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남침례회 해외선교부는 서울에 선교본부를 설치하고 교회에서 실시할 각종 프로그램을 제공함으로 교회발전에 기여했다. 오늘날 교회진흥원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또한 부산에 침례병원을 설립하여 의료사업을 전개함으로써 교단의 위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선교사업에 유기적인 인재양성의 필요성 때문에 대전에 신학교를 설립했다.
학교법인 이사회가 조직되고 이사장에 장일수 목사, 이사에 김용해, 신혁균, 안대벽, 한기춘, 최형근, 최성업 목사가 선임되었다. 신학교를 대전에 유치하는 것을 적극 주장한 사람은 나요한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 침례교회의 분포로 볼 때 대전이 교통중심지로 적합한 지역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 평양에 또 하나의 신학교를 세우고, 서울에는 신학대학원을 세우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나선교사가 처음 한국을 탐색하기 위해 부임했을 때는 1950년 6월, 즉 한국전쟁이 막 발발할 때였다. 그래서 그는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 필리핀으로 피난해야 했다. 당시 남북이 대결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사료된다.
이사회는 대전시 중동 10번지에 있는 국일관(國一館)을 구입하여 캠퍼스로 사용했다. 국일관은 일본인이 유곽으로 사용하던 장소였다. 교사, 기숙사, 도서관, 사무실 등을 꾸미고 1954년 4월에 문교부에 인가를 신청했다. 학칙에 따라 별과 50명, 예과 50명을 정원으로 하는 모집요강이 각 교회에 발송되었다. 나는 교회제직과 이 문제를 의논한 뒤 입학원서를 제출했고, 별과 제1회로 입학했다. 당시 한국 교계는 장로교단의 총회신학교, 장로회신학교, 한국신학교, 고려신학교, 감리교단의 감리교신학교, 성결교단의 서울신학교를 비롯하여 구세군의 사관학교 및 기타 군소 교단의 단기 성경학원 등이 운영되고 있었다. 교직원은 초대교장에 나요한 박사, 교무과장에 조응철 박사, 학생과장에 한기춘 목사, 서무과장에 김병욱 집사 등으로 구성되었다.
초대 교장인 나요한 선교사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중국에서 30년간 선교사로 활약하던 분이었다. 그는 중국 정부가 인민공화국이 된 뒤, 더 이상 선교가 불가능해지자 선교사업을 철수하고 필리핀에서 대기하다가 한국으로 파송되어 왔다. 따라서 그는 동양문화권에 이미 익숙한 터라, 한국 생활에도 별 무리없이 잘 적응하였다. 그는 본래 쾌활한 성품에 무게있는 신앙인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의 굳은 신념과 보수적인 신학노선은 한국 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또 나선교사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위해 구호대책을 세워 나갔다. 구호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원조금, 의류, 구호미 등을 미국으로부터 지원받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일생을 전도사역에 충성했던 원로목사들에게는 위로금과 신형 자전거를 지급했고, 그 자손들에게는 학자금을 주는 등 특별한 후대를 했다. 하지만 그가 1959년 한국 침례교단의 총회 분규에 개입하여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한국 선교의 오점으로 남았다. 결국 그는 본국으로 소환되어 한국을 떠났다.
조응철 박사는 본래 장로교 출신으로서, 미국에 유학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었다. 그가 침례교에 들어온 것은 나요한 선교사의 통역이 인연이 되었다. 안대벽 목사가 미국으로 유학하기 위해 떠나면서, 그를 나요한 선교사의 통역원으로 추천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학에 능통하고 학벌까지 좋은 데다 친절하고 겸손하여 나요한 선교사는 그를 전격 발탁하여 교무과장으로 등용했다. 그는 평소에 입버릇처럼 “나는 겸손을 배운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무실에 찾아온 손님들의 신발을 빠짐없이 바로 놓아주었고, 설교를 할 때마다 예레미야와 같이 눈물을 흘리며 박력있게 하는 그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특히 그의 설교학 강의는 학생들에게 큰 유익을 주었다. 설교학은 모두 3학기 계속되었는데, 첫 학기는 이론, 둘째 학기는 실습, 그리고 셋째 학기는 설교 강평을 받게 했다.
