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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 빌 2:1-4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직업이 택배기사인 집사님 계셨답니다. 하루 종일 택배 생각만 하고 살았답니다. 모처럼 쉬는 날이 있어 가족들과 함께 처가에 놀러 갔답니다. ‘딩동~’ 하고 처가집의 벨을 누르자 장모님이 "누구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자신도 모르게 "택배요!"라고 했답니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은행에 10년 근무하는 자매가 있었답니다. 결혼한 지 3개월이 되었는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답니다. 진찰을 한 의사 선생님이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라고 하자 그 자매가 "감사합니다. 근데 만기일은 언제인가요?"라고 했답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품은 것을 말하고 마음에 품은대로 살아갑니다. 병을 흔들면 담긴 것이 나오듯 사람도 마음에 담긴 것이 나옵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이 이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뇌를 보면 동물과 전혀 다릅니다. 개미와 DNA가 30% 닮았고 침팬지와는 98.6%가 닮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뇌는 신경세포(뉴런)이 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천개씩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100조개의 연결고리가 있는 것입니다. 뇌의 크기기 마음의 크기를 만들고 아이큐를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래의 뇌는 인간의 뇌보다 5배 이상 됩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났다는 아인슈타인의 뇌는 1.23kg으로 남성 평균 1.4kg이고 여성 평균 1.25kg입니다. 평균보다 가볍습니다. 뇌의 문제가 아닙니다. 뇌는 장기입니다. 그 장기는 생각, 의식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우면 기쁨과 쾌감을 담당하는 호르몬인 도파민이 나옵니다. 분노하면 분노와 공격성인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됩니다. 행복해 하면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하는 호르몬 세로토닌이 분비됩니다. 우리의 마음에 따라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이란 결코 단순한 추상적인 에너지가 아닙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말이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고,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따라 우리의 걸음걸이, 우리의 태도, 우리의 말, 우리의 옷 입는 맵시, 우리의 장래, 우리의 직업 등이 달라집니다. 미국의 수필가인 에머슨은 "사람이란 종일 자기가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람의 일생은 자기 생각 그대로 되기 마련이다."라고 했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잠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마음의 기준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미래의 인생의 수준이 달라집니다.
여러분, 혹 짓다가 만 건물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어쩌다 한 번씩 남원을 지나 구례 쪽으로 가다보면 산중턱에 공사를 하다만 건물이 보기도 흉하게 있었습니다. 산 속에 지어 멋진 건물이 될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부도가 나서 십여 년이 되도록 공사를 하지 못하고 방치해 놓은 것이든지 아니면 어떤 사연이 있겠지만, 그 건물은 흉측스런 모습으로 인해 산의 경관을 해치고 있었습니다. 짓다가 만 건물은 그냥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흉물로 변해갑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성장이 멈추어버리면, 신앙이 그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멈춘 신앙은 그 때부터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멈춘 신앙은 퇴락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냄새가 납니다. 마치 죽은 물고기가 부패하면서 썩은 냄새가 나듯이, 성장이 멈춘 신앙인에게서는 세상적인 냄새가 풍겨지기 시작합니다. 내 삶과 생각을 말씀에 맞추려하지 않고 세상에 적당하게 맞추어 살기 때문에 세상의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성장하는 신앙일 때에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갑니다. 성장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무더운 여름, 대지를 적시는 단비를 기다리며 내 믿음이 자라고 있는지, 아니면 머물러 있는지. 점점 퇴보 되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누구나 주 앞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숙하지 못한, 어쩌면 건물이 지어져 가는 공사 중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때로 세상의 유혹 앞에서 나약한 내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으로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믿음의 길에서 이탈된 채 살 때도 있습니다. 내 안에서는 의롭게 살고 정직하게 살려 하는데, 자꾸만 거짓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내 모습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 역시 ‘내가 목사이면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목사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 때도 있습니다. 자신이 실수했을 때 실수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실수했음을 알고 고치려하는 것에는 하나님께서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실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실수했음에도 실수인줄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문제이고, 실수하지 않았다고 우기며 자기를 합리화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사 중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우리의 인격도 온전한 모습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공사 중에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그 공사를 완성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내분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안타깝고 속이 상해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가 내분을 해결하고 하나를 이룬다면 자기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다투지 말고 하나가 되어 자기를 기쁘게 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대하는 2:1-4절은 헬라어 원문 상으로 보면 길지만 한 문장입니다. 이 문장은 주절과 조건절, 그리고 목적절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이 문법적 구조가 이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열쇠 역할을 합니다. 