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6장 23-33절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고자 하시는 복은 분명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러나 구약을 통해서는 그것을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통해 내다보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통해 내다보게 하시지만 그것에 안주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분이 진정으로 주고자 하는 복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외적이고 물질저인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좀 더 분명히 알리기 위해 하나님은 때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관련해 어려움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통해 때로는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잃게 만드시기도 하십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시는 이도 여호와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겁니다.
때문에 성도는 주어질 때 주신 이가 하나님이신 줄 알고 감사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두어 가실 때 거두어 가시는 이가 하나님이줄 알아야 하고, 그때도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을 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주고자 하시는 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거기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3절은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입니다. 본래는 그랄의 평원에서 지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으로 인하여 그랄의 골짜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땅 백성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그렇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랄 골짜기에 와서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우물을 파기만 하면 그랄 사람들이 와서 다투고 대적하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이때 이삭은 저들의 다툼과 대적에 대하여 다투거나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용히 물러났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우물을 팠는데, 하나님께서는 여러 번의 갈등 이후 평안히 안식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곳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였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왜 그가 르호봇을 떠나 브엘세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이후 본문을 통해 추측해 보자면 르호봇에서도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하여 산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나그네로서 살게 하셨습니다. 어느 곳에 머물러 평안히 지내게도 하셨지만 거기서 영구히 살도록 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론에서도 말했지만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안주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르호봇에서는 다투거나 대적하는 일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곳이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게 하신 것입니다.
좀 더 넓게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이삭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가 것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길 때가 있겠지만 400년 후, 즉 아브라함의 자손 4대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오게 되어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창15:13,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진정한 안식처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지상의 삶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삶 속에서도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사는지, 예를 들어 어떤 이들은 전세 혹은 월세로 삽니다. 반면 자기 집을 가지고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안에도 보면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의 경우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집이 없으면 집이 있기를 바라고, 집이 있다면 더 좋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을 샀다고 해서 평안함만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불편한 일들이 있고, 때로는 어려움도 있고, 고난도 있습니다. 왜 그러한 일들이 있는가? 지상의 삶은 결코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불편한 삶, 어려운 사람, 고난이 동반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진정한 안식이 없다는 것을 알리시면서 영원한 안식처를 바라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삭이 어떤 일로 인해 브엘세바로 가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브엘세바로 옮기고 난 뒤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이삭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데, 24절입니다.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즉 하나님께서는 르호봇에서 평안하게 안식하게 하셨지만 그곳에서의 삶도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 두려워할 만한 일을 만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두려워할 만한 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란 어떤 의미인가? 이 말은 창세기 15장 1절의 말씀을 상기시키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여기서 ‘이 후’란 어떤 일 이후 입니까? 아브라함이 당시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연합군을 물리친 사건입니다. 물리쳤지만 강대국이기에 다시금 정비하여 아브리함을 치러 올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의 방패로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에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동일합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었다면 동일하게 너에게도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할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조금 더 설명하자면 두려워할 만한 일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를 지키고 보호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우리를 능히 지키시고 보호하실 수 있는 분이시란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관련해서 말씀드리면 아무리 강대국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그런 강대국이 연합을 이루어 사람으로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다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으로부터 지키시고 보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란 말씀은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생각하셔서’란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있으셨고, 그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동일한 약속을 이삭에게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남달라서 아브라함을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이 있으셨기 때문에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해서, 달리 말하면 하나님 자신이 약속하신 바에 대하여 반드시 지키시기 위해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약속의 말씀은 이미 같은 장인 창세기 26장 3절과 4절을 통해 말씀하셨던 부분입니다.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게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물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기 26장 8절에 의하면 “이삭이 거기 오래 거주하였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거주하였기 때문에 오래 전에 말씀하셨던 것은 잊어버렸다는 차원에서 다시금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인간에게 두려워할 만한 일이 있을 때 그 두려움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로 인해 그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마13:22 참조).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삭을 찾아가시고 이전에 말씀하셨던 바를 동일하게 말씀하고 계실 뿐입니다. 세상의 염려, 두려워할 만한 일로 인하여 말씀이 막힌 것처럼 있기 때문에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동일한 말씀을 주십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했다가 상황이 나빠지니까 처음에 말씀하셨던 것과 다른 말씀을 하시지도 않습니다. 약속하신 말씀에 대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말씀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말씀하셨던 바와 다른 말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미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고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살피셔야 합니다.
