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동안 진주 ㅡ 대전 ㅡ 진주에 들릴 일이 있었다.
흐미...
특히 마지막 진주일정은
애제자의 결혼식 초대를 받은지라
나름(?) 예의껏 차려입고는 집을 나섰었다.
새벽, 대전을 향해 한참을 달리다보니
배가 고파 잠시 휴게소에 정차..
휴게소를 향해 걸어가는데 땅이 기운 듯 다리가 삐끗...
엥? 뭐지?
하고 봤는데...
구두 밑창도 삭나 싶어 보니...
맞다. 삭았다. . . 헐.
나올 때 옷 색에 신발을 맞추려니
운동화나 자주 신는 갈색 캐주얼화는 아니다 싶었다.
결혼식장보다 장례식장믈 많이 갈 나이였던지라
신발은 대충 벗고 들어가면 되서
구두를 꺼내 신을 일이 적었었다.
제자의 결혼식이다보니
그때의 녀석들과도 만나 얘기할 일들이 있다보니
나름 깔맞춤한다고 꺼내 신은 신발인데...
라면 한 그릇 후딱 먹고 얹힌 속을 안고,
(오전 8시 이전에 파는 게 라면뿐이어서. . .)
절뚝 걸음으로 걸으며
'분명 나올 땐 괜찮았는데... ' 싶어 살펴보니
운전하면서 오른발을 써서 뒷굽과 엑셀레이터를 밟는 부분이 으스러진거...
뭐 달리 방법도 없었기에 그 상태로 대전을 향했다.
'구두가 왜 이런가?' 달리며 생각해보니
신지는 않았지만 오래되긴 했다 싶었다.
그러니까 한 20년 전쯤
내가 결혼할 때 정장과 함께 샀던 구두였다.
정장은 이미 110에 28의 근육질 체형에서
D컵에 임신 6개월의 배로 시나브로 변한지라 못 입은지 오래되었지만, 발은 살찌지 않는지라 그래도 가끔은 꺼내 신지 않았나 싶었었다.
결혼할 땐 이미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접고
작은 집에서 대안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인지라
양복입고 구두 신을 일을 별로 없었다.
아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욱.
그 중간중간에 공교육 교사 다시 한다고
임용쳐서 근무하기도 했지만,
그때 알았다.
아이들과 온 몸 섞어가며 뒹굴어야 할
초등교사가 양복입고 구두 신을 일이 별로 없다는 걸.
애들 8학년 졸업시킬 때나 입고 신었었네.. 그래, 저 구두.ㅋ
한때는 멋부리는 걸 좋아해
꽤 비싼 양복과 와이셔츠, 넥타이를
월급날마다 사 모았는데...
지금은 저 구석탱이 어디엔가 고이 모셔져 있다.
언젠가 입을 날이 있기를,
아니 입을 몸매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며.. ㅋ
. . . . . .
부스러지는 신발을 신고 일정을 소화하고 나니
신발은 양쪽 다 더 걸레가 되어 있었다.
흐미. . .
집으로 들렸다가 내일 새벽에 진주 갈까 싶었는데,
그럼 진주까지 2시간에 2시간이 더 걸리니...
4시간 운전은 자신이 없다고
허리가 통증으로 알려왔다.
오케이~~~ 👌
수선할 매장을 검색하다 보니
매장은 없고 마침 근처에 홈플러스가 있기에
에라, 모르겠다~
큰 맘 먹고 구두를 사기로 했다.
홈플러스에 가면 좀 싼 2~3만원짜리 막 구두를 살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그건 경기도 오산..
(테무에서 맨날 싸구려 물건을 사니
백화점은 고사하고 마트도 안 가본 지 오래라 감을 잃으셨구려.. ^^;;)
뭐 우리가 돈이 없지 안목이 없는 건 아닌지라
집는 족족 가격이 후덜덜..
자꾸 눈이 엘칸토, 에스콰이어 매장 쪽으로 가고...
제일 저렴한 구두가격을 물으니
다행히도 숫자가 한 자리대.
그니까 9만 9천원...
9만 9천원 짜리 세 종류 중 하나를 골라 구입.
사장님이 내게 맞는 치수의 구두를 가지러 창고에 다녀오는 동안, 구두 가게에 앉자 조명빛을 받아 삐까번쩍하게 빛나는 구두들을 보았다.
구두나 옷을 사러 롯0백화점 등을 돌아다니던 시절이 생각났다.
아... 나 이런 거 사고 꾸미는 거 좋아하던 사람이었지.
있는 집안에 없는 자식. ㅋㅋ
실소, 그니까 어처구니가 없어 나도 모르게 웃음이 툭 터져 나왔다.
. . .
. . .