우선 주절은 4절 마지막에 나오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를 기쁘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왜 이처럼 바울 사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야만 했습니까?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지금 감옥 속에서 숱한 세월을 살아오지만, 그것은 주님을 위해 자신이 당한 고난이기에 얼마든지 참아낼 수가 있었습니다. 뼈마디마디가 쑤시고 저려오는 아픔과 통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견딜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성도들이 모인 빌립보교회인데 이 교회 안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 이것은 정말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울에게 상처로 다가왔고, 자신 안에 있는 기쁨이 빼앗길 정도로 통증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갈등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한자로 갈등은 갈은 칡 ‘갈(葛)’이고, 등은 등나무 ‘등(藤)’입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처럼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불화를 일으키는 상태를 갈등이라고 합니다. 갈등이 내면에서 일어나면 마음이 상하게 되고, 염려와 불안이 엄습합니다. 갈등이 관계 속에서 나타나면 싸움이 됩니다. 부부간의 갈등, 부모와 자녀간의 갈등, 고부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계층 간의 갈등, 지역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 갈등이 국가나 민족 간의 갈등으로 확대되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빌 1:15에 보면 빌립보교회 내에도 투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인간적인 경쟁을 하려는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한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개개인은 다 예수를 잘 믿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이런 저런 소식 가운데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들을 때 감옥 안에서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기쁨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되어 있지만, 새번역에는 “내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에게 기쁨이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명언 중에는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우리 민족은 속마음을 잘 나누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좋아도 혼자 좋아하고, 싫어도 혼자 싫어합니다. 무엇을 고민해도 털어놓지 못하고 끙끙 앓는 민족이기에 그렇게 좋은 명언은 우리 정서에서 나온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말은 영국의 격언집에 나오는 말입니다. 영국 신사들이니 그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슬픔이란 혼자서도 얼마든지 간직할 수 있습니다. 슬프게 지내고 싶습니까? 이 세상과 담 쌓고 친구 없이 혼자서 외톨이로 살아가면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그는 결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이란 반드시 누군가와 나의 벅찬 감사와 감격을 나누어 가질 때에만 일어나고 또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서 오히려 웃음과 기쁨을 가져오고, 남의 기쁨에서 슬픔을 얻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우리의 옹졸한 정서를 잘 담아내고 있는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에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겉으론 기뻐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슬픔에 빠져들고 기분이 썩 좋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이 있어 기뻐하는데, 함께 기뻐해주지 못하면서,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분 나빠서 돌아서게 됩니다. 아무개는 승승장구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잘 안 되는 것이야 하고 기분이 가라앉게 됩니다. 우리 심령 깊은 곳에는 놀부 심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할 수 있는데, 실상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는 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어렵습니다. 여러 글을 읽다보면 참 좋은 말이었는데, 메모하지 않으면 그 좋은 말을 다 잊어버리고 맙니다. 단편적으로 생각나는 말도 어디서 읽었는지도 모르는 것도 많습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올드 보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주인공이 15년 동안 감금당한 방안의 액자에 적힌 글인데, 후에는 주인공이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게 됩니다.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만 울게 될 것이다.” 이 말은 19세기 영국사람 ‘엘라 윌콕스’라는 시인이 쓴 시의 첫 구절입니다. 어느 책에서 이런 짧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 자신은 알고 있잖아!”라는 글입니다. 1940년 아카데미 8개상을 휩쓸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는 속치마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빅터 플레밍 감독은 대연회 장면을 찍을 때 스칼렛의 자매들에게 비싼 실크 속치마를 사 입고난 후에 계산서를 청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스칼렛의 동생이 차액을 남기려했는지 싸구려 속치마를 사 입고 왔습니다. 관객이 알 수 없는데 어떠냐고 항변하는 여배우에게 감독은 버럭 큰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자신은 알고 있잖아!” 감독은 실크 속치마를 입은 배우의 행동과, 실크 속치마를 입은 척하는 배우의 행동이 관객의 눈에 다르게 비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크 속치마를 입고 춤을 추는 마음과 싸구려 속치마를 입고 춤추는 것은 마음이 다르고, 자세도 다르고, 행동이 다르고, 반응 또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진실은 진실을 낳고, 진실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진실만이 진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거짓을 품었으면 거짓을 낳을 수밖에 없고, 거짓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짧은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너 자신은 알고 있잖아!”라는 말을 마음에 새겨두기로 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이라고 해도 ‘내가 알고 있다. 또 하나님이 아신다.’라는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고 성실을 다하면 하나님이 아십니다.성실이 성실을 거두고, 진실이 진실을 낳고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언제나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는 4절 마지막에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직접적으로는 바울 자신의 기쁨이 넘치게 해달라는 말인데, 사실은 주님에게 기쁨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삶, 우리 주님에게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셨다는 것, 주님이 미소를 지으셨다는 것, 주님이 마음으로 받아주시는 일을 하였다고 하면 그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으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다 대인관계를 잘 하라는 말씀입니다. 