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김원종 - 일찍부터 정신생활에 몰두 6. 목회자의 고민을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
1 1970년 3월에는 서울 마포교회로 전임하였다. 마포교회는 신앙이 돈독한 식구들이 있어서 그들로부터 많은 협조를 받았다. 그런데 교회는 전세 65만 원에 세 들어 있었는데 집 주인이 몰래 팔아먹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으니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 나올 형편에 놓여 있었다.
2 새로 교회를 얻으려면 적어도 190만 원은 있어야 했으므로 본부에서 120만 원을 지원받고 자체에서 100만 원을 예산하고 식구들에게 헌금을 분담코자 식구들의 가정을 1차 심방해 보니 모두들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3 조그만 방에 5, 6명씩 기거하며 매일 길거리에 나가 행상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니 식구들을 위해서 정성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새벽 기도회 때면 식구들이 오기 전 4시경에 성초 기도로써 식구들의 명단을 놓고 한 사람 한 사람 상기하며 기도했다. 5시쯤이면 식구들과 같이 기도회를 가졌다.
4 밤이면 보통 11시 30분경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식구들은 ‘교회장은 잠을 자지 않으며 정성 들인다’라는 소문이 나니 식구들은 모두 맡겨진 헌금의 책임을 수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산보다 더 많은 돈이 헌금되어 오르간도 사고 장판, 커튼 등 계획에 없었던 것도 다 마련할 수 있었다.
5 승공 강의를 하기 위하여 경찰서를 방문하여 서장실에 들어가니 천안 경찰서장으로 있던 이세영씨가 마포 경찰서장으로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서장은 당장에 구청의 직원과 동장, 반장, 새마을 지도자 등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라고 했다. 그 이후 기업체, 학교마다 강의를 하러 다녔다. 그때 얼마나 고통이 컸던지 밥맛이 없어졌는데 지금까지 회복이 되지 않는다.
6 마포교회에서 1년 6개월간 시무하다가 1975년 7월 20일 하계 전도 기간에 구리교회로 갔다. 처음 취임사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신앙을 지도하러 온 것이 아니라 배우려고 왔다는 그런 마음뿐이었다.
7 구리교회는 통일산업과 주식회사 일화 등 주요 기업체와 기관이 있어서 재적 인원이 무려 1,500명을 헤아렸으니 대교회임에 틀림없었다. 40일 전도 기간이라 매일 강의를 하고 예배 때면 기성 교회 같은 분위기라 새식구인지 오래된 식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8 처음에는 수련소 강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어느 때는 천막에서, 혹은 교문 강당 등을 전전하면서 예배를 드리니 벌써 분위기조차 어수선하였다. 우선 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밤마다 가정별, 회별로 특별집회를 가져 보았으나 재적 인원의 4분의 1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9 기업체의 책임자를 찾아가 식구들의 신앙지도 등 협조를 바라면 “회사는 회사고 교회는 교회다. 두 가지 일을 겸해서 볼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식구들을 신앙 가운데로 이끌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며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인격 개조는 안 되고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10 지방에 있을 때는 기업체의 식구들이 예배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되어 ‘그럴 수가 있느냐’ 하며 반문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청년들 가운데 주일이 되면 낚시질이나 등산을 다니는 등 해괴 망칙한 소문만 내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11 정말 기가 막혀서 이 모든 사실을 하늘 앞에 솔직히 보고해야 할 것인가 망설여졌다. 그러나 이렇게 내적으로 병들어가는 것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도 없이 한참 계시다가 한탄하셨다.
12 나는 우선 교회를 건축해 놓고 문제들을 하나하나 수습해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성전 건립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현재 교회의 대지 256평을 평당 3만 3천 원씩에 매입하고 수수료 등 비용을 합하니 약 9백만 원이 들어갔다.
13 그동안 성전 건축을 위해 저축해 놓은 자금은 모두 대지 구입비로만 소모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성전 건축 문제를 제직회를 통하여 거론하였더니 연로하신 노인들은 “짓다가 돈이 떨어지면 수습을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노파심을 가지고 “정식으로 짓지 말자”라는 것이었고, 청년층에서는 “1천 명이 넘는 대교회에서 교회 하나 짓지 못한다는 것은 믿음의 문제이다. 믿고 정식으로 건축해 보자”라고 의견이 맞서게 되었다.
14 저녁 회의 때에 많은 식구들과 합의를 보고 나면 다음 날에 반대하는 식구들이 와서 항의를 하고 심한 꾸중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때까지 지방에서 양 떼 같은 어린 식구들을 데리고 목회를 했는데 여기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나를 엎어 굴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무척이나 괴로웠다.
15 생각다 못해 어느 날 밤에는 ‘여기서 목회 못하겠으니 다른 곳으로 보내 달라고 할까’ 하는 마음으로 12시가 넘도록 기도를 하고 있는데 “이놈!” 하는 소리와 함께 “이 선생은 천신만고의 중상과 모략, 비판과 핍박을 받아오면서 한 번도 원망 않고 살아왔는데 식구들이 좀 알아 주지 않는다고 억울한 마음을 갖다니…” 하는 하늘의 책망 소리가 들려왔다.
16 ‘아이쿠 나는 또 불합격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문제들을 수습하고 결국 엄덕문 선생에게 설계를 의뢰해서 건축에 착수했다. 노동은 식구들이 전담하였고 헌금도 목표한 대로 수금이 되어 대망의 교회를 완공하였다.
17 교회가 있으니 식구들도 신앙적으로 안정이 되어 가서 제직회와 각 부서를 조직하고, 유치원, 새사랑 노인대학도 신설하고 새마을금고도 개설했다. 새마을금고를 통해서는 식구들의 생활적 단결과 통일을 위해 일찍이 영양에서 하던 소비조합을 구상하고 럭키대리점을 냈다.
18 그러나 식구를 믿고 세워 놓았는데 5~6개월 사이에 몇 백만 원의 적자를 내버렸다. 1차 실패를 하고 교회에서 새마을금고를 시작해서 340만 원의 재산이 되었다. 그 후 지교회를 세 곳 세웠다. 역시 인재 등용의 실패와 인사이동으로 원금을 모두 반환해 주고 폐쇄하게 되었다. 앞으로도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살아갈 것이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식구님들 대하여 오직 사랑으로 기도해주시는 많은 교회장님 분들께도 감사의 마음을 올려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