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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0일 주일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43
설교 제목:
하나님은 왜 우상숭배를 싫어하실까?
이사야 44:9~20
사무엘하 15:22~23
***
설교 개요
1. 우상숭배는 허망한 것이다
2. 우상숭배는 생명을 죽이는 공식이다
3. 율법이 우상으로 바뀌는 때
4. 고집부리는 것도 우상숭배다
5. 이념, 주의, 정치색도 우상숭배다
***
1. 우상숭배는 허망한 것이다
이사야 44장 9절부터 20에는 우상숭배에 대한 조롱의 말씀이 나온다. 그 조롱의 말은 이렇게 표현된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모두 허망한 자들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우상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증언하는 자들은 눈이 먼 자들이요,
무지한 자들이니, 마침내 수치만 당할 뿐이다.
이사야 44:9, 표준새번역성경
이어서 예언자는 우상을 만드는 과정을 소개한다. 철로 만든 우상은 대장장이가 만들고, 나무로 만든 우상은 목공이 만든다. 대장장이는 땀 흘리면서 철로 우상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다가 지치고 갈증이 나면 물을 찾는다. 목공도 나무를 잘라 우상을 만든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잘라 불을 피워 몸을 따뜻하게 하고 빵을 굽는다.
대장장이는 쉽게 지치고, 목공이 사용하는 나무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서 자란 것이다. 목공이 그 나무를 자라게 한 것은 아니다. 목공도 나무로 우상도 만들고 땔감으로 사용한다. 그것이 우상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눈이 가려지고 마음이 어두워진 사람이 하는 행동이다. 예언자는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조롱한다:
불을 때고 남은 토막으로는 신상, 곧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숭배하고, 그것에게 기도하며
‘나의 신이시여,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 하고 빈다.
이사야 44:17, 표준새번역성경
예언자는 우상숭배자들의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것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런 사람에게는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다.
고작 한다는 말이 ‘내가 그 나무의 반 토막으로는 불을 피워,
그 불덩이 위에 빵을 굽고 고기를 구워 먹었지.
불을 때고 남은 나무로는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지.
이제 나는 그 나무 토막 앞에 절한다’ 하는구나.
타고 남은 재로나 배를 채우려는 자들,
그들은 어리석은 마음에 미혹되어서, 도움마저 받지 못한다.
손에 쥐고 있는 우상이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사야 44:19~20
이렇게 우상숭배는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십계명에도 우상숭배를 금하는 말씀이 첫부분에 나온다. 그만큼 중요한 계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왜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일까? 하나님은 그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실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변덕스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신들처럼 하나님도 자기만 섬기라고 요구하시는 그런 분일까?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금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우상숭배는 생명을 죽이는 공식이다
앞에서 우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았으니 이제 우상에게 절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우상에게 절하는 사람은 그 쇠붙이나 나무토막으로 만든 것에게 소원을 빈다. 거기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절을 하는 횟수와 방식이 있어서 그대로 따른다. 우상숭배는 공식을 따르는 행위다. 우상숭배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을 따르는 것이다. 공식대로 일정한 행동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특징이다.
공식을 따라 행동하는 것이 왜 나쁜 일일까? 우선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공식에 갇히시는 분이 아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늘의 대리인들은 공식을 따라 살지 않고 늘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늘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면서도 과연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깨우침을 주셨고 그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다.
구약성경 미가 6장 6~8은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신약성경 로마서 12장 2절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신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질문을 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려고 고심한다.
예를 들면, 예언자 미가는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가면 좋을까를 하나님 앞에 질문한다. 하나님 앞에 드릴 제물로 양을 몇 마리 가지고 가면 될까요? 아니면 저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제 맏아들을 바치면 될까요? 이런 질문을 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미가의 깨달음이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표준새번역성경
우상숭배자는 공식을 따르고 참된 신자는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이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려는 노력이다.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하실까? 왜 이렇게 하라고 하셨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구하고 찾는다. 그래서 참된 신자는 공식대로 살지 않고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인도하심을 구한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공식대로 산 사람들은 모두 낭패를 당했다. 예를 들면,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이면서 전쟁이 일어나자 성소에서 법궤를 들고 나와 전장으로 메고 갔다. 그들은 예전에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들고 앞장서게 한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들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싸움에서 제사장들에게 법궤를 메고 앞장서게 한 일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그 어리석은 두 제사장은 전쟁에서 패하고 법궤도 빼앗기고 자신들도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이나 자신의 공식대로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공식대로 행하는 것은 사실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싸움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질문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그 난공불락인 줄 알았던 그 성을 정복했다. 그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다음 성은 비록 크기는 여리고성보다 작았지만 거기서는 패하고 전사자가 다수 발생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고 이전에 경험한 승리공식을 따랐다. 그것이 패인이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이나 공식대로 행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자기 마음대로 행하시는 분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만드시고 모든 생명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생명의 특징은 섬세한 돌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적은 화초라도 때를 따라 다른 방식으로 돌보아야 건강하게 자란다.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할 때도 규율을 세우야 할 때가 있고 규율을 풀어주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기다려 주어야 할 때가 있다. 자녀를 양육하거나 식물을 기르거나 동물을 돌볼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항상 같은 방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기 때문에 생명이기 때문에 공식대로 대하지 않고 그의 형편에 맞게 대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은 건강하고 온전하게 자라날 수 있다. 화초는 물을 주어야 잘 자란다고 매일 물을 주기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화원 주인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키우는 화초가 죽는 이유는 물을 안 주기 때문이 아니라 물을 너무 많이 주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생각없이 공식대로 살면 생명을 죽이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공식을 추구하는 것이 곧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는 이유는 그것이 공식을 만들고 공식을 따라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생명을 죽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돈벌이가 잘 된다고 제품을 마구 만들기만 하면 되겠는가? 주변도 살피고 환경도 생각하고 자기 식구들이나 직원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상숭배가 무엇인가? 그것은 공식을 따라 사는 삶이다.
