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도삭찬(秦時鍍鑠鑽)
커서 쓸모없는 송곳이로구나!
진시도삭찬(秦時鍍鑠鑽)은 운문문언(雲門文偃) 선사가 목주선사(睦州禪師)를 참방(參訪) 하였을 때 선문답(禪問答)에서 나온 평가(評價)다. 목주선사(睦州禪師)는 위산영우(潙山靈祐) 선사 회상(會上)에서 제일좌(第一座)였다. 문언선사가 처음 목주선사의 도풍(道風)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때는 토굴(土窟) 주위에 높은 담을 쌓고 대문을 굳게 닫아 잠그고 묵언정진(默言精進)을 하였다. 굳게 잠긴 대문을 여러 차례 두드렸다. 목주선사가 문을 열고, 누구냐? 무엇 하러 왔느냐? 문언선사가 말하기를 소승은 생사일대사(生死一大事)를 밝히려고, 말끝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호같이 달려들어 문언의 멱살을 움켜잡고 무엇이라고? 이놈의 똥자루야! 온 산골이 쩌렁쩌렁 고함을 치면서 잡았던 멱살을 획! 떠밀치고 대문을 잠가버렸다. 문언선사는 얼떨결에 당한 일이라 한마디 말도, 못하고 쫓겨났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로 쫓겨났다. 운문선사는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물러나서 수행을 다시 정진하여 자신만만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이 들어서 세 번째로 목주선사를 찾아갔다. 지난번과 똑같이 대문을 열자말자 다짜고짜로 멱살을 움켜잡고 말해라! 말해라! 벽락 같이 소리를 쳤다. 자신만만한 마음으로 찾아간 문언은 목주선사의 다그치는 압력에 눌려서 입도 벙긋 못하자. 야~ 왠! 진시도삭찬(秦時鍍鑠鑽)이로구나!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이때 문언선사의 발이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하고 문에 발목이 치어버렸다. 순간! 통증과 함께 심지(心地)가 활짝 열려 개오(開悟)하게 된다.
그 후로 목주선사의 지시에 따라 문언선사는 설봉선사(雪峰禪師)를 참방하고 더욱 정진하여 설봉선사의 법을 잇게된다. 그 후에 소주 영수원(靈樹院)에서 삼십년(三十年)을 주석(住錫)하고 말년(末年)에는 운문산(雲門山)으로 이주(移住)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낸다. 문언선사의 교화로 전법 제자가 88명이나 되었고, 나중에 운문종(雲門宗)의 종조(宗祖)로 추앙을 받는다. 운문선사 어록을 보면 선문답(禪問答)이 간단명료(簡單明瞭)하다. 무엇을 물어도 한자 일자(一字)로 답(答)을 한다. 선이란 불립문자(不立文字)이기 때문에 일자(一字)도 사족(蛇足)이 된다. 앞에서 나온 진시도삭찬(秦時鍍鑠鑽)은 진시황(秦始皇)이 아방궁(阿房宮)을 지을 때 쓰던 송곳이다. 이 송곳이 너무 커서 후대에는 아무 데나 어는 곳에도 쓸 곳이 없다는 뜻으로써 선문답에서 입으로 말만 날카롭지 실지 얻는 바가 없는 공부가 덜된 놈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운문록에 있는 선문답 한 예를 보면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운문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정법안장(正法眼藏)입니(問如何是正法眼藏)까? 운문스님이 이르기를 보(普)니라. (雲門曰普) 이런 운문선사 선문답을 운문일자관(雲門一字關)이라고 한다. 보고도 모르면 관문(關門)이다. 보관문(普關門) 빗장을 푸는 것이, 수행납자(修行衲子)의 혜안(慧眼)이다. 수행자는 남의 입 쳐다보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언제쯤 황하강(黃河江)이 맑아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