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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7일 주일 설교
시리즈 주제: 21세기 현대인을 위한 복음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 걸까요?
제목: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요한복음 1:9~13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설교를 위한 묵상
21세기를 세속사회라고 부른다. 세속사회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다. 그런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시편에 두번씩이나 반복되는 말씀처럼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열매인 진실과 자비를 저버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매우 종교적인 세상에서도 매우 세속적인 세상에서도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은 있을 것이다.
아집과 무지는 인간의 한계로 말미암는 부족현상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신앙 자체를 더 이상 필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선을 추구하고 양심을 지키는데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의지나 결심으로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이런 현상은 아마 중세시대에 교권이 타락하고 종교전쟁 등으로 세상이 허망하게 되는 것을 본 사람들이 종교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한 것과 유사할 것이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처럼 하나님은 만들어진 존재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오늘 한국 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종교인들의 일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다시 한번 종교의 필요성이 현격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느끼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아예 종교나 신앙을 언급하는 그 자체를 인간다움을 부인하는 무지나 맹신으로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권위가 없는 사회는 기초가 흔들리는 사회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집안에 어른이 없으면 그 집안은 콩가루가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야를 보라. 이보다 더 콩가루 집안이 있는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어떤 규범이나 권위가 있는가? 오로지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편가르기라는 유아적 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인간다움도 없고 논리나 이성이나 양심도 없다. 권위를 저버린 사회가 마주하는 비열하고 초라한 모습,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스스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겠다는 자만과 허영으로 일어서서 그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에게 처참하게 망가지고 난 뒤에 비로소 자신이 유한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닐까? 1985년에 중학교 국어선생님이 고등학교 1학년생인 나에게 편지를 보내신 적이 있다. 그 편지에서 내가 기억하는 한 마디는 ‘유한(有限)자적 존재’라는 말이다. 당시에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던 나의 신앙을 설명하신 국어선생님이 표현이었다. 국어선생님은 인간이 유한자적 존재임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그 상황에서 어떤 삶의 방식을 선택하셨을까?
2022년 3월부터 1년가량 나는 오늘을 위한 복음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하고 있다. 사실 나는 늘 이 문제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특별히 나는 21세기 현대인을 위한 복음을 정리해 보고 싶었다. 즉, 오늘 나는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스스로 정리해 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스무 개의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글을 썼다. 그것이 소책자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 걸까요?’이다. 나는 그 소책자의 해설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설교로 정리했다. 그렇게 나는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가 사역하는 새소망교회와 성동구청 기독신우회 수요예배에서 이 주제로 설교를 했다.
사실 이미 해설서가 있지만 그것을 설교로 만들 때는 새로운 통찰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 시리즈 설교를 통해서 몇 가지 주제를 더욱 강하게 붙들었다. 그것은 ‘성경 드라마의 시놉시스’라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나타났고, 또한 종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각성으로 드러났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이라면 그 뜻은 지금 우리나라와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제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문제에 대한 천상의 청사진을 펼쳐야 할 시간이 되었다고 느낀다.
이번 주일에 나는 지난 2년간 설교한 내용을 종합할 것이다. 그것은 스무개의 질문에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이다. 나는 이 질문에 주어를 넣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나는 이번 설교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이다. 믿음은 하늘의 부르심에 대한 반응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현세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세계관이며 세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기초가 된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는 먼저 하늘의 부르심을 들었기 때문이며 둘째로 달리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존재를 확신할 수 있는 길이 이것이며, 내가 삶에 대하여 감사할 수 있는 길이 이것이며, 미래를 희망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에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
나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일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 믿음이 만들어갈 나의 존재라는 열매가 결국 나를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 열매를 맛보고 유익을 얻을 것이다. 유한자적 존재로서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름으로 영원에 잇대어 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것이 현재 내가 찾은 최고의 길이다.
설교 개요
1. 믿음이란 무엇인가?
