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 이조 참판 행 통정대부 병조 참의 지제교 정공 묘갈명〔贈吏曹參判行通政大夫兵曹參議知製敎丁公墓碣銘〕
공의 휘는 시윤(時潤), 자는 자우(子雨), 성은 정씨(丁氏),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시조는 윤종(允宗)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자손들이 매우 현달하였다. 우리나라의 벼슬하는 집안들은 홍문관에 선발되는 것을 지극한 영광으로 여기는데, 그것을 마치 집에서 전수되는 물건처럼 8대를 연이어 온 것은 공의 경우가 유일하다. 교리 자급(子伋)이 참판 수강(壽岡)을 낳고, 참판은 판서를 지내고 시호가 공안(恭安)인 옥형(玉亨)을 낳았다. 판서는 좌찬성을 지내고 시호가 충정(忠靖)인 응두(應斗)를 낳았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이다. 증조부는 윤복(胤福)으로 대사헌을 지냈고, 조부는 호선(好善)으로 관찰사를 지냈다. 부친은 언벽(彦璧)으로 교리를 지냈다. 모친은 목호옹 낙선(睦壺翁樂善)의 따님으로, 인조 병술년(1646, 인조24)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태어난 지 7년 만에 부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의지할 데 없는 외롭고 고단한 처지가 되어 제대로 성장하고 자립할 수 없을 것 같았으나,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16세에 육촌 형인 우담(愚潭) 선생과 시랑(侍郞) 임유후(任有後)를 따라 공부함으로써 명성을 크게 드날렸다.
기유년(1669, 현종10)에 진사가 되었다.
병진년(1676, 숙종2)에 음보(蔭補)로 금정 찰방(金井察訪)이 되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졸(吏卒)을 살리고 강포한 세력을 억눌렀다. 그러자 이졸들이 “놓칠 수 없는 분이다.”라고 하면서 임기가 다하였을 때 임기를 늘려 달라고 청원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특별히 계속 직무를 이어 가도록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찰에 올랐다.
숙종 경오년(1690)에 영춘 현감(永春縣監)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 지평으로 조정의 부름을 받자 부로(父老)들이 길을 에워싸고 수레를 부여잡으며 못 가게 만류하였으며 철로 비석을 만들어 떠난 사람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담았다. 이로부터 병조에서는 낭관(郎官)을, 춘방(春坊)에서는 사서(司書)를, 간원(諫院)에서는 정언과 헌납을 지냈고, 홍문관의 선발에 들고 나서는 수찬, 교리, 서학 교수(西學敎授)를 지냈다. 천조랑(天曹郎)의 경우 의망(擬望)은 되었으나 임명되지 못하였고 지제교(知製敎)는 늘 겸대(兼帶)하였다. 왕명으로 지방에 나갈 경우는 호남에서 전답을 점검하고 관서(關西)에서 어사직(御史職)을 수행하였다. 그 사이 문신 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자 상이 고비(皐比)를 하사함으로써 은총을 내렸다.
갑술년(1694)에 문사랑(問事郎)으로서 김춘택(金春澤)의 은옥(銀獄)을 조사하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조정의 판도가 일변하여 국문을 담당하던 신하들이 모두 축출되었고, 이때 공 역시 축출된 인물에 포함되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서용되어 마전 군수(麻田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는 대개 당로자가 공이 일전에 천조(天曹)에 의망되었던 것을 꺼린 나머지 일부러 4품의 직급으로 올려 줌으로써 저해한 것이다.
무인년(1698)에 필선(弼善)에 제수되었다. 이 당시는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장물죄를 범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으나 정작 이에 대한 문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때에 조정에서 의론을 거쳐 청(淸)나라에 쌀을 요청하려 하자 공이 감개한 심정으로 소장을 올려 말하기를,
“중외의 유사(有司)들이 백성들이 죽어 가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윗사람이 태만해서 아랫사람에게 해를 입힌다.’라는 경우입니다. 이러고도 만 리 밖의 나라에 동정을 구걸한다면 또한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장물죄를 범한 아전의 경우 건네준 자이든 건네받은 자이든 법으로 볼 때 마땅히 같은 죄과를 적용해야 할 것인데, 준 자는 죄받고 받은 자는 아무 일 없이 편안하게 있습니다. 법은 하나일 뿐인데 어째서 약한 자에게는 시행되고 귀하고 강한 자에게는 굴복하는 것입니까.”
