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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성화
김 자 영
남미 판타날 수련
‘하나님의 이상천국모델국가’로 하나의 나라만 복귀되면 그 나라를 기반으로 하여 세계를 복귀하기가 쉬우므로 대한민국을 하나님의 조국으로 복귀하고자 참부모님은 심혈을 기우리셨다.
하늘이 준비해온 기독교가 통일원리를 받아드리지 않으니 미국으로 가셨다. 또 황무지의 땅 남미의 판타날에 가셔서 뜨거운 태양과 모기와 각종 곤충과 싸우며 나무를 심고 수도를 놓고 집을 지었다. 이상천국을 세우고자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 땅을 일궈 그곳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드셨다. 세계의 축복가정들은 부모와 자식이 그곳에 함께 가서 천국백성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40일 특별수련을 받도록 하였다.
참부모님은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낚시해서 먹고 사는 법과 양식업을 가르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고 생선가루(fish fowder) 를 만들어 단백질 섭취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아프리카에까지 보내주었다. 우리 가정은 형편이 안 되어 가지 못하였다. 가지 못한 남편은 집에서라도 훈독회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하며 식사를 준비하는 나에게 들으라고 새벽이면 훈독경을 소리 높여 낭독하였다.
막내딸 내외가 방학을 이용하여 판타날에 가게 되어 내가 돐 지난 손녀를 보아주게 되었다. 떠날 때 울고 안 떨어질 가 봐 살짝 떠났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울기 시작하더니 낮에는 그런대로 넘겼지만 밤만 되면 슬프게 울다 지쳐 잠이 들 때까지 일주일을 울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째 되던 날 판타날에서 잘 도착하였다는 전화연락이 왔다. 아기에게 엄마아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더니 그날 밤부터 울음을 뚝 그치고 잘 놀았다. “엄마아빠가 참부모님 계신 곳에 와서 공부하고 끝나면 돌아갈 터이니 그때까지 할머니와 잘 놀고 있어” 라고 하는 말 한 마디에 마음이 안정이 되었던 것이다. 말 못하는 아기라고 알리지 않고 떠나면 안 된다. 다 알아듣는 것이다.
나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신문지의 그림을 가위로 오리게 했는데 다른 것보다 가위로 그림을 오려내는 것을 좋아했다. 한 달 동안 신문그림을 오려 놓은 것이 부대 자루로 하나 가득 하였다. 처음엔 서툴던 것이 한 달되었을 때는 어른보다 더 예쁘게 잘 오렸다. 손놀림을 많이 해서 인지 공부를 잘하여 특성화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장학생으로 수업료를 안 내고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한국은행 명동지점에 취업이 되어 자기가 벌어서 경희대 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를 졸업하여 축복까지 받아 효도하고 있다.
인정 많고 자상한 남편
참부모님께서 72가정 약혼자를 정해 주실 때 먼저 나를 부르시고 신랑감으로 김덕수씨를 추천해 주시며 “천품이 참 좋은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축복받고 몇 년이 지난 축복가정 모임에서 아버님께서는 “영자야 덕수 좋은 사람이지?”라고 물으셨다. “네”라고 대답했지만 아버님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에 내가 남편에 대하여 흡족해 하지 못하는 것을 아시는 것 같아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랬더니 또 한 번 “덕수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평생을 아버님 말씀에 남편이 좋은 사람이라고 내 마음속 깊이 새겨주셔서 천생배필이라 생각하고 살았다.
남편은 어린 시절 몸이 너무 허약하여 초등학교 때는 결석을 많이 하였으나 운동을 하여 좋아졌다고 하였다. 개척 시절 잘 먹지 못해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지만 체격이 좋아 건강해 보였다.
김우정 목사님이 중랑교회에 계실 때, 목사님과 식구들이 태국 방콕으로 여행을 갔었다. 거기서 곰발바닥을 팔고 또한 한약을 파는 사람이 맥을 짚어주며 건강 상담을 해 주었다. 임술자 권사는 맥을 본 사람에게 “누가 건강이 제일 안 좋아요?” 라고 물으니 “김덕수씨” 라고 하여 그 사람은 돌팔이 의사라고 하였다. 남편이 일찍 성화하자 “지나고 보니 그 의사 참 용한 분이였어요.”라고 하였다.
