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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문학의 실천적 지평:
지은경 시인의 생애, 문학 세계 및 학술적 기여에 관한 종합 연구
1. 서론: 문학적 실천주의와 휴머니즘의 총체적 구현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그리고 출판인이자 문화운동가로서 다방면의 족적을 남긴 지은경(池垠京)은 단일한 장르나 역할로 규정하기 어려운 입체적인 지식인이다. 1987년 등단 이래 40여 년에 이르는 그의 문학적 여정은 단순한 개인적 서정의 토로를 넘어선다. 그의 작품 세계와 활동은 실존주의적 철학에 기반한 자아 탐구에서 출발하여, 여성주의적 시각을 통한 사회 구조적 모순의 규명, 생태 위기 시대의 환경시(環境詩), 그리고 소외된 이웃과 지구촌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 휴머니즘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다.
지은경 시인은 "시를 삶으로 증명한 시인"이라는 문단의 평가가 대변하듯, 텍스트 내부에 갇힌 문학을 지양하고 현실 사회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추구해 왔다. 월간 문예지 《신문예》를 20년 이상 발행하며 신인 작가 발굴과 문학적 생태계 조성에 기여하는 한편, '인사동시인들' 활동을 통한 시의 대중화, 교도소 및 병원에 대한 지속적인 도서 기증, 우크라이나 전쟁 난민 구호를 위한 인세 기부 등 문학의 윤리적 실천을 몸소 보여주었다. 본 연구는 지은경 시인의 생애와 학문적 배경을 개괄하고, 17권에 달하는 시집과 다수의 평론집, 그리고 학위 논문 등에 나타난 문학적 궤적을 심층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한국 현대문학계 내에서 그가 차지하는 다층적인 위상과 의의를 총체적으로 조명한다.
2. 생애와 학문적 배경 및 문단 활동 개관
2.1. 철학적 사유에서 문학적 창조로의 이행
1950년 9월 24일 서울에서 출생한 충주 지씨(忠州 池氏) 지은경은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세계와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사유의 기틀을 마련했다. 학부 시절 형성된 철학적 기반은 훗날 그의 시 세계가 단순한 감각적 서정을 넘어 형이상학적 고뇌와 실존주의적 성찰로 나아가는 핵심적인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후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예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미학적 시야를 넓혔고,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1980년대 대표적 여성 시인인 최승자의 시를 연구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철학(학사), 예술학(석사), 문학(박사)으로 이어지는 그의 학문적 궤적은 인간 의식의 기저를 탐구하고 이를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며, 나아가 학술적으로 비평하는 전인적(全人的) 문학인으로서의 학문적 근간을 완성했다.
2.2. 등단 및 문단 내 주요 이력
지은경은 1987년 11월 12일 《보리수 시낭송》에서 자작시 「자화상」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한국 현대시단의 거목인 이근배 시인의 추천으로 문단에 정식 데뷔하였다. 이후 그는 창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국 문단의 중추적인 기관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일조해 왔다.
구분
주요 이력 및 활동 내용
창작 및 비평
시집 17권, 평론집 3권, 칼럼집 4권, 수필집 등 총 30여 권 저술
언론 및 출판
1981년 창간된 월간 《신문예》를 2003년 인수하여 발행인 및 총회장 역임, 도서출판 '책나라' 대표
협회 및 기구
국제펜(PEN)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현대시인협회 24·25대 부이사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및 문학정보화 위원장, 한국여성문인회 이사, 한국비평가협회 이사
사회 문화 활동
인사동시인협회 등 8개 협력단체 총회장, 세종시 예총 자문위원, '마음의 평안을 주는 시와 산문' 기증 운동 전개
주요 수상
황진이문학상 대상, 세계평화문학상 대상, 한국문협 서울시문학상, 연암문학예술상 대상, 국회사무총장상, 문예사조문학상, 한국자유시인협회상 등
이러한 폭넓은 이력은 그가 지닌 문학적 에너지가 텍스트의 생산에 그치지 않고, 문인들의 연대와 교류, 문학의 사회적 확산이라는 거시적 목표를 향해 조직적으로 작동해 왔음을 입증한다.
