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 19세기에 들어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 음악이 특히 강력한 영향을 행사한다.러시아는 민속음악과 그리스 정교 교회음악의 풍부한 전통과 함께 음악을 사랑하는 나라였다.그러나 지배층은 서구의 예술음악,특히 이탈리아·프랑스·독일의 음악을 요구했다.어떤 재능있는 아마추어 작곡가가 곡을 썼을 경우,그의 음악은 언제나 서구의 음악 양식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미하일 글링카(Michail Glinka, 1804~57)역시 아마추어 작곡가였다.그러나 그는 자신의 음악에 러시아적 요소를 도입했다.이러한 글링카의 음악은 후세 러시아 작곡가들에게 선구적 모델로 작용했다.루빈스타인 형제,안톤과 니콜라이는1856년에 연주협회를 결성하고,청중들에게 새로운 러시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뿐만 아니라,음악교육을 개선하여 젊은 음악가들을 양성하고,러시아의 음악 수준을 서유럽의 경지로 끌어올리기 위해1862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를, 1866년에는 모스크바 콘서바토리를 건립하기도 했다. 루빈스타인 형제는‘서구화주의자’로서 서구적 음악기법의 보급에 힘쓰고 러시아 피아니즘을 확립했다. ■ 5인조의 결성: ‘막강한 소집단’ 곧이어 일군의 젊은 아마추어 작곡가 그룹이 등장했다.이 그룹은 비평가이자 그룹의 지지자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에 의해1868년에 ‘막강한 소집단(Mächtiges Häuflein)’이라 불렸으며,훗날 서구에서는 이들을 ‘5인조’라고 명명했다.밀리 발라키레프를 정점으로 하여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알렉산드르 보로딘,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세자르 큐이로 구성된 이들 동인들은 모두가 귀족 출신으로서,다른 직업에 종사하면서 창작활동을 벌였다.무소르크스키와 큐이는 장교였고,림스키코르사코프는 해군 사관후보생이었으며,보로딘은 전도가 유망한 화학자였다.이들은 발라키레프 집에서 서로를 알게 되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예술적 목표는,글링카와 이들 그룹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다르고미주스키의 전통을 계승하면서,서유럽의 영향에서 벗어난 진정한 독자적인 러시아 음악을 육성하는 것이었다.이들은 약25년 동안 서로 협력하면서 오페라,교향시 등을 창작했으며,슬라브 민요를 작곡의 창조적 원천으로 삼았다.이들 중 전업 음악가는 발라키레프 한 사람이었으며,모두 다른 직업에 종사하며 창작활동을 했다. 발라키레프가 음악계에서 잠정적으로 은퇴하는70년대에는 사실상 해체된다. ▲ 밀리 발라키레프(Milij A. Balakirev, 1837~1910) 그는 글링카와 매우 친했으며,러시아 음악이 미래에 가야 할 길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준 글링카가 죽은 이후에는 그의 후계자인 다르고미주스키(Alexander Dargomizhskii, 1813~69)를 존경하면서,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작곡가들을 규합했다.그는 이 젊은 작곡가들과 함께 러시아의 민요에 기반을 둔 새로운 러시아 음악의 창작에 앞장선다. 발라키레프는 안톤 루빈스타인이 황제의 원조를 얻어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즘에 대항하기 위해, 1862년 로마킨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수업료가 없는‘음악자유학교’를 설립했다.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찬미하던 동시대의 서구 작곡가들,즉 리스트,베를리오즈,슈만의 작품 보급에 힘쓰면서,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동료들의 작품을 연주할 무대를 마련했다. 발라키레프는1867~69년에 왕립 러시아 음악협회의 연주회에서 지휘활동을 했으며, 1883~94년에 궁정합창단장을 역임했다.그가 남긴 작품은 두 편의 교향곡을 비롯해 교향시〈러시아〉 〈타마라〉 〈이슬라메이〉를 비롯해,피아노 곡과 다수의 가곡 등이 있지만,오늘날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다.그외 두 권의 러시아 민요집도 편집했다. ▲ 세자르 큐이(César A. Cui, 1835~1918)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 인으로서,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 참전,퇴각시 부상을 입고 폴란드에 머물렀다가,그곳에서 리투아니아 여인을 만나 큐이를 낳았다.그는10살 때부터 피아노 교육을 받았으며,특히 쇼팽에 심취했다.이어서 폴란드 국민음악의 선구자로 꼽히는 모뉴슈코(St. Moniuszko)에게서 음악을 배웠으나, 185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기술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855년에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했다.졸업 후 동교 강사로 활동하다가, 1878년에 교수로 임용되었다. 요새 축성의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던 그는 오페라와 소수의 관현악곡 그리고 살롱풍의 피아노 소품을 작곡했지만,그의 동료들의 작품에 비해 러시아적 색채가 덜 두드러졌다. ▲ 알렉산드르 보로딘(Alexander P. Borodin, 1833~87) 어려서부터 음악에 흥미를 보였지만,장래 희망 직업은 화학자였다.그는1850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의과대학 약학과에 입학하여1856년에 졸업한 후, 2년 동안 군의관으로 종사했다. 1862년에 모교의 교수로 임용된 후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유기화학 연구자로서 업적을 남겼다.
