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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 신라 선덕왕 3년 서기 634년에 창건하여 국보 30호로 지정된 모전 3층석탑 을 비롯하여 화쟁국사비 비석대 ,당간지주와 웃물인 삼룡 변어정이 유물로 남아닜다 .2,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담장을 마주하고 있어 교통편은 황룡사지터와 같다
모전석탑의 높이9,3m 임진왜란때 파괴되것 일제시대 수리하여 오늘날 현재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한다 , 기단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된 동물1마리씩 네모퉁이에 배치고 하고 있는데 동해을 지키는 물개가 내륙에는 사자상을 세워 분황사를 지키고 있는 모양세로 이루고 있다
절의 좌전 에 새겨져 있는 천수대비 관음도<<天壽大妃觀音圖>> 의 벽화는 이시대의 신라명공 솔거가 그렸다고삼국사기 열전 솔거전에서 전하고 있다
이그림이 매우 영험하여 눈먼여자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서 전한다 . 이벽화도는 경북유형 문화제 제97호로 지정 되어 보존 되고 있다 한다
분황사는 원효가 머물면서 삼매경소를 지었던 유서깊은 절이다,
원효는 처음 진덕왕 4년 서기 650년 당나라 고승 현장이 인도유학 하고 돌아온 선유식을 배우기 위하여 의상과 함께 당에 유학차 떠났으나 가는 도중에 고구려의 순찰병에 걸려서 첩자에 오인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으나 얼마지나 오해가 풀리어 신라로 귀국하였다 그런지 10년후인 신라 태종 7년 경신,서기 660년에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차 길을 떠났으나 원효는 잠을 청하던 토굴에서 밤에 해갈이 심하여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먹고 달게 잠을 잤으나 아침에 일어나 물을 찾으니 해골에 담긴 물이라
순간 구역질을 하고 토해내고 말하기를 마음이 일어난즉 여러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지니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닌것을
삼계는 오직 마음뿐인데 당나라로 가나 신라로 가나 그마음이 그마음인것을
그리하여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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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혼자 배를타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종남산에
들어가 중국의 화엄종2대조사 지엄화상에게 수업하였다
세상에서 의상을 가르켜 금산보개의 현신이라 한다
그의 도계는 오진,지통. 표훈, 진정,진장,도융. 양원,상원 ,능인, 의적등 10대덕을 영수로 하는데 모두 아성있어서 각기 전( 傳)이 있다
오진은 하기산 골암사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이면 팔을 뻗어 부석사의 석실을 캤다. 지통은 추동기를 지었는데 대개 친히 가르침을 받았음으로 오묘한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히 불국사에 있으면서 천궁을 왕래 하였다
의상이 황복사에 머물러 있을때 신도들과 탑을 돌았는데 매양 허공을 딥고 올라 갔으며 계단을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탑은 사다리가 설치 되지 않았다, 그 신도들은 계단에서 3자나 떨어져 공중을 밟고 돌았는데 의상이 이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세상사람들이 이를 보면 괴이하게 여길 것이므로 세상에 모범을 보일수 없다고 하였다 나머지는 최우(崔侯)가 지은 본전과 같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험한길 헤치고 연진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니
지상사의 문 열리고 서진으로 맞이 하였네
빛나는 화엄을 우리나라에 심으니
종남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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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유학차 도중에서 토굴에서 잠을 청하다 해갈이 심하여 해골 바기지 물을 먹고 모든진리의 깨달음은 내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을 포기하고 분황사에 머물러서 노래를 지어 태종의 홀로된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아들 설총을 낳았는데 설총은 신라 10현의 1사람이 되었다 그는 당시 향가를 집대성 하여 이두를 만들었는데 아쉅게도 상용되지 못했다 한다 그의 저서로 삼국사기 열전편에 화황계가 소개 되어 있음을 본다
삼국사기 열전편 설총전에서 말한다
설총의 자는 총지이며 조부는 내마 남달이다, 아버지는 원효인데 처음에 상문이 되어 불서에 해박하더니 다시 본래대로 돌아와 스스로 소성거사라 불렀다. 총의 성품이 밝고 예민하여 나면서 부터 도술을 알았다
방언으로서 구경을 해독하고 후생을 가르켰으니 지금까지 학자들은 종으로 삼고 있다. 또 글짓기에 능하였으며 세상에 전해진것은 없고 다만 지금 남쪽땅에 혹 총이 지은 비병이 있는데 문자의 결락으로 읽을수 없음므로 그것이 무엇인지 알수 없다 ,,,,,,,,,,,,,,,,
&., 신문대왕시대 5월 어느날 신무왕이 총을 청하여 나를 위하여 총을 불러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진술하지 않겠소 하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
화황이 처음으로 들어왔을때 행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장막으로 보호하면 삼춘을 만나 곱게 피니 백화가 능가하고 홀로 빼어나니 꽃들이 와서 임금을 배알하지 않는이가 없었으니 오직 미치지 않을까 근심 하였습니다 .