3. 문학 비평과 학술적 기여: 최승자 시 연구와 다학제적 평론
지은경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창작 활동 이전에 문학 비평가이자 학자로서의 기여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의 비평적 시각은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하는 철학적 뼈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3.1. 실존의식과 페미니즘을 통한 최승자 시의 재발견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취득한 박사학위 논문인 『최승자 시 연구: 실존의식과 페미니즘을 중심으로』(2007)는 한국 1980년대 여성 시단을 대표하는 최승자의 텍스트를 철학적, 정신분석학적 틀로 해부한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받는다.
이 연구에서 지은경은 최승자의 시를 단순히 개인적 절망이나 허무주의의 발로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전통적 가치관과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중심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치열한 저항'이자 '실존의식의 발로'로 독해한다.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남녀 불평등과 권위주의적 폭력에 맞서, 최승자가 선택한 독설과 자기 파괴, 육체의 사물화(Objectification) 등의 시적 전략이 역설적으로 가장 처절한 형태의 휴머니즘과 페미니즘을 구현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더 나아가 지은경은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무의식과 언어 이론을 원용하여, 최승자 텍스트 내의 '시'라는 기표(Signifier)가 상징계의 빈틈에서 솟아나는 소외된 주체의 욕망을 어떻게 대변하는지를 기호학적으로 분석하였다. 최승자의 독설과 환멸이 사실은 자본의 힘에 종속된 현실을 떠나 참된 자유와 주체적인 삶의 방식을 획득하려는 '진정한 자아 욕망의 발현'이며, 죽음의 충동(Death drive)을 통해 불쾌의 경험을 쾌의 감정으로 역전시키는 고도의 승화 과정임을 논증했다.
이러한 학문적 성과는 지은경 자신의 시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억압된 주체의 해방을 논한 학문적 통찰이 창작의 장으로 건너와, 훗날 지은경의 후기 시에서 '생태계라는 억압받는 대상'을 향한 공감과 해방의 모티프로 치환 및 확장되는 내적 메커니즘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3.2. 의식의 흐름과 뇌과학을 아우르는 다학제적 평론
지은경은 자신의 평론집 『의식의 흐름과 모순의 해법』 및 『인식의 지평』을 통해 현대 예술과 문학을 해석하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두 번째 평론집인 『인식의 지평』에서는 김혜순, 최정례, 이기성 등 당대 시인들의 작품을 '허상과 욕망', '삶과 죽음', '공(空)과 색(色)' 등의 철학적 범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특히 그는 현대 예술의 철학적 배경으로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중시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와 뇌과학 고찰"과 같은 글을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인지과학적 통찰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탐구하는 다학제적 비평을 시도했다. 그 외에도 안중근론을 다루는 등 문학과 역사, 과학을 넘나드는 넓은 스펙트럼은 비평가 지은경의 학문적 유연성을 대변한다.
이와 함께 그는 산문의 영역에서도 세밀한 이론적 구분을 시도했다. 세 번째 칼럼 에세이집 『문학은 휴머니즘의 실현』의 서문에서 그는 일반적인 산문이 수필로 통칭되는 현상을 지적하며, 경수필, 중수필, 에세이, 칼럼, 미셀러니 등의 미학적 차이를 명확히 규명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이론적 꼼꼼함은 그가 단순히 다작하는 문인을 넘어, 글쓰기의 형식과 윤리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연구자임을 시사한다.
4. 시 세계의 층위적 분석과 주제의 진화
지은경의 시 세계는 1995년 첫 시집 『시인의 외출』을 시작으로 『그리고 꿈속의 꿈』, 『자폐공화국』, 『이칼로스의 노래』, 『비창』, 『시간의 춤』, 『인생』 등을 거쳐 최근작인 제17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과 환경시집 『지구가 뜨거워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변화와 진폭을 보여준다. 초기의 시가 실존적 고독과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는 구도자적 성격을 띠었다면, 중기를 거치며 점차 사회적 타자와 인본주의적 성찰로 시선을 돌렸고, 최근작에 이르러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학적 상상력과 생명 존중 사상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또한 외국 독자를 위한 한영 대역 시집 『사람아 사랑아(A Person of Love)』를 출간하며 한국 문학의 보편성을 세계에 알리는 시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4.1. 고독과 침묵 속에서 길어 올린 실존의 미학
지은경 시의 출발점에는 인간의 근원적 결핍과 고독에 대한 철저한 직시가 자리 잡고 있다. 『자폐공화국』, 『이칼로스의 노래』, 『유츠프라카치아』, 『비창(悲愴)』 등의 시집 제목이 암시하듯, 시인은 현대인의 소외와 단절, 존재론적 비애를 예리한 언어로 포착한다.
