟁의 잿더미에서 우울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보다 도시 젊은이의 밝은 삶을 담은 ’꽃집의 아가씨’, ‘사랑을 하면 예뻐져요’와 같은 노래처럼 박력있고 명랑한 분위기를 띄고 있었다.
이후 봉봉 사중창단은 노래는 물론 직접 연주하는 보컬그룹으로 거듭나면서 ‘한국의 밀즈 브라더스(Mills Brothers)’로 불리기도 했다. 밝고 건전한 노래들로 유독 상복이 많았던 봉봉 사충단은 공보부의 무궁화가요대상, 동양방송의 방송가요대상, KBS의 고운노래대상, 서울신문의 한국문화대상 등 숱한 가요 관련 상들을 모조리 휩쓸며 최고 인기 보컬 그룹으로 군림했었다.
특히 봉봉 사중창단을 히트 퍼레이드로 이끈 신호탄은 1966년에 발표했던 ‘등대지기’로 밝고 경쾌한 풍의 노래를 많이 부른 봉봉 사중창단 특유의 스타일과는 달리 포크송에 가까운 편안한 노래였다. 인기는 있었지만 특별히 큰 히트곡이 없었던 봉봉 사중창단은 ‘등대지기’를 시작으로 점차 히트곡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게 된다.
‘등대지기’와 ‘육군 김일병’이 수록된 봉봉사중창단의 앨범의 B면은 ‘울릉도 트위스트’는 물론 ‘제니의 추억’, ‘남성금지구역’ 등 이씨스터즈의 6곡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씨스터즈에게 1966년은 ‘울릉도 트위스트’,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 ‘목석같은 사나이’, ‘남성금지구역’을 연달아 히트시킨 해였으며, 이들의 최대 전성기로 기억되고 있다.
‘울릉도 트위스트’는 이들이 60년대를 대표하는 걸그룹으로 각인시킨 최고의 명곡이자,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가요의 고전이다. 맑고 발랄한 고음역의 화음을 구사했던 이씨스터즈는 1966년 TBC 방송가요대상에서 중창단상을 수상한 것을 이어서 제1회 KBS 고운노래대상 시상식에서도 금상을 차지했다.
이후 멤버들의 결혼과 더불어 리드보컬 이정자가 팀을 탈퇴해 새로운 멤버 김상미를 영입하는 침체기를 겪은 후, 봉봉 사중창단과 함께 스필릿 음반을 발표했다.
1967년 결성된 남성 4인조 마일스톤은 국내 최초의 고교생 포크 보컬그룹이다. 또한 팀의 리더였던 이규대는 혼성듀엣 바블껌의 리더였다. 사촌형들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받은 이규대는 1967년 배재고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진명여고 강당에서 열렸던 문학의 밤 행사에서 중동고의 3중창단이 들려준 매력적이고 환상적인 화음에 마음을 빼앗긴 이규대는 담임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서 친구들과 4중창단을 결성하게 된다. 팀 이름은 ’소년의 목소리‘라는 뜻의 ‘보이스 보이스’로 정했다.
오리지널 멤버는 하이테너 이규대, 테너 홍선표, 바리톤 김청배, 베이스 이태영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처음에 음악실에 모여서 ‘내 주를 가까이’와 ‘오라오라 내게오라’ 등 주로 찬송가를 위주로 연습을 했다. 그리고 보이스 보이스의 첫 무대는 학교의 채플시간이었고, 이들의 합창은 단숨에 전교생을 사로잡고 말았다.
고등학교 2학년에 이르러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정표’라는 의미의 마일스톤으로 팀명을 바꾼 이후 유명 포크송을 4중창에 맞춰 편곡을 해서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생이 악기를 연주하며 직접 노래하는 팀은 마일스톤이 유일했다.
팀의 리더였던 이규대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고교 2학년 시절 처음 만났던 양희은의 친구이자 경기여고생이었던 조연구와 다시 한 번 조우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연가’와 ‘짝사랑’을 빅히트시킨 버블껌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규대의 자리에 조동호를 맞이한 마일스톤은 홍대 미대를 나온 조승구가 재킷을 디자인한 앨범에 바블껌과 함께 데뷔를 갖게 되었다. 버블껌이 6곡을, 마일스톤이 5곡을 수록한 이 앨범의 수록곡 가운데 마일스톤의 ‘나그네’는 박목월 시인의 시에 백명기가 곡을 입힌 노래가 담겨 있다.
박목월 시인의 사용 동의를 얻지 못한 이 곡으로 인해 이 앨범은 발매되지 못한 채 창고에 쌓이고 말았다. 때문에 이 앨범은 현재 백만원을 호가하는 초희귀 음반으로 거래되고 있다. 한편 이규대와 조연구의 딸은 ‘내 이름 예솔이’의 주인공이자, 중요 무형 문화재 5호 판소리(춘향가, 적벽가)의 이수자, 그리고 아마도이자람밴드의 리더인 이자람이다.
