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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일 구역 성지 순례 일정표 | |
.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 | |
모이는 장소 | 명동성당, 성모님 동산. 앞. 오전 9시 까지 집합. |
명동 주교좌 성당 09:00- 10:00 | 한국교회의 상징,, 최초의 본당, 최초의 공동체가 만들어진 곳,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진 지하성당,( 성 앵베르범 주교, 성 샤스탕 정신부, 성모방 나신부, 일부 유해/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와 기해박해 당시 무명 순교자 두 분이 모셔짐) 성당 설계와 시공감독은 코스트 신부가 맡아 성령 강림 대축일 1898년 5월 봉헌식을 하면서 기해박해 병인박해 순교자 지하성당에 모심. |
한국천주교역사 | 1784년 이승훈 북경 세례 받은 후 귀국,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이 강학과 집회를 가짐. 명레방에 살던 중인 김범우, 입회 후 자신의 집에서 교회예절 교리강좌를 벌임, 명레방에 신앙공동체가 최초로 생김. |
시작기도 (성모동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항상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 ! 오늘 저희 맛세오 형제회 명일구역 형제들이 한 마음으로 성지 순례를 하고자 합니다. 시작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시간을 주님께 봉헌 하오니, 주님의 축복이 저희 공동체 에 가득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소서. 오늘 성지에서 의 미사와 기도와 순례 중에, 저희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하시어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게 하시고 그들의 순교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또한 맛세오 형제회 명일구역 공동체가 더욱 사랑하고 일치하여 주님 보시기에 더 좋은 모습으로 거듭나게 해 주소서. 좋으신 주님! 이 좋은 하루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평화로울수 있도록 저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소서. 이 모든 기도를 우리 주 그리스도 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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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성지 | 한양, 새남터와 더불어 서소문 밖 처형장임. 1801년 신유박해 당시 100명이 순교한 장소. 이중 44인이 시성됨. 대표적인 사람이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 김효임 고롬바, 김효주 아네스 |
초기 순교자 124위 시복자중 서소문 순교자 27위가 포함됨 정약종 아우쿠스티노, 아들 정철상 최창현 요한, 강완숙 골롬바, | |
약현성당. 11:00 -12:00 | 1.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약 체결, 제한적인 신앙 자유 획득. 2.1887년 수렛골(현재 순화동) 명동(종현) 공솔로 설립됨(교리강습소) 3.1890.1.23 교우증가 문안 586명, 문밖 950명 4.1891. 명동 두세 신부 순교지가 보이는 장소에 성당 대지확보 5.1891. 8. 정지작업중 청부인 구속으로 공사중단. 1891.10.27.약현성당 정초식 1891.11.9. 정두세(Doucet) 신부 초대 주임으로 부임, 서울 두 번째 본당됨 1892.11.6. 최초의 근대식 벽돌집으로 약현 성당 준공 1893.4.23 약현성당 축성식 1895. 본당 학교 설립. 1896.3. 한국교회 최초 한국인 사제 서품식 갖음(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쿠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 1897.12. 한기근 바오로, 김성학 알렉시오, 이내수 아우쿠스티노) 1896.4 본당 주임 정두세 신부 부주교 역임 1898.5 명동 대성당 축성 미사참례 11시 교중미사: 전시관 성당에서 |
미사 후 순교성지 전시관: 관람.12:00 – 12:30 | |
점심식사 | 설렁탕으로. |
