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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표적
본문<요5:1~16>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가장 짧게 요약하자면 무엇일까요?
-사람의 의냐? 하나님의 의냐? 입니다.
즉, 구원이 사람의 행함으로 주어지는 거냐?
아니면 ㅎ님의 은혜인 십자가 복음으로 주어지는 것이냐의 차이이지요.
이것에 대한 기준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혹은 옛언약과 새언약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의 의냐 ㅎ님의 의냐, 이것이 두꺼운 성경 66권 전체가 담고 있는 엑기스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은혜는 누가 입게 되는가? 이지요.(이게 중요한 포인트..)
-정답은 자기부인이 일어난 자에게 은혜가 덮쳐 옵니다.
자신에게는 오직 죄만 나오기 때문에, 도저히 ㅎ님 말씀을 지킬 수없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자임을 아는 것을 자기부인이라 합니다.
한마디로 I'm 낫팅!(난 그저 티끌과 같은 자입니다)~의 상태에 처한 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오늘 38년 된 병자가 낫는 이야기가 비로 여기에 포커스를 맞춘 메시지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 번째 표적에 대한 내용입니다.
더불어 이 세 번째 표적을 통해 당시 유대교의 왜곡된 신앙체제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시는 두 번째 표적이었지요. 표적을 보고 따르는 거짓 신앙과 오직 말씀을 믿는 참된 신앙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메시지였습니다.
오늘은 사람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ㅎ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행함에 신앙의 가치를 두고 있는 당시 유대교와 오늘날 기독교가 동일한 신앙의 터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2천년 전의 유대교나 오늘날 기독교나 모두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과는 동떨어진 인본주의 사고체계로 만들어 낸 다른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영, 다른 예수...)
이제 세 번째 표적의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1절/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이유는 유대인의 명절 때문이었습니다. 모세 율법은 유대인의 20세 이상의 모든 남자들은 반드시 1년에 3차례 예루살렘으로 와서 명절을 지킬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7대 절기 중에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오순절), 초막절을 말합니다.
왜 ㅎ님은 세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오게 해서 지키게 했을까요? ㅎ님의 구원의 경륜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유월절은(IX의 십자가 피 흘리심을 말함), 오순절은(십자가로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다시 오심으로 성도들의 거듭남을 상징하고), 초막절은(구원 받은 성도가 이 세상을 행인과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정체성, 즉 L/cycle를 의미 합니다.)
이렇게 세 절기가 품고 있는 중요한 의미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 있어야 된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에 신앙의 푯대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당시 구약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찾았듯이, 우리가 찾는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도성인 천국을 지향하는 삶을 의미 합니다. 즉, 성도는 항상 이 세 절기가 말하는 -예수 보혈, 성령의 인도하심, 그리고 나그네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골3:1절 이하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1절을 ~그렇다면 예수께서 올라가신 이 절기는 셋 중에서 어느 절기였을까요?
요한복음에는 세 차례의 유월절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2:13절, 6:4절, 11:55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차례 유월절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이 맞다면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대인의 명절은 오순절이나 초막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 2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예루살렘 성전의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양문(sheep gate)입니다. 이 문으로 희생 제물들을 들여보내는데(소, 양, 염소, 비둘기), 그 가운데 양이 가장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양의 문’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 그 양문 곁에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고, 그곳의 다섯 행각(쉴 수 있는 작은 공간)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 3-4절/ 5: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이 병자들이 이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 있는 이유는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움직일 때 누가 됐든 그 연못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가 병에서 고침 받게 된다는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병자들이 이곳에 모여 천사가 내려오는 때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 )부분은 일종의 전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근거가 없는 미신 같은 전설에 따라서 형성된 엉터리 신앙을, 사람들이 따르는 형국을 보여주는 장면이지요.
‘베데스다’ 라는 이름은 ‘자비의 집’ 즉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이 연못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는 이유는 그곳이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천사가 임할 때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는 한 사람의 몫이었습니다. 오직 일등에게만 은혜가 주어지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 말할 수 있을까요?
