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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주의할 점
1. 요한계시록은 그 시대의 성도들에게 보낸 사도 요한의 편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 예언서로 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던
주후 95년의 성도들에게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보낸
사도 요한의 위로와 경고의 편지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로마서와 같이
사도 요한 역시 요한이 목회하던 그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의 편지를 볼 때
그 교회의 상황과 바울의 편지를 함께 살피면서 말씀을 보는 것처럼
요한계시록도 그런 관점에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2. 요한계시록은 그 시대의 성도들만 알 수 있는 암호로 기록되었습니다.
1) 요한계시록을 암호와 은어로 기록한 이유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시대였으므로
밧모섬에 갇혀있던 요한이 그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려면
편지를 검열하는 로마 군인들 모르게 편지를 써야만 합니다.
따라서 요한은 로마 군인들은 모르고 성도들만 하는
암호와 은어로 이 편지를 썼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읽으려면 이런 암호와 은어들을
그때의 성도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를 확인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가령 3과 7과 12는 완전수라든지,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니 이 세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든지,
666은 짐승의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도미티안 황제를 뜻하는 것이라든지,
‘144,000’은 주님을 믿는 전체 성도들 가리키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요한이 사용한 암호와 은어들입니다.
2) 암호의 숫자를 해석할 때 조심해야 할 일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동일한 암호에 대하여는 동일한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44,000에서는 1,000을 만수(滿數)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인 전체로 해석했다가,
뒤의 천년왕국에서는 아무 근거도 없이 1,000을 숫자 그대로 해석하여
천년왕국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 방법입니다.
같은 암호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려면
그럴만한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3. 요한계시록에서의 마지막 종말의 때는 로마의 멸망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1) 요한계시록에서의 마지막 종말의 때는 로마의 멸망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주께서 그때 오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가 죽으면서 곧바로 로마가 망하고,
그 후에 주께서 정하신 적절한 때에 세상이 멸망하고
세상 만민이 주님 앞에 나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요한이 죽기 전에 모두 다 일어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2) 그러나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주께서 그날을 뒤로 연기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미티안이 죽고도 380년이 지난 뒤인 주후 476년에 로마가 망했고,
로마가 망한 후에도 1,500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도
주님은 여전히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종말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읽을 때에는
로마의 멸망에 관한 부분과 마지막 종말에 관한 부분을 잘 살펴서 읽어야 합니다.
4.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지막 때에 믿음을 갖기 힘든 때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 요한계시록을 공상과학소설로 읽지 마십시오.
천년왕국이니 7년 환난이니 하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주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 마지막 때에
도미티안 때와 맞먹는 어려운 때가 오리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살던 도미티안 황제 때에는 엄청난 핍박으로 왔지만,
마지막 때에는 엄청난 죄의 유혹이 될 것입니다.
그 유혹이 너무 엄청나서 정신을 차리고 살 수 없는 때가 올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엄청난 죄의 유혹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이 무너지는 엄청난 신앙의 혼란이 함께 일어나니
성도들은 도무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마저 사분오열되어
믿음을 가진 사람 중에도 많은 사람이 신앙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시대의 성도들이 그 엄청난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지킨 것처럼
마지막 때의 성도들도 이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5. 결국 요한계시록의 주제 역시 창세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마지막 때의 혼란에 대한 예언은 복음서에도 바울 서신에도 있습니다.
다만 요한은 그때의 성도들이 엄청난 핍박 속에 있으니
조금 읽기 까다로운 말로 더 강력하게 편지를 썼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역시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핍박과 유혹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잘 섬겨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복된 성도가 되자고 말씀입니다.
6. 요한계시록의 일곱 가지 복
1)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도미티안 같은 핍박의 때이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악의 세상이든 간에
주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 1:17)
오직 말씀만이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2)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계 14:13)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되리라”는 이 말은
로마 황제 도미티안이 자신을 숭배한 자들에게 약속한 말입니다.
그러나 도미티안은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쓴 이듬해 그는 죽었습니다.
그는 이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는커녕 자신의 생명조차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주님을 믿는 신앙을 잃지 않고 살다가 죽는 자가
참으로 복을 받은 자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의 수고를 그치게 하시는 이,
진정으로 우리가 영원토록 편히 쉬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하시는 이는
우리의 구주 예수님뿐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그 믿음을 온전히 지키는 자가 되십시오.
3)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 16:15)
자기의 옷을 지킨다는 것은 주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흰 세마포 옷을 입어서
죄로 얼룩진 자신의 몸을 가리는 것을 말합니다.
주께 회개하여 그 죄를 용서받은 자에게 주께서 이 세마포 흰옷을 주십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보였다는 것은
죄의 용서함을 받지 못해 그의 죄가 그의 몸에 그대로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들은 주께서 주신 흰 옷을 입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고,
죄를 용서받지 못한 자들은
죄로 얼룩진 자신의 벌거벗은 수치를 그대로 드러낸 채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지은 죄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서 자신의 옷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다는 것은 영적인 긴장감을 갖고
항상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주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며 그날을 기다리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깨어서 자기 옷을 지키는 자가 되십시오.
4)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9:9)
어린양의 혼인 잔치는
마지막 날 주님의 백성들이 재림하여 오시는 주님과 만나는 것을 뜻합니다.
주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신 후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들을 영원한 기쁨의 나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전에 먼저 그의 백성과 만나는 것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사람의 평생에 가장 기쁜 날이 혼인날이므로
주님을 만나는 그날의 기쁨을 혼인 잔치에 비유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다윗처럼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일을 중단하지 않은 자,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을 통해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기를 멈추지 않은 자는
그날 주님과 만나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생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그날의 기쁨을 생각하며 오늘의 아픔을 이기십시오.
그날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주신 사명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5)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계 20:6)
첫째 부활이란 우리가 처음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들어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때 주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서 죽었던 우리의 영이 살아났습니다.
그때 우리는 첫째 부활에 참여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순간까지, 혹은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 믿음을 잘 지킨 자들에게는 둘째 사망의 고통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둘째 사망이란 주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끝까지 믿음을 지켜 주께로부터 그 믿음을 인정받은 자들은
결단코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됩니다.
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계 22:7)
주께서 곧 오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날을 잘 준비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더디 오실 것이라 여기고 그날을 준비하지 않다가
갑자기 그 날을 맞이한 자들은 영원한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는 날을 준비하는 자가 되십시오.
7)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계 22:14)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에 나아가려고, 문들을 통하여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고
항상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씻으며 살아가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옷을 주님의 피로 씻는 일입니다.
당신의 삶과 생활 속에 주께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 삶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거리에서, 일터에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인간관계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그날그날 자신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말씀으로 점검하고,
잘못된 것을 주께 고백하여 그 죄의 때를 씻어내십시오.
그런 다음에 주님의 거룩하신 것을 내 안에 채워주시기를 간구하십시오.
7.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께서 속히 오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는 요한의 때에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생각이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려고 그날을 미루신 것이 오늘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언제까지나
그날을 연기하기만 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금년이 주께서 기다리시는 그 마지막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이 경고한 이 모든 말씀이 그때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