옛 용산 신학교 13:30- 14:30 |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엣 신학교 성당, 배론 신학교에서 여주 부엉이골로 이전 후 다시 용산신학교로 옮김. 다시 헤화동 신학교로 이전함. 1902년 -1958년까지 김대건 신부 유해 안치되었으나 헤화동으로 이전, 조선교회 초대교구장 소브뤼기에르, 8대 교구장 뮈텔 주교 유헤도 모심. 생활관은 성심 수녀회 관구사무실과 성심기념관으로 사용함. 바다의 별.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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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성지 15:00- 16:00 | 당고개 순교지는 최양업 이성례 마리아와 9명이 순교한 거룩한 순교 성지다. 젖먹이 아들이 죽은 이성레 마리아, 11명의 자녀중 10명을 잃은 손소벽 막달레나, 신앙이 삶의 기준이었던 이경이 아가다, 홍병주 베드로, 홍영주 바오로 박종원 아우쿠스티노, 이문우 요한, 권진이 아가타, 이인덕 마리아 |
왜고개 성지 16:30- 17:30 | 원래 황토가 좋아 기와를 만들던 곳이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와고개가 왜고개로 바뀐 것이다. 또한 용산 성심학교, 약현, 명동,성당 벽돌도 여기서 구운 것이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배르, 주교, 모방신부. 샤스탕 신부, 1886년 병인박해 순교한 베르뇌 주교, 남종삼, 최형, 홍봉주, 임시 머물던 장소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도 이곳에 가매장된 후 미리내로 옮겨진다. 원래 새남터에 순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신부인 앵베르, 샤스탕, 모방신부는 노고산에 암매장된 후 4년만에 유해를 빼내어 박바오로의 선산 삼성산에 안장되었고 이후 박바오로 아들 박순집은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성직자와 치명자 시신을 훔쳐내 왜고개에 안장 한다. 다시 이들은 1924년 시복을 앞두고 발굴되어 바티칸,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내 지고 명동성당에 일부가 안치된다. |
마침기도. | 항상 저희를 사랑으로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 오늘 주님의 축복 속에 하루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 드리나이다. 성지에서의 하루를 통하여 저희 마음을 열게 하시고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여 주시며, 같은 신앙 안에 살고 있는 우리 공동체를 하나되게 이끌어 주셨나이다. 이제 우리는 성지순례를 통하여 주신 은혜를 깊이 간직하오며 항상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결심 하오니 이 작은 믿음을 크게 이끌어 주소서. 오늘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 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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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종주교관방문 17:40- 18:00 | 유수일주교님과 환담. 그리고 시간이 허락하면 모시고 저녁식사. |
주님의 말씀과 삶과 그분의 거룩한 복음을 마음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사부님) |
순교자 성월, 9월의 시작이다. 내가 주관하고 있는 明逸 본당, 맛세오 형제회 명일구역 형제들과 서울 도심성지를 순례하기로 한 날이다. 오전 9 시 명례방 명동성당 성모동산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8시10분경, 주변을 산책하듯 하며 살폈다. 아주 오랜만에 온 명동성당. 한국 최초 신앙공동체가 생긴 곳이다.
이벽 선조의 주도면밀한 계획있는 열성은 조선최고의 학자들 중심으로 강학을 하고 천주실의와 칠극 등의 자료로 한국 천주교는 태동의 시기를 넘긴다. 정약용 형제와 권철신 권일신 형제와 이승훈이 중심 인물들이었다. 어느해 동지사로 떠나시는 아버님을 따라 북경으로 가는 이승훈에게 이벽은 밀지를 전한다. 가서 세례를 받고 성물과 교리책등을 수집하여 갖고 들어오라는 당부다.
이승훈은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부 실천한 후 자신도 세례를 받고 환국한다. 이 즈음 이벽은 양반으로서 대학자만으로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다.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주교 아닌가! 중인들에 대한 전교가 필요한 이유였다. 그래서 김범우, 이존창이 합류하게 되고 전주의 유항검(유항검은 양반이었다) 도 합류가 되어 교세는 내포와 전주로 확대되는 기회가 된 것이다. 아무튼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깨닫게 된 초기의 신자들은 그 문제를 갖고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집에서 종교적 모임을 수시로 갖는다.
그러던 어느날 김범우 집에 많은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집회가 지속되면 될 수록 참여자들은 늘어 났다.