3. 율법이 우상으로 바뀌는 때
앞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간 엘리의 두 아들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의 법궤를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공식에 적용하려고 했다가 큰 수치를 당하고 망한 제사장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하나님의 율법이 우상으로 바뀌는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율법에 대하여 강조하는 대목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명하셨다. 그렇게 하면 그가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도 덧붙이셨다(여호수아 1:8). 시편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예찬하는 대목이 나온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고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시편 19:7~8).
그런데 신약성경으로 오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라디아서 5:4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갈라디아서 5:18
사도 바울은 자기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율법이 우상이 될 수 있다니! 우리는 모세가 광야에서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만든 구리뱀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매달라고 명하셨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뱀의 독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그는 모세의 구리뱀을 놋쪼가리라며 박살을 내버렸다. 그때 히스기야가 외쳤던 말이 ‘느후스단’이다(열왕기하 18:4). 모세의 기적이 있은 후 700년이 지나자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신 기념물이 아니라 우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구리뱀이 우상으로 바뀌게 될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질문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이다. 즉, 공식대로 전통을 만들면 그것은 반드시 우상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 이 구리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것을 만들라 하셨습니까? 그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렇게 세번의 질문을 했더라면 그 구리뱀은 우상으로 변질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율법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 율법이 무슨 뜻인지 질문하고 생각해 보지 않고 이렇게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는 문자 그대로 지키는 행동은 마치 공식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일수록 생명을 해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율법에 정말 열심을 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했는가?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선봉이 되고 교회를 박해하지 않았는가?
나중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언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새 언약은 문자로 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
고린도후서 3:6
율법이 문자가 되면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율법 앞에서 질문을 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구하면 그 율법은 성령 안에서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유익이 된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며 온전하게 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차별금지법 반대 운동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질문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것뿐 아니라 모든 활동과 업무는 조율되고 변화되고 새롭게 다듬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회와 문명은 퇴보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늘 부지런히 연구하고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최신의 의료기술을 연마하는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겠는가? 아니면 30년 전 대학에서 배운 그 낡은 노트를 가지고 돋보기 안경을 쓰고 처방을 하는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겠는가? 경력이 많다는 것은 한가지 방식으로만 처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다양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대처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많은 학습과 경험에서 나온 것이리라.
아무리 좋은 구호나 주장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언제나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서는 연습이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연습은 바로 질문이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나님께 물어보기 위함이다. 기도란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이다. 문제가 클수록 우리가 질문하는 시간을 길어질 수 있다.
4. 고집부리는 것도 우상숭배다
앞에서 나는 우상숭배는 공식을 만들고 그 공식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율법도 어떤 사람은 우상으로 만든다. 율법을 공식으로 삼기 때문이다. 율법은 언제나 문자로 기록되어 우리에게 오지만 우리는 그것을 늘 성령의 조명 가운데 재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율법을 묵상한다는 말의 의미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묵상한다고 할 때 우리는 그 문장을 무한 반복함으로 묵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말씀이 언제 하신 것인지,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그리고 살인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질문하시고 답을 얻으셨다. 그렇기에 형제를 향하여 노하거나 미련한 몸이라고 욕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셨다. 사람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바로 그 행동 때문에 살인이 일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질문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누구 앞에서든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가정이나 공동체에는 질문이 없다. 질문을 할 수 없는 단체가 있다. 거기에는 위계질서와 계급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곳에는 갈등과 불화가 짙은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생기발랄하고 생명이 가득한 곳에는 언제나 거침없는 질문과 웃음과 노래와 춤이 솟아나기 마련이다.
구약시대의 두 인물 다윗과 사울은 이런 예를 잘 보여준다. 다윗은 춤추는 사람이며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주변에 제사장을 대동하면서 늘 하나님께 질문하거나 스스로 물었다. 그것이 기도다. 그러나 사울 왕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할 수 없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예언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거역하고 말았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찾아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가 제사장을 대신하여 제사를 집례한 행동을 책망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공식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적어도 백성들이 자기를 따를 것이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식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그리고 망한다. 그때 사무엘이 무엇이라고 책망했는가?
사무엘이 나무랐다.