갑자기 한가인이 붉은 얼굴에 옥같은이 깨끗한 옷으로 단장하고 헤매여 와서 침착하게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첩은 눈처럼 흰모래밭을 밟고 겨울처럼 맑은바다를 대하고 봄비로 목욕하여 때를 씻으며 청풍을 맞고 지내는데 이름은 장미라 합니다 . 왕의 미덕을 듣고 장막속에 모시려 하는데 왕은 저를 용납하시 겠습니까 하였습니다
또 한장부가 배옷에 가죽띄을 띠고 백발을 머리에 이고 지팡이로 짚고 초라한 걸음으로 구부리고 나와 말하기를 저는 경성밖의 큰길가에 사는데
아래는 창황들 경치에 임하고 우뚝한 산빛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름은 백두옹이라 합니다 . 절념컨데 좌우의 공급이 비록 넉넉하여 고량으로서 배를 채우고 다주로 정신을 맑게 한다 하나 상자속의 저장으로는 보기할 좋은약과 독을 제거하는 극약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비록 실과 삼이 있더라도 가령풀로 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무릎 여러군다들이 결핍을 대비 않음이 없다고 하는데 왕께서 그렇게 할 의사가 있습니까 하였습니다
어떤이가 또 말하기를 둘이 왔는데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렵니까 하니
화황이 말하기를 장부의 말도 역시 도리가 있으나 미인을 얻기 어려우니 장차 어찌 할것인가 하였습니다 , 장부는 나아가 말하기를 저는 왕이 총명하여 의리를 아실것으로 믿기 때문에 왔는데 지금 보니 아닙니다
무릇 임금된자가 간사하고 아첨하는자를 가까히 하고 정직한자를 멀리 하지 않는이가 적습니다 .,,,, , 예로부터 이와 같는데 어찌 하오리까 하자
화왕이 말하기를 내가 잘못이다 내가 잘못이다 하였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안색을 고치고 말하기를 그대의 우화는
진실로 깊은 뜻이 있으니 글로서 임금된자의 계를 삼게 하시오 하였다
드디어 총을 고관으로 탁등 시켰다
일본국의 진인이 신라의 사신 설판관에게 준 시서 에 이르기를 일찍히 원효거사가 지은 << 금강삼매론>> 을 그를 뵙지 못한것을 깊히 한하였는데
듣자니 신라국 사신 설이 바로 거사의 포손이라 하니 비록 그 조부를 빕지는 못하였으나 그자손을 만난것을 기뻐하여 시를 지어 주는 것이다 하였다
그 시는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다만 그자손의 이름과 자는 알수없다
고려 현종 13년 천희5년 신유에 이르러 홍유후로 추증 하였다
원효의 큰업적은 당시에 귀족중심의 소승불교을 모든중생도 선을 딱아 대승이 될수 있다점을 강조 하고 불교를 대승불교로 승화 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교조 적으로 해석이 중구난방으로 갈라져 있던 불교 통합을 위한 화쟁 사상을 제기 했다 .오늘날에 1967년도 동해의 태종비 유적에서 원효결서 1권을 꺼집어내어 발표한 원효결서 유통되고 있음을 본다
*/ 대승(大乘)의 대(大)는 크다는 뜻으로 만유를 포용하는 우주의 본체이고
승(乘)은 수레 승으로 사람이 물건을 실어 나르듯 우주만물에 진리를 실어 나르는 것을 공용으로 삼기에 기탁을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대승이란 우주만물에 널리 두루한 상주 불변의 본체의 진리로서 외직 나와 영혼과 하느님의 영혼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자만 알수 있는 진승이 곧 대승인바 승만경 ,능마경에서는 여래장 .반야부 계통 경전에서는 공 혹은 대지혜이며 법화경에서 일승 ,
유마경에서는 진해탈자로 표현 되고 있다
삼룡변어정/ 전설에 따르면 웃물에 세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7년 서기 775년에 당나라 사신이 이 뭇물에 사는 용을 세마리의 물고기를 변하게 하여 잡아가 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서 빼앗아 왔다 한다 ,
웃물의 겉모양이 팔각이고 내부는 원통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외부의 팔각 모양은 부처를 가르키는 팔정도를 말하고 내부의 원통은 대승불교의 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3,화쟁국사 비편/ 웃물속에 초라하게 남아 있는 비대좌는 고려시대 숙종6년 1107년 8월에 숙종이 원효대사에게 대성 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웠다 그후 방치된것을 조선후기 추사 김정희가 이것을 밝혀내고
차신라 화쟁국사 지비적(此新羅化諍國師志碑積)으로 음각으로 조각해 넣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한다
&/ 비대는 직육면체이고 상면은 비신을 삽입하는 홈이 파져 있는 모습이다
재물일도 (宰物一道)원효선사가 7세기 당시 신라불교를 화쟁시키기 위해 쓴것이 아니라 후천대개백을 앞둔 20세기 말 세계십대종교 이쟁을 재물일도로 통일 하려는 원효성사의 뜻이 나타나있는 성서이다
원효의 금강삼매론에서 말하기를 통합해서
논하면 일관이요 전개해서 논하면 십문이다
또한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蔬) 에서 말하기를 전개해도 번거로워
지는것이 아니요 합친다고 좁아지는 것은 아니다 라고 설하고 있음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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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32세 풍월주 신공조 에서 말한다
&/. 진공의 아들 신공이 대를 이었는 신공은 홈돌의 조카로서 또한 홍원의 딸을 화주로 삼았다
수년내에 낭정은 한결같이 삼간의 손으로 들어갔다. 홈돌의 아첨으로 문명테후를 섬겼다. 이에 그의 딸이 유신공의 외손이므로 태자에게 받쳤다
태자와 모후는 홈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소명태자가 무열제의 명으로 흠운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하였으나 일찍히 죽었다