2.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
3.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1.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또는 나는 그것을 믿는다! 이렇게 믿음에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설명할 때 우리는 그 믿음의 대상 또는 믿음의 내용을 제시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을 믿는 걸까요? 그 믿음의 내용을 신조(信條)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글로 정리한 것을 신경(信經)이라고 합니다. 사도신경이 대표적입니다. 사도신경에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그 아들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재림, 교회와 죄사함과 영생이 포함됩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확인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공적인 예배 시간에 우리가 믿는 내용을 고백하는 이유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교회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늘 새롭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계속 하나님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성경이 소개하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전능하신 분으로 소개됩니다. 아브라함은 나중에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순종을 살피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분임을 알게 됩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모세에게는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소개됩니다. 기드온에게는 두려움에 떠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됩니다(여호와 샬롬). 다윗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와 같은 분으로 고백했습니다. 그 이후에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이스라엘의 신랑으로, 천군천사의 섬김을 받으며 그들을 부리시며 만국을 통치하시는 왕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대상인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하는가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의 상황과 관련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황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경험하는 것을 신체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신앙적인 각성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각성과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며 우리의 신앙은 활력을 얻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앙이 현실 속에서 역동성을 띠게 되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과 관련이 적은 신앙고백을 계속 붙들고 있으면 그 신앙이나 믿음은 더 이상 활력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늘 새로운 신앙적 체험과 각성을 필요로 하며 그런 깨우침이 일어나는 시대마다 영적인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다면 교회가 믿는 바가 이 세상과 별 관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 말은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또는 왜 교회에 다녀야 합니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교회가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없을 때 교회는 침체됩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담은 쪽지를 전도지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전도지에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보통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구원은 죽어서 하늘나라인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예수님을 믿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대답입니다.
문제는 이런 대답이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나 행복으로의 초대 같은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아마 천국과 지옥에 대한 믿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생각이 줄어들기 때문에 더욱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실종된 사회를 세속사회라고 부릅니다. 세속사회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비합리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공적인 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며 교회 같은 곳에서만 허용되는 주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연구하여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 보기도 하고 신앙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를 여러가지 방식으로 제시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이미 그 마음에서 신에 대한 개념을 제거해 버린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나 저런 이야기나 다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진실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섬김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을 하는 교회들은 삶으로 신앙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앙은 더 이상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에서 섬김과 희생과 공감으로 경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신앙의 체험은 종교적인 영역이었습니다. 그것은 방언 같은 은사를 경험하는 집회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신앙의 체험은 가정이나 카페 등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고 소통하면서 교제를 통해 연대감을 키워 나가는 활동을 하는 동안에 경험됩니다.
신앙은 분명 초월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부터 출발하지만 그것이 삶 속에서는 사람에 대한 연대와 공감 또는 섬김으로 나타납니다. 이 두 가지는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는 두 가지 중요한 기둥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은 우리 내면에 확신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느끼는 공감과 기쁨과 소속감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줄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신앙을 활력있게 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저는 그 동안 위 두 요소 중에서 앞 부분에 대하여 주로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신조이며 믿음의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노력입니다. 그 노력의 결과로 저의 소책자, ‘21세기 현대인을 위한 복음: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 걸까요?’와 그 해설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몇 달 동안 이 주제에 대하여 설교를 했습니다.