평소 1분간에 맥박이 55박이고 저혈압으로 조금만 기운 없으면 병원에 들어가 포도당 주사를 맞고 오곤 했었다. 등산을 즐겨 자주 산행을 하였는데, 운동을 한꺼번에 많이 하면 활성산소가 많이 생겨 원기를 빼앗겨 건강이 나빠진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신혼생활 때부터 내가 힘들어하는 일, 즉 우물에서 물을 길어오는 일, 연탄을 갈아주는 일들을 도맡아 해 주었다. 마늘껍질을 까서 찧어 냉동실에 넣는 일도 아내 손이 쓰리고 아플 것을 염려하여 다 해 주었다. 무거운 것을 들거나 아이를 데리고 외출 할 때 자기가 앉고 다니며 나를 고생시키지 않으려 매사에 배려심이 많았다.
생일날은 잊지 않고 작은 선물이라도 꼭 사다 주었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전혀 돈을 쓰지 않으니 외출할 때 입고 나갈 마땅한 옷이 없다고 옷을 사주고 화장품과 귀걸이, 목걸이, 속옷까지 사다주었다.
화장품 가게를 하고 있을 때였다. 추운 겨울 따뜻한 커피를 직접 타 가지고 와서 나에게 주는 것을 본 앞집 가게 아줌마가 부러워했다. 자기 남편은 자기가 마실 물도 떠다 마시지 않는데, “선향이 아빠는 어쩌면 그렇게 아내에게 잘해줘요. 부럽네요.”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나는 “그런 것은 아무 일도 아니야, 내가 해산후 허기져 있을 때 잉어를 사와 마늘과 생강을 넣고 고아서 주며 먹고 기운 내.”라고 했을 때 “얼마나 고마웠는지 눈물이 핑 돌았지, 그때의 일을 평생 잊을 수 없어.”
얼마 후 자기 남편도 선향이 아빠 덕분에 이제는 배워서 달라져 자기에게 잘해준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섬세하게 해 주는 것에 대하여 좋게 여겨지지 않았고 남자가 대범하게 남성답게 큰일을 하는데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다. 그래서 남편이 살아 있을 때 감사한줄 모르고 지냈다. 아버님께서 천국은 이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해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보다 정이 많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 더 높은 위치에 가게 된다는 말씀이 있다. 인생이란 출세가 목적이 아니고 아껴주고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남편은 어느 모임에서든 약방에 감초처럼 분위기를 살리고 화동을 잘하였다. 교회에 가면 주일 학생들에게 잘 해주니 잘 따랐고 장년회, 부인회원들까지 모두 좋아했다.
하루는 친정아버지께서 “영자야, 네 남편에게 잘해주어라, 덕수는 인정 많고 참 자상하더라. “일전에 사위가 서울 갔다 내려가는 길에 잠시 들렸었다. 소낙비가 내려 밭에 참깨를 베어놓은 것을 처마 밑으로 옮기고 있는데 비를 맞으며 밭으로 뛰어와 재빠르게 옮겨다 놓아 주고 갔다. 또 한 번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자르고 있는데 “제가 도와 드릴게요.”라고 하며 가위를 빼앗아 잘라주고 갔다.
친정어머니가 아버지보다 10년 먼저 성화하셔서 아버지가 홀로 시골에 계실 적이었다. 아버지 좋아하시는 파김치와 오이김치, 갈치와 이면수 감자와 양파 된장등을 챙겨가지고 시골에 내려가서 식사를 챙겨드리고 채전 풀도 뽑아 주고 외롭지 않게 도와드리기도 하였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들들은 전화도 한 통도 없네, 딸들이 영화도 보여주고 이렇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니 행복하다. 둘째 며느리는 딸 같아 큰며느리는 본심은 착한데 너무 정이 없어, 나갔는지 들어 왔는지 말 한마디 안 해, 덕수는 일주일이 멀다 않고 자주 전화를 해주었다.”라고 하신다. 나는 전화하려고 해도 할 말이 없어서 자주 못 하는데 남편은 “장인어른님, 별고 없으세요? 여기는 비가 오는데, 춥지는 않으세요?” 별다른 내용이 없어도 자주 안부를 전하였다. 지나고 보니 남편이 나의 친정 부모에게 사랑받는 이유가 세심한 관심을 가져 주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남편의 성화
남편은 축복을 받기 전에 경남 청도와 창녕 개척전도를 거쳐 경북 칠곡을 개척하였다. 축복을 받은 후에 순천, 함평, 장성, 고창, 정읍지역장 서울 월곡교회 개척까지 14년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전북사업부장, 충남사업부장을 거쳐 일화제약회사에서 관리과장, 경북총판, 전주 출장소장, 대전 출장소장, 서울서부지점을 마지막으로 1990년 52세에 회사에서 나왔다.