스스로 소명제주가 되기를 원하였음므로 자의후가 이를 허락하였다 태자와 더불어 모후가 자주 소명궁에 거동하였다,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을 나았다, 후가 이에 소명궁에 명하여 동궁에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총애함이 홈돌딸보다 컸다 ,홈동의 딸이 투기하였다 . 문명태후가 죽자 홈돌등이 스스로 죄가 무서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했다, 게다가 홈둘의 딸이 총애를 읽었다 이에 홈돌등이 모반하였다, 야명궁을 핑계삼아 인명을 옹립하여 하였으나 스스로 왕이 되려 한것이다
문무제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나의 아버지 오기공이 북원으로 부터 들어와 호성장군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자의 황후 명에서 나온것이다
그때 진공이 호성장군으로서 인부를 내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주상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어찌 중요한 직을 가벼히 내어 주겠는가 하면서 물러 서지 않았다 ,대개 적들의 모의가 이처럼 치밀했기 때문이었다 ,제가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 발설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 비밀리에 경외의 군대를 입성시켜 홍돌등이 군사을 동원하여 야명궁과 군관궁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오기공의 심복인 난두가 그모의를 발설하였다, 그위 시위 삼도는 적편에 많이 서 있었다, 자의황후가 걱정 하였다. 이에 순지, 개원 ,당원 원수,용원공 등과 더불어 비밀히 사병을 불러들여 호위하고 삼도의 대감을 모두 파면하여 다스렸다. 홈돌등이 이에 크게 놀라 진격하여 대궁을 포위 하였다
이때 서불한 진복궁이 수병을 이끌고 포위을 깨고 들어와 말하기를 경외의 병력이 크게 이르렀다, 너희들은 적신에 미혹 되었으니 죽음을 면할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때 홈돌등이 그무리를 속여 말하기를 상대등 군관과 각간진복이 제의 밀조를 받아 인명을 즉위시켰다, 하였다 그러나
군관이 움직이지 않았고 진복은 포위를 깨뜨렸음으로 무리들이 의심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오기공이 큰소리로 왕에게 충성할자는 오른쪽,적을 따를자는 왼쪽으로 서라고 선포 하였다 . 그러자 무리중에 오른쪽으로 간자가 많았다, 홈돌등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러 가려고 하였다
오기공등이 병사를 풀어 대파 하였다, 경외의 병력이 또 이르렀다
적은 이에 3간을 사로잡이 바쳤다
반란이 비로소 평정되고 삼도중에 이로써 죽임을 당한자가 많았다
자의 태후가 화랑을 폐지하라고 명하고 오기공으로 하여금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명부에 속하게 하고 직을 주었다 ,그러나 지방의 낭정들은 그대로 있었다 ,실직이 가장 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풍속이 서울로 점점 퍼졌다 중신들은 모두 어래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라하여 후기 화랑 국선제도가 전기화랑를 대신하여 시작되었다 . 전기화랑은 1세위화랑이며 32세 화랑 신공이며 때는 681년 문무왕의 말년이자 신문왕의 초년이 었다 그후 자의태후가 득도한 신문왕 2년6월에 국학을 설립하여 경사의 자제을 입학으로 허락하였다
삼국사기 본기 신무왕조에서 말한다
신문왕 2년봄 정월에 친히 신궁에 제사지내고 대사령을 내렸다 ,여름 4월에 위화부령 2명을 두어 선거 사무를 관장토록 하였다. 5월에 태백성이 달을 범했다, 6월에 국학을 설립하고 경1명을 두었으며
또 공장 부감 1명과 채선감 1명을 두었다
그리 하여 화랑의 풍속은 크게 변하였다
&/. 성덕왕이 즉위 하니 휘는 홍광 이다 본명은 융기였으나 당현종 휘와 같음으로 선천중에 고쳤다( 당서에서는 김지성이라 하였음 ) .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 동복아우다 ,효소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음므로 나라 사람이 세운 것이다. 당의 측천이 효소왕 부음을 듣고 애도식을 거행하여
2일간 조회를 정지 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형의 장군 도독 호를 승습케 하였다
&/., 성덕왕16년 여름 6월에 황룡사 탑에 낙뢰가 있었다, 비로소 누각을 만들었다 ,누각을 만들고 단청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이때 국선에 입학 한 솔거가 처음으로 황룡사 벽에 노송도(老松圖)을 그리고 명공으로
이름이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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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월 15일 양산연합뉴스 최병길 기자의 보도에 의하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서리마을에 이지방에서 활약하는 화가 정연출(61) 화백에 의하여
이 벽화의 풍경으로 그려진 나무에 까치들이 날라와 앉으려다가 부딪쳐
죽어 있는 것을 마을 주민이 거두워 묻어 주었다는
현대판 도로 벽화 노송도이야기가 오늘날에도 와전되어 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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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거는 가난하고 벼슬이 없는 집안의 아들로 아들로서 일찍히 화랑으로 입문하여 그림을 그려 출세하려 하였으나 공부를 제대로 마칠수 없었다
솔거는 밤낮으로 천신에게 기도하여 신의 가르침을 받고자 원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 하였다