좀 다른 교육을 하고 싶어 가족과도 등지고
안정된 직장, 안락할 가정들을 버리고 떠나온 거였지..,
하긴 그땐 둘 다를 영위할 수 없는,
이것 아님 저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꽁교육에서 대안학교 판으로 꿈을 쫓아 떠나니
일단 월급이 1/5토막이었다.
꽁교육에서 한달에 250만원 정도 받다가
갑자기 대안학교 수습교사 월급이라고 40만원을 주는데.. 음..
6개월 수습기간이 지나면 정교사 월급을 준다는데 그것도 80만원이었다.
또 대안교육 운동 초기인지라 재정 뿐 아니라 학교의 생존도 보장할 수 없었다.
주로 2~ 30대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꿈들을 이뤄보려고
학교에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가정을 꾸리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가정을 꾸린 이들도 가정생활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그때,
그 어려움과 구박을 뚫고 결혼생활을 시작했으나
사랑이란 이름만으론 그 어려움들을 감당하기에는
내 미안함이, 내 자격지심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 미안함이 싫어 가정대신 학교를,
그리고 그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선택했다.
어리고, 좀 모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 둘을 함께 선택할 수 없던
그런 시기였다.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 생각해봐도
이해할수도, 이해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그 사람들만 어렴풋이 느낄 뿐.
(근데 그 시절의 그 사람들 중 지금까지 이 현장에 남아 있는 이는 딱 둘 뿐이다. 최초 대안학교인 산어린이학교 교장하고 있는 한00과 나.
공교육 선생님들이 농담으로 '교직탈출은 지능순'이라 하던데, 뭐 지능이 월등히 높은 둘만 살아남은 거라 믿고 싶지만... 실은 아둔함의 끝판왕일수도. ㅋㅋ)
. . .
. . .
비까번쩍 새 구두를 신고 진주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진주 모텔에 입성하니
신이 내게 예비한 주말의 영화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하하하
내겐 참 친절도 하셔라~~
Tomorrow is another day!
배불뚝이 아저씨가 됐지만 그래도 금새 알아보고
인사도 하고 막 챙겨줬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녀석들이 훌쩍 커서
이젠 애들의 애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된 녀석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아이들을 한 번 안아보고 싶었는데
무서워 해서 패스~~~ ㅜㅜ
어려운 환경과 시기를 잘 이겨내고
소방관 부부가 된 영인이.
큰 박수를 쳐줬다.
가만히 앉아 식을 바라보며
정말정말 잘 살기를 기도했다.
소방관이라 교육에는 큰 연관이 없음에도 선생님 하시는 일이라고 이전 무등 10주년 책도 후원하고, 책도 읽어보겠다 해서 보내줬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잘 키우길 바랐다.
. . . . . .
집에 돌아와 주말을 주욱 돌아보니
새 구두를 사신고 가길 참 잘했다 싶었다.
그러려고 신발이 부셔졌나보다.
새롭고 좋은 기운만 가지고 가라고
새구두를 샀나보다.
첫댓글 제가 작품 외에 쌓아두는 게 구두인데여... ㅋㅋㅋ
시내 나가면 들여다 보는 게 구두, 몇 년 전에만 해도 빨간 하이힐 신고 다녔는데...
재작년인가 그걸 신고 나갔다 왔더니 발이 너무 아파서리...
1년 넘게 보기만 하다가 작년에 하이힐 구두를 여름 샌달 세 켤레만 남기고 몽땅 소거하고는...
와우, 이제 나 정말로 할매가 되얐구나 생각하며 비탄에 젖은 거 ^^;;
옛날에 필리핀에 이멜다 대텅이 비싼 구두를 엄청 샀다고 사람들이 지탄했었는데,
저는 그게 왜 지탄할 일인가, 나도 돈이 많았다면 사서 쌓아 놨을 정도인 걸, 뭐 그런 생각도 했었던... 하하~~
장쌤 양복 빼 입은 거 멋져요, 언능 살 빼고 잘 차려입고 애들 가르치기를요~~~
구런데 그 동네에서는 요즘도 고리타분한 결혼 관행이 인나바여... ^^;;;
아마 저만 고리타분 할 수도. ㅋㅋ
살을 빼야 하는데, 하는데 하며 말만 하네요. ㅋ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나이가 떠오르네요.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은 가물가물하고 제목만.ㅋ 소설을 읽어도 그 때 뿐이고 내용이 기억이 안나니 내 기억력은 뭔가 싶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읽는 이에게 아무리 고요한 자국을 남기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죠.ㅎㅎ
자신이 갖은 최고로 좋은 단정한 옷 꺼내입고 깨끗한 신발 신고 가서 마음을 다해 축복해 주는 것, 그런 것이 마음이 모습으로 드러나는 정성인 것 같아요.
저는 '구두'하면 계용묵의 구두!
어쩜 '오해'받고 사는 게 나의 삶임을,
그 수필이 인상적이었을 때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