이 작업은 평생동안 노력하고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대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영역입니다. 오늘은 그 동안 정리한 내용을 종합하여 우리 기독교인은 무엇을 믿는지 다시 한번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고백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이 설교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갈 등불이 되고 우리가 푯대로 삼을 깃발이 될 그것을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무엇을 믿는가?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과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믿는다는 말은 영접하는 것입니다. 영접은 맞이하고 모시어 들인다는 말입니다. 누구를 모시어 들입니까?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소개하는 성경의 요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을 하나님의 활동이나 초청 또는 방문에 대한 긍정적인 응답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며,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우리의 대답입니다. 믿음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고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초청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러분과 같이 저는 어린 시절부터 사도신경을 고백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고백이 무엇이어야 할까에 대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종합하여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마스터플랜(master plan)이며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입니다. 그것은 성경의 주제이며 우리가 성경을 배울 때마다 분명하게 드러나야 할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우리에게 이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등불이며 동시에 우리가 푯대로 삼아야 할 깃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인간인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여주는 대서사시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고 그 계획에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깨닫고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여 자신을 바칩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손으로 지으신 세계를 가꾸시고 돌보시며 생명 충만한 곳이 되게 하려고 계획하셨고 노력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인간을 특별하게 지으시고 그 권리와 임무를 부여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충실한다면 세상은 평화와 번영의 땅이 될 것이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의도를 저버리고 자신의 본분과 소임에 반대되는 일을 한다면 땅은 다시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덮일 것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의 활동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배반과 거스름의 역사입니다. 그것은 에덴에서의 배반이며 노아 시대의 타락이며, 바벨탑의 반역,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으로 나타납니다. 그때마다 세상은 혼잡하게 되며 그 백성의 땅은 황폐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예언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계시하셨습니다. 성경 이야기의 절정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시고 열두 사도를 중심으로 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배웠으며 그 계획에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렇게 해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가 퍼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자신의 욕심과 세상의 자랑을 좇던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그들은 잃어버린 기쁨과 삶의 보람을 되찾았으며 자신의 가정과 마을 공동체가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구원이 임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면서 사람들에게도 그 길에 동참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쁨으로 합류했고 어떤 사람들은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사람들의 삶에서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처음부터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어올 수 없다’(시편 1:5)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이 장차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고 새로운 세상을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실현될 세상이 이미 온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에서 선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삶에 동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회는 온 세상에 퍼졌고 모든 나라와 백성과 방언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무리가 오늘도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시고 인간을 통하여 인간과 더불어 어떻게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기를 희망하시는지 그 뜻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드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며 본분입니다.
3.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제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셨으며 그것을 돌보시고 앞으로 새롭게 만드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이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인간을 지으셨고 계속적으로 인간을 부르심을 믿습니다. 저에게 믿음은 이 세상에 대한 이해이며 미래에 대한 소망이며 동시에 인간으로서 저의 소임에 대한 확신입니다. 저에게 믿음은 이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세계관이며 인생이 무엇인지를 평가하게 하는 인생관입니다. 그리고 신앙은 저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역사관입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예수님이 저에게 바른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역사관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작품이며 하나님의 나라임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며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들을 다스리고 심판하실 분임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살 때 인간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바로 그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게 되며 하나님이 장차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을 물려받고 그 세상에 동참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저는 현대인들이 어떻게 이 세상과 인생과 역사를 이해하는지 조금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양심과 보편적인 상식과 윤리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비양심적인 행동들과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면서 동시에 좌절하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 그렇게 노력한 사람들이 여전히 법치와 인권과 절차가 유린당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복수의 칼을 갈 따름입니다.
물론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되겠습니다. 과학적 발견을 성경으로 재단하여 그 진위를 판별하는 것은 성경의 본래 기능과 역할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교권이 정치와 사회 공동체의 문제를 좌우하는 것도 현대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과학의 이름으로 성경의 진리를 미신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일도 잘못입니다. 또한 정치권이나 국가공동체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신념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배척하는 일도 큰 잘못입니다.