이러한 실존적 탐구는 제13시집 『오랜 침묵』에서 한 차원 높은 미학적 절정에 도달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 「허공에 그리는 입술」은 이 시기의 대표적 정조를 대변한다. "허공에 핀 꽃을 본다 / 고요와 침묵을 먹고 자란 꽃은 / 스스로를 세워 평화를 꽃 피운다"라는 구절과 "생각과 느낌 사이의 고요 / 느낌과 생각 사이의 침묵"이라는 시구를 통해, 지은경에게 '침묵'은 단순한 발화의 부재가 아니라 진정한 앎과 평화에 도달하기 위한 적극적인 수행의 공간임을 증명한다. 시인은 무언(無言)의 허공 속에 언어 이전의 진실을 기입하고자 하며, 이는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일상적 언어의 소음을 걷어내는 고도의 시적 금욕주의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불안하고 파편화된 주체가 침묵이라는 내면의 여과기를 거쳐 자기 정화를 이루어내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다.
4.2. '여기, 그리고 지금'의 인본주의적 역동성과 대중과의 소통
제17시집 『여기, 그리고 지금』은 지은경 시력 40년의 철학적 사유가 집대성된 역작이다. 데카르트의 명제적 회의(懷疑)에서 출발해 라캉적 무의식의 세계까지 아우르는 시인의 사유는 철저한 '현재성'에 집중한다. 시인은 과거의 회한이나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경계하고, 오직 '지금 살아서 박동하는 마음'에 집중할 것을 역설한다.
특히 이 시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주목해야 할 문학적 장치는 총 7부로 구성된 69편의 모든 수록 시마다 시인이 직접 작성한 '시작노트(Poet's Note)'를 덧붙였다는 점이다. 현대 시가 지나치게 난해한 상징과 해체주의적 기법으로 무장하여 대중과 유리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 시인은 독자와의 능동적 소통을 위해 시작노트라는 파라텍스트(Paratext)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 산문적 여백은 단순한 시의 해설을 넘어, 그 자체로 철학적 아포리즘(Aphorism)의 역할을 수행하며 시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확장시킨다.
수록작 「숨은 얼굴」은 출근, 퇴근, 사랑의 순간마다 각기 다른 가면(Persona)을 꺼내 쓰며 속마음을 숨긴 채 계산기를 두드리는 현대인의 이중성과 물신주의를 예리하게 폭로한다. 「침묵의 나라」에서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인간성 상실'을 통탄하며, 시 「흔들리는 사다리」에서는 인공지능(AI)에 밀려 청년 일자리가 사라지고 일자리를 찾아 캄보디아로 떠났다가 희생당한 이주 노동자들의 비극을 고발한다. 사다리가 흔들리는 비극은 개인의 잘못이 아닌 사회와 세계의 책임임을 분명히 지적하는 사회적 목격자로서의 시선이 두드러진다.
또한 「세상의 대장간」에서는 이 고통스러운 세계를 '거대한 수련원'으로 인식하고, 삶의 온갖 긴장을 불에 달구어 단단한 검으로 벼려내는 프로메테우스적이고 니체적인 '운명애(Amor Fati)'의 초인적 의지를 보여준다. 문화평론가 나호열이 지적했듯, "문학이란 밥상은 혼자 차린 공동식사 / 혹시 올 사람을 위해 남겨두는 마음이다"라는 시구(「혼밥의 미학」 중)는 고독 속에서도 타인을 향해 밥상을 차려두는 지은경의 윤리적 태도, 즉 "고독한 인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다.
4.3. 생태학적 상상력과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경고
최근 지은경 시의 가장 뚜렷한 지향점 중 하나는 '생태 및 환경문학'으로의 확장이다. 시집 『지구가 뜨거워요』는 환경과 생명,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전면적으로 다룬 작품집이다. 이 시집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부의 제목은 '지구가 뜨거워요', '인류세', '친환경 에너지', '갈대숲', '생수병의 비극', '가파도의 눈물' 등 생태 위기의 현장과 직결되어 있다.
