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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녹취록>
제목: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일시: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정오
대상: 성동구청 기독신우회
설교안: https://cafe.daum.net/Wellspring/W8Aq/43
영상: https://youtu.be/WjpjiPt7f6s?si=4OUufNfHQ4iQmir_
지난 목요일 날 서울시 공직자 연합 예배 참석을 했죠. 그곳에 우리 서울시에 있는 각 구 신우회 그리고 서울시 산하 어떤 기관들에서 함께하는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서울시의 공직자들 가운데 간절한 마음으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분들이 많구나!’ 그래서 은혜를 받고 도전을 받고 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고 하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시는데 ‘주님의 구원이 뭘까’ 또는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 우리는 어떻게 다른 걸까?’ ‘이 세상은 어떤 곳이고 또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이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연합예배 때는 ‘천국은 정말 있습니다’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셨죠. 그래서 임사체험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설교자의 개인적인 체험들을 통해서 ‘정말 천국은 있다’ ‘그러니 신앙생활 바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실히 복음의 삶을 살자!’ 하는 그런 도전적인 설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배 참석하신 분들 중에는 ‘우리 신우회 예배를 인도하시는 조해강 목사님은 오늘 설교를 어떻게 들으셨을까?’ 하고 궁금해하셨을 것 같아요. 제가 외부에서 설교를 들으면 꼭 소감을 쓰는데 아직은 소감을 쓰지는 않았어요. 다만 이런 생각이 좀 들었어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그 하는 동기가 있지요. 동인(動因), 모티브(motive)라고 하는데 ‘왜 하는가?’ 어떤 것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할 수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어떤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할 수도 있고, 어떤 것은 두려움 때문에 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두려움 때문에 무엇을 한다는 것은 바른 동기는 아니지 않냐! 사람이 두려움 때문에 교통 법규를 지키죠. 범칙금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그런 일을 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초청하시고 이끄실 때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도다!’ ‘하나님의 사랑에 인도되어 나간다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옥의 형벌을 면하기 위하여, 또는 다 들려 올라가는 천국에 나만 소외되는 사람 되는 그런 불행한 사태를 막기 위하여, 또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지옥의 불구덩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 저는 그 삶이 익숙해왔지만 그런 식으로 많이 전했지만, ‘크리스찬이 신앙 생활하는 동기에 대해서만큼은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곳에서 제가 구원에 대해서 정의를 한 적이 있죠. 제가 이렇게 정의를 했어요.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저에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했어요. 왜냐면 삭개오같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방문하셔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다’라고 하셨을 때 삭개오의 집에 임한 구원은... 그 전까지의 삭개오는 동네에서 비웃음을 받는 혐오의 대상이었죠.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삭개오는 ‘자기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겠습니다.’ ‘토색(횡령)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하면서 자신이 이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모습을 보이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아,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삭개오에게 예비하신 그런 계획하신 삶이 있는데 그것을 처음에는 몰랐어요.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아,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계획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이 ‘오늘 구원이 여기에 임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거로구나!’
구원은 더 많은 의미가 있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도 있고요. 또 최근에 제가 옮기고(번역하고) 있는 톰 라이트가 설명하는 구원도 있고요. 톰 라이트(Tom Wright)는 그렇게 말하는 거 같아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 세상 회복 프로젝트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이 세상을 회복하시는데 이 세상 전체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도 그 회복된 세상 안에 포함되어 있는 거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여러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원받은 우리들이 또는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냐?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갈 것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그리고 인간을 그곳에 관리자로 세우신 세상에 ‘아, 내가 내 욕심만 챙기지 말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나를 여기에 심으시고 이곳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깨닫고 한번 하나님의 뜻을 펼쳐가는 인생을 살아봐야 되겠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구원받은 우리들이 꿈꾸는 또는 살아야 할 삶이 아닐까? 그렇게 살다 보면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있고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하다 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 때... 사실 지금 부르신 것은 적절치 않죠. 좋은 때가 아니어요. 왜냐면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고 난 다음이거든요. 그 전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지 않으셨을까요 ‘아담아!’ 하고 부르지 않으셨을까요? 아담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에덴 동산에 있죠. 에덴 동산!
여러분, 에덴 동산이 어디입니까? 혹시 에덴 동산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생각해 보셨나요 에덴 동산에서 네 개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니까 그 두 강은 확실합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또 나머지 두 강은 사람마다 좀 틀려요. 제가 약 20몇 년 전에 신대원 다닐 때, 제 친구가 - 동기죠 – 에덴동산의 위치를 고고학적으로 그러니까 과학적으로 이렇게 분석을 했어요. 대륙이동설을...