과학문명이나 기술은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며 그 기술과 문명을 바르게 사용하여 인류에게 유익이 되게 할 길잡이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끊임없는 무기경쟁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크고 작은 단위의 사회가 공통적으로 따라야 할 가치와 양심을 든든하게 할 기초는 어느 시대나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이나 종교활동은 바로 그 보편적 가치와 양심을 바로잡고 그 기초를 점검하여 다지는 일입니다. 그것을 외면하는 공동체는 모래 위에 집을 세우는 사람들처럼 끊임없이 기초가 무너지는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미국이나 중국 또는 소련 같은 강대국의 힘을 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워싱턴의 외교가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했으며, 중국의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세워 활동하고,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을 보고 그들의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공과에 대한 논쟁은 우리 조상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헌신을 이해하려는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간이 흘러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니 미국의 민주주의에 기대어 살 길을 찾으려 했던 분들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진상을 알고 나서 어떻게 실망했는지 우리는 듣습니다. 또한 소련의 혁명군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던 분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우리 선배 지도자들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서로를 불신하며 갈등했습니다. 그 갈등의 원인은 아마 지역이나 신분 또는 종교나 사상에 매여 서로를 적대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년이 지났건만 그런 갈등은 여전히 오늘 우리 가운데서 더욱 첨예하게 재연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한 갈등과 전쟁의 위기도 해소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누가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젊은 세대는 통일의 당위성에 대한 생각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합니다. 인간에게 다가오는 위기 앞에서 우리를 하나로 연합하게 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을 가지고 달음질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민주주의가 시작된 그리스 아테네는 물가와 기후위기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미국은 약소국가들에게는 원수 같은 약탈자로 그려질 때가 많습니다. 미국의 지성인들조차도 미국의 민주주의는 병들었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오래 전부터 자본에 휘둘리며 경직된 생각에 갇힌 민중이 쉽게 선동되는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으로 시작한 세계 공산주의도 구소련의 붕괴로 그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이제 공산주의 이념이 유토피아를 만들 것이라는 주장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최고의 가치인양, 또는 빨갱이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철 지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경제체제는 그 자체로 진리는 아닙니다. 누가 그것을 운영하는가에 국민과 국가의 번영이 달려 있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더 많은 엘리트가 필요한 것이 아니며 더 탁월한 과학문명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학벌이나 재력이나 기술에 있어서 공급과잉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양심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이 인간에게 공통으로 있는 양심을 되살아나게 하며 우리가 운용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자유경쟁과 사회보장이라는 제도들을 바르게 작동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 어디에서 인간의 가치를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찾으며 인류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서 인류에게 다가오는 지구적 재앙을 막기 위하여 연합하고 협력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까?
저는 이토록 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다고 확신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배우고 따른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 대한 건전한 생각을 갖게 되며 인간의 본분과 소임에 대하여 깨닫게 되며, 앞으로 우리에게 열릴 희망의 미래를 바라보며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확신 때문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되시고 영원한 희망을 공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다른 길이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하나가 되어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땅은 국경선과 산맥 또는 강과 호수로 나뉘어집니다. 바다는 땅을 서로 멀리 떨어지게 하는 장애물입니다. 그렇게 나라마다 민족마다 지역마다 생각이 다르고 지지하는 가치가 다릅니다. 지리산은 영남과 호남을 나누고 차령산맥이남의 사람들은 양반이라도 관직이 등용하지 말라는 고려의 건국자 왕건의 유언은 천년이 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역량은 자유시 참변을 통해 급격히 약화되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많은 무장독립운동가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요새 그 참변의 원인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저는 정진호 교수가 쓴 역사소설, ‘여명과 혁명, 그리고 운명’을 읽고 있습니다. 그 소설은 성재 이동휘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사를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정교수는 자유시 참변은 우리 조상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감정으로 인한 갈등에서 촉발되었다고 평가합니다.
현재 야당대표는 단식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9월 15일로 16일째 단식이라고 합니다. 갈등과 불통, 상호비방과 적대시는 오늘의 정치권을 가장 적절하게 묘사하는 단어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 단어들은 국론이 분열된 국민들의 상황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땅은 지리적으로 갈라지고, 사람들은 인물을 따라 갈라져서 줄서기를 하고 있으며, 생각도 사분오열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됨을 이루어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서로를 향하여 다른 점을 찾으려 할 때 우리는 결코 화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늘에는 장애물이 없습니다. 물론 영공이라는 개념이 있어서 하늘에도 국경선이 있다지만 하늘은 모두 연결되어 온통 하나입니다. 하늘 아래에 있는 우리는 다 다른 땅에 거하지만 한 하늘 아래에 있다는 공통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습니다. 북녘의 하늘도 남녘의 하늘도 다 같은 하늘입니다. 바다 건너 아메리카의 하늘도 유럽의 하늘도 다 하나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 아래에서 온 인류가 하나입니다. 하늘을 우러를 때 우리는 하나임을 깨닫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서 우리는 서로의 결핍을 보충해 줄 수 있습니다. 서로의 결핍은 더 이상 우리의 좋은 공격포인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늘 아래서 우리의 장점은 서로를 위한 섬김의 이유가 됩니다. 그렇게 땅은 하늘을 인식하고 경외함으로써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늘을 유대인들과 우리 조상들은 하늘님 또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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