롬4:4-5절을 보면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4:5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은혜와 보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보수를 은혜라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란 일을 안했는데 월급이 나올 때 은혜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러므로 베데스다 연못은 은혜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은혜를 구하기 위해 그곳에 모여 있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일에 대한 보상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신 이유는 은혜에 대해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성경이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이었습니다. 세상과 이스라엘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특혜가 주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은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 이었습니다
(출34:6)보면, ㅎ님은 율법을 어긴 이스라엘을 진멸해야 했지만 모세의 중보로 용서하시는 ㅎ님 자신에 대해~나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ㅎ님이다. 라고 ㅎ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ㅎ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부 관계로 나타내는 호세아서에서는 본래부터 부정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지만 계속 다른 남자와 눈을 맞추며 바람피우는 고멜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선지자 호세아가 바로 ㅎ님 자신을 빗대 이야기인 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은혜와 사랑의 ㅎ님을 발견 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율법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했다는데 있습니다. 일종의 조건부 은혜로 오해 했던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율법을 힘써 지키는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를 가장 잘 요약해 놓고 있는 내용이 신28장입니다. 신28장은 흔히들 축복 장이라고들 알고 있지만 아니지요. 너희들은 율법을 도저히 지키지 못하는 자임을 알라는 것이었지요, 내용의 구성 자체가 그렇습니다.1~14절까지는 율법을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실 복에 대한 내용이고, 15~68절까지는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할 때 그들에게 주어질 저주에 대한 내용입니다. 복에 비해서 저주가 4배 가까이 언급된 것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ㅎ님께 자비를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 언약 아래서 이스라엘은 율법을 열심히 지킴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얻는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철저히 실패했고 율법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일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 율법 언약 아래 놓고 저주를 경험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저주를 맛 본 자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54:7-8절을 보면 “54:7 내가 잠시 너를 버렸으나 큰 긍휼로 너를 모을 것이요 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이방 민족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버리심은 잠시였습니다. 그들을 이렇게 잠시 버리신 것은 더 큰 긍휼을 맛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넘치는 진노를 맛보아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와 긍휼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이해했던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롬3:19-20절>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말함)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의 종으로 살아가는 불의한 자신들의 비참한 실상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경을 그렇게 연구했으면서도 성경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복을 얻고자 했던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율법 언약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바벨론 포로 신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70년 유배기간이 끝난 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후에 그들이 한 일은 더 열심히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자 하는 옛 신앙의 길을 고집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체제가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을 찾으신 것은 그 베데스다 연못이 유대인들이 은혜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에 모여있던 자들은 건강한 다른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몸도 감당할 수 없는 병자들이었습니다. 애당초 율법을 행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조건조차 주어져 있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이들이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모여 무작정 그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베데스다 연못 역시 율법의 세계 즉 처절한 경쟁의 세계였습니다. 이곳에서도 은혜는 경쟁으로 얻어지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 은혜를 맛보려면 천사가 임하는 때를 지켜보고 있다가 천사가 임하는 그 순간에 온 힘을 다해 가장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실상 이것은 은혜가 아닌 저주의 세계였습니다.
갈3:10절을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율법의 세계, 즉 행함의 세계에서 주어지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저주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의 세계였습니다. 은혜가 약속되어 있지만 요구되는 것은 율법적 행함이라는 저주였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신앙체제의 현 주소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의 현 주소이기도 합니다. 입만 열면 은혜, 은혜,.., 은혜라는 말을 달고 살아가지만 정작 경험하는 것은 행함을 담보로 하는 저주 밖에는 없습니다.
