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군과 천사들의 노래
본 문 / 누가복음 2장 14절
주 제 / 예수 탄생의 의미는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하늘백성들에게 평화’이다.
작성일 / 2022년 12월 25일. 성탄절. (№ 22-5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 2:14)
Ⅰ 오해하면 오류에 빠진다. (마 22:23-33)
유대교의 양대 종파라 하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이다. 이 두 종파 사이에는 신학적 견해차가 있었다. 바리새파는 부활을 인정하지만, 사두개파는 부인한다는 점이었다. 신명기 25장 5∼6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신 25:5∼6) ‘형사취수제도’인데, 사두개인들은 바로 이 율법을 근거로 부활을 부인했다. 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형제가 일곱인데, 차례로 다 죽어서 결과적으로 한 여인이 일곱 형제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입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이 없다는 대답을 듣고자 했다. 이때 예수님은 사두개파의 2가지 오해를 지적하셨다(마 22:23∼33참고).
첫째, ‘부활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셨다. “부활의 때에 누구의 아내인가?”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현생의 연장’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은 질적 새로움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다. 부활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현생의 연장’이 아니라, 천사와 같은 존재로 새롭게 출발하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오해하였기 때문에 부활을 부인하는 신학적 오류에 빠졌던 것이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셨다. “부활의 때에 누구의 아내인가?”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써 그들과 맺은 ‘언약을 실현시키시는 하나님’, 즉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부활을 부인하는 신학적 오류를 불러왔다. 오해는 오류를 불러온다.
Ⅱ 성탄의 의미 (눅 2:13∼14)
오늘은 성탄절이다. 즐거운 날이다. 그런데 2022년 성탄절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성탄절이 주일과 겹치기 때문이다. 귀한 공휴일 하나 날아갔으니 아쉽다. 사두개인들처럼 ‘성탄절의 의미’를 오해한 결과이다. 성탄절이 공휴일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탄절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아쉬운 성탄절’이 아니라, ‘가슴 벅차고 즐거운 성탄절’이 되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천군과 천사들이 베들레헴 목자들에게 성탄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불렀던 노래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성탄절의 의미’가 담겨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눅 2:14)
1. 성탄절의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노래한다. (눅 2:14a)
예수님의 탄생이 왜 하나님께 영광일까? ‘하나님의 숙원’이 이루어지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숙원은 ‘언약의 완성’, 즉 ‘자기백성의 구원’이다. 그 숙원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구체화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올렸던 기도가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이 땅에 강림하셨다. 그 일을 완성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이 하신 ‘하나님의 일’은 바로 ‘하늘백성의 구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숙원’인 ‘하늘백성의 구원’을 위해 탄생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그럼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었을까? 그건 아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했다. 다만 눈으로 볼 수는 없었다.
출애굽기 34장에는 ‘모세의 얼굴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내려오니 그의 얼굴에 영광이 가득하여서 백성들 앞에 설 때에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출 34:34∼35 참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얼굴도 그러할진대, 하나님의 영광은 어느 정도일까?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부탁했다.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하나님은 거부하셨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이라”(출 33:20).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다. 이렇게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영광은 충만했다. 사람이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영광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은 줄곧 존재했는데, 천군과 천사들은 왜 ‘예수님의 탄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노래했을까?
여기서 ‘영광’(독사)은 ‘가장 고귀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천군과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극점에 도달했다고 노래한 것이다. 성탄절을 공휴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이 극점에 도달하는 날이다.
사람들은 세상을 정복한 제왕이 보좌에 앉아 경배 받는 것을 영광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영광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요 14:9)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내려오셨는데, 그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상에 내려오신 하나님은 한 번도 보좌에 앉으신 적이 없다. 태어나셔서 구유(말밥그릇)에 누우셨다. 어려서부터 목수의 일을 배우셨다. 땀 흘려 일하는 청년이었다. 가시관을 쓰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생을 마감하셨다. 그것이 바로 극점에 이른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누구를 정복하여 얻는 영광이 아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낮아지심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성탄절을 공휴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영광이 극점에 달한 날이다. ‘아쉬운 성탄절’이 아니다. ‘벅참 가슴으로 즐거워해야 할 성탄절’이다.
2. 성탄절의 두 번째 의미는 ‘하늘백성들의 평화’라고 노래한다. (눅 2:14b)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예수님도 그러하다고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요 14:17a).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탄생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가 있다. “♬ 헤베누 샬∼롬 알레헴, 헤베누 샬∼롬 알레헴, 헤베누 샬∼롬 알레헴, 헤베누 샬롬 샬롬 샬롬 알레헴 ♬”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라는 뜻이다. 여기서 ‘평화’(에이레네)란 말은 ‘고요하다’, ‘하나 되다’란 뜻이다.
‘고요하다’란 말은 ‘잔잔한 바다를 여유롭게 떠가는 돛단배’를 연상케 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두려운 일, 분노할 일들이 참 많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급증했다. 그 돈 모으느라 자신은 물론 부모님까지 아끼고 또 아꼈다. 부모의 사랑이 담겨있는 돈이다. 자식의 고마움이 담겨있는 돈이다. 몇 년 후에는 집을 장만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돈이다. 그 돈을 빼앗겼으니 당장 어디로 가야하나 앞이 캄캄하고 두렵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이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천군과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의미하는 것은 ‘하늘백성들의 평화’라고 노래한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분노가 멈추는 평화라고 노래한다. 그러니 세상이 험악하면 험악할수록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영접하여서 잔잔한 바다 위를 여유롭게 떠가는 돛단배처럼 평화로운 삶을 얻으라는 노래이다.
또한 ‘평화’는 ‘하나 되다’란 뜻이라 했다. 사실 하나가 되면 속일 일도 없고, 속을 일도 없다. 왼손이 쥔 것을 오른 손이 속여 빼앗는가? 오른 손이 쥔 것을 왼 손이 때려 빼앗는가? 그저 필요에 따라 오갈 뿐 빼앗음과 빼앗김이 없다. ‘하나 됨’이야 말로 진정한 평화이다. 천군과 천사들은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백성들이 하나 됨으로써 평화를 누리게 되는 사건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가정 구성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마음과 뜻이 하나 된다. 소망도 하나 된다. 그러니 다투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할 일도 없다.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가정이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 구성원들이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서로 한 몸이 된다. 다툼도 시기도 질투도 없다.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섬기면서 거룩한 열매를 맺는 교회가 된다. 그러라고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노래이다.
Ⅲ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평화를 누리는 성탄절
성탄절은 극점에 달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날이다. “날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극점에 달했으니 나의 찬양도 받으소서!” 이렇게 노래하는 날이다. 또한 성탄절은 평화를 누리는 날이다. 세상은 험악하나 예수 안에서 고요한 삶을 누리는 날,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써 하나 되는 날이다.
2022년 성탄절은 휴일 하나 없어졌다고 섭섭해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예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성탄절이 되길 바란다.
<기도>
하나님, 우리 영광교회 성도들 이 거룩한 성탄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소서, 예수님이 주신 평화를 가정과 교회에서 마음껏 누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