국내 최초의 금지곡은 1933년 5월 조선총독부가 관보에 게시한 ‘축음기레코드 취체규칙’에 따라서 그 해 6월에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였던 채동원의 ‘아리랑’을 비롯한 4장의 음반이었다.
1960년대는 물론 1975년 ‘긴급조치 9호’에 의해 대중가요가 금지곡으로 묶인 사례는 적지 않다. 1964년에 발표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창법이 ‘왜색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던 노래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북한에서 간첩을 내려 보낼 때 고스톱과 ‘동백아가씨’를 꼭 가르쳐서 내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한국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였다.
한국 트로트 음악을 완성시켰다는 평가는 받는 이미자는 ‘동백아가씨’ 외에도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까지 모두 왜색, 비탄조 등의 사유로 금지되면서 한때 가수 생명까지 위협받을 정도였다. 이미자는 500편에 가까운 영화, TV드라마,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를 취입한 한국 대중가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후 평범한 가수로 인식되던 이미자는 1964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취입하면서 최고 가수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원래 ‘동백아가씨’를 부를 가수로 내정된 가수는 당대의 인기가수였던 최숙자였다.
미도파 레코드에서 막 독립했던 신생회사 지구레코드는 높은 개런티가 부담스러워서 작곡가 백영호에게 긴히 요청을 해서 저렴한 개런티의 이미자를 대타로 나서게 했던 것이다. 1964년 여름, 스카라 극장 앞 목욕탕 건물 2층 녹음실에는 찜통더위를 피하기 위해 낡은 선풍기 한 대 앞에 둘째를 임신한 만삭의 현미와 이미자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 때 현미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이미자는 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의 ‘동백 아가씨’를 녹음했고, 이 두 곡은 두 사람 모두에게 대표적인 노래로 자리하고 만다. 현미와 함께 이미자의 노래까지 동반 대박을 터트리자 ‘만삭에 녹음을 하면 대박이 난다’는 풍문까지 돌 정도였다.
특히 ‘동백아가씨’는 35주 동안 인기차트 1위를 점령하는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세웠다. 연주비마저 없어서 작곡가 박시춘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을 마쳤던 신생레코드사 지구레코드도 동시에 메이저급 회사로 상승하게 되었다.
작곡가 백영호는 생전에 “그땐 술집에서 술값대신 동백아가씨 음반을 한 장 구해달라고 했을 정도였다.”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대단한 열풍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960년대는 대중음악의 활성화가 확실했던 만큼, 최초의 의미를 갖는 음반과 가수들이 넘쳐났다. 장르적으로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은 신중현이 결성했던 록밴드 에드포가 1964년 12월에 발표한 [에드훠의 첫 앨범]으로 공식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5개월 앞서 발표된 키보이스의 데뷔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가 발견되면서 상황은 복잡해졌다. 사실 그룹의 결성 시기가 가장 빠른 밴드는 미8군 장교클럽 하우스밴드로 활동했던 코끼리 브라더스다. 비슷한 시기에 결성된 밴드로 김치스와 바보스도 있지만, 이들은 가수로서 가장 중요한 정규 앨범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초 논쟁에서 제외된다.
매시기로 보자면 키보이스의 데뷔앨범을 국내 최초의 록밴드 음반으로 인증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에드포의 첫 앨범을 한국 최초의 락 앨범으로 인정하려는 분위기는 수록곡 모두가 신중현의 창작곡이고, 키보이스는 히트 팝송을 번안하거나 트로트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김영광의 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로 밴드 음악이 담긴 앨범으로 국한되는 이 음반의 초반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1963년 결성해서 8군 무대와 일반 무대를 고르게 오가며 활동했던 키보이스는 많은 뮤지션과 가수를 배출한 그룹이다.
초기 키보이스는 영미 팝 음악을 번안해서 주로 불렀던 이유로 ‘한국의 비틀즈(Beatles)’로 불렸었다. 이들이 현재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했을 때는 광화문까지 줄을 설 정도의 인기를 누렸다.
윤항기를 중심으로 시작된 키보이스는 미8군 무대에서 송영란과 함께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패키지쇼를 펼치며 초기에 활동했다. 종로의 디쉐너와 무교동의 세시봉, 아카데미 등 음악감상실에서 활동하던 이들은 처음에 악기를 연주하는 중창단으로 출발했지만, 이전 중창단과 달리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본격적인 밴드로 진화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그녀의 입술은 달콤해/캥가루 사냥]이라는 첫 독집 앨범으로 이어졌다. 대부분이 번안곡이었고, 작곡가 김영광의 작품이 창작곡으로 자리했던 사실은 애드포와 함께 후세 평가에서 의견이 갈리는 사유이기도 하다.
