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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7장 31-36절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겠노라
예수님의 가르침 이후 무리들과 논쟁하시면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영적 실상을 드러내실 때 모세가 너희에게 준 율법을 지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너희는 하나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았다는 것은 단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까지를 포함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저들에게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함께 그 말씀에 대한 실천으로 나타난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는 만큼 우리가 지키지 못하는 연약함도 있지만 원리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 지식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바른 지식이 없다 보니 바른 해석도 할 수 없었고, 바른 해석을 할 수 없다 보니 바른 실천 또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성경을 해석한다고 할 때 하나님 지식과 상관없이 해석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성경 해석의 가장 중요한 틀 중 하나는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지식을 말할 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말할 수밖에 없는데, 만약 하나님의 속성과 반대되는 해석을 하게 되면 하나님 자신과 반대되는 것을 내놓는 것이 됩니다. 그런 해석을 어떻게 올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어 히스기야가 기도해서 15년 생명 연장 받은 사건과 관련해 많은 사람이 기도의 능력을 말합니다. 물론 기도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눅9:28)라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그러나 기도의 능력은 기도하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기도를 들으시는 이의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기도 자체가 기도를 들으시는 이로부터 도움과 능력을 구하는 자세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말하길 좋아합니까? 기도하는 자의 능력으로 말하길 좋아합니다. 이미 여기에 하나님 지식에 대한 부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식에 대한 부재만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지식의 부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능력이 있고 우리에게는 능력이 전혀 없는데 마치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15년 생명 연장이라고 할 때 기도의 능력이 하나님의 작정까지 변경할 수 있는가?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불변하다는 것은 한 번 정하시면 정하신 바가 변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기도의 능력을 말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도 변경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여러분, 히스기야의 기도와, 기도로 인하여 15년 생명 연장 받은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작정이 변경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런 식으로 말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을 위기 가운데 있다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측면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을 때 그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줄 알도록 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15년 생명이 연장되었다면 자칫 세상 사람들 말로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기도와 생명 연장이라는 부분을 보면서 이렇게 풀기 보다는 기도의 능력, 그것도 사람에게 어떤 능력이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 하나님의 뜻도 변경시킬 수 있는 것처럼 푼다면 거기에는 하나님 지식의 부재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의 열심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지식은 중요합니다. 로마서 10장 2절과 3절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하나님 지식이 빠진 열심은 결국 하나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반대편으로 달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목적지는 서울인데 부산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면 어떻게 됩니까? 서울에서 더 멀어지게 됩니다. 열심이 좋은 것이긴 하나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율법 이해의 잣대로 예수님을 비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무엇 하나 반박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왜 반박할 수 없었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들의 율법 해석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이 틀린 줄 알고 수정해야 합니다. 틀린 것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반박할 수 없다고 해서 그들이 수정하였는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더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반감만 커져갔습니다.