그의 생태시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맹목적으로 예찬하는 전통적 서정시의 낭만적 자연관에서 탈피해 있다.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생태계의 거대한 그물망(Web of life) 속 하나의 미립자로 환원시키며, '인류세'라는 지질학적이고 문명사적인 위기 앞에서의 뼈아픈 자기반성을 촉구한다. 편의주의와 자본주의적 소비가 빚어낸 '가파도의 눈물'과 '생수병의 비극'을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개별 주체의 실존적 위기(초기 시)가 거시적인 지구 생명체의 위기(후기 시)로 치환되었음을 시사한다. 최승자 연구에서 지적했던 남성 중심적이고 자본 중심적인 폭력성이 자연을 착취하는 논리와 맞닿아 있음을 통찰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한 생태학적 연대를 시적으로 형상화해 낸 것이다.
4.4. 노동의 신성함과 보편적 지구촌 연대
지은경 시인은 추상적인 이데아에만 머물지 않고 땀 흘리는 삶의 현장에 깊숙이 개입한다. 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첫차를 타고 노동의 현장으로 향하는 하층민의 군상을 따뜻하고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한 사회학적 서정의 수작이다.
이 시는 "한밤중 쓰레기더미 처리하는 사람들 / 거리의 눈을 치우는 사람들 / 새벽에 아르바이트 나서는 청년" 등을 열거하며, 고물가와 고금리의 "영하 12도" 경제 한파 속에서도 "동트기 전, 입김으로 밤길을 더듬는" 이들의 생명력을 찬미한다. 결구에서 시인은 "칠흑의 어둠이 도끼처럼 위험하지만 / 누군가의 노동으로 아침은 빛나고 / 인류 문명이 진화한다"고 선언한다. 시인은 이 시의 시작노트를 통해 "문명의 바탕에는 노동이 존재"하며, 양극화와 인구절벽의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개인주의를 넘어 공동체 의식으로 가야 한다"고 사회 통합의 메시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시 「내 고향은요」에서 민족과 국경의 물리적 경계를 초월한 '지구촌주의(Cosmopolitanism)'로 승화된다. 자신을 겸허한 "풀꽃"에 비유하며 산에서 뿌리를, 바다에서 하늘을 배웠다는 시인은 "내 고향은 대한민국이요 지구촌이요 / 꽃 피울 수 있는 곳은 모두 고향입니다"라고 노래하며 자연과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고향으로 품어 안는다.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현대 사회에 이처럼 강력한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를 던진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지은경은 '세계평화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5. 예술의 신체화: 서도(書道)적 수련과 미학의 일치
지은경 시인의 문학 세계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어 예술을 넘어선 신체적 수행의 측면, 특히 서예(붓글씨)를 통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미학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시인은 문학적 사유를 추상적 공간에만 남겨두지 않고, 전신(全身)의 에너지를 붓끝에 모아 종이에 새기는 물리적 실천을 병행해왔다.
관련 대담 기록에 따르면, 지은경은 단순히 손목의 기교로 글씨를 쓰는 것을 배격하고 합기도와 같은 오랜 무예 운동을 통해 체득한 에너지를 서도에 적용한다. 먹을 가는 행위 자체를 수행으로 여기며 타인의 벼루 가는 모습만으로도 그 사람의 내면과 서예의 방향성을 판별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눈의 뿌리인 마음밭(心田)을 다스리는 일이 곧 예술의 본질이라는 사유와 맞닿아 있다.
특히 그는 발바닥에서부터 대지의 기운을 끌어올려 고관절을 거쳐 붓끝에 에너지를 몰아넣는 '입목지술(入木之術: 왕희지의 일화에서 유래한, 먹물이 나무판을 깊숙이 파고드는 경지)'의 신체적 역동성을 강조한다. 좋은 붓과 나쁜 붓을 가리지 않고 오직 주체의 역량으로 붓의 놀림을 지배하는 이 철저한 장인정신은, 그의 시가 허투루 쓰인 단어가 아니라 고통과 침묵이라는 삶의 벼루에 오랜 시간 먹을 갈아 정제해 낸 '신체화된 언어'임을 증명하는 은유적 알레고리로 작용한다.
6. 문학적 실천주의: 출판, 연대, 그리고 사회적 나눔
지은경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또 다른 축은 제도로서의 문학을 가꾸는 '조직자'이자 사회와 문학을 잇는 '매개자'로서의 역할이다. T.S. 엘리엇의 "인간은 선이거나 악을 행하는 한 인간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차라리 악을 행하는 편이 낫다"는 명제를 인용하며 행동하는 지식인의 삶을 옹호한 그는, 자신의 세 번째 칼럼집 제목을 『문학은 휴머니즘의 실현』으로 명명하며 문학의 궁극적 존재 이유를 '실천'에 두었다.
