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씨(李氏)의 본원(本源)은 신라 3대 유리왕 9년 서기32년에 씨족집인 6촌을 6부로 개칭하면서 6부촌장에 6성(姓)을 사성(賜姓) 전할 때, “알천 양산촌(閼川楊山村)”을 급량부(及梁部)로 하여 촌장인 “알평공”(閼平公)에 이씨(李氏)를 사성하면서 비롯되었다고한다.
알평공은 신라초기 화백회의(和白會議)를 시행한 6부촌장의 의장(議長)이었으며, “혁거세”(赫居世)를 신라 초대왕에 추대한 공이 있음으로 후에 법흥왕(法興王)은 문선공(文宣公)의 시호를 추증하고 무열왕(武烈王)은 은열왕(恩烈王)으로 추존하였다 한다.
영천이씨(永川李氏)는 알평공계 이씨에서 분종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문헌상 기록을 찾지 못하여 고려 초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시고 고울군(高鬱君:고울은 영천의 옛이름)에 봉해진 이문한(李文漢)공을 시조로 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영천이씨의 선세계보(先世系譜)는 1798년 발간된 무오보(戊午譜) 1권에 수보(修譜)되어 있으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전고대방(典故大坊) 및 많은 성씨관련 문헌에도 빠짐없이 고증되고 있다.
영천이씨(永川李氏)의 본원 |
◆ 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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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의 거의 모든 성씨와 같이 우리 영천 이씨도 뿌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다만 영천 이씨의 근본은 신라 양산촌(촌장 알평공)계의 이씨에서 갈라졌으며 고려 초기에 평장사(平章事)벼슬을 지낸 이문한(李文漢) 할아버지를 시조(始祖)로 받들어 오고 있다.
영천 이씨는 시조 이문한 할아버지가 영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후손이 대대로 영천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본관(本貫)을 영천(永川)으로 하는 "영천 이씨"임은 우리 나라에 모든 성씨들이 본관을 발상지로 부르는 전통문화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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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川李氏의 淵源 (영천이씨의 연원)
시조 고려 초 평장사 이문한(李文漢).
永川李氏는 신라 유리왕 9년(AD:32) 6성을 사성 할 때 제1성 양산촌 李氏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나 고증 문헌이 없기 때문에 고려초 평장사를 지내고 영천 땅에 세거한 李文漢을 시조로 족보가 이뤄졌다.
구족보에는 시조7세 이극인(李克仁: 대장 군 봉,익양군) 연대가 고려 통합시로 되었으나 고려사에 고려중기(?-1224)로 고증되어 정정한 기록이 수록되어있다
영천은 신라 땅 切也火郡을 경덕왕 때 臨皐로 고치고 고려 초 道同 臨川 두고을을 합쳐 永州로 하였다 현종 때는 慶州에 소속되고 조선태종 13년 永川으로 되었다.
(주요성씨) 李, 崔, 鄭, 皇甫, 金, 尹, 張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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