중랑교회 제직회장으로 있을 때는 낡은 성전을 보수하느라 많은 고생을 했다. 72가정 회장을 성화하는 날까지 10년간을 했다. 여행을 갈 때나 행사를 할 때는 떡과 과일이나 음료수를 직접 나누어 주는 봉사를 힘든 줄 모르고 앞장서서 기쁘게 했다.
“국가메시아 수련을 받으러 왜 안 가느냐?”라고 하니 외국에 가서 그 나라 말을 배워야 하는 데 자신이 없어 못 배우고 능력이 없어 실적을 못 올리면 하나님이 손해나니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며 사양했다.
할 일이 없어 연기 자욱한 복덕방에서 날마다 보내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담배는 자기가 피는 것보다 간접흡연이 더 해로운 것인데 5년을 그곳에서 보냈으니 그게 원인이 되어 10년 후 폐암이 될 줄 이야…….
나는 구제익 목사님께 “남편에게 교회의 일 좀 맡겨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랬더니 중랑교회 가정 순회사 직책을 주었다. 할 일이 생기니 그때부터 마음 잡고 담배 연기 마시는 곳에 가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구재익 목사님이 충북 교구장으로 가신 후 중랑교회 관리 장로를 6개월간 동안 시무했다. 관리 장로란 재직회장 일과 담임목사가 하는 일을 하면서 전임 목사 생활비를 보내주는 일이었다.
그 당시 여수 해양수련소에서는 지도자 교육을 참아버님께서 계속하고 있어서 인원 동원을 하는 일과 주일 설교까지 맡아서 해야 했다. 인터넷을 할 줄 모르니 공문이 오는 것도 보기 어렵고 보고서 작성해서 협회에 보내는 일과 인원 동원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제 명대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나에게 하소연을 하였다.
너무 힘들어 김영휘 협회장님을 찾아가 식사를 하며 이 일을 면하게 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더니 “생의 마지막 충성이라 생각하고 6개월 정해진 기간이니 참고 견뎌라.”라고 하였다.
6개월간을 마치고 신임 목회자 오던 날 단상에서 눈물을 흘리며 “목회자와 같이 힘든 자 없습니다. 아버님께서 인원 동원을 하라 할 때 자기만이라도 가겠다고 하면 그것같이 기쁠 수가 없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못 간다고 하면 그렇게 슬플 수 없습니다. 목회자를 슬프게 하지 맙시다.”라고 하며 눈물을 훔치고 단상을 내려왔었다.
중동평화 서명운동을 할 때는 친척집과 면목동의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해피 매실을 전달하였고, 36만 쌍 축복 때는 휘경동 전철 입구와 등산로에서 성주를 마시게 하며 나와 함께 축복운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렇게도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은 둘째딸이 대장암 진단이 나오던 날 통곡을 하며 울었다. 그날로부터 입맛이 없다고 하며 식사를 못 하여 병원에 가서 종합검진을 하였다.
딸이 대장암 진단이 나왔기에 자기도 대장암이 아닌가 의심이 되어 대장 내시경 검사를 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보통 10분이면 끝나는데 대장이 보통 사람보다 많이 꾸불꾸불하여 섬세히 찾아보려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러나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다. 복부CT 촬영, 위, 대장내시경 검사와 하루 종일 먹지도 못하는데 자꾸 피를 빼가니 휘청거렸다.
둘째딸은 대장암이 간, 폐까지 전이된 상태서 발견되어 아산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은 후 청평 수련소에 와 있었다. 아빠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오더니 “내가 어제 밤에 꿈을 꾸었어요, 우리 집을 새로 짓는데 천정궁과 같은 돔으로 된 지붕을 헬리콥터로 힘들게 올리려다 그만 청평 호수에 떨어지고 말았어요.”라고 하니까 남편은 “기도 많이 해야겠구나.”라고 하였다.