한편 예루살렘 사람 중 어떤 한 사람은 종교지도자들, 유대인들을 비판하고 있는데도 예수를 잡지도 않고 대꾸하지도 않는 것에 대하여 매우 의아하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지만, 곧바로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는데, 지금 예수는 나사렛 출신이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 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말씀을 드렸지만 이미 그것 자체가 외모로 판단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예수님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말씀하시는데, 한편으로는 자신이 참 사람임을 인정하십니다. 왜냐하면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성을 취하기 전 그는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로부터 나신 성자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때문에 너희는 하나님을 모르고 있지만 나는 안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이 나를 보내셔서 너희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 사실이 당시에는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실 수 있도록 그렇게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그의 말씀 해석, 그리고 그의 치유 능력을 행하심 등을 통해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 당국자들, 그리고 유대인 중 다수가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와는 또 다른 부류도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31절을 보시면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그러니까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또한 논쟁하시면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의 말씀을 믿게 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이 더 깊어지고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 믿음이 제자들이 고백한 그런 믿음의 내용인가? 다시 말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그런 믿음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을 보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믿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행하신 많은 표적, 다시 말해 기적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정리해 두어야 할 것이 있는데, 표적을 근거로 한 믿음은 참된 믿음인가? 아니면 거짓된 믿음인가? 일단 참된 믿음과 달리 거짓된 믿음에는 역사적 믿음과 일시적 믿음 그리고 이적을 행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만약 표적을 근거로 한 이 믿음이 이적을 행하는 믿음으로만 있다면 거짓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이 오로지 표적만을 근거로 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표적을 근거로 한 믿음이되 말씀이 함께 있다면 그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무리 중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 표적을 근거로 한 믿음임을 그들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예수가 행한 표적보다는 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표적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표적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그 가르침 아래 있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표적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합하여 저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거짓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말처럼 지금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정도로 알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함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점에서 거짓된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참된 믿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가운데 어느 정도 준비해 두신 믿음이 있다고는 할 수 있는 그런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경우는 그리스도께서 귀머거리와 고집불통에게 설교하셨던 것처럼 보이지만 약간의 열매가 따랐다고 말하면서 비록 주님의 가르침보다도 기적에 더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위한 준비를 믿음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해석합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참된 믿음이라고 할 때 표적만 가지고 참된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표적은 말씀을 섬기기 위해 있습니다. 그런 표적도 성경 계시가 완성되고 난 뒤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1항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중단이 되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롬10:17).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믿었다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말씀이 들려졌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한편 31절에서 그리스도가 오셔서 행하실 표적에 대해서는 이사야 35장 5절과 6절에 잘 나타납니다.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러나 이런 표적만 행하시는 게 아니라, 이사야 61장으로 가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한다고도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61:1-3)
그런데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이런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11:3-6)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이 이사야가 예언한 그리스도이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한복음을 계속해서 보고 있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해서 알리고 계십니다. 그의 말씀으로, 그의 표적으로 알리고 계십니다. 여기에 대해 한편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반감이 점점 커져갈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는 그리스도로 여기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고 표적을 봄으로 그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로 여기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 앞에서의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 중 하나입니다. 받지 않는 자가 있다면 받는 자가 있습니다. 받지 않는 자들은 왜 받지 않는가? 베드로전서에 있는 말씀으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벧전2:8). 그의 신앙이든, 아니면 세상적인 어떤 일 때문이건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받는 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보배이기 때문입니다(벧전2:7). 보배란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에 가장 큰 유익을 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부분에 있어서 유익을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외적 삶의 풍성함을 보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것들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을 아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모든 것인 양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이 보배로 있기 보다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로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마19:23-24)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마음에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세상의 것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까지도 바꾸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마음을 두고 있는 이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보배가 아니라 걸림돌이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믿지 않는 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는 자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예수를 반대하는 입장과 찬성하는 입장이 대립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계속해서 어느 쪽이 옳은지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 32절에 보시면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라고 말씀합니다. 무리가 수군거렸다는 것은 찬반의 대립과 무엇이 옳은지 묻는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러내 놓고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림으로 인해 그 소식이 바리새인들에게까지 들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경우 이 수군거림이 매우 심각하게 여겨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자칫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들이 설 자리를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한 이해도 다르고, 심지어 자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하니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당시 대제사장들과 함께 예수를 잡으려고 아랫사람을 보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이들이 더 많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를 따르는 세력이 더 많아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 우리가 살핀 30절 말씀에 근거하자면 그들이 잡고자 한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가 ‘때가 차매’ 보내신 것처럼 그의 죽으심도 ‘때가 차매’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려고 오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33절과 3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는 28절과 29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나셨고, 또한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때 보냄을 받았다는 것은 성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한 것으로 낮아지신 신분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육신부터 시작해서 공생애를 사실 때 모든 율법에 순종하신 것, 그리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처럼 그의 고난과 죽음 역시 때가 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지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어야 합니다. 나를 잡기 위해 온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군사가 오더라도, 그래서 힘과 무력을 통해 잡고자 할지라도 하나님의 작정과 그의 뜻을 변경시킬 수 있을 만큼 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심지어 하나님 자신도 자신이 작정하신 바를 변경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낮아지심의 마지막 부분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입니다. 그때는 잡으러 올 때 잡힐 것이고, 잡혀서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기까지는 나를 잡으려고 온다고 해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입니다.