권면, 사랑의 위로, 교제, 긍휼과 자비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인간관계를 좋게 하라는 말이지, 자기 자신을 위한 덕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이런 말씀은 다, 좋은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과 자비라는 말도 인간관계를 위한 말이지, 나 자신을 위한 덕이 아닙니다. 여러분, 누구를 권면하고 싶습니까? 권면이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도 그리스도 안에서 나와야 진정한 권면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와 무슨 교제를 하고 싶습니까? 누구를 긍휼히 여기고 자비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습니까? 그것도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성령 안에서 나올 때에야 사람을 변화시키고,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합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주님에게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 안에서 말해야 진정한 권면이요, 참 위로가 됩니다. 2절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고 하나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서 독불장군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있기 위하여 당신이 있어야 하고, 내가 잘 되기 위하여 다른 사람도 잘 되어야 합니다. 빌립보교회는 일치와 연합이 안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사람들인데, 연합과 협력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인간관계가 좋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교회가 여성주도형의 교회였기에 교역자인 사도바울에게 지극정성으로 잘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이 감옥에 갔다하면 열심을 다하여 돌아보았습니다. 영치금도 잘 넣어주었습니다. 사람을 보내어 옆에 있으면서 도와드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암투가 끊이지 않았고 문제가 많았습니다. 지도자들이 하나 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이 나중에는 실명을 거명하면서 “하나 되라”고 했습니다. 빌 4:2에서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까지 명하였습니다. 이들 이름은 여성들의 이름이요, 빌립보교회의 여성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있었기에 교회와 온 성도들은 불편하였습니다. 교회는 일치와 연합을 깨뜨리며 해야 할 만큼 시급한 일도 없고, 중요한 일도 없습니다. 일치와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과, 우리의 교회가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 되어야 잘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 되지 못하면, 그것은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 됨으로 천국을 만들고, 다툼과 미움으로 나누어지므로 지옥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 일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게 보시지만,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 한 뜻을 이루어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온 성도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을 정말 기뻐 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3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라고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는 인간관계는 남을 나보다 높이라고 하십니다. 다툼이나 허영이란 무엇입니까? 경쟁심이나 명예심으로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신을 드러나게 합니다. 다툼이나 허영이란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높이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신은 겸손하게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캐고 허물이나 찾으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높이 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4절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란 자신에게 머물지 말고, 어려운 사람들,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일 다 하기에도 힘에 벅찬데, 누구의 일을 돌아볼 것입니까?” 그렇게 말씀하지 말고, 나의 일을 제대로 못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요구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이란 경건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경건에 대하여 그릇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깨끗하고 고고하게 사는 삶을 경건한 삶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이라는 것이 세속에 물들지 않고, 혼자서 명상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약 1:27에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바람직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깨끗한 삶이 경건한 삶의 기초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거기에 한 가지 더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란에 처하여 있는 이웃을 돌아보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환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이 먼저이고, 이어서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삶”이라 하였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본다는 말은 굳이 고아와 과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말할 때에 대표적인 예로 고아와 과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반드시 나를 통하여 영광 받으실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돌아보게 하시는 사람을 두셨습니다. 물론 우리 자신을 먼저 돌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으로 머물지 말고, 우리의 어려운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파스칼이 한 말입니다. “가슴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그 자신의 이성이 따로 있다.”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인간관계의 매듭은 이성으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풀어가야 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인관계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우리의 인생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고 살아갈만한 가치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나빠지면 무엇을 하여도 의미도 없고, 보람도 없고 실망하게 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잡아 주십시오. 