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권귀(權貴)들은 대단히 불쾌해하면서 상 앞에서 다투어 그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이에 상은 삭출(削黜)을 명하였다. 얼마 뒤에 대신(臺臣)들이 찬축(竄逐)을 청하였으나 상은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공의 충정을 헤아린 결과였다. 공은 성품이 중후하고 너그러우며 타고난 참된 성품 그대로 행동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다. 언행으로 보면 남과 대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공을 모르는 자들은 혹 공의 성품이 유순한 데 가깝다고 여겼으나, 이와 같이 특정 사안을 만났을 때는 과감하게 말함으로써 그 확고한 신념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신사년(1701)에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제수되었다.
병술년(1706)에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정해년(1707)에 통정대부에 올라 길주 목사(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전후로 백성들을 다스릴 때 오직 오교(五敎)의 시행을 급선무로 여겨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로 하여금 모두 다 효제충신(孝弟忠信)의 의리와 윗사람을 친애하고 어른을 섬기는 의리를 알도록 하는 한편, 호협한 행동을 하면서 특히나 불량한 자들은 법으로 다스려 용서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순종하였다.
이듬해 모종의 일로 인해 파면되었다.
또 그 이듬해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외직으로 나가 영월 부사(寧越府使)가 되었다가 3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두호정사(斗湖亭舍)에서 소요하며 한가롭게 지냈다.
계사년(1713)에 병을 얻어 서울로 돌아와 6월 8일에 졸하니 향년 68세였다. 그해 8월에 안산군(安山郡) 내양등대(內楊等代) 해좌(亥坐)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그곳은 공의 선영(先塋)이다.
공은 성품이 효성스러웠다. 평소 부모 얼굴을 모르는 것이 가슴에 통한으로 맺혀 새벽이면 반드시 사당을 배알하였고, 부모의 기일이 되면 그 곡하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던 한편, 그달에는 반드시 초하룻날부터 재계하고 소식(素食)하여 그믐날을 다 보내고서야 중지하였다. 또 마을에서 수양가(收養家)를 만날 양이면 매우 도타운 성의를 보이면서 제사에 제수를 보내 주고 묘에 표석을 세워 주니, 이는 바로 부모를 향한 그리운 마음을 미루어 행한 것이다. 조정에 올라서는 청렴결백함을 자랑하려 하지 않았고, 벼슬에서 물러나 본가에 머무를 때에는 거친 밥조차 늘 잇지 못하는 형편이나 한 번도 권귀의 문전을 기웃거리지 않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직위가 덕에 걸맞지 못하게 되었으나, 세상이 상전벽해처럼 변하는 동안 끝까지 깨끗하다는 명성으로 온전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는가.
숙부인(淑夫人) 이씨(李氏)는 시직(侍直) 이정원(李正源)의 따님이자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의 손녀이다. 시직공(侍直公)이 일찍이 말하기를 “너를 남자로 태어나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공에게 시집와서는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하인에게 인자하였으며, 집이 비록 가난하나 의리에 맞지 않으면 단 하나도 취하는 법이 없으니, 종인(宗人)들이 다 본보기로 삼았다. 향년 80세로 신축년(1721, 경종1) 6월 16일에 졸하여 공의 묘에 부장하였다.
3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가운데 첫째는 도태(道泰), 둘째는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를 지낸 도복(道復), 셋째는 도제(道濟)이다. 두 사위는 이광(李洸)과 문과에 급제하고 정랑(正郎)을 지낸 이수대(李遂大)이다. 측실에게서 둔 아들은 도길(道吉)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두 사위는 이사근(李思謹), 이기겸(李基謙)이다.
도태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사 항신(恒愼), 필신(必愼)이며 세 사위는 김정광(金鼎光), 문과에 급제하고 참판을 지낸 이제화(李齊華), 최인유(崔仁裕)이다. 도복은 1남 5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생원 가신(可愼)이고, 다섯 사위는 생원 이유인(李裕仁), 이윤기(李允基), 권형징(權泂澂), 진사 신정악(申挺岳), 홍유(洪)이다. 도제는 4남을 두었는데 생원 의신(宜愼), 윤신(允愼), 보신(普愼), 근신(近愼)이며, 측실에게서 둔 아들은 무신(懋愼)이다. 이광은 4녀를 낳았는데 모두 출가하였다. 이수대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민헌(民獻), 민준(民儁), 민현(民顯)이고 딸은 출가하였다.