“주께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시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것이겠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을 봐주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의 말씀을 버리셨기 때문에,
주께서도 임금님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15:22~23
사무엘의 책망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행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다. 그래서 사울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망하게 되었다. 고집을 부리는 것이 왜 우상숭배와 같을까? 사람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는 완고하게 자기 고집에 갇혀 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이나 아집에 사로잡힌 모습이며 그것은 바로 공식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 고집 때문에 자신도 죽고 자기 가족도 매일 죽어간다.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숭배의 한 모습이다.
5. 이념, 주의, 정치색도 우상숭배다
사람이 가진 공식 중에 가장 치명적인 공식이 이념이다. 이념은 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것이다. 이념은 같은 편끼리 연합하게 하고 다른 편을 적대시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게 보면 종교도 이념의 색채를 띨 때가 있다. 하기야 모세의 구리뱀처럼 신령한 물건도 우상이 될 수 있으니 이 세상의 그 무엇이 우상으로 바뀌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념도 종교도 공식이 된다면 결국 이념이나 종교도 우상숭배로 전락할 수 있다.
우상숭배가 왜 나쁜가? 우상숭배는 질문이나 생각 없이 공식을 생명체에 적용하기에 나쁘다. 그렇게 하면 생명이 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이나 종교가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데 그때마다 이념이나 종교 때문에 희생자가 늘어난다. 우리나라에서 이념 때문에 희생자가 많이 생긴 때는 역시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절이다. 그때는 민주주의 진영이나 공산주의 진영 둘 중에 하나에 속하게 하고 서로 죽이는 난리가 일어났다. 그것이 4.3사태이며 여수-순천사건이다.
이념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생명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인간이 이념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면 사람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가족이나 친지를 원수로 여기게 만든다. 더 좋은 사회를 꿈꾼다고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고 죽인다는 게 말이나 될 말인가! 그럼에도 우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빌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이념이라는 우상 앞에 절을 하면서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상숭배가 어리석은 것처럼 이념에 포박되어 양 갈래로 나뉘어 싸워서는 결코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없다. 오늘의 미국이 그렇고 대한민국이 그렇다. 트럼프가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망했다는 표정이다. 아마 해리스가 당선됐다면 트럼프 진영의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이런 식의 과열된 우상숭배는 우리들도 익숙하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선택하는 대신에 사람이 만든 공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념이나 자기 주장, 아집이나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 세상에 좋기만 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좋기만 한 생각이나 주장, 이념이 어디 있는가? 이 세상에 선한 분은 하나님 한분 뿐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은 복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궤변을 무찌르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고린도후서 10:4b~5
이념이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경을 읽어보라. 이사야 44장에서 하나님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고레스를 보시고는 ‘너는 내가 세운 목자다.
나의 뜻을 모두 네가 이룰 것이다’ 하시며,
예루살렘을 보시고는 ‘네가 재건될 것이다’ 하시며,
성전을 보시고는 ‘너의 기초가 놓일 것이다’ 하신다.
이사야 44:28, 표준새번역성경
이사야 45장에서 하나님은 고레스를 기름부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메시아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이 택하신 일꾼이라는 뜻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에게 말씀하신다. "고레스에게 말한다.
내가 그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놓겠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한 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못하게 하겠다. 고레스는 들어라.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산들을 평지로 만들고,
놋쇠 성문을 부수며, 쇠빗장을 부러뜨리겠다.
안보이는 곳에 간직된 보화와 감추어 둔 보물을 너에게 주겠다.
그 때에 너는, 내가 주인 줄을 알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부른 것은,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을 도우려고 함이었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너에게 영예로운 이름을 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주다.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나 밖에 다른 신은 없다.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해가 뜨는 곳에서나, 해가 지는 곳에서나,
나 밖에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겠다.
나는 주다. 나 밖에는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도 만들고 어둠도 창조하며, 평안도 주고 재앙도 일으킨다.
나 주가 이 모든 일을 한다."
이사야 45:1~7
하나님이 자기 뜻을 이루시려고 택하신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이며 하나님 앞에서 목자라는 칭호를 얻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영이나 이념이나 국적이나 종교를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 우리가 예언자들을 따라 이런 믿음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세상으로 난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문은 하나님만이 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문이 열리지 않으면, 그리고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한번 이념이나 종교, 그리고 지지하는 사람 때문에 그 거룩한 문 앞에서 살육을 벌이는 참혹한 재앙에 빠질 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보면 철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에 절하는 행위는 소박한 소꿉놀이인지도 모른다. 진짜 큰 문제는 자기 고집이나 편견, 이념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말하기를,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 숭배입니다.’(골로새서 3:5)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정말 싫어하신다. 우상숭배가 나쁜 이유는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 생각이나 공식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즉시 생명이 상처를 입고 죽어 나가는 일이 생긴다. 하나님은 생명을 지으시고 돌보시고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다. 생명이 충만해지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바로 그 생명을 죽이므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행동이 된다.
우리 모두 우상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질문의 기도를 드리면서 살아가자. 지혜자는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잠언 3:5~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