때로는 아주 작은 일에, 정말 작은 손짓 하나에, 평범하게 던진 말 한마디에, 우리들의 가슴이 찢어지고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게 합니다. 무심코 던진 말인데, 말 한 마디에 입은 상처는 일생 아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진한 사랑을 느끼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세상과는 다를 것이라는 생각으로 교회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만 더 손잡아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내어 밀어야 합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헤어지기는 쉬워도 또 다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등 돌리기는 쉬워도 다시 손잡고 사랑하긴 어렵습니다. 비방하기는 쉬워도 용서하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좋은 인간관계를 회복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말씀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29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은혜를 받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고 나서 오늘 본문으로 넘어오는데, 그 첫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러므로’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도 받아야 하는데, 그 고난이란 다른 사람을 향한 선한 사랑의 태도를 가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 한 마음을 품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고난입니까? 힘들기 때문입니다. 힘든데도 해야 하기 때문에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고난도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힘들어도 이웃에 대하여 그렇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런 태도는 단지 고난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난은 영광을 가져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이런 태도는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옛날, 이 땅 위에 극심한 가뭄이 찾아왔습니다. 나무도 풀도 마르고, 사람도 짐승도 갈증에 겨워 물을 찾아 헤맸지만 한 방울의 물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한 소녀가 병에 걸려 누워 있는 어머니를 위해 물통을 들고서 메마른 황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황량한 들판에는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물을 찾다가 지친 소녀는 마른 풀 위에서 깊은 잠에 떨어졌습니다. 배고픔에 눈을 뜬 소녀는 놀라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기 물통에 물이 채워져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지친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물통에 입을 갖다 댔습니다. 그러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렇게 자책한 소녀는 집으로 정신없이 뛰어갔습니다. 그러다 소녀는 그만 지나가던 강아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물통은 땅에 뒹굴었고, 소녀는 물이 다 쏟아진 줄 알고 울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놀랍게도 물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때 강아지가 달려와 응석을 부리며 매달렸습니다. 소녀는 강아지에게 물을 조금 나눠줬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나무로 만든 물통이 은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집에 돌아온 소녀는 ‘어머니, 물이에요!’ 하며 어머니에게 물통을 건넸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는 괜찮다. 그보다 너나 마셔라.’하고 딸에게 다정히 말했습니다. 서로에게 물통을 건넬 때 다시 은 물통이 금으로 변하였습니다. 소녀는 기뻐서 물통의 물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때 허름한 길손이 나타나서 ‘미안하지만 물 한잔 주시지 않겠습니까?’라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녀는 물을 마시려다 말고 잠자코 물통을 길손에게 건넸습니다. 그러자 물통에서 흐르던 물방울들이 모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반짝이는 북두칠성이 되었습니다.
이 전설 같은 이야기는 유명한 ‘톨스토이’의 ‘북두칠성’이란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랑에 의해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사랑은 죽음의 시초가 되고, 이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삶의 시초가 된다.’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마음에 도달할 수 있으며, 살아있는 양심에서 나온 것만이 양심을 꿰뚫을 수 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을 감싸 안을 수 있는 따뜻한 가슴뿐입니다. 우리는 일생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힘써야겠습니다.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또한 마음을 같이 하고 하나 되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높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갈보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기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 안에서 좋은 인간관계를 갖게 하옵소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을 높이고,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 빌 2:5-11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라는 질문을 했다면 무엇이라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최고의 가치를 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미국의 해리스라는 여론조사 기관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이 문제를 조사 했습니다.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라는 질문에 56%가 관계, 21%가 종교적 믿음, 5%가 돈(물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돈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이 열 배가 넘습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미국 사회에서 나온 통계라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소통이라는 것이 사회의 화두입니다. 그런데 소통은 ‘관계’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관계를 맺으려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관계는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된 핵심 주제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연결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고립된 사람들보다 병이 치유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고 합니다. 