한기춘 목사는 학생과장의 보직을 맡으면서, 구약신학 분야를 강의했다. 본래 한학자였던 그는 15세에 초시(初試)에 합격한 수재였다. 성실하게 준비된 강의는 학생들을 만족시켰고, 부흥회에서 행하는 그의 설교는 은혜가 넘쳤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이 단체를 떠나고 싶어도 펜윅 선교사의 복음이 좋아서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한목사는 어느 날부터인가 정치적인 문제에 빠져, 조응철 박사를 제거하는 데 선봉이 되었다. 조박사의 약점을 찾기에 바빴고, 채플 시간마다 그의 험을 뜯고 공격적인 언사를 퍼부었다. 설교가 아닌 설전(舌戰) 속에서 은혜는 고사하고 환멸스럽기까지 했다. 그 싸움은 1, 2년 안에 간단히 그칠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조박사는 학교를 떠났고, 그 와중에 한목사 자신도 권고사직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목사는 그 처사에 불복하여 단식 투쟁을 벌였다. 나는 이미 학교를 졸업한 상태였지만, 몇몇 친구 목사들과 함께 한목사를 찾아가 단식을 풀도록 권면했고, 급기야 그는 교수실을 떠났다.
김호연 교수는 한국신학대학 출신으로 실천신학을 담당했다. 그는 비록 목회학을 비롯하여 특별한 전공과목 없이 되는 대로 많은 과목을 강의하는 인상을 주었지만, 침착하고 과묵하여 큰 약점을 발견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언제나 믿음직하기는 했지만, 강의 시간에는 때때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한태경 교수는 중앙신학교 출신으로 신약신학을 담당했다. 고집이 대단한 사람이었는데, 강의 시간에도 그런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자신의 학설을 주입식으로 전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시험을 볼 때 다른 학설에 호의적인 견해를 보이면 배타적으로 대했고 점수도 인색했다.
도월태 교수는 조직신학과 역사신학을 맡았다. 특히 그는 침례교회사를 인상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1957년에 제2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피선교국의 국민성을 이해하고 같은 생활을 실천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학교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고 학생식당에서도 식사를 자주했다. 성경의 교훈대로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때로는 기계처럼 원리원칙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외에도 최형근(崔炯根) 목사는 교양 과목을, 서동순(徐東淳) 강사는 영어를, 구두서(具斗書) 강사는 국문학을, 그리고 김영철(金永哲) 강사는 법학통론 등을 강의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시절은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가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때 보고 배우고 느끼면서 꿈을 키웠던 것이 결국 나의 성직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미국인 교수는 “여러분, 신학교 학창시절에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친구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때 사귄 친구들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끊을 수 없는 벗으로 남아있다. 생각해보면 그때 얻은 친구들은 나의 보배들이었다. 진정한 친구는 상호 이해하고 격려하며 힘이 되어준다.
대부분 학생들은 기숙사에 입주하여 공동생활을 했다. 새벽기도회는 철저히 수행되었다.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당번이 복도를 다니며 작은 종을 치기 때문에 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도회는 아침식사를 할 때까지 이어졌다. 식당 사정은 좋지 않았다. 식사 종소리가 나면, 각 방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이 순식간에 식당으로 몰려들었지만, 식탁에 놓인 것은 콩나물국과 목을 확 쏘는 화학간장이 쳐진 한 두 가지 반찬이 고작이었다.
한 번은 나요한 선교사의 회갑잔치를 충서지방회 주최로 하게 되었다. 한국 선교 7년만의 일이었다. 평소에 유달리 친숙하게 지내오던 신혁균 목사가 이 사실을 알고 지방회에 제안했던 것이다. 1957년 3월 1일. 나선교사 내외분을 초청했다. 격식은 재래 한국식으로 하기로 하고 광천교회에서 주선을 했다. 식순 가운데 자녀가 절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나선교사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신목사는 “김전도사가 수양아들이 되면 어떨까?” 하며 내게 제언했다.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번 일은 피할 수 없었고 내 마음도 그리 싫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인연이라고 하고 믿음 안에서는 섭리라고 한다. 나선교사와 나는 깊은 관계가 있었다. 모교회에서 총회를 할 때 나선교사는 소명자를 부르는 설교를 했고,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작정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회갑연에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들 역할을 했다. 그 일 후에 나선교사는 고맙게 생각했는지 언제나 나를 만날 때는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가워했다.
절친했던 신학교 동기생들(임병찬, 김갑수, 박경배, 남용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