간혹 보면 매번 똑같은 말씀이 어떻게 힘이 되고 어떻게 위로가 되느냐는 식의 말을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말씀에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할 때 말씀에 능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하신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런데도 말씀에 힘을 받지 못하고 말씀에 위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나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 쪽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들다가도 세상의 어려움이 있으면 그 어려움 때문에 말씀을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문제인 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 66권으로 기록된 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힘이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위로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 밖에서 힘과 능력과 위로를 찾으시면 안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시편을 읽어보십시오. 많은 부분 다윗이 기록을 하였는데, 다윗의 경우 얼마나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까? 충신인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시기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움 받았지만 이스라엘 모든 나라의 왕으로 세워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으로 세움 받고 난 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의 인생 전반을 보면 결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시편을 보면 그런 모든 어려움 속에서 누구를 찾습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고,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시고, 하나님이 나의 위로임을 누누이 고백합니다. 다윗에게만 그런 하나님으로 계십니까? 우리에게도 동일한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그런 힘과 위로가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까? 하나님 편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동일하시지만 우리의 믿음이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의 여러 가지 어려움, 환난을 잘 활용하셔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훈련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서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훈련을 잘 해야지, 이 훈련을 하지 않고 쉽게만 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과의 갈등 왜 없겠습니까? 나와 저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갈등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좋아하는 취양도 다릅니다. 생각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서 맞춰가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 말씀 안에서 변화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애써야 합니다.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지상의 교회는 결코 영광의 교회가 아니라 전투하는 교회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다시 24절을 보시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이상 우리는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시편 3편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나는 한명이지만 나를 잡기 위해서, 나를 해하기 위해서 천만인이 진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5절에 이런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진쳐서 두려워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누워 자고 깰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다윗을 붙드셨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시편 2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4절에 의하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이 위하시는 사람을 대적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합니다. 저들만의 고백이 아니라 성도의 고백임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본래는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선 자체이신 하나님과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인간이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친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씻기셨습니다. 때문에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친히 우리의 힘이 되시겠다,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요, 방패인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혹 두려움이 찾아온다면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악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5절로 오시면 약속의 말씀을 다시금 받은 이삭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이삭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나님 편에서는 약속의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 앞에서 이삭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하여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린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의 자세는 이러해야 합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겠다, 우리의 위로가 되시겠다는 말씀에 대해서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혹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책망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책망하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책망하신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말씀이라 할지라도, 기록된 이 성경 66권의 모든 말씀 앞에서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복음 앞에서만이 아니라 율법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실 때만이 아니라 거두어 가실 때도 동일합니다. 우리를 높이실 때만이 아니라 우리를 낮추실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자세여야 합니다.
실제로 이삭을 보시면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브엘세바에서 장막을 쳤는데, 그곳에서도 종들이 우물을 팠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 때문에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그런데 브엘세바로 왔지만 여전이 물이 부족합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포기했는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그리고 우물을 팠습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렸다는 것이요, 특별히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우선시 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염려로 있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을 하지 못할 정도라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성도는 내일을 염려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런 방향으로서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 세상의 근심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 안다고 말씀하시는 것에 맡겨 놓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 찬송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일 염려를 왜 오늘 가지고 와서 염려하겠습니까? 한 날의 괴로움도 족하다고 하시는데, 앞으로 되어질, 그러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일에 염려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간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어야 합니다.
26절 이하는 이비멜렉 왕이 이삭을 찾아와서 언약을 맺고자 하는 내용인데, 우선 26절에 보시면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 비골과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아비멜렉이라는 말은 왕의 이름이 아니라 칭호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1장에 나오는 아비멜렉과 지금 여기에 나오고 있는 아비멜렉은 다른 인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1장에 보면 군대 장관 비골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이름이 아니라 군대 장관의 명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삭에게로 와서 언약을 맺고자 하는데, 우리는 이미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왕의 언약을 살핀 바 있습니다. 창세기 21장 22절에 보면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말하기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청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23절에 의하면 “그런즉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여기서 하나님을 가리켜 내게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대로 너도 나와 네가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간단히 말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후대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맹세가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왔을 때 지켜졌는가? 한편으로는 지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그랄 땅, 곧 블레셋 왕에게 찾아왔을 때 그를 받아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지켜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우선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이삭이 거부가 되었을 때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결국 쫓아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정당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부당하게 쫓아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26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 사후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메웠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후대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쳤지만 가는 곳마다 시비를 걸고 다투고 대적하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 역시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과의 맹세를 잘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이삭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에게 너희를 떠나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러니까 이삭이 저들의 악에 대하여 선으로 나타내었지만, 선으로 나타내었다고 해서 그들의 악함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닌 겁니다. 그래서 그런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가 나를 쫓아낸 것은 너희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지 내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부당하게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너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데,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는 말씀 때문에 성도의 경우 무조건 당하는 쪽으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 이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들의 죄에 대하여 드러내야 할 때는 드러내야 합니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합니다. “신앙인도 가능하다면, 그들의 원수들이 침해 행위의 목적을 회상케 하고, 그들의 강포와 협잡과 불의한 행위를 자제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일은 합당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이 자기들에게 닥쳐오는 모든 침해를 묵묵히 소화시키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복수심과 복수 행각을 삼가기를 요구하시는 것뿐이다.”