증손과 현손 이하는 많아서 다 적지 못한다. 단 항신의 아들 지해(志諧)에게는 재원(載遠)이란 아들이 있는데 그는 전임 군수로서 공의 제사를 모시면서 명(銘)을 부탁한 자이고, 그의 아우 재운(載運)은 현재 침랑(寢郞)이며, 가신의 아들 지덕(志德)은 현재 현감을 맡고 있다. 이상은 증손과 현손으로서 조정에 벼슬한 자들이다.
이제화의 아들 헌경(獻慶)은 문과에 급제한 전임 승지이고, 한경(漢慶)은 정언을 지냈으며, 최인유의 아들 경(炅)은 현재 군수를 맡고 있고 경의 아들 현중(顯重)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상은 외증손과 외현손으로서 알려진 자들이다.
도길은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수신(守愼), 우신(友愼)이고, 세 사위는 박곤수(朴崑秀), 이원채(李元采), 이서만(李瑞晩)이다. 이사근은 1남을 두었는데 영화(永和)이고 이기겸은 3남을 두었는데 사량(思良), 사좌(思佐), 사온(思溫)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때가 되면 나가고 / 時則行
때가 아니면 숨으니 / 不時則藏
나는 예전 그대로건만 / 我則如故
도에는 성쇠의 차이가 있네 / 道有消長
맑은 덕과 완전한 명절은 / 淸德完名
조맹이 주고 뺏을 바 아니니 / 非趙孟與奪
행적을 추려 명을 새기매 모두 지나치지 않네 / 銘以最蹟儘匪溢
[주-D001] 우담(愚潭) 선생 :
정시한(丁時翰, 1625~1707)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군익(君翊), 호는 우담이다.
[주-D002] 임유후(任有後) :
1601~1673.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효백(孝伯), 호는 만휴(萬休), 시호는 정희(貞僖)이다.
[주-D003] 김춘택(金春澤)의 은옥(銀獄) :
1694년 김진귀(金鎭龜)의 장자 김춘택이 한중혁을 비롯한 서인 자제들과 함께 은화(銀貨)를 모아 궁중에 내통하여 폐위된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였다고 하여 일어난 옥사(獄事)를 말한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민암이 이 사건의 국문을 담당하면서 서인을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는데, 희빈 장씨의 방자한 행동에 불만이 커져 가던 숙종은 오히려 민암의 처사를 문제 삼아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서인을 다시 등용하게 된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燃藜室記述 卷34 庚申大黜陟許堅之獄》
[주-D004] 윗사람이 …… 입힌다 :
《맹자》 〈양혜왕 하(梁惠王下)〉에 나오는 맹자의 말이다. 흉년이 되어 백성들이 죽고 이산(離散)하는 와중에도 담당 관리인 유사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아뢰지 않는 현실을 두고 한 말이다.
[주-D005] 오교(五敎) :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을 말한다. 순(舜) 임금이 신하인 설(契)에게 “백성이 서로 친하지 않고 오품(五品)이 서로 손순(遜順)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대를 사도(司徒)의 관직에 임명하노니, 그대는 오교를 공경히 시행하되 관대한 방향으로 펼치도록 하라.”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書經 舜典》
[주-D006] 홍유(洪) :
《식산집(息山集)》 권6 〈병조참의정공묘지명(兵曹參議丁公墓誌銘)〉에는 ‘洪晅’으로 되어 있다. 한편 《유회당집(有懷堂集)》 권9 〈승지정공묘지명(承旨丁公墓誌銘)〉에는 역시 ‘洪’로 되어 있다.
[주-D007] 조맹(趙孟)이 …… 아니니 :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덕성이어서 관직처럼 유력자가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말이다. 조맹은 춘추 시대 진(晉)나라 권신(權臣)인 조돈(趙盾)과 그 직계 후손들을 이르는데, 당시에 권력이 막강하여 작록(爵祿)을 자기 마음대로 주고 뺏고 하였다. 이에 맹자가 말하기를 “남이 귀하게 해 준 것은 양귀(良貴)가 아니니, 조맹이 귀하게 해 준 것을 조맹이 능히 천하게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孟子 告子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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