좋은 음식이 아니더라도 함께 먹는 사람이 혼자 좋은 것을 먹는 사람보다 훨씬 더 건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생에 있어 인간관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적인 것은 물론이고 건강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다양한 스트레스의 요인들이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인간관계로부터 옵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이 생기면 영적으로도 문제가 생깁니다. 기도가 막히고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고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난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수평적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수직적 관계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과 다시 재림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사람의 모델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 이 세상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 ‘품는다.’는 말은 단순히 마음에 간직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태도를 우리 성도들이 삶 속에서 생활화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 아버지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고 계셨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마음, 삶의 태도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6-8절의 말씀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본문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최고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이 누굽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신학적으로는 성육신이라고 말하는데 이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대하시는 사랑의 태도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처지가 되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자기를 비워'라는 말씀을 합니다. 예수께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시면서 그가 만일 그의 신성을 포기한 것이라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우리의 모범은 되실 수 있어도 우리의 구원자는 되실 수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쉽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우선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등 된 자리를 포기하시고 사람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주인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종의 자리를 취하셨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받으실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셨습니다. 대신 가장 낮은 사람인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때로는 오해를, 때로는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 되기를 원하는 오늘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꺼이 자신을 낮추기 위해 주장할 수 있는 특권을 포기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한 것들이 있습니까?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을 줄이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있습니까? 좀 더 큰 집에서 살 수 있는 분들이 집을 줄인다든지, 좀 더 큰 자동차 탈수 있는 분들이 더 작은 차를 타며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습니까? 주차장에 주차 할 때도 다른 이웃들이 주차하기 어렵지 않도록 주차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차 안하고, 내가 좀 더 먼 곳에 주차하고 걸어오는 일, 엘리베이터 탈 때나 식당에서 식사 할 때도 연약한 이웃을 배려하고 자신이 손해 볼 줄 아는 것 등. 믿음의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양보나 희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챙길 것 다 챙기고, 다 대접받고 다 높임 받고, 언제 섬기고 언제 이웃들을 전도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의 시작은 자신의 비우심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섬김의 마지막 절정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8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신 이유, 거기서 못 박히신 이유, 그것이 그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속죄양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얼마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구원하신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 분이 당신의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죄악으로 물들고 오염된 우리를 건지기 위해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뛰어드신 것입니다. 무슨 자격을 따지지도,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그냥 달려와 십자가에서 우리의 더럽고, 역겨운 냄새로 진동하는 우리의 죄를 그대로 끌어안으시고, 희생 제물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내가 뭔데, 도대체 나란 인간이 뭐 길래, 하나님께서 외아들 독생자를 아무 조건 없이 주셨는지, 어거스틴은 어느 날 이 은혜 앞에 눈물을 쏟으며 고백합니다. "내가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라 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위해 기꺼이 당신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 바울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 앞에 전율을 느낀 것입니다. 이 사랑, 이 은혜를 입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변화 받은 구원의 자녀가 할 일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이기주의가 극성을 떨고, 매정하고, 형제고 부모고 자기에게 손해를 줄 것 같으면 얼굴을 싹 돌리는 세상에 ‘이 마음을 품으라.’는 이 주님이 말씀을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빌립보서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1장을 차분하게 읽어보면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훌륭합니다. 