보로딘의 음악적 명성은 몇몇 작품에서 보여진 열정적인 표현력에서 찾아진다. ‘포로베츠 인의 춤’이 들어 있는 오페라〈이고르 공〉(미완성),교향곡1번과2번 및3번(미완성),현악4중주1번과2번 등이 그의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오페라〈이고르 공〉은 보로딘이 사망한 뒤,림스키코르사코프와 글라주노프가 공동으로 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곡을 완성시켰다. ▲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Modest P. Musorgskii, 1839~81)
5인조’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소르크스키 역시 귀족 집안 출신이며,어려서부터 어머니와 독일인 안톤 헤르케에게서 피아노 교육을 받았다.그의 음악적 재능은 일찍이 보였지만,당시 러시아 귀족 집안은 군인이 되는 것이 상례여서,무소르크스키는육군사관학교 예비학교 및 근위사관에 입학하게 되고,졸업 후에는공무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5인조 중에서 유일하게 러시아 밖을 나간 적이 없는 인물이었으며,가장 독창성이 뛰어난 작곡가였다.그는 그다지 많지 않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사적 공헌은 매우 크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보리스 고두노프>와 피아노곡<전람회의 그림>이 있는데 후자는 라벨에 의해 편곡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의 교향적 음화(音畵)로서‘성 요한제의 밤에 개최된다는 악마들의 연회’가 불러일으키는 인상을 그린〈민둥산의 하룻밤〉(1867)은 무소르크스키의 최초의 주요 작품이 되었지만,〈보리스 고두노프〉와 마찬가지로 원곡보다는 그의 사후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새롭게 개정한 판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무소르크스키는 원 악보의 첫장에 다음과 같은 프로그램을 적어놓았다. ‘지하에서 울려오는 음산한 소리,어둠의 요정들 등장,이어서 어둠의 왕(체르노보그)등장,체르노보그에 대한 찬미와 암흑의 미사,마녀들의 사바트(안식일)향연.이 광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먼 마을의 교회종이 울리기 시작하고 어둠의 요정들은 물러난다.그리고 날이 밝는다.’ ▲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plai A. Rimki-Korsakov,1844~1908) 5인조 중 최연소자였으며,그의 동료들이 아마추어 작곡가로 머물렀던 것과 달리 전문 음악가로 대성한다.그는5인조의 음악적 목표에서 출발하면서 특히 오페라와 교향시 부문에서 탁월한 음악적 업적을 남겼으며,특히 베를리오즈,슈트라우스 등과 더불어 음악사상 관현악 편성법의 대가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그는 동료들의 많은 작품의 관현악 편성을 도맡아 했으며,그의 저서〈화성학 실습〉과〈관현악법 원리〉는 이 분야의 고전적 교과서로 꼽히고 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음악애호가의 가정환경에서 성장하며 아마추어로서의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성장해가면서는 피아노보다는 민속음악이나 오페라에 더 관심을 가졌던 그는12세 때(1856)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순양함‘알마즈 함’에 배속되었고,이 시절에 발라키레프가 보내준 민요를 주제로 한 <내림 마장조 교향곡>(1865)을 작곡했다.이것이 러시아에서 씌어진 최초의 교향곡이다. 2년 반에 걸친 원양 항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그는 계속해서 가곡〈3개의 러시아 주제에 의한 서곡〉(1866),교향곡 제2번(1868)과,자신의 첫번째 오페라〈프스코프의 소녀〉(1868~72)등을 작곡하면서 작곡에 더욱 정진하게 된다. 그는14편의 오페라, 4편의 교향곡, 5편의 교향시 외에 피아노 협주곡,현악4중주,관현악 모음곡,피아노 곡, 40편이 넘는 가곡,합창곡 등을 남겼다.〈천일야화〉에 기초한〈세헤라자데〉(Op.33, 1888)와〈스페인 기상곡〉은 오늘날에도 자주 연주되는 그의 대표적 관현악 모음곡이지만,그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난 장르는 오페라 분야,특히 환상과 유머가 넘치는 요정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이다.이러한 작품에서 그는 자신의 탁월한 관현악법의 기술과 생생한 상상력을 통해 현란한 그림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오페라 작곡에 있어서 가졌던 원칙은 드라마보다는 음악이 우선이었는데,바로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이 극적인 점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그의 대표적 오페라로는〈사드코(Sadko)〉(1896)와〈금계(金鷄)〉(1907)가 있다. <출처: 서양음악사100장면(2),.pp.303~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