5-7절/ 5:5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주님은 연못에 모여있는 병자들 가운데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를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때 그가 예수를 향해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니, 1~2년도 아니고, 단 며칠만 감기에 걸려도 힘든데, 그것도 사족을 움직일 수도 없는 중풍병에 걸려서 무려 38년이나 누워 있는 사람에게 기꺼 묻는 말씀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질문하시는 예수님은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 분이 아닌가요?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의 속마음을 깨내기 위해서 질문 하신 겁니다. 그가 병고침에 대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고, 후대에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뭔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과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답변은, <Yes~Sir>이 아니라, ‘(방법과 수단을 말함)-> 내가 낫기 위해선 물이 동할 때 먼저 이 못에 들어가야 하는데, 나를 도와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못에 들어가기만 할 뿐이지요” 이것이 그가 예수님에게 한 말이었습니다. 즉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뭔가를 해야 하는데, 나는 못하네요.‘라고 답한 것입니다.
38년 동안 누워있던 그가,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본들 남보다 빨리 못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 베데스다 연못에서 주어지는 은혜는 그림의 떡이었을 뿐입니다. 은혜의 집에서 더 큰 저주를 맛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 베데스다 연못의 세계는 오늘날 기독교의 현 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이 땅에서도 큰 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매 주일마다 이것저것을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설교를 듣습니다.
-그 내용은 교회생활과 선한 삶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 힘쓰고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착하게 살라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그 설교에 따라 주일성수, 십일조, 각종헌금, 전도에 힘씁니다.
-착하게 살기 위해 거짓말도 하지 않고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하는 일도 힘씁니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 노력했는데도 기대했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족한가 싶어서 더 열심으로 그 길을 달려갑니다. 이들에게 포기란 없습니다.
복이 눈앞에 있는데 이를 포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남보다 더 주일성수에 힘쓰고 더 많은 헌금을 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생활에 힘씁니다.
평범해선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일등만이 그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이 되어버린 현대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알지 못하기에 이런 저주의 세계를, 은혜의 세계로 착각하며 자기 열심과 자기 의를 앞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 8-9절/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하십니다. 그 순간 그 사람의 다리가 나음을 입습니다. 다리에 생기가 들어간 것입니다. 누워있던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구했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가 이 은혜를 받기 위해 무엇을 한 것이 있었나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은혜가 그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그가 은혜를 맛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은혜를 연결해주는 사닥다리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토록 소망했던 은혜는 베데스다 연못이 아니라 그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예수를 통해 그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행위와 무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떤 선한 행위나 신앙의 행함에 전혀 감동 받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 은혜를 더 멀리 할 뿐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제아무리 지극 정성으로 기다려도 은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고, 힘을 다해 헌금을 드리고, 봉사 충성한들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은혜에서 더 멀어질 뿐입니다.
롬9:15-16절을 보면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이 불쌍히 여기는 자에게만 은혜를 주십니다. 은혜를 받고자 달음박질한다고 은혜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상상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든 수고는 헛수고일 뿐입니다(앞의 내용~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노라, 긍휼-by택하심)
이러한 유대인들의 왜곡된 신앙관을 고발하기 위해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세 번째 표적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 상식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노력 없이 하나님의 복 받을 생각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라는 말로 목사들이 성도들을 다그칩니다. 결국 세상과 똑같이 인과응보의 정신사조가 ㅎ님의 교회에서 작동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롬4:5)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지극정성에 복을 베푼다는 무당잡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는 신입니다. 그들은 베데스다 연못의 세계에 살고 있을 뿐 복음의 세계를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거짓 은혜를 팔고 이득을 챙기고 있는 종교로 전락한 현대 교회의 세계입니다.
주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 더러운 거적을?-이사해)
-즉 주님의 이 말씀은 거짓 은혜를 팔아 종교 장사하는 거짓 기독교에서 떠나라는 말입니다.
-정성과 열심을 내세워 은혜를 팔고 있는 거짓 종교체제의 실상을 보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 저주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계18:4절에도, 내 백성아 음녀교회인 큰 성 바벨론에서 나와, 그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고 하십니다.
