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하기>에 대하여
시조에서 ‘비유는 생명이다’라고 흔히 말한다. 그만큼 비유가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고시조의 평시조(단시조)를 살펴보면 직유로 된 것보다 은유나 암시적 은유로 된 작품이 대부분이다.
현대시조에서 관념어나 추상어를 구체적 언어로 대신하지 않고 그냥 시어로 쓰는 경향이 짙은 것은, 비유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창작에 들어가면 관념어나 추상어를 구체어로 바꾸기는 매우 어렵다.
그 대표적인 시어들이 ‘사랑, 자유, 권력, 슬픔, 결혼’ 같은 말로 바꾸기는 쉽지 않다. 상징적인 말로 바꾸는 것 또한 한계가 있다.
시조 짓기에서 왜 관념어나 추상어를 구체적 언어로 바꾸라고 하는 것일까?
관념어나 추상어는 오감으로 느낄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오감을 통하여 느끼는 것은, 그 실체가 분명하여 독자에게 선명한 이미지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의 감정을 독자에게 분명하게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슬픔’ 하면 그 실체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눈물’이라 하면 눈으로 볼 수도 있고 만져 느낄 수도 있어, 독자에게 내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 된다.
이처럼 구체어는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느낄 수 없는 말을 실감하게 만드는 것은 비유(은유)이다. 그러나 모든 시어를 비유할 수 없는 것이 창작의 현실이다.
시인의 가슴에는 언제나 창조적 진화를 하려는 욕구가 있다. 즉 엘랑비탈(Elan Vital)이 쉼 없이 일어난다.
기존 관념이나 습성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늘 들끓는 것은 어쩌면 시인의 원초적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상징과 비유로 말하기 어려운 표현을 조금 바꾸어 보려는 시도가 <낯설게 하기>라는 대안이 아닐까 한다.
<낯설게 하기>는 익숙한 언어나 사고의 틀을 해체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방식이다. 즉 의미는 같지만, 습관적으로 사용 해온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방식이다.
쉬운 예로 ‘뻐꾸기시계가 12시를 알린다.’라는 말은 단순하고 일상화된 표현이다. 일상적인 의사소통의 방식(틀)이다.
그러나 ‘뻐꾸기가 12시를 소리 내어 읽는다.’라 하면 같은 의미의 말이지만 일상어를 벗어난 낯선 말이 된다. ‘알린다’를 ‘읽는다’라고 바꾸었을 뿐인데 어딘지 새롭게 느껴진다. 맛이 다르다.
이처럼 낯선 표현은, 익숙하여 당연하게 여겨지는 지루함을 벗어나, 신선한 이미지로 독자에게 다가가려는 시도이다.
즉 관습화된 일상적 지각(知覺)을 깨는 방식으로 시적 효과의 반전을 가져오려는 시도이다. 한 마디로 시어의 새로운 연결 고리로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에 한들거린다.’라는 표현은 누구나 하는 일상적 언어이다. 이 말을 바꾸어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 <낯설게 하기>이다.
‘코스모스가 색동 옷을 입고 바람을 타고 논다.’라고 한다면 독자는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 왜일까? 코스모스를 의인화하여 ‘한들거리다’를 ‘타고 논다.’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낯설게 하기>의 문학사적 배경과 의미는 여러 학자나 선배 시인들로부터 충분히 배운 바 있겠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별로 없을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필자의 창작 경험에서 얻은 방법을 공유하고 싶어 간단한 예문을 들어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론적이며 학술적인 내용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창작시 참고하면 도움이 될 실무지침 같은 것이다. <낯설게 하기>가 시조 창작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알아두면 창작에 도움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낯설게 하기>를 할 수 있는가?
수많은 학자나 문학인들이 <낯설게 하기>를 주장하지만, 실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필자는 이 방법을 누구나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보려 한다.
작품 전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한두 표현만 바꾸어도 독자는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첫째 사물을 의인화시킨다. 의인법은 창작시에 많이 이용되는 수사법이다.