1785년 정조 9년 봄, 드락거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는 첩보를 받고 잠복하며 조사를 하던 형리들이 집 안으로 들이 닥쳤다. 투전판이라고 확신한 형리들은 듣도 보지 못한 물건을 보고 전부 형조로 압송한다. 대면한 형조판서는 모두 양반 자제들이라 훈방하고 중인 신분이었던 김범우만 곤장을 치고 귀양을 보낸다. 김범우는 끝내 돌아 오지 못하고 순교로서 1784년 9월 14일 생을 마감한다.이사건이 바로 을사추조적발사건이다. 천주교라 종교가 수면위로 들어나는 사건이다. ( #. 김범우의 유배지는 달래신부가 쓴 책을 근거로 충북 단양으로 알려졌으나 1980년 후손이 나타 나 밀양 단장임을 밝힌다. 1989년 김범우의 외손의 도움으로 실묘를 찾았다., 2011년 9월 부산교구 레지아와 교구민 협조로 성모동굴 성당을 건립하게 된다.)
명동성당이 지닌 고유의 의미를 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한국천주교의 요람이다.
2. 서울대 교구 주교좌 성당이다.
3. 신앙공동체가 처음 생긴 장소다.
4. 약현성당이 봉헌된 후 6년만에 코스트신부가 설계하고 감독하여 1908년 5월 성령 강령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되었다.
5. 봉헌식 때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순교자를 지하성당에 모셨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 성 앵베르 범 주교, 성 샤스탕 정신부, 성모방 나 신부 /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한국인 성인 - 김성우 안토니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기해박해 순교자 - 두 명의 무영순교자
시간이 임박하자 구역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성원이 되자, 약 15분간 한국 천주교사에 대하여 설명 한 후
시작기도를 드렸다. (기도 전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아멘.
항상 저희를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 !
오늘 저희 맛세오 형제회 명일구역 형제들이
한 마음으로 성지 순례를 하고자 합니다.
시작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우리의 모든 마음과 시간을 주님께 봉헌 하오니,
주님의 축복이 저희 공동체 에 가득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여 주소서.
오늘 성지에서 의 미사와 기도와 순례 중에,
저희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하시어
신앙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게 하시고
그들의 순교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깨닫게 하소서.
또한 맛세오 형제회 명일구역 공동체가 더욱 사랑하고 일치하여
주님 보시기에 더 좋은 모습으로 거듭나게 해 주소서. 좋으신 주님!
이 좋은 하루를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 안에서 기쁘고 즐겁고 평화로울수 있도록
저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소서.
이 모든 기도를
우리 주 그리스도 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그리고 성모님 앞으로 나아 가 개인적인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순교자 성월 첫 주일 갖는 순례에 대하여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옵소서 청하였다.
단체사진을 찍고
지하 경당으로 자리를 옮겨 순교자들을 경배하고 찬미하며 거룩한 순교를 되새겼다. 알렐루야!
명동 성당을 떠나기 전 휴식공간을 찾아, 조식 대용으로 총무과 준비 해 온 샌드위치와 음료를 나눈 후 소공동 지하아케이트, 2호선 시청 통로 긴복도를 지나 8번 출구 대한일보사 사옥 앞으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서소문 밖 형장을 찾아 걷다. 소덕문 표시석에 모두 모여 소덕문 (서소문)에 얽힌 박해와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가기 위하여 나간 이야기와 형장을 설치하는 조건등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려 주었다. 그리고 길을 건너 서소문 순교 현양탑과 공원화 사업에 대하여 설명하며 약현성당에 도착하였다.