• 10-13절/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5: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5: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5: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너무 기뻐서 환호하며 걸어갔을 것이고 그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면 안되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안식일 규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안식일 규례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자신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라고 말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는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라며 자신은 그저 그가 시킨 일을 따라 이렇게 한 것뿐이다 라며 변명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라며 그를 추궁합니다. 이런 불법을 명한 장본인이 누구인지 밝혀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병고침 받은 그도 자신을 고쳐준 자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신 후 즉시 그 자리를 피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통해 자신의 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지긋지긋하던 병에서 고침 받은 것이 너무 기뻐서 날뛰며 난리 법석을 떨다보니 예수가 그 자리를 떠나는 것조차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38년 병에서 해방된 것이 안식인데 그걸 모르고 안식일은 날짜로 지키는 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주님을 만난 자는 날마다 안식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야’ ~
• 14-16절/ 5: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5: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그 후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서야 그 사람은 자신을 고쳐주신 분이 예수였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였다고 말합니다.
-죄의 저주에서 자유함을 얻었지만 자신을 정죄하는 유대인들 앞에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또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유대인들 사회에서 남은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자가 예수였다는 것을 알게 된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아와 치열한 논쟁이 벌어집니다(17-47절). 이 논쟁에 대해선 다음 몇 주간에 걸쳐 살펴볼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병에서 나은 것은 좋았는데,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더 심한 것이 생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범하지 말아야 할 죄란 무엇을 말하고, 그렇게 하면 그에게 생길 더 심한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성경이 말하는 죄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죄가 최초로 드러난 현장은 선악과를 먹은 에덴동산이었습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끊어졌습니다. 서로 대적하는 원수의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가 아니라 선악과를 먹게 한 생각이 죄입니다. 네가 선악을 판단하는 인생의 주체가 되라는 사탄의 꼬임에 인간이 넘어간 것입니다.
그 이후 모든 인간은 사탄의 자녀로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창6:5-7절에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6: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가 아닌 엄중한 저주만이 합당한 자들입니다. 이런 인간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일방적인 은혜를 베푸십니다. 세상은 이러한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설명해 주어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은혜란 바로 이런 은혜를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오셔서 선포하신 ‘은혜의 복음’입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은혜라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모범생이 되기 위해 힘써 성경을 지켜 행하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은혜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표적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 눅5:32절입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유대인들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의인을 부르러 오시는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그 율법을 통해 의인으로 준비되어 있으라는 뜻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러한 생각을 뒤집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베데스다 연못에서 행하신 세 번째 표적을 통해 주어진 교훈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표적의 의미를 알고 있다면 다시는 정성을 다한 십일조, 정성을 다한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 주신다는 목사들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그러한 거짓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에서 자리를 들고 떠나야 합니다.
주님은 은혜를 맛 본 그에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에서 떠나 다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으로 생명을 얻은 우리에게 주어진 새 계명입니다.
-성도에게 죄란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이 싸움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하는 거짓 복음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을 얻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신부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기대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이 땅에 속한 현실적인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현실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이웃 나라들처럼 잘 먹고 잘사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죄 사함의 복 하나만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영벌에 처해질 자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죄사함 뿐 입니다. 이러한 ㅎ님의 뜻을 모르고 육신의 복만 추구하다가,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 그들이 범한 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오게 하시고자 징계의 채찍을 수없이 드셔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수 없는 반복한 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였습니다.
본문에서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가 범할 수 있는 죄란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난 38년 동안 수족이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고 땅에 붙어살던 것보다 더 심한 것이란 무엇일까요? 영원한 저주인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자들로 모이는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에게 주어진 싸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머물러야 하는 싸움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기 행위를 앞세운 자기 의의 세계인 베데스다 연못을 쳐다보게 합니다. 이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으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합니다. 엡6:1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고 은혜의 복음의 터 위에 굳게 서서 악한 자의 미혹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은혜의 복음의 세계를 더 깊이 알아 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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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