이전에 판게아(Pangea)라고 하는 온 세상이 한 대륙이었을 때, 아마 거기에 강이 이렇게 한 곳으로 물려 있었을 건데 그 강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네 강이 흘러나오니까… 그게 대륙이동이 이렇게 생기고 나니까 티그리스, 유프라테스는 확실한데 나머지 두 강은 비틀어졌을 거다. 하면서 이것을 다시 이렇게 맞춰 보면 에덴 동산의 위치는 여기다. 그렇게 저에게 설득을 했는데 ‘야, 너 언제 그런 거 찾아봤니?’ 그럴싸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어떤 사람들이 영국의 고고학자(데이빗 롤)가 에덴동산의 위치를 정말로 ‘여기다’ 하고 그럴 싸한 것을 고고학적으로 주장을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에덴 동산은 하나님이 거기 거니시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에덴동산은... ‘고고학적으로 실제 여기가 에덴동산이다.’ 하는 것이 의미가 없지요. 마치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 거기에 하나님이 ‘내 눈과 귀가 여기 있겠다’ 하셨잖아요?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이 떠나셨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에덴 동산이 지금 여기다 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그곳은 의미가 없는 장소이죠. 다만 고고학자가 고고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성경의 이야기가 그냥 허무맹랑한 게 아니다.’라고 증명한 것들은 가치가 있는 주장인 것 같아요.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에덴동산의 의미는 거기 하나님이 계시고 거기 사람을 들이셔서 거기서 사람을 만나시고 그곳을 센터로 삼아 온 세상을 번영케 하는 그 생명의 중심부이지요. 이 똑같은 역사를 가나안 땅,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이루려고 하신 거죠. 그러나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배반하고 쫓겨났죠. 아담처럼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예수님을 보내셔서 친히 그리스도 안에 임재하시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나도 아버지 안에 있다.’ ‘너희도 내 안에 거하라.’ 하고 새로운 에덴 동산을 만드셨죠. 그것이 교회에요.
에덴동산은 그냥 아름답고 풍요로운 땅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이죠.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하신다는 의미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셨다면 사실은 에덴동산이라는 의미고, 또 예수님께서 교회를 부르셔서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아버지께서도 너희와 함께 하신다.’ 하신 이유는 교회가 에덴동산과 같은 역할을 할 거라는 뜻이죠.
그런데 아담이 전에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 왜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했을 거예요. ‘아담아 오늘은 에덴동산 동쪽에 가서 그곳의 짐승들 이름을 좀 지어라.’ 하면 에덴 동산에 동쪽으로 가고 그랬겠죠. 어떤 날은 아담이 하나님을 ‘하나님, 제게 하나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아마 그런 시간이 있었겠죠.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시간이 있나요 하나님께 제안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나요 여러분의 기도 생활이 그런 거잖아요.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시죠?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죠? 여러분이 기도시간에 하나님께 ‘주님, 저 좀 힘 듭니다.’ 하고 상담하기도 하지요. 거기 그곳이 에덴동산이죠.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부르셨죠. 아담과 하와는 그전까지는 벌거벗었지만 서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죠.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로는 서로 자기의 수치를 가리느라 벌거벗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거죠.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벌거벗김을 당하셨지만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죠(히브리서 12:2). 예수님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신 거예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수님의 처지를 보고 ‘수치스럽다!’ ‘고통스럽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지 않으셨죠. 아담과 하와도 전에 하나님 앞에 있을 때, 그들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어요. 왜요? 왜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삶은 부끄러운 삶이 아니에요.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않고 부정한 짓을 하면 아무리 자기를 포장해도 그건 수치스러운 거예요. 하나님 앞에 수치스러운 거고, 사실은 사람들 앞에도 수치스러운 거예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셨어요. 어린 아이지요. ‘사무엘아!’ 근데 그 소리를 제사장은 듣지 못했어요. 귀가 멀어서 눈이 멀고. 근데 사무엘은 들었어요. 성전에서 잠자고 있을 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겠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낼까?’ 하고 하나님이 이사야를 찾으셨죠.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십시오.’ 예수님도 성경을 읽다가 ‘아, 이 두루마리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구나!’(히브리서 10:7) 하고 일어서서 나사렛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죠.
저는 오늘 설교준비는 사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부끄러워 숨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준비된 사람이 있다는, 그 두 개를 대조하는 설교를 하려고 왔어요. 근데 여기서 찬송하면서 마음이 바뀌어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그것도 ‘예, 저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시다고요? 제가 그 일을 해야 된다고요?’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실 때, 그 감동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 길은 외로운 길이에요. ‘하나님. 왜 저에게 그런 것 보여 주셔서 제가 이렇게 힘들어야 합니까?’ 그럴 때가 있어요.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그런 고통스러운 때가 있어요.
여러분들도 지금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자리에 왔어요. 때로는 여러분도 갈등을 할 거예요. 이 자리에 온 것뿐 아니라 여러분이 맡고 있는 어떤 직임에 대한 결정 때문에 말이에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적어도 이 자리에서 요것만은 내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겠어!’ 하고 결정한 것 때문에 여러분은 어려움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내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감동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때로는 그 일이 힘들 수도 있다고요. 외로울 수도 있다고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주님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우리 신우회 회원 여러분, 여러분이 여기 잘 오셨는데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시는 여러분의 앞길은 순탄치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우리 같이 그 길을 믿음으로 이겨 나갑시다. 아멘.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격려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한번 격려할까요?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십니다.’ 예, 하나님 여러분과 함께하셔서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부끄러워서 피하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 저 여기 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결단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힘주셔서 우리의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존귀하신 주님,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을 때 지금의 아담은 너무 부끄러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무엘을, 이사야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셨을 때,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나갔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이 자리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어렵고 때때로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 우리 앞에 있음을 지금 다시금 깨닫습니다.
하나님, 많은 사람이 걷지는 않을지라도, 찾는 이가 적을지라도 그 길이 좁고 협착하기에… 그러나 부끄럽지 않는 길 되게 하여 주시옵고, 그리고 주님이 언젠가 우리의 선택이 헛되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시는 그날이 반드시 올 줄 확신하고 피차 격려하며 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