그러길 몇해뒤에 꿈속에서 한노인이 나타나서 내가 바로 천제 단군인데
너의 지극정성에 감동되어 너에게 영겁한 붓을 주노라 했다
꿈속에서 깨어나보니 한자루의 붓필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솔거는 신의 응답에 감명해서 단군어전 수천매를 밪낮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그중 제일 근사한것을 뽑아 단군사당에 영정을 뽑아 배열였다
나머지 그림은 모두 마음의 주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솔거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더욱 정진한 결과 명공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 믿거나 말거나
주역과 개천역에서 말한다
어느시대 막론하고 개국시조 임금으로 등극하신 분이 어찌 평범 무사한 인물이엇다고 봐서 되겠는가? ,더욱히 신라때 화가로서 이름높은 솔거가 그의 꿈속에서 단군께서 나타나시어 내가 단군이노라 하는 현몽의 기억을 되살려
단군성령 2천매를 그려 그중 가장 근사한것을 뽑아서 영전에 봉안한 사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는데 그 영정을 나뭇잎을 접어서 대관하고 계신다
,,,,,,
우리조상위엄으로 통일신라시대 찬란한 문화는 당시 세게에 어느시대 불허 할만큼 찬란했고 또한 고려시대 청자기술 하나만으로도 현대과학연구가 무색할정도로 대단한 휼륭한 작품이 아니었던가 ?
이모두가 우리 국조단군의 위대한 혈통을 이어받은 민족혼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이 겠는가 ?
단군이 휼륭하신것은 우리민족의 휼륭함을 말하는 것이다
단군님 계서 끼치신 이땅은 금수강산이며 금수강산에 태어난 우리민족은 무궁화를 사랑한다 ,무궁화는 나무에서 피는 우리나라 꽃이다
우리나라을 사랑하는 뜻은 나무의 꽃을 사랑하는 것으로 비유하게 된다
나무는 역리학적 차원에서 보면 동방민족혼의 상징으로 삼아 타당하면 손색이 없는것이다 ,
무궁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단군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본말 동귀의 뜻임을 알수 있을 것이다 -!!!!-
\삼국사기 열전 솔거전에서 말한다
솔거는 신라사람으로 가난하고 벼슬이 없는 집안에 태어 났으므로 그의 족계의 기록이 없는데 태어나서부터 그림을 잘그렸다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도(老松圖) 그렸는데 줄기가 비늘처럼 주름지고 가지 잎이 꾸불꾸불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들이 왕왕 날아들어 어정거리다가 떨어진곤 하였다, 해가 묵어 퇴색하자 절의 승려가 단청으로 개칠 하였는데 까마귀 참새가 다시 오지 않았다
또 경주 분황사의 觀音 菩薩像圖 . 진주 단속사 維摩像道이 모두가
솔거의 필적으로 전한다 .세상에서 신화(神話)전해 진다
솔거년보 추적/ 신문왕대말년 또는 효소왕초년에 출생 추정
20세 전후 단군영정을 거려서 경사의 주민에 나누어 주어 명공으로 이름을 얻게되고 그공으로 국선에 입학 그림에 전공한 것으로 추정됨
성덕왕 16년 서기 717년 황룡사 노송도를 그리고 화공으로 출세
경덕왕 14년 서기 755년 천수대비 관음 보살도
( 경수태후 만월부인 : 혜공대왕 어머니 영정 추정)를 그림
경덕왕 22년 서기 763년 진주 단속사 유마상도 그림
유마상 대내마 이순의 초상으로 추정
공통적으로 실물과 초상을 그려 영험한 나타남
이후 대성이 불국사을 창건했는데 이모두 진흥왕때 부터 왕과 왕사 등
실물 인물이라고 원효결서는 말하고 있음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흥륜사의 금당 10성에서 말하기를
동벽 서쪽벽에 앉아 이소를 향한것은 아도,염촉,혜숙, 안함 의상이여
동쪽에 않아 이소를 향하고 있는것은 표훈,사파, 원효,혜공, 자장이다 하여
당시 실제 인물을 부처로 빌어 표현하고 있음을 볼때
솔거가 맨처음 기도하여 붓을 얻어 단군영정을 그려 봉안하여 영험한 이름을 드러내고 국학에 입학 20세 전후 황룡사 노송도를 그리고 경덕왕때 천수대비 관음 보살도 . 경덕왕 22년 진주단속사 유마상은 이절의 창건자 이순의 영정을 그린것으로 추정 해봅니다
23년 봄에 왕자 승경을 태자로 세우고 대사령을 내렸다
35년 여름 6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어 신년을 축하하고 토산물을 받쳤다
때에 효성왕이 세자로 있었고 신충은 화랑이 되었다
신충이 국선이 되자 자 왕이 신충을 불러 연회를 베풀고 묻기를
낭이 국선이 되어 사방을 유람하였는데 무슨 특이한 일을 보았는가 하고 물으니 신충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이 남의 웟자리에 있을한데도 겸손하게 낮은자리애 않아 있으니 그중 한가지이여 부유한 사람인데도 의복이 검소 하였으니 그중 두가지 이며 본래 귀한 세력이 있는데도 그 위세를 쓰지 않으니 이것이 세가지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말을 듣고 짐에게 아들이 없으니 동생을 태자로 세웠는데
왕이 신충을 동궁사자(東宮私者)임명하여 세자를 살피게 하였다
효성왕이 동궁으로 있을때 현사 신충과 함깨 궁궐의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자주 두었는데 태자가 바둑을 둘때마마다 번번히 이겼다
침울해 하는 신충을 보고 세자가 말하기를 후일 내가 만약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있다 라고 하니 신충이 일어서서 절을 하였다
36년봄 2월에 사찬 김포질을 신년을 축하하고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받쳤다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성덕이라 하고 이거사 남쪽에 장사 지냈다
효성왕이 즉위하니 휘는 승경이고 성덕왕의 둘째아들 이고 어머니는 소덕황후다 .대 사령을 내렸다,3월에 사정의 승및 좌우의방 부를 좌로 고쳤다
논공행상를 실시하였는데 이찬 정종을 상대등으로 삼고 이찬 의충을 중시로 삼는등 공신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신충을 잊어버리고 상을 주지 않았다 .