흔히 1기 키보이스로 분류되는 시절의 멤버는 차중락(보컬), 차도균(베이스 기타),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으로 구성되었고, 1969년에 코끼리 브라더스 출신의 장영과 박명수, 조영조를 중심으로 전개되면서 ‘제1회 보컬그룹 경연대회’에서 ‘최고상’과 ‘연주상’을 차지했다.
조용조를 축으로 재정비된 키보이스는 작곡가 김희갑과 김영광의 조력으로 ‘바닷가의 추억’과 ‘해변으로 가요’, ‘님 떠날 시간’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1969년 탈퇴했던 차중락과 차도균은 솔로가수로, 윤항기와 김홍탁은 각각 키브라더스와 히파이브의 리더로 활동했다.
60년대부터 지방 소도시에까지 문을 열었던 다방의 인기는 70년대에 이르러서 음악다방으로 변형되었다. 여러 음악이 플레이되던 음악다방 최고의 리퀘스트는 역시나 ‘커피 한 잔’이었었다.
펄시스터즈 최고의 히트곡인 ‘커피 한 잔’은 신중현이 이끌던 애드포가 1964년 발표한 첫 앨범에서 명보컬리스트 서정길의 목소리로 발표되었던 노래 ‘내 속을 태우는 구려’를 원곡으로 하는 넘버이다.
이처럼 신중현은 자신이 부르거나, 최초 가수가 부른 노래가 제대로 히트를 기록하지 못하면 시대와 상관없이 다른 가수에게 그들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부르게 하거나 버전을 바꿔 부르게 하면서 기어이 히트를 기록하게 만드는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예를 더해서 신중현과 더 맨, 엽전들, 뮤직파워에서 연달아 연주를 했고, 김정미 역시 불렀던 ‘아름다운 강산’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창작 락 앨범은 신중현이 결성시킨 락밴드 에드포가 1964년 12월에 발표한 앨범으로 KBS TV에 출연한 멤버들의 스튜디오 연주 사진을 자켓으로 사용한 작품이다. 최초 발표 당시 그다지 주목을 이끌지 못했던 이 음반은 리드보컬 서정길의 독집으로 커버가 수정되어서 재발매되는 등 복잡한 절차를 지니고 있다.
녹음은 일반 가정집을 이용했던 장충녹음실의 카펫이 깔린 응접실에서 진행되었으며, 정식 녹음장비가 아닌 미군의 휴대용 릴 테이프 녹음기에 길게 연결되어진 한 개의 마이크 주변에 모여서 동시녹음으로 진행되었다.
‘비속의 여인’ 등 14곡의 녹음을 하루 만에 끝낸 이 앨범은 90년대 말, 서울 청계천에서 “일본인이 400만원에 사갔다”는 믿기 힘든 풍문까지 나돌 정도로 희귀 아이템이기도 하다. 이 앨범의 수록곡 중 ‘천사도 사랑할까요’, ‘굳나잇 등불을 끕니다’를 통해서 흥미롭게 확인되는 사실은 신중현사단의 1호 여가수는 펄시스터즈나 김추자가 아닌 장미화라는 점이다.
시대를 초월해서 회자되고 있는 이 앨범은 히키신 연주집과 더불어 300장 한정본 박스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한국대중가요 역사에서 포크의 대중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뮤지션은 트윈폴리오와 한대수를 손꼽는다. 그러나 이보다 4년 앞서 발표된 국내 최초의 통기타 음반이 존재한다. 1962년 ‘5ㆍ16 군사혁명 1주년기념 콩쿨대회’에서 만난 한양대생 서수남과 중앙대생 하청일을 주축으로 성악가 석우장과 천정팔의 라인업으로 구성된 아리랑 브라더스가 그 주인공이다.
대도레코드의 녹음기사 이청은 모든 직원이 퇴근한 밤에 아리랑 브라더스의 멤버들을 마장동 스튜디오로 몰래 불러서 약 한 달간 도둑 녹음을 강행했다. 그리고 1964년 라 스카라(LA SCALA) 레코드사를 창립해서 초반으로 200장을 제작해서 언론과 음악 관계자들에게 배포해서 반응을 살폈다. 타
틀곡이었던 ‘우리 애인은 미쓰 얌체’보다 ‘동물농장’과 ‘웃어주세요(도미니크)’가 의외로 더 큰 반응을 보이면서 타이틀곡을 ‘동물농장’으로 변경해서 급히 300여장을 추가로 제작했다.
이 앨범의 자켓 디자인은 수작업으로 그린 의자가 다소 조악하게 담겨져 있는데, 이는 자켓 디자인 파일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서수남은 아리랑 브라더스와 함께 8군 그랜드 올 오프리쇼에서 활동한 직후인 1968년 현인의 친딸인 한혜정과 함께 혼성 컨트리 보컬 듀오 앨범을 내고 활동을 이어 나갔는데, 이 앨범 역시 아리랑 브라더스의 앨범과 함께 희귀 앨범으로 손꼽힌다.
[출처 : 벅스 뮤직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