왜 성도는 저들의 악에 대하여 인내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우리의 본성에는 복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하지 않으면 반드시 복수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복수심만 없다면, 악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교정할 목적으로만 있다면 때에 따라 다른 사람의 잘못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부적절한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의 복수심을 가진 말이라면, 그래서 그 말로 인하여 다툼을 일으킨다면, 그래서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허물을 드러내는 것에 대하여 신중해야 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부당하게 대했는데 이제 너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이삭에게 아비멜렉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28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아브라함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비멜렉 왕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과도 함께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함께 하심을 이방인 왕이 보았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주신 외적인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이삭의 삶의 자세를 통해서도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5:16). 이삭의 삶의 자세가 저들이 볼 때도 귀감이 될 정도인 것입니다. 물론 실수한 것도 있었지만 그 실수 한 부분 외에 그의 삶의 자세는 이방인에게조차 귀감이 될 정도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이방 왕에게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에 두려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왕이 한 가정의 가장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이삭을 부른 것이 아니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친히 언약을 맺자고 요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삭을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의 경우 여전히 남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남의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런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이삭에게 힘이 없었는가? 세상적인 관점에서는 힘으로 그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피했습니다. 물러났습니다. 악에 대하여 선으로 갚고자 했습니다. 그런 이삭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비멜렉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고, 친히 찾아와 언약을 맺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아비멜렉의 자세를 통해 인간의 간사함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시기로 인하여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이삭의 번성함 앞에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전에도 만만치 않았지만 더 이상 견줄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위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선적인 사람이요, 이중적인 사람인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언약을 맺기 위해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은 교만으로 똘똘 뭉쳐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부패한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에게는 이런 본성이 없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책은 제거되었지만 이 땅에서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면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이기에 우리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와의 싸움에서 전적으로 이기지는 못합니다. 이 땅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이삭이 악에 대하여 선으로 이긴 것처럼 우리 역시 악을 악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도록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더불어 주의 은혜를 따라 선한 열매를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29절을 보시면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지금 아비멜렉은 이삭이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두려움을 주셨고, 그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심으로 복을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찾아와 언약을 맺고자 하는데, 쉽게 말하면 네가 우리를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다.
그러나 앞서 있었던 사건을 보면 분명 이삭은 쫓겨나듯 나갔습니다. 이삭이 거짓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는 분명 호의를 베푼 것이 있었지만,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을 때는 그 복으로 인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할 수 없어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가장을 합니다. 잘못을 시인하기보다는 잘못을 감추기 위해 이런 저런 변명을 댑니다. 분명한 사실로 있지만 사실을 사실로 대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진리로 여기지 않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블레셋 왕의 말이 정당하지 않을지라도 일일이 다 따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블레셋 왕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30절과 31절을 보시면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여러분,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이후 다시금 찾아와 손을 내밀 때 그 손을 뿌리치면 안 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우리 자신의 잘못을 경감시켜서는 안 됩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한 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찾아 왔을 때는 그가 어떤 변명을 하더라도 찾아와서 화해의 손길을 내놓는 것으로 인하여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를 회개하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신자를 향해 그렇게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 역시 이웃의 죄에 대하여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면, 이런 자세가 사도 바울이 경고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는 그런 성격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고후6:14).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내용은 우리가 불신자들과 짝을 이루어 그들의 사슬로 묶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뜻입니다. 거룩한 백성이 불의와 불법에 동참하게 되는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언약 체결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 해주는 방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8)는 말씀에 합당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32절과 33절을 보시면 “그 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이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알리어 이르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어딜 가나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우물을 주셨지만, 블레셋 왕과 언약을 체결하는 그 가운데서도 물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을 주십니다. 이곳을 ‘세바’라 하였는데 아브라함 때 블레셋 왕과 언약을 맺은 브엘세바를 상기시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서조차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의 경우 블레셋 왕과의 언약 이후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창21:33), 이삭 역시 동일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 있고자 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맹세는 사람과 했지만 이삭이 의지하고자 한 것은 우물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그 복을 이방인이 알 수 있도록 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왕조차 평화를 위해 손을 내밀 정도가 되었습니다. 정확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서 이삭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성취해 나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방인 왕이 그 복을 함께 누리는 자로 있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아브라함 때도 그렇지만 언약을 체결했다고 해서 그들이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네가 우리보다 강하기 때문에 우리를 해하지 말라는 측면에서 언약을 맺었을 뿐입니다. 반대로 약해지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 언약을 깨어질 수 있는 언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와 맺은 언약을 깨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약자가 강자에게 언약을 맺자고 한 것이 아니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대적인 분께서 그렇지 못한 자와 체결하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맞잡은 손을 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언약을 체결하시면 그 언약을 깨뜨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붙잡은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드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두렵게도 하시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리심으로 두려워하지 않게 하십니다.
때문에 우리의 힘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위로 역시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만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너희 착한 행실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처럼 악에 대하여 선을 나타내는 열매로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