신충이 이일이 이지경에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한탄했다
때에 낭도중에 그림을 화가 지망생 솔거<率居>란 자 가 있었는데 말하기를
때를 놓지면 원망해도 소용 없는일이니 지금 대왕이된 세자을 원망하는노래를 지어서 바둑을 뚜던 뜰안의 정자 아래 잣나무에 붙여 보시오
낮말은 새가 알아듣고 밤말은 쥐가 알아듣는다는 속설이 있는데
나무또한 엄연히 살아 숨쉬는 생명체라 알아 듣고 반응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 겠습까 하니 하니 신충이 수긍했다
그리하여 신충이 원망하는 노래를을 지어서 세자와 바둑을 두던 정자아래 잣나무에 붙였다 . 그러자 얼마되지 않아서 싱싱하던 잣나무가 갑자기 말라 버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좌우의 사람을 시켜 조사케 하였더니
조사한 사람이 .그 노래를 찾아 받쳤다 . 왕이 놀라 말하면서 말하기를 만사를 관장 하느라 하마터면 각궁을 잃을번했다 라고 하며 이찬의 작록을 주니 잣나무가 소생하였다. &/. 3년봄 정월에 중시 의충이 죽었으므로 이찬 신충을 중시로 삼았다 하여 이때 이찬의 작록을 준것으로 추정해 본다
그노래는 다음과 같다
대저 잣나무는 가을에 시들지 않듯히
너를 어찌 잊으랴 이르신 우러르 보던 얼굴이 계시온데
달그림자가 옛못의 일렁이는 물결을 원망하듯이
얼굴만 바로보니 세상이 어지러운 지고!
여름5월에 지진이 있었고 가을9월에는 유성이 대미성으로 들어갔다
겨울10월에 당으로 갔던 사찬 포질이 돌아왔다.
효성왕 2년 봄 2월에 당현종이 성덕왕 부음을 듣고 오래도록 애석히 여기며 좌찬성대부 형도를 홍려 소경을 관직으로 보내어 조제케 하고 태재 태보를 추증 하였다. 그리고 사황를 개부의 동삼사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 .
형도가 출발하려 할때 황제는 시을 서문에 짓고 태자 이하 백료들은 모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제는 도에게 말하기를 신라를 군자의 나라라 하고 자못 서기를 알아 중국과 유사하다, 경이 유교에 두터우 므로 부절을 가지고 가게 하는 것이니 마땅히 경의을 연설하여 대국의 유교가 성하다는 것을 알리시오 하였다 . 또 나라 사람이 바둑을 잘둔다 해서 조명으로 솔로 병조 참군 양계응을 부관으로 보냈는데 나라의 고수들이 모두 그밑에 있었다 .
이에 왕은 도 등에게 금보,약물을 후히 주었다,
당은 사신을 보내어 왕비 박씨를 책봉 하였다
,
3년 봄 정월에 조고의 사당에 참배 하였다
중시의충이 죽었으므로 이찬 신충을 중시로 삼았다
신청궁이 완성되었다,
3년봄 2월에 왕의 아우 헌영을 등용하여 파진찬으로 삼았다
'3년 봄 3월에 이찬 순원 딸 혜명을 왕비로 삼았다
선청궁이 완성되었다.
3년 여름 5월에 파진찬 헌영을 태자로 삼았다
4년봄 3월에 당에서 사신을 보내어 부인 김씨를 왕비로 봉하였다
5년 여름 4월에 대신 정종 사인에게 명하여 노병을 사열하였다
6년봄 2월에 동북쪽에 지진이 있었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여름 5월에 유성이 상대성을 범하였다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명에 의하여 구를 법류사 남쪽에 불사르고 뼈를 동해에 뿌렸다 ,
경덕왕이 즉위하니 휘는 헌영이고 효성왕의 동복아우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헌영을 태자로 세웠기 때문에 위를 이어 받은 것이다, 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다 ,당에서 사신을 보내어 개의부 동삼사 사지 절대 도독. 계림주재 군사 겸 충지절영해 군사를 승습하라 하였다 . 아울러 어주 효경 1부를 주었다
대왕이나라를 다스린지 24년에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서 전정을 모시었다.