교인들 하나하나가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저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빌립보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5-17절을 읽어보면 빌립보 교회에 파당이 있어서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개인은 다 예수를 잘 믿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27절을 보면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한 지붕 밑에서 더불어 살아가면서 하나를 이루지 못하는 것, 이것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복음을 믿더라도 서로 하나를 이루어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다는 것입니다. 직장이든 학교든, 나이든,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정말 힘들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이 다르다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주제입니다. 같은 배에서 난 형제들도 다릅니다. 성격, 기호, 생각, 경험, 배경, 관점이 너무도 다릅니다. 형제라면 당연히 우애를 나눌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부도 한 사람은 성격이 항상 느긋하고 한 사람은 성질이 급한데 이런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부부가 둘 중 한 사람은 사회사업가 같이 퍼주고, 한 사람은 모으는 데 집중한다면 같이 살기 어렵습니다. 남편은 생선을 너무 좋아하는데 아내는 생선 알레르기가 있다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닙니다. 남편은 물건들을 모으는 것이 취미이고 아내는 날마다 내다버리는 것이 특기라면, 아내는 쇼핑을 너무 좋아하고 남편은 한번 사면 30년 이상은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갈등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침잠이 많은 아내와 아침을 꼭 먹고 출근해야 하는 사람이 함께 산다면 험난한 삶이 예상됩니다. 한 사람은 다혈질이고 한 사람은 점액질이면 힘들어집니다.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맞추며 살아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하는 방식이 자기가 처한 배경과 지식과 경험에 따라 너무도 다릅니다. 그래서 일치점을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나와 다른 것 때문에 날마다 싸우며 은혜를 쏟으며 살 것인가, 아니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피하며 살 것인가?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가 먼저 죽어지는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에 우리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내게 있는 ‘의’를 철저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비워야 할 것 중에 가장 먼저인 것은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한 것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금식하면서 자신이 금식했노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허약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남들을 많이 도와주었지만, 도와주면서 자신이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게 모두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무서운 것은 자신이 한 것을 자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큼 하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에 사로잡히진 마십시오. 우리는 겸손하게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후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앙적인 자기 의도 없습니다. 포기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열심을 다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 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의를 만들지 않겠다고 열심을 포기하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 때에도 그렇고,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잊지 마십시다. 그 열심이 나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한 후에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영광의 보좌를 내려놓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그 보혈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당신의 지체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엡 2:22절에 보면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함께’ 이 함께 라는 개념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함께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옛날에 성전을 지을 때는 생김새가 다양한 돌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에도 보면 성전을 지을 때 정으로 돌을 쪼지 말라고 했습니다.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돌의 모양 그대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있는 대로 끼워 맞춰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성격이나 배경, 경험, 기질, 어떤 일에 대한 관점과 생각이 다릅니다. 이해나 반응, 은사도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절망이 됩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은혜 받은 나 자신이 품어야 합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함께하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외톨이가 됩니다. 외톨이는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든 것이 많습니다. 교회는 더불어 세워가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를 바꾸려고 몸부림치며 상처받고 깨지다가 결국은 ‘안 바뀐다.’로 결론짓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바뀌면 상대가 바뀌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나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되었다.”라고 고린도교회에 말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자기가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바꾸어서 사귀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맞추어주는 것입니다. 돌담을 만들 때도 큰 돌만 있으면 돌담이 안 됩니다. 튀어나온 돌이 있으면 다른 돌이 들어가면 됩니다. 서로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의 원리입니다. 물은 컵에 맞게 담깁니다. 물이 자기 형태를 가지고 있다면 컵에 못 들어갑니다. 이것은 줏대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성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기 고집과 방식, 주장을 일관되게 고집한다면 미성숙입니다. 좋은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문제가 없는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희한한 사람들이 있어도 품어주는 교회가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가운데 우리를 성숙하게 하십니다.