6.1. 월간 《신문예》의 발행과 문단 생태계 수호
지은경은 1981년 창간된 격월간 문예지 《신문예》를 2003년에 인수하여 현재까지 20년 이상 발행인을 맡으며, 한국의 열악한 출판 시장 속에서도 순수 문학의 보루를 굳건히 지켜왔다. 특히 《신문예》 통산 100호 발간을 기념하는 특집 권두 에세이에서 그는 한국 문단 일각의 맹목적인 노벨문학상 집착 현상에 일침을 가했다.
노벨문학상이 언어, 국가, 대륙의 정치적 안배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며 "세계문학사는 노벨문학상과 무관하게 쓰이고 있다"고 강조한 그는, 진정 중요한 것은 외부의 상찬이 아니라 문학이 당대 사회의 호응을 얻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만약 문학이 사회적 호응을 얻지 못한다면 전적으로 문인의 책임이며,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독자의 반응을 끌어내는 작품을 써야 한다"는 그의 선언은, 문학이 고립된 상아탑에서 벗어나 '사랑을 바탕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관용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굳건한 편집 철학을 보여준다. 그는 매년 '신문예 신인상' 및 문학상을 제정하여 역량 있는 신인을 발굴하고 원로 문인(이근배 등)의 업적을 기리는 등 문단 내 세대 간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이 외에도 『정예시인 15인선』, 『3.1독립운동100주년.대한민국건국100년 기념집』, 『한국 현대시를 빛낸 시인들』 등 다수의 기획 도서를 직접 엮어내며 한국 문학사의 결절점들을 기록하는 작업에도 앞장서 왔다.
6.2. 대중 속의 문학: '인사동시인들'과 도서 기증 운동
엘리트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거리의 대중과 호흡하려는 실천적 노력은 '인사동시인들' 활동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지은경은 20여 년간 시민들에게 시를 보급하는 이 문화 운동을 이끌며, 동인지 『인사동 시인들』을 지속적으로 출간해 2024년 제18호 한영대역본 발간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시인과 대중이 인사동 골목에서 조우하며 문학적 담론을 나누는 이 활동은 시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적 삶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는 지론의 사회적 실현이다.
이러한 나눔의 철학은 '마음의 평안을 주는 시와 산문' 기증 운동으로 구체화되어, 15년 이상 전국 교도소와 종합병원 등 문화적·정신적 위무가 절실한 소외 계층에게 도서를 지속적으로 기증하는 활동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세계 평화를 염원하며 개인 소장 도서 판매 수익금을 우크라이나 전쟁 구호금으로 대한적십자사에 전액 기부한 행보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을 물리적인 구휼(救恤)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지은경 문학 실천주의의 백미라 할 수 있다.
7. 결론
지은경 시인은 언어의 미망(迷妄)에 빠져 안주하는 것을 거부하고, 시와 학문, 그리고 물리적 삶의 궤적을 일치시키기 위해 40여 년간 쉼 없이 분투해 온 한국 현대문학의 진정한 거장이자 실천가이다. 초기 시를 통해 실존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고독의 노래는, 여성주의적 비평과 정신분석학적 탐구를 거치며, 종국에는 생태계 전체와 소외된 노동자를 껴안는 거대한 긍정의 찬가로 진화하였다.
문학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할 때 발생하는 공허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시를 쓰는 틈틈이 《신문예》의 발행인으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인사동 거리에서 시민들과 시를 나누었으며, 교도소의 쇠창살 너머로 가장 따뜻한 책을 보내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문학이란 밥상은 혼자 차린 공동식사"라는 시인의 선언처럼, 그의 문학은 철저히 개인적인 고독의 산물이면서도 궁극적으로는 타자를 향해 내미는 극진한 환대(Hospitality)로 완성된다.
개인의 실존적 불안을 사회적·생태적 차원의 거시적 성찰로 확장한 미학적 성취, 1980년대 여성 시인(최승자)의 저항을 학술적으로 규명하여 주체의 복권을 시도한 비평적 공로, 그리고 지식인의 상아탑을 무너뜨리고 문학적 실천주의를 통해 휴머니즘을 육화(肉化)해 낸 생애의 궤적은, 분열과 단절로 점철된 21세기 인류세의 위기 속에서 한국 문학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견고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