3월3일 왕이 귀정문 누각에 올라 좌우에게 말하기를 누가 도중에서 영복성을 데려올 수 없겠는가 하니 다, 이때 위의가 깨꿋한 고승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어 좌우가 불러 인도하여 빕게하니 내가 말한 영승이 아니다 하고 물리쳤다
다시 한승려가 있어 납의을 입고 앵통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만나보고 누각위로 맞아들여 그 통안을 보았는데 다구가 가득차 있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하니 승려가 말하기를 충담이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어디서 오는길인가 하고 물으니 승려가 말하기를 매해 중삼일과 중구일에 차를 끓여서 남산의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올리는데 지금 이미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한잔의 차를 나누어 줄수 있는가 라고 하니 승려가 이에 차를 끌여 받쳤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찾잔속에 이상한 향기가 풍기었다,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을 찬미하여 사뇌가를 지어 그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런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를 지으라 고 하였다
승이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치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서 왕사로 봉하였으나 승이 재배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스러운 어머니라
백성은 어리석으나 즐거운 아이로 여기시면 백성의 사랑을 알리라
구물거리고 사는 중생 이를 먹여 다스리니
이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나라를 지닌줄 알지니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하리라
찬기파랑가는 다음과 같다
열치고 나타난 달이 흰구름을 따라 떠간 하늘
새파란 모습 기량의 모습 잠겼으라
일오천 조약들이 낭의 지니신 마음 끝까지 쫒고자
아 잣까지 높아 서리 모를 화판이여
& 생의사 석미륵
선덕왕때 승려 생의가 항상 도종사에 머물렀는데 꿈에 승려가 인도하여 남산으로 올라가 풀을 묶어서 표시를 하게 하고 산의 남쪽 골자기에 이르러서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묻혔으나 청컨데 대사는 거내어서 고개 마루에 두라 하였다, 꿈에서 깨자 벗과함게 표시를 해둔 그 골짜기에 이르러서 땅을 파보니 석미륵이 나왔으므로 삼화령 위에 안치했다,
선덕왕 13년 갑진년에 절을 지어 살았는데 후에 이름을 생의사라 하였다. 지금은 와전되어 성의사라 하며 충담사가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끟어 올린것이 바로 이부처라 한다
경덕왕의 왕의 재위기간은 천보( 임오) 서기 742년에 즉위해서 을사 765년에 돌아가시고 혜공왕이 즉위했다
이보다 앞서 경덕왕이 아들이 없어 비를 폐하고 사랑부인으로 봉하였다
후비 만월부인 시호가 경수태후이며 각간 의충의 딸이다
삼국사기 본기에서 말하기를 7월23일에 왕자가 탄생하였다 하여
756년 년간에 일어난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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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훈대덕 ( 표훈천사 ) /
세상에 있으며 산다하고 하늘로 돌아가면 죽었다 하는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라 그렇기 때문에 죽음이 있으면 반드시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반드시 이름이 있고 이름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말이 있으면 반드시 행이 있느리라 ;유원의기와 지묘의신은
저절로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여 가득히 빛났으니
있을곳은 있고 감응하여 대응하니라 오되 시작된곳이 없고 가되 끝나는
곳이 없으니 하나를 통하여 만가지를 이루지 못함이 없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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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서 말한다
경덕왕이 하루는 표훈대덕을 불러서 말하기를 하늘이 짐을 돕지 않아서 후사를 얻지 못하였으니 원하옵건데 대덕께서 상제에 청하여 두게 해시오 하였다
표훈대덕이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기를 천제께서 말씀 하시기를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고 했습니다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원하옵건데 딸을 바꾸어 아들로 삼아 주시기 바라오 라고 하므로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하였다.