한양도성에는 사대문(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숙정문)이 있고 그 사이 작은 소문으로 사소문(동소문(홍화문, 혜화문), 시구문(광희, 문),서소문(소덕문, 서의문) 북소문(창의문)이 있다. 그중 서소문은 소덕문이라 불렀으나 성종이 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에게 휘인소덕이란 휘호를 추존하려다 보니 소덕문이 걸려 소의문이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서쪽의 작은문이라하여 서소문이라 부른 것이다. 아무튼 서소문은 천주교 신자에게는 공포의 지역이었다. 의금브나 포도청에 온갖 악형을 받아 몸은 만신창이 되었는데 소달구지에 실려 형장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었다. 울퉁불퉁 길의 영향으로 몹씨 흔들리는 마차에 진동은 악형을 받아 생긴 고통을 배가 시켜 주는 그 자체만으로 형벌이 되었다. 아~~ 얼마나 고통이었을까.
그렇게 서소문 형장, 당고개 형장, 새남터로 이끌려가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게 된다. 설명을 하면서 그 고통들이 느껴졌다.그런 어려운 순간에도 순교자들은 예수,마리아를 부르며 순교한다. 형장이 만들어진 배경과 형장이 세워지는 조건도 설명한 후 길을 건넜다.
약현 성당 언덕을 오르기 위하여 신호 대기중인 형제들.
언덕을 오르면서 쪽방을 알리는 사인보드가 보여 담아 두었다. 가끔 반찬 봉사를 하기 위하여 찾는 곳이다. 실장인 소화 데레사의 봉사심이 남다른 곳이다. 나날이 사랑과 인정이 넘치는 소외된 이들의 아름다운 공동체로 거듭나게 하소서 아멘 하며 언덕을 걸어 올랐다.
서소문 순교자 기념성당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45분이었다. 주일날은 미사참례 인원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기념관 성전을 사용한다.
미사 참례 후 약현 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을 하늘에 아름다운 성가대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천상의 노랫소리가 심금을 울린다. 순교 기념성당에서의 교중미사 참여 이 또한 은혜다. 아멘.
이곳은
한양, 새남터와 더불어 서소문 밖 처형장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운 순교를 증거하는 성당이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 100명이 순교한 장소로서 이중 44인이 시성됨. 대표적인 사람이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 바오로., 김효임 고롬바, 김효주 아네스, 초기 순교자 124위 시복자중 서소문 순교자 27위가 포함됨 정약종 아우쿠스티노, 아들 정철상 최창현 요한, 강완숙 골롬바, 등이 순교하였다.
현(峴)은 고개를 뜻하는 말이다. 언덕에 오르면 낮은 곳을 볼 수 있다. 약현은 바로 약초가 많은 언덕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교자 기념성당을 짓는 장소는 순교터가 잘 보이는 언덕에 짓는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에는 순교터가 바로 코 앞이었다. 언덕 아래에 건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온갖 건물들로 시야가 가려졌다.
성당 이력은 다음과 같다.
1.1886년 한불 수호통상조약 체결, 제한적인 신앙 자유 획득. 2.1887년 수렛골(현재 순화동) 명동(종현) 공소로 설립됨(교리강습소) 3.1890.1.23 교우증가 문안 586명, 문밖 950명 4.1891. 명동 두세 신부 순교지가 보이는 장소에 성당 대지확보 5.1891. 8. 정지작업중 청부인 구속으로 공사중단. 1891.10.27.약현성당 정초식 1891.11.9. 정두세(Doucet) 신부 초대 주임으로 부임, 서울 두 번째 본당됨 1892.11.6. 최초의 근대식 벽돌집으로 약현 성당 준공 1893.4.23 약현성당 축성식 1895. 본당 학교 설립. 1896.3. 한국교회 최초 한국인 사제 서품식 갖음(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쿠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 1897.12. 한기근 바오로, 김성학 알렉시오, 이내수 아우쿠스티노) 1896.4 본당 주임 정두세 신부 부주교 역임 1898.5 명동 대성당 축성 |
6,25를 겪으면서 파괴된 것을 재건하였으나 최초의 성당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러다. 1998년 2월 11일 방화로 소실된다. 즉시 복원을 시작하여 2000년 9월 17일 정진석 대주교의 집전으로 최초 성전 건립당시 원형대로 봉헌 된다.