나의 꿈에는 며칠 전 누워서 잠자고 있는데 천정이 내 가슴위로 떨어져 “누구 다친 사람 없느냐?”라고 소리치다 깨었다. 꿈을 깨어 생각하니 천정과 지붕은 가장을 상징하니 남편이 잘못되는 꿈이라 느껴졌다. 그런데 72가정 여귀주씨의 꿈에 “덕수씨가 나 죽었다.”라고 자기에게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를 환자인 남편에게 직접 전화하여 내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 같았다.
엑스레이 상에서 우측 폐 하단에 물이 차 있으니 폐 내시경을 받아 보는 게 좋겠다고 하였다. 폐 내시경은 힘들 거라 했는데 다행이 순조롭게 하였다. 검진 결과는 비폐포성 암이라 수술이 필요 없고 약만 먹으면 된다고 하였다. ‘이레사’라는 약인데, 한 달분이 210만 원이었다. 의료보험지원 대상이 아니라 약값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 생활로는 감당키 어려웠다. 며느리는 자기들이 사업하는 것 안 벌었다 생각하고 약값을 대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치료하라고 위로를 하였다.
대장내시경 탓인지 배가 계속 아프고 기침을 하면 옆구리와 허리까지 아프다고 고통스러워했다. 병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어도 전혀 호전되는 기미가 없자 일본에 약침치료로 난치병을 잘 고치는 여자 침구사가 있으니 함께 가자고 하여 일본으로 갔다.
하네다 공항에서 내려 동경 사이타마갱에 사는 의사 집에 택시를 타고 가는데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검은 먹구름이 몰려와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날씨가 펑펑 울고 싶은 나의 마음속의 상태와 똑같았다.
최의사 집에서 숙식을 하며 치료를 받으니 즉시 심한 기침도 사라졌다. 음식 맛도 돌아와 식사를 하고 기운이 생겨 다음날 산책을 하였다. 저녁에는 족욕을 한 후 모처럼 TV를 재미있게 보고 잠이 들었다.
편안히 잠든 모습을 보며 나는 옆방으로 와서 최선생과 늦게까지 이야기하다 잠이 들었다. 새벽 밖에서 쿵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 불을 켜놓지 않고 2층 계단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화장실 입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하며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이송되어 갔으나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2005년 8월 22일 천력 7월 18일 새벽에 성화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일본에서는 이 약이 사지 마비와 호흡곤란을 일으켜 갑자기 사망한 사례가 있어 금기 약이라고 하였다.
성화식장에 온 여자식구는 “장로님 가실 꿈을 내가 꾸었어요, 중랑교회 식구들이 소풍을 가는데 한참을 가다 강을 만났어요, 시퍼런 물이 철철 넘쳐흘러 더 이상 못 가겠네요 하는데 이것도 못 넘어가 하며 혼자만 훌쩍 넘어 갔어요, 요단강 건너가는 꿈이었지요.”라고 하였다.
믿음의 자녀인 조인형씨는 얼마 전 “김덕수 장로님이 단상의 높은 의자에 앉아 계셔서 게를 진상하고 큰절을 올렸었는데, 영정 앞에서 절을 하고 보니 그 꿈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던 거였네요.”라고 하였다.
며느리의 꿈에는 딸이 자기 머리를 가위로 자르고 엄마 머리도 잘라야 된다며 달려들어 도망치다 깨었다고 하였다. 손자는 “할아버지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상 뒤에서 흰옷 입은 할아버지가 불쑥 일어서며 나 살아 났다.”라고 하는 꿈을 꾸었으니 안돌아 가신다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남편이 일찍 퇴직하여 직장이 없을 때, 나로 하여금 가족의 생계를 돕도록 수지침 학회와 지회, 복지관, 성당, 교회, 노인대학 등 수지침 강의 신청이 많이 들어오게 하늘이 역사하심을 실감했다. 그러나 오전과 오후, 야간 강의까지 하다 보니 남편의 건강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애통해 할까봐 남편이 일찍 가게된 것이 운명이라 여기고 슬퍼하지 말라고 여러 사람에게서 꿈을 꾸게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