천제가 말하기를 될수는 있으나 남자로 하면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라고
하며 표훈대사가 내려 오려고 할때 천제가 또 불러서 말하기를
하늘이 인간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되는데 이제 대사가 마치 이웃동네을 다니듯 하면서 천기를 누설시키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 통례를 금하겠다라고 했다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해주니 왕이 말하기를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서 후사를 삼으면 족하겠소 하였다 . 이에 왕후
만월이 태자를 낳으니 왕이 매우 기뻐 하였다
태자가 8세에 이르러 왕이 즉고 태자가 즉위하니 이사람이 혜공대왕이다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에 나섰는데 정사가 다스려 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해도 방비할 겨름이 없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징험된것이다
소제가 여자였다가 남자로 되었기 때문에 돌때부터 즉위하기 까지
항상부녀의 놀이를 하고 비단 주머니을 차기 좋아하며 도류들과 희롱 하였음으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마침내 선덕과 김양상에게 시해 되었고
표훈대사 이후에는 성인이 신라에 태어 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경덕왕 14년 봄에 곡식이 귀하여 백성이 굶주렸다, 옹천주의 향덕이 가난하여 부모를 봉양할수 없자 다리살를 베어 그 부친을 먹였다, 왕이 그말을 듣고 물품을 자못 후하게 내려 주고 문려를 정표 하였다
신라경덕왕 14년 을미(서기 755년) 에 분황사 약사여래 금동보살을 주조하여 안치하였는데 그무게가 30만 6700톤이 었다 장인은 본피부 강고내미였다
때에 천수대비( 관음보살 )앞에 한기리의 여인 이 눈먼 여자 아이를 데레와 빌었더니 눈을 떳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신비한 영험을 가진 그림이 당시 화가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도라고 학자들은 추정 하고 있다 한다
삼국유사에서 말한다
경덕왕때 한기리의 여인 희명의 아이가 난지 5년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쪽벽에 그려진 천수대비상 앞에 가서 아이로 하여금 천수대비상 ( 천수대비: 관음보살 )도( 圖) 앞에 가서 아이로 하여금 노래를 지어 빌게 하였더니 마침내 광명을 찾았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무릎을 끓고 두손모아 천수관음 ( 千手觀音) 앞에 비나이다
천수,천안을 가졌으니
하나를 놓고 하나를 덜어서 둘이 없는 나에게 하나만 주소서
아,나에게 주소서, 나에게 주시면 자비가 크리라
다음과 같이 찬한다
죽마 총생이 항간에서 놀더니 하루아침에 두눈이 멀었네
헛되이 양화를 보냄이 몇해 였으라 했다
경덕왕19년 경자 4월 초하루에 두개의 해가 나타나더니 열흘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일관이 아뢰기를 청컨데 인연있는 승려로 하여금 산화공덕을 지으면 재앙이 물러 날것입니다 하였다 . 이에 조원전에 깨끗히 단을 베풀고 청양루를 행차하여 인연 있는 승려를 기다렸다, 이에 월명사가 밭사이로 난
남쪽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고 하였다
월명사가 외뢰기를 신은 다만 국선의 무리에 속하여 단지 향가만 알뿐 범패를 익히지 못했습니다 , 라고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이미 인연있는 승려로 지목 되었으니 향가를 써도 좋소 라고 하자 월명이 이에 도솔가를 지어서 불렀는데 그내용은 이러하다
오늘이어 산화가를 불러 뿌린 꽃이여
나는 곧은 마음의 명을 만들어서 미륵 좌주를 모셔라
그시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 용무에서 산화가를 불러 처운에 한송이 꽃을 날려 보내니
이는 정중한 곧은 마음이 시키는 것이니
멀리 도솔천의 대선가를 맞이하라
이를 산화가라 하는데 이는 잘못이며 마땅히 도솔가로 해야한다
얼마후 해의 괴변이 즉시 사라지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서 좋은차 한봉지와 수정염주 108개를 내려주자 갑자기 모습이 깨끗한 한동자가 나타나서 끓어 않아 차와 염주를 받들고서 궁전의 서쪽 작은문으로 나갔다
월명을 그를 내궁의 심부름 꾼으로 여겼고 왕의 법사의 종자로 여겼는데 확인해보니 모두가 아니었다. .왕이 매우 이상히 여기고 사람을 시켜서 뒤쫒게 하니 동자가 내원의 탑안으로 사라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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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와 염주는 남쪽벽에 그려진 미륵 좌상앞에 있었다,
이에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능히 이처럼
지성에 비춘것을 알아 조야가 모두 듣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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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더욱 존경하여 다시 비단 100필을 주어서 큰 정성을 표하였다
월명사가 일찍 죽은 누이 동생을 위하여 재를 올리면서 향가을 짖고 제사를 지내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서 지전을 날리니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 향가는 다음과 같다
생사의 길이 이에 잇음에 두려워 지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이루고 가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가지 나서 가는곳을 모르겠구나
아! 미타찰에서 만나볼 나는 도을 딱아 기다린다
월명은 향상 사천왕사에 거주 하였는데 피리를 잘불렀다
일찍히 달밤에 피를 불며 문앞의 큰길을 지나가자 달이 그 운행을 멈추었므로 이로 인하여 그길을 월명리라 하였고 법사또한 이로서 이름을 날렸다
법사는 곧 능준대사의 문인이다
신라 사람중에는 향가를 숭상하는자가 많았다, 대개 시송과 같은 류였는데
그렇게 때문에 이따금 천지귀신을 감동시키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바람이 지전을 날려서 누이 의 저승가는 밑천을 삼게 하였고
피리소리는 명월을 움직여서 항아를 머무르게 하였네
도솔천이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의 한곡조를 맞이 하네
단속사 / 삼국사기 본기에서 왕의 총신 이순이 하루아침에 세속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여러번 불러도 오지 않다가 마침내 중이 되었다 후에 단속사를 창건하여 살았다 하였으며 삼국유사 별기에서도 나이 50에출가하여 중이 되어 단속사를 창건했다 고 강조하고 있다 .
