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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몸 없는 예수님 뒷바라지>의 줄거리:
음식과 옷 등 필요한 온갖 일을 돌보아 주는 것을 ‘바라지’라고 합니다. 여기에 ‘뒷’자를 붙여서 '뒷바라지'라고 하지요. 즉 앞서지 않고 뒤에 있으면서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을 뒷바라지했다고 합니다. 주로 의식주와 관계되었을 텐데, 그러면 예수님 몸이 없는 이 시대에는 예수님 뒷바라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몸 없는 예수님 뒷바라지
(누가복음 8:1~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몸 없는 예수님 뒷바라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몸 없는 예수님 뒷바라지’
‘바라지’라는 말은 음식이나 옷이나 필요한 모든 것들로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아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뒷’을 붙이면 앞서지 않고 뒤에서 보살피는 것을 더 명확히 하는 효과를 갖게 됩니다. 적어도 바라지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보다 돌보는 사람을 중시합니다. 그가 자신의 일을 할 때에 그 사람 뒤에서 돕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지’에 ‘뒷’을 추가로 붙이는 이유는 절대로 돌보는 사람과 그가 하는 일에 앞서지 않아야 함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산모가 아기를 낳을 때에 산모를 돌보는 사람은 모든 일을 접고 산모에게 집중합니다. 돌보는 사람과 산모 사이에 어떤 일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해산바라지라고 합니다. 또한 옥에 갇힌 사람을 바라지하는 옥바라지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러한 바라지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면 여인들의 뒷바라지가 있습니다. 요새는 풍조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뒷바라지는 여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결혼을 한 여인은 아내로서 남편을 뒷바라지하게 합니다. 자기 자신의 일을 별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만 바라보고 있다가 남편이 하는 일에 필요한 것들을 돕습니다. 그러다 자녀를 낳으면 어머니로서 자녀에게 집중하게 됩니다. 자녀들의 삶을 뒤따르며 바라지를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여인들의 삶이란 조선시대부터 얼마 전까지 대부분 뒷바라지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뒷바라지의 의미와 관련하여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구절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1절은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근처의 각 성과 촌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파하셨고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어서 2~3절에서는 열두 제자 외에도 예수님을 따랐던 여성 제자들에 대해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이 했던 일이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의 뒷바라지였습니다.
3절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섬긴다는 말이 바로 뒷바라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파하시러 각 성과 촌을 다니실 때에 먹을 것과 입을 것과 마실 것을 준비했을 것이고 숙소도 제공하였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뒷바라지를 한 것입니다. 여인들의 뒷바라지는 제자들의 활동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은 온전히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백성의 수를 계수할 때에도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숫자에 포함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시대처럼 남편과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는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여성들은 남편과 자녀들에 앞서 자신의 일을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성이 무시되는 상황은 유대 종교에 의해 묵인되고 정당화되었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일곱 귀신 들렸다가 나은 막달라 마리아가 소개되고 있고, 헤롯 왕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다른 여러 여자가 소개됩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출신이었지만 요안나와 수산나는 사회적으로 높은 집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들이 함께 어울렸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제자들을 뒷바라지 했던 사람 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을 것이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인 살로메를 비롯하여 어부집안의 여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비천한 출신은 아니었으나 경제적으로 하층민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인들이 계층을 막론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섬겼습니다.
여인들이 제자 무리에 포함되었음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음 공백에 모심으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분이나 경제력으로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의 유무나 계층을 따지지 않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다만 여인들은 열두 제자들과는 다른 입장에서 예수님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면서 자신들의 핑크빛 미래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을 통해 꿈과 비전을 이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반해 여인들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쫓겨나갔고 요안나와 수산사는 정확히 어떤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였기에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요청되어 왔던 뒷바라지의 역할을 예수님께 이행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여인들의 사이에는 독립된 다른 일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근거로 하여 독립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보다 앞선 일을 독립적으로 가질 수 없었습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여인들의 독립성을 허락하지 않았음에 원인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들의 마음에서는 예수님이 우선적인 관계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움직임을 따르며 뒷바라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열두 제자를 언급한 후에 예수님을 뒷바라지하였던 여인들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제자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결혼한 여인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여자가 결혼을 하였을 때에 남편과 사이에는 자신의 일이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무슨 일을 하면 남편을 따르며 뒷바라지하는 것이 요구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요구되었던 마음가짐도 이와 같습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뒷바라지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1~3절을 통해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8장부터 나타나는 내용을 7장과 구분합니다. 7장까지를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1차 사역으로 보고, 8장부터를 갈릴리 지역에서 이루어진 2차 사역으로 보고 있습니다. 1차 사역에서는 대중들을 상대로 한 사역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한편 2차 사역에서는 제자들과의 관계에 집중됩니다. 누가는 제자의 역할을 드러내며 2차 사역의 내용을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아직 열두 제자는 제자 본연의 입장을 취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사회적으로 뒷바라지가 체질이 되어버린 여인들의 모습으로부터 참된 제자의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누가가 드러내고자 한 제자는 곧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는 자들입니다.
