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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납심당 성전이 납골당 되면 망한다>의 줄거리:
남왕국 유다를 구약 성경적 교회라 할 수 있다면, 성전의 붕괴와 함께 일어난 유다의 멸망은 오늘 날의 교회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는 한 선민인 유다 나라는 지켜질 것이라고 했던 확신이 미신이었듯이, 교회 다니기만 하면 구원을 얻겠거니 하는 생각도 치명적인 미신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오해로 인해 구원의 확신이 미신에 그치고 마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습니다.
납심당 성전이 납골당 되면 망한다
(열왕기하 25:1~30)
8.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9.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10. 시위대장에게 속한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었으며
11.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무리 중 남은 자는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모두 사로잡아 가고
12. 시위대장이 그 땅의 비천한 자를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납심당 성전이 납골당 되면 망한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납심당 성전이 납골당 되면 망한다’
‘납심당’이라는 말은 납골당을 패러디해서 만들어본 말입니다. 납골당은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조그만 항아리에 재가 된 뼈를 담아 사물함에 안치하는 곳입니다.
저희 할머니께서도 무덤을 쓰셨다가 이장을 하셔서 납골당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납골당(納骨堂)은 바칠 납(納)자를 사용하여 뼈를 받아들이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성전은 마음을 받아들이는 집이라는 뜻에서 납심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납심당이 납골당이 되면 선민의 나라는 망합니다.
이 선민의 나라가 망한다는 구약 성경적 이야기를 오늘날로 가지고 오면 선민의 나라 자체는 교회이기 때문에 시사하는 점이 중차대합니다. 어떻게 교회를 상징하는 선민의 나라가 망할 수 있을까요? 선민의 나라가 망할 수 있다면 선민들의 모임으로 자처하는 오늘날의 교회도 망할 수 있음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바벨론의 군대 장관이 와서 유다를 멸망시키는데 특별히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는 광경이 소상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성전과 왕궁을 불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살랐으며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허물었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지 453년 만에 파괴됩니다.
선민의 나라는 성전이 있어야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기에 성전이 파괴되자 선민의 나라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물리적 측면에서 성전을 파괴한 것은 바벨론이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파괴한 것은 선민들 자신이었습니다.
선민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온전히 갖고 정하신 규례와 율법을 따라 제사를 드리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 숭배 및 온갖 우상 숭배를 하면서도 성전을 무의미하게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에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 하나님이 출애굽을 시키셨고 모세가 이끄는 조상들과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었고 그것을 준수하기 위해 성막이 지어지고 이어서 성전이 세워진 것을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었습니다.
비록 자신들은 바알 숭배를 하고 있더라도 성전이 서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나라를 이방민족으로부터 지키실 것이고 침공을 받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지켜질 것이라는 오해를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의 존립에 근거된 구원의 확신은 미신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파괴해버리십니다.
이전에 바벨론에 의해서 두 차례에 침입이 있었으나 그 때까진 성전이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3차 침입 때에 성전이 파괴되는데, 내용적으로는 이미 유다 백성들에 의해서 파괴된 후였습니다. 다시 말해 성전이 납골당이 되어버렸습니다.
선민들이 납심당으로서의 성전을 납골당으로 전환시켰는데 어떻게 내용적으로 파괴시켰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남 왕국 유다가 천만 명쯤 된다고 가정해봅니다. 이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더라도 이들의 천만 개의 심장은 성전 안에 모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므로, 선민이라면 어느 곳에 살고 있든지 마음은 납심당으로서의 성전에 와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성전에 이름을 두신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성전에 두신 이름이 연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 연결을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이 성막의 구성의 의미를 따라서 진행됩니다.
먼저 지성소의 법궤 안에 말씀의 돌판이 상징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살아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세상 것을 담았던 마음이 번제단에서 죽어야 합니다.
성전이 납심당이 되는 것은 어디에 있든지 마음을 성전에 두는 것입니다. 성전에 마음을 둘 때에 장사를 하는 중에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지를 생각하게 되고, 장사하는 육체의 현장에는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성소 안에 있는 분향단과 떡상과 등대가 의미하는 대로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십니다. 그렇게 선민의 나라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성전에 올 때조차도 마음을 세상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려 본들 그것은 생명이 없는 죽은 시체와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빠져있는 육체가 들어왔으니 성전은 납심당에서 납골당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납심당으로 기능할 때에는 육체가 거하는 삶의 현장으로 하나님의 뜻이 밀고 들어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세상의 가치에 묶여 있으면 내 뜻이 성전 안으로 밀고 들어와 성전을 정복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이 성전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으로 밀고 들어가시지만, 마음이 세상에 있을 때에는 내 뜻을 성전에서도 관철시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의 성전은 죽음의 공간인 납골당이 되어버리고 성전의 의미가 말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선민의 나라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사건을 오늘날 우리의 교회에 적용해보면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망할 교회가 있고 절대로 망하지 않을 참 교회도 있습니다.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해서 가톨릭은 바티칸 제2공의회를 통해서 수정을 가합니다.