강 상류에 있는 자갈은 매우 거칩니다. 그러나 하류에 가면 고운 모래나 자갈이 있습니다. 그 자갈들을 보면 모가 나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돌고 돌면서 서로가 엉키고 깎여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나고 까다롭고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두신 것은 나를 다듬어 가시는 것입니다. 모난 사람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은 나도 모가 났다는 것입니다. 둥글둥글한 사람은 모두와 잘 어울립니다. 교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은 내가 교만한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부딪히면서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는 실망하지만 도전 받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연약함을 보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다를 바가 없고, 내 안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관계 안에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내가 저 정도의 사람도 품지 못하는구나, 이 정도의 문제도 극복하지 못하는 수준이구나.’ 하면서 내 연약함이 보이고, 다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자기 변화를 하는 동기부여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거부한다면 편안할지는 몰라도 성숙과는 멀어집니다. 함께 하면서 관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비우셨습니다. 8절의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나 존귀를 하나도 남김없이 비워버리셨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우셨다면,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덜 비우셨다면, 배신하고 도망쳐버린 제자들을 어떻게 다시 제자로 부르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는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한 지상의 유일한 곳입니다. 교회만큼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남겨놓으신 지상의 그리스도의 몸,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십시오. 삶은 관계입니다.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친밀함은 우리 삶의 행복의 핵심입니다. 관계 안으로 깊이 들어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그 안에서 축복과 은혜를 함께 누리기를 바랍니다. 주인이요 선생이요, 더 나아가 왕이신 예수님이 만백성을 위해 자신의 목숨조차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 주시면서 섬기셨다는 겁니다. 왕이신 그분이 마치 종처럼 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킹 서번트(King-Servant, 종의 왕)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이 어떻게 되셨습니까? 9-11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 만물과 만민이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주라고 고백합니다. 모든 이름 중에 가장 높은 이름을 갖게 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신학에서는 예수님의 승귀라고 부릅니다. 오를 ‘승’(昇)과 귀할 ‘귀’(貴) 곧 존귀해지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이 낮아지신 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겸손이란 말이 흥미롭습니다. ‘겸손’이란 이 단어는 라틴어 ‘Humus’(땅) 또는 ‘Humilis’(땅바닥에 엎드리는)란 단어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낮고 천한 인간이 되셨으니 하늘이 땅바닥으로 낮아지신 것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 인간은 본래 흙입니다. 본래 위치는 땅바닥입니다. 그런데 자꾸 하늘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고 남의 위에 올라서려고 합니다. 그래서 불행하고 또 갈등과 문제가 생깁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을 영성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행복해지고 또 갈등과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개인적으로 눈높이가 너무 높으면 불행합니다. 반대로 눈높이를 낮추면 행복합니다.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이 작년 3월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대국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1승 4패였습니다. 대국 전에는 전승을 노렸습니다. 그런데 첫 대국에서 그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자존심이 상했겠죠. 두 번째 대국에서 또 패배했습니다. 당황했을 겁니다. 세 번째 대국에서도 패배하니까 1승만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낮아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네 번째 대국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한 판 이긴 게 이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해맑게 웃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마음을 낮추면 모든 게 행복해집니다.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나치게 욕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당대의 최고 스펙을 갖춘 엘리트였습니다. 교만의 극치를 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달려졌습니다. 그의 모든 스펙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더욱 더 성숙해지면서 나중에는 이렇게까지 고백합니다. 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렇게 마음을 낮추니까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며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하버드대 신학부 교수였던 헨리 나우엔의 일화입니다. 그는 뭔지 모를 스트레스로 시달리다 급기야 우울증 증세까지 겪었습니다. 고민 끝에 지적 장애인들의 라르쉬 공동체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는 본 한 사람이 “당신은 구누신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 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하버드대 교수 헨리 나우엔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되물었습니다. “하버드가 뭔데요?” 그 말에 헨리 나우엔은 충격을 받았고, 그 날 밤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오늘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이 사람들은 내가 하버드 교수인 것이나 업적에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헨리 나우엔일 뿐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고 우울증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게 바로 겸손의 영성이 주는 축복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질서가 집히고 평화로워집니다. 갈등이나 다툼이 사라집니다. 중세의 한 수도원이 이야기입니다. 