낮아지신 신분 이후 예수님은 높아지신 신분으로 있게 되는데, 그 내용은 부활로부터 시작해서 승천하시고 다시금 재림하셔서 마지막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 이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나를 잡으려고 오지만, 그리고 너희 심중에 있는 것처럼 잡아서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것이 너희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때가 되어 십자가에 죽게 되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것인데, 그때 내가 온 곳으로 다시금 돌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고,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올 수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결국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더 이상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확증과도 같습니다.
물론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간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지상에 머무시면서 행하시는 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인을 보게 하며, 못 걷는 사람을 걷게 하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못 듣는 자를 듣게 하며, 죽은 자를 살려내며, 무엇보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이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표적과 그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돌이키는 일이 있는가? 오늘 본문에 근거하면 더 이상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저들의 마음이 강퍅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에게 보이고 있는 표적들, 그리고 그의 가르침들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거절하고 저항하는 저들의 완악함을 책망하시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잡으려고 하고, 또 죽이려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너희가 받고 있는 은혜를 거부하고 있는 까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들려주시고, 또한 그 말씀의 사실성을 표적으로 나타내고 계시지만, 특별히 구약의 예언이 지금 자신을 통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지만, 그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저들에게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의미에서 33절과 34절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가를 볼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시되 단지 낮아지신 신분으로만이 아니라 높아지신 신분을 통해 그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냄을 받았습니다. 29절 마지막에 ‘그가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성육신하셨고, 지금 공생애를 살고 계시며, 이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33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지상에서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의 삶으로 끝이 아니라 그 이후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부활이 있고 승천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 재림하실 것이고, 모든 것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도 높아지신 신분에 속합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결국 모든 것에 대하여 심판하실 주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 무엇이 있는가? 마치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방해하고 대적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저들 스스로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대적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방해를 받고 대적하는 자들에 의해 실패하는 일이 있는가? 없습니다. 혹 예수 그리스도를 죽임으로 자신들이 승리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그것조차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로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일을 결단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실패처럼 보이는 일도 사실은 하나님께 실패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그의 몸 된 교회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8:17)고 말씀하실 때 고난을 받는 자리가 우리의 실패의 자리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물론 고난은 어렵습니다. 고난은 힘이 듭니다. 고난은 괴롭기도 합니다. 그래서 좌절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신 것은 우리를 높여주기 위함입니다. 그가 낮아지셨다가 높아지신 것은 낮은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고난으로 끝이 아니라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영광을 소망하는 자로서 고난에 임해야 합니다. 실패자가 아니라 영광을 위하여 한시적으로 낮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 자리에서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견인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는 대상은 이런 내용과 상관이 없지만, 주의 몸 된 교회는 주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결국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서 함께 거하게 될 자들이기 때문에 그 영광된 자리를 위해 고난의 자리에서 인내하며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내하며 견디면서 주를 더욱 찾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55장 6절과 7절은 이렇게 교훈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오늘 본문 35절과 36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고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말씀은 저들이 얼마나 무지함 가운데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무지함이 저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모를 때 풀어내는 것을 보면 땅의 것으로 푸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 승천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저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는가 하면서 저 멀리 이방 땅으로 가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의미 하는가 고민하지만 그런 고민도 사실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단지 유대 땅에서 저 멀리 이방 땅으로 가시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로 간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지금 유대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인데, 의와 평강과 희락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만을 구하는 자로 있다면 지금 유대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에 대하여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라에 대하여 밝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하여 밝아진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더 커져간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지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지상의 것이 모든 것인 양, 그리고 지상의 것으로만 모든 생각이 기울어져 있다면 거기에 어떻게 신앙이라는 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결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