조선시대에 살았던 여인이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남편보다 앞서는 자신만의 일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는 것이 아내의 역할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우리의 삶의 모습 또한 이와 마찬가지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보다 앞선 나만의 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회적으로 가정에서는 부모이고 직장에서는 사장이나 직원이고 학교에서는 학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다면 이 모든 역할들이 예수님보다 앞서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뒷바라지의 삶을 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많은 경우 우리의 삶은 뒷바라지의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역할과 일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우선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나의 일을 도와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뒷바라지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공생애 때에는 육체를 입고 계셨기에 뒷바라지의 형태가 명확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각 성과 촌을 다니실 때에 뒤따르며 숙식을 제공해드렸습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일에 여러모로 도움을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님은 몸이 없습니다. 몸이 없는 예수님께 어떻게 뒷바라지를 해드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신 뒤에도 계속해서 일해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있을 때 여인들이 뒷바라지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몸 없이 일하실 때 뒷바라지하는 자들이 제자들입니다.
몸 없는 예수님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고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는 구체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이 땅에서 하시는 일은 공생애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시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안에 창조주 하나님이 충만하게 현존하셨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공생애 때의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실 때에는 베드로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예수님의 몸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모습입니다. 또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들으셨을 때도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로 들으시는 일에 대해서도 예수님 안에 충만하게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주권이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하시며 보시기에 좋으신 대로 역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적인 주권이 나를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충만히 계시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관계하는 모든 대상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예수님과 같은 일이 일어나리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음을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이 일을 하고 싶어 하시고 해나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이 됨으로써 몸 없이 이 일을 하고 계신 예수님을 뒷바라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몸으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께서 충만히 현존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현존이 충만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 내 몸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것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뒷바라지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은 바로 몸입니다. 몸은 본래 나의 소유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것 중에 첫 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몸을 예수님께 드림으로써 예수님을 뒷바라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실 때에 하나님이 충만하게 현존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하나님의 충만하신 현존 상태를 이식받을 자들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몸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시는 일에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몸 안으로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이식될 수 있을까요? 당시의 제자들은 아직 십자가 사건 전이었기에 예수님을 온전히 뒷바라지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몸을 뒷바라지하였던 자들이었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이 없어진 후에 예수님을 뒷바라지할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하여 하셨듯이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해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몸을 내어드림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충만히 이식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몸을 성전 삼아서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파하시는 예수님의 뒷바라지를 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충만하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을 한강물이 흐르듯이 지속적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충만해지면 내 마음 안에 하나님의 현존은 충만해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시는 일을 위해 내게 주어진 몸으로 섬기며 뒷바라지하는 것입니다.
이 뒷바라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우리의 삶에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배우자를 대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나에게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기를 원하십니다. 또 자녀를 대할 때에도 예수님이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것처럼 나에게서 예수님 안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기를 원하십니다. 배우자를 대하든 자녀를 대하든 예수님이셨다면 요한복음 5장 19절에서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셨다면 직장에서도 오직 마음에 충만하신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시는 말씀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우리의 몸을 통해 나타날 수 있도록 몸을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몸으로 뒷바라지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동료 목사님의 사모님은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어서 휠체어를 타십니다. 그 사모님과 함께 있을 때는 목사님께서 사모님의 뒷바라지를 하십니다. 사모님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목사님은 자기 일을 앞세울 수가 없습니다. 사모님의 발이 되고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뒷바라지입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을 돕는 분들이 장애우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손과 발이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격체로서 살아계시며 이 땅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입이 되고 손과 발이 되고 몸이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공생애 때처럼 하나님이 충만하게 현존하시는 일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세상에서 성취하기 위해 가장 힘써야 될 일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마음을 드려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는 상태는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이 상태가 한강물 흐르듯이 끊임없이 흘러서 십자가 예수님 안에 나의 마음이 충만해지면 내 몸을 성전 삼아 하나님의 현존하심이 충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셨고 지금도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의 몸으로 이루어가시게 할 수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몸으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불편함이 없도록 뒷바라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도 나의 일을 우선시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지금 예수님께 몸을 드려서 예수님께서 배우자를 만나게끔 해드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도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이 시대를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는데도 여인들과는 다르게 내 일을 독립적으로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결혼을 했어도 배우자를 우선시할 수 없습니다. 내 앞에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이 나의 배우자에 대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해나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보시는 배우자에 대해 하나님의 주권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몸을 드려서 예수님이 배우자를 대하게 하시고 자녀를 대하게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는 것입니다.
몸 없는 예수님을 뒷바라지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내 마음을 십자가로 충만하게 하는 것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충만히 거하시며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상태를 재현해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이 공생애 때에 하셨던 일을 계속해서 해나가실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평생의 삶으로 확정지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내 일은 따로 없습니다. 내 일은 몸이 없는 예수님께 내게 주어진 것 중에 첫 번째인 몸을 드림으로써 뒷바라지하는 것입니다. 내 몸을 드리기에 내 몸이 있음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관계가 동원되는 것입니다. 갖고 있는 재물이나 사회적 신분 또한 예수님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시는데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이 멋진 삶을 살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몸 없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시려는 예수님께 우리의 몸을 드려 뒷바라지하며 살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십자가의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충만하도록 마음을 한강물처럼 흘려보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공생애 때에 예수님께 일어났던 하나님 충만함이 내 안에 이식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