묵상과 기도로서 서소문 성지와 기념성당에서 순례자로서의 마음을 정리 한 후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선의 국법과 대척점이 된 천주교의 전파 쉽지 않았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교리에 힘을 얻은 사람들 그들은 백성들이었다. 양반 상반으로 구분되어 사람답게 살 수 없었던 그 시대의 천주는 삶의 돌파구였다. 지식인의 고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격적으로 사군자라 하였고 신분적으로는 사대부라 불리던 조선의 지식인들, 엄청난 임란 병란을 통하여 겪었던 고통과 함께 아무것도 안하면서 양반이라는 신분하나로 권력과 금권을 틀어 쥐는 모순에 저항하는 양심 있는 세력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시작은 반계 유형원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는 그렇게 이야기 한다. 먹을 것은 하나밖에 없는 그것을 먹으려고 덤벼드는 사람은 여럿이니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양반들도 스스로 농사지으며 스스로 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영향은 성호 이이에게 까지 이어진다. 곧 성호 제자들은 거의 남인계열이었다. 그들이 결국 천주교의 앞잡이가 된다. 박물관에서 여러박해를 증거한 후 어느부랑자에 의하여 시작된 방화로 잿더미가 되어버린 현장에서 성모님은 굳건하셨다. 이 사실을 사진과 실물로 확인하며 관람을 마쳤다. 다음 성지순례 장소는 옛 용산신학교다.
코스트 신부가 설계한 옛 신학교 성당, 배론 신학교에서 여주 부엉이골로 이전 후 다시 1892년 용산신학교로 옮김. 그리고 혜화동 신학교로 이전함. 1902년 -1958년까지 김대건 신부 유해 안치되었으나 헤화동으로 이전, 조선교회 초대교구장 소브뤼기에르, 8대 교구장 뮈텔 주교 유해도 모심. 생활관은 성심 수녀회 관구사무실과 성심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옛 용산신학교 성당이나 생활관, 전부 아름답다. 이곳에 서면 옛적에는 새남터 형장이 빤히 보였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고층건물이 차단하고 있어 조망이 불가능 하다. 우리나라에서의 신학교 역사는 다음과 같다.
1855년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가 설립된다.
1866년 병인박해 강제로 페쇄조치 되고
1885년 여주 부엉이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설립된다.
1887년 용산 함벽정인 이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이 부근에 개인 가옥을 매입하여 서울교구 사제들을 위한 성직자 묘역을 만들었다. 용산성당이 그 자리를 관리하고 있다.
오늘 계획은 걸어서 하늘까지가 아니라 걸어서 왜고개 성지까지 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순례의 길을 옛용산신학교에서 멈춰야 하였다. 왜고개까지 가려던 계획은 일정상 깃든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약현성당 건립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다음 기회에 들려 주는 것으로 하고 떠나야 하였다. 명례방 성전 뒤 성모님 동산에서 시작한 순교자 성월 순례 출발을 용산 함벽정 옛 성심 신학교 성모님 동산에 매듭 짓게 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오늘 순례를 통하여 순교자의 정신을 되새겨 봄으로써 나의 신앙적 정체성을 살펴 보는 기회가 되기를 소원하며 작은 카페로 향하였다. 출발하기 전 몇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작은 휴식을 갖으며 오늘 일정에 대한 감사기도와 마침 기도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순례자의 마음을 전하였다.
항상 저희를 사랑으로 지켜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 오늘 주님의 축복 속에 하루를 허락해 주심에 감사 드리나이다. 성지에서의 하루를 통하여 저희 마음을 열게 하시고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여 주시며, 같은 신앙 안에 살고 있는 우리 공동체를 하나되게 이끌어 주셨나이다. 이제 우리는 성지순례를 통하여 주신 은혜를 깊이 간직하오며 항상 기도하고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고자 결심 하오니 이 작은 믿음을 크게 이끌어 주소서. 오늘 함께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와 영광 드리오며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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