“자기 잘못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접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 착하고 선하게 도덕적으로 잘 살면 그에게도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신다.”라고 하는 말을 교의헌장 제16항에 명시를 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가톨릭은 이미 올바른 복음에 입각한 기독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좀 더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참 교회가 있고 지역 내의 조직 교회가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구원은 교회 밖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교회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 있습니다.
성전이 납심당의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전의 의미를 완성시키신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과 승천 사건은 교인들의 마음을 모으는 납심당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면서 십자가에 우리 마음을 둘 때에 우리 마음에 구원이 임하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구원이 있는 것이고 교회는 복음을 통하여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교회 밖에는 구원 받은 자가 없다”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고, 구원은 교회가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교회를 생겨나게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에 현재 조직 교회 안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사역 공간에 마음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치 남과 북 사이에 비무장지대가 있는 것처럼 십자가를 경계로 세상과 천국이 나누어지는데 그 사이에 주님께서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이루신 주님의 사역 공간 안으로 우리 마음을 들여보내는 것이고 이것은 건강 가족 돈 권력 등의 모든 세상 가치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 가치로 기뻐하고 만족하지 않고 행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주님을 따라 세상에 대해서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고 함께 승천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이 하늘에서 아버지와 교제하시면서 아버지로 인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승천하실 때의 마음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해야 복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있는 것이 얼마나 좋으시면 이 세상의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곧바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너머로 주님의 사역 공간이 있고 그 끝에 주님께서 아버지와 마주대하시는 장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도 주님께 이끌려 그곳까지 가야만 합니다.
현재 가톨릭과 개신교와 기타 종파를 합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이 22억 명이라고 합니다. 이 22억 개의 마음이 주님의 십자가 너머로 갈 때에 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며 모이는 곳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들의 마음이 십자가 너머로 가질 않습니다. 그러한 교회라면 오늘 본문의 망하게 된 유다와 같고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사도신경이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을 라틴어로 ‘크레도(Credo)’라고 합니다. 이 말은 크레와 도의 합성어인데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크레’라고 하는 말이 심장을 의미하는 코르(cor)에서 나왔습니다. 심장을 드리는 게 믿음입니다. 주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독일의 괴팅겐에 가 있을 때에 저를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괴팅겐으로 따라오십니다. 또한 제가 미국이나 캐나다에 있을 동안에는 어머니의 마음도 그곳으로 따라 오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구주로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도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승천하는 엘리야를 보았듯이 제자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마음이 엘리야를 따라서 하늘로 올라갔을 때 엘리야와 함께 계시던 하나님의 영이 엘리사에게 임했던 것처럼,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제자들의 마음이 하늘로 따라서 올라가자 오순절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마28:20절에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도 승천하신 주님께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성전의 완성으로서 납심당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22억 명의 신도가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십자가 너머로 가야만 합니다. 진짜 교회는 마음의 모임입니다. 마음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있고 육체만 모이면 생명이 빠진 죽은 시체들만 모인 납골당이 될 뿐이고 더 이상 교회는 교회가 아니게 됩니다.
선민들이 성전의 내용적 의미를 파괴했을 때에 선민 됨의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길이 없기에 선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나라도 망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더라도 십자가 너머로부터 부활과 승천으로 주님이 지금 아버지와 함께 계시는 자리까지 우리의 마음이 보내지지 않는다면 교회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교회는 마음을 납심당으로 보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죽은 뼈들이 모인 납골당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상태가 구원입니다. 죽은 다음에 천국을 가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입니다. 구원은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역사를 이루신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엡2:6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구원의 상태인 것입니다. 하늘에 앉혀진 마음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때에 삶의 현장에 남아있는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실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은 이렇게 구원 받은 자들에게 뒤따르는 결과입니다.
교회를 납골당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너머로 마음을 보낼 때에 우리 마음이 빠진 상태로 육체들이 모여 있을 때에 그곳에서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임재하십니다.
성전은 납심당인데 납골당으로 변하자 나라가 망했습니다. 교회는 십자가 너머의 공간을 납심당으로 삼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마음은 세상에 머문 채로 육체만 교회에 모여서 세상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교회는 납골당이 될 것이고, 그러한 교회는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듯이 결국 망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선택받은 사람들의 숫자만큼 마음들이 모여 있어야 될 십자가 납심당이 충만하게 차게 하여 주시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선민의 나라로서의 교회를 왕성하게 확장시키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