삼국사기본기에서는상대등 신충과 김옹이 면직되었다
기록하고 있으며 신충이 중이 된 기록이 없다
& 면직이란 무언인가 오늘날 면직의 상식법규는 임용권자가 일방적인 직권에 의해서 행해지는 면직행위를 말한다 국가공무원법은 신체적 장애 정신 이상등으로 1년이상 직무를 감당하지 못할만한 지장이 있을때 나 직무수행능력이 현제한 부족으로 근무성적이 불량할때 ,직제와 정원의 개편 또는 예산의 감소 등에 의해 폐직또는 감원되었을때 휴직소멸등으로 복귀 하지 않을때 대기 명령을 받은자가 그기간 의능력의 향상 또는 개전의 의사가 없다고 인정될때 경우에 직권면직이 행하여 지는 일종의 해고 제도로 볼수 있다 왕이 면직시켰으며 또한 신충이 중이된기록은 없다
이로볼때 단성사를 창건한 사람은 신충이 아니라
왕의 총신이 었던 대내마 이순이 신빙성이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단속사 창건 년간이다
신충이나 이엄이나 경덕왕때 벼슬을 했고 후에 후에 단속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763년 이엄이 창건햇다고 기록하고 있어 삼국사기본기 경덕왕시대
에 단속사가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키포인터로 추정해 본다
삼국사기 본기 경덕왕 22년 기록에서 말한다
경덕왕 22년계묘는 서기 763년이다 ,이해 여름 4월에 왕은 사신을 당에보내 조공했다,가을7월에 태풍이 불어 기오가 날리고 나무가 .뽑혔다 . 8월에 복사꽃 오얏꽃이 다시 피었다 ,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면직되었다
대내마 이순은 왕의 총신이 었는데 홀연히 하루는 아침에 세속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여러번 불러도 오지 않다가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창건하고 그곳에 살드니 그뒤에 왕이 음악을 좋아한는 말을 듣고 곧 궁문으로 나아가 간하기를 신이 들으니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음란한 음악에 그칠줄 모르다가 이로 말미암아 정사가 무어져 국가가 패멸하였다 합니다, 앞에있는 수레바퀴가 엎어지면 뒤에 있는 수레도 의당히 경계 해야 하므로 엎드려 바라옵건데 대왕께서 허물을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하시어 나라의 수명을 길게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왕이 듣고 감탄하여 음악을 정지 하였으며 다시 정실로 불러 들여 도의 묘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듣고 여러날 만에 그쳤다
경덕왕시대 직장 이준이 << 고승전>>에는 이순으로 되어있음 } 이 일찍히 발원하여 나이 50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창건 하겠다고 하였는데 경덕왕 22년 서기 763년 계묘에 홀연히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었다 . 그리고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짖고 살면서 종신토록 속세를 떠나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한다 하니 왕이 허락 하였는데 금당 둿벽에 남아 있는
진영: 유마상도 (眞影 :維摩像圖) 가 그것이다
이순이 처음에는 조그만 사찰을 하나 지어 살다가 나이 50이되자 조연소사( 槽淵小寺)를 큰사찰로 개창하여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장노 라하였다 ,이때 사찰벽면에 그림으로 장식하였는데
솔거가 유마상도를 그렸다는 속설이 전한다 .
이절에서 20년 머물렀다가 죽었다 한다
다음과 같이 찬한다
공명을 이루기 전에 귀밑거리 먼저 세웠으니
임금의 사람은 많아도 백세토록 바쁘리
언덕을 두고 산이 자주 꿈속에서 찾아오니
그곳에 가서 향불을 피워 우리 임금의 복을 빌겠네
그러나 솔거가 유마상도를 그렸다는 진주단속사는
지금 소실되어 없으나 그사지에는 보물 제72호 동삼축 석탑이 남아있다
유마경은 4-7세기 신라에 성행 하였으며 특희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고구려 승려 보덕에게 유마경 가르침을 받았다
신라 삼국사기 기록은 7-8세기 신라유마상 사상이 폭넓게 퍼져 있었다
이순이 나이 50이되는해인 763년에 벼슬을 버리고 중이 되어 단속사을 창건하고 단속사에서에 20년동안 머물렀다가 죽었다 했으니
죽은연대는 도는 783년 년간으로 추정해 볼수있다고 본다
그뒤에 왕이 음악을 좋아 한다는 말을 듣고 곧 궁문으로 나아가 간하기를 신이 들으니 걸,주가 주색에 빠져 음란한 음악을 그칠줄 모르다가 이로 말미암아 정사가 무너져 국가가 궤멸 하였다 합니다
앞에 있는 수레바퀴가 엎어지면 뒤에 있는 수레도 의당히 경게 해야 하므로 엎드려 바라오건데 대왕께서 허물을 고치시고 스스로 새롭게 하시어 나라의 수명을 길게 하셔야 합니다 하였다
왕이 듣고 감탄하여 음악을 정지 하였으며 다시 정실로 불러 들여 도의 묘와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듣고 여러날만에 그쳤다
24년 여름 4월에 지진이 있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당제는 사자에게 검교 예부상서의 직을 제수하였다, 6월에 유성이 심성을 범하였다. 이달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장에 장사 지냈다. << 고기> 에 이르기를 영대원년 을사에 죽었다 하였고 구당서 및 자치통감에는 모두 이르기를 대력 2년에 신라왕 헌영이 죽었다 하였으니 어찌 그리 잘못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