그러나 필자가 <낯설게 하기>에서 말하는 의인화는 주체가 아니라 술어만 바꾸는 의인화법이다. 예를 들면 ‘꽃이 피었다.’에서 ‘꽃’을 구체적인 꽃으로 바꾼다. ‘장미’라고 할 때 ‘장미꽃이 꽃다발을 들고 담장에 기대섰다.’처럼 그 사물을 사람이 하는 행위(술어)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특징은 사물의 주체를 바꾸기보다 술어를 바꾸는 기술이다. 예문에서처럼 ‘피다’를 자연적 현상의 술어에서 의도화 된 술어(들고 섰다, 기대섰다 등등)로 바꾸는 것이다.
‘계곡 물살에 돌멩이가 굴러간다.’라는 표현을 ‘물살을 못 버티고 돌멩이가 땅을 친다.’라고 다르게 바꾸어 보는 수사법이다.
피다 → 들고 섰다. 굴러간다 → 땅을 친다.
둘째 사전적 해석을 해체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다.
즉 보는 관점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소리’하면 우리는 청각적 이미지만 생각한다. ‘소리’는 들리는 것이지, 떨어지는 물체가 아니라는 기존 관념을 깨는 것이다. 이 ‘소리’를 물체로 바꾸면 된다. ‘떨어지는 새소리를 밟고 가는 숲속에서’처럼.
새소리가 아래로 떨어져서 땅바닥에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땅바닥에 있으니, 발밑에 밟히는 것은 당연하다.
‘새소리를 듣고 가면’ 일상적 언어의 틀이지만 ‘새 소릴 밟고 간다.’는 낯선 이미지로 다가오는 새로운 언어소통의 틀이 된다.
소리 → 무게를 지닌 물체로 상상 → 떨어지다.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보인다’ → 밤하늘에 불이 켜지기 시작한다.
‘해 질 무렵이면 전신주의 그림자는 길어지고’
→ 전신주가 제 키를 키워가는 저녁나절‘
'가을이 오다' → 가을이 바라보다.
셋째는 상상력이다.
‘봄이 되면 새싹이 돋는다.’ ‘봄볕이 싹 튼다’
이러한 해석은 상상력에서 온다. 이 상상력은 공상이나 망상과는 전혀 다른 발상이다.
‘뭇사람 마음에 감동을 주다’는 ‘뭇사람 마음에 꽃물결을 일으킨다.’
‘양지쪽에 새싹이 돋고 있다.’는 ‘고요한 아우성이 양지쪽에 가득하다.’처럼 바꾸는 작업이다.
이러한 상상력은 시인의 타고난 오감을 활용해야 나온다.
넷째는 모순법(oxymoron)의 활용이다.
모순 어법은 수사법에도 있는 것이지만 요즘 시인들은 이 모순 어법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나무 빈속은 청렴이 가득하다.’ ‘이순신 장군은 죽어서도 살고 있다’
‘님은 갔지만 나는 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표현들은 작가의 노력과 상상력에서 발동한다.
몇몇 작품에서 발견되는 예가 아니라 작가가 부단히 <낯설게 하기>를 시도 할 때만 가능하다. 언어와 언어의 화학적 반응으로 생겨나는 결과물을 구슬로 엮어 내야 언어의 마술사가 될 수 있다.
특히 현대시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 중의 하나로 설명조의 작품이나 관형어의 남용으로 묘사하듯 하려는 창작 시도는 시조의 본질이 아니다.
시조의 본질은 상징과 비유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어려울 때 가끔, <낯설게 하기>를 시도해 보는 것도 좋은 작품을 생산하는 방법의 하나임은 확실하다.
*추가
오늘(8/25)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낯설게 하기>를 잘한 광고를 보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교실로 무대를 배달하다. /뮤지컬 배우"
이 말은 "오늘 학교에서 학생을 위해 뮤지컬 공연을 한다."라는 일상적 말을 해체하여 낯설게 표현한 좋은 예이다.
첫댓글 비유ㅡ
은유가 좋지만
ㅡ
기술콰 노력이
요구되겠지요
<낯설게 하기>
배람합니다
정독하여 정진토록 하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