노수도사가 다툼이 많기로 소문난 수도원의 원장으로 발령을 받고 갔습니다.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사들이 나왔는데 그를 단순한 신입으로 알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그 수도원의 전통은 처음 들어온 신입 수도사는 주방에 들어가 접시를 닦는다며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갑질을 한 셈입니다. 그는 문제가 여기 있음을 직감했고 주방에 들어가 접시를 닦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괄시와 천대가 심했습니다.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째 되던 어느 날 감독이 순시 차 방문했는데 원장이 안 보여서 물었습니다. 수도사들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석 달 전에 왔을 텐데 무슨 소리냐고 호통을 칩니다. 그 순간 수도사들은 사태를 파악하고 즉시 주방으로 달려가서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후로 그 수도원은 모범적인 수도원이 됐다고 합니다. 노수도사는 정말 존경받는 원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이렇게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성 브라더 로렌즈! 그러므로 여러분도 겸손의 영성을 배우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낮추시기 바랍니다. 그게 오히려 높아지는 비결입니다. 약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반대로 교만하면 반드시 망합니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하나님은 높아지려는 자는 낮추시고 낮아지는 자를 높이십니다. 채우려는 자는 비우시고 비우려는 자는 채워주십니다. 가지려는 자는 없이 하시고, 포기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정말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에 눈이 열려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정말 내가 살려고 하지 않고, 내가 죽어 다른 이를 살리는 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러면 다 살고, 그렇지 않으면 다 무너집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살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더 가지려고, 내가 더 대접 받으려고, 내가 더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지면, 내가 권리를 포기하고, 내가 낮아지고, 내가 죽으면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고, 회복의 길이 있고, 다시 시작할 길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왜 주님을 바라봅니까? 주님의 마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갖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이 마음이 부어지고, 그렇게 살아집니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주님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는 것만큼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마음을 알게 하옵소서. 주님의 마음을 심령에 부어주옵소서. 주님의 마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너희 구원을 이루라 / 빌 2:12-18
켄 가이어가 쓴 "묵상하는 삶"에 보면 멕시코시티의 "양파 파는 노인"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멕시코시티 시장 한구석에서 '포타라모'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 노인이 양파 스무 줄을 걸어놓고 팔고 있었습니다. 시카고에 온 미국인 한 사람이 다가와서 물었다고 합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입니까?’ 10센트라고 대답합니다. 두 줄에는? 20센트라고. 세 줄에는? 30센트라고. "깎아주는 것이 없으시군요. 그러면 스무 줄을 다 살터이니 얼마에 파시겠습니까?"하자 그 노인은 "그렇게 팔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미국인은 다시 "아니 왜 못 파십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하자 그는 이런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나는 양파를 팔뿐 아니라 내 인생을 살기 위해서 여기 나온 것입니다. 난 이 시장을 사랑합니다. 여기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고, 사람들과 인사를 건네는 것을 사랑하고, 친구들을 사랑하고 농작물 이야기하는 것을 사랑한답니다. 그런데 당신에게 한꺼번에 몽땅 팔면 나는 내 인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노인이야말로 현재의 행복을 아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전철 공사구간 식당에서 일하는 정경희라는 여 집사님이 10년 전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김해 공항 옆 덕동 마을에 늘 환하게 웃는 성아라 부르는 미소 천사가 산다고 합니다. 성아는 서른네 살의 뇌성마비 장애우 노처녀로서 손도 다리도 발도 뒤틀려 걷는 것도 먹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아는 늘 환하게 웃으며 사계절 빠짐없이 낡은 유모차를 끌고 열심히 박스를 모으러 다닙니다. 세상이 다 어렵고 힘들지만 성아는 늘 행복해 합니다. 오늘은 박스가 너무 많다며 “이모, 고맙다”고 몇 번이나 “감사합니다.”를 연발합니다. 성아는 82세 노모와 슬레이트 단칸방에 둘이 삽니다. 성아는 가끔 얼굴을 찡그리며 말합니다. “엄마는 이가 없어 너무 불쌍해요.” 성아의 말에 가슴이 저려와 빵을 먹으라고 주니 “이모, 빵 이거 내 주머니 넣어 주세요.” “왜?” “엄마 갖다 주려고요” 세상에 이런 천사가 다 있을까 싶습니다. 성아는 팔십 노모를 부양하는 가장입니다. “박스를 한 달 모으면 돈이 얼마나 되니?” 물으니 그저 히히 웃으며 “만 원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성아가 너무 예뻐서 자기 식당에 들르는 근로자 아저씨도, 옆에 우체국 직원들도 성아가 올 때쯤 되면 박스를 미리 끈으로 묶어 놓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성아가 부탁해서 235mm 털신을 한 켤레 사주면서 잠바와 목도리도 함께 사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정집사가 하는 말이 “성아가 나를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가진 것 없다고 세상 살기 어렵고 힘들다고 투정하지 말라고, 그래서 성아를 볼 때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일할 수 있는 건강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성아가 교회 갈 때에 다른 사람이 5분 걸리는 길을 슬리퍼를 신고 한 시간이나 걸려 가는데 이 털신을 신고 30분 만에 갈 수 있도록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덕동 마을 주민들이 성아를 위해 대문 앞에 박스를 많이 모아두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성아는 덕동 마을의 미소천사입니다. 저는 이 글을 보면서 하나님이 오늘 믿는 우리를 통해서도 나타내고자 하는 삶이 무엇일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빌립보서는 빌립보교회 설립자인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 집사 편으로 보내어 준 선교헌금에 대한 감사와 빌립보교회 안에 교인들 간의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갈등을 해소하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면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야 한다고 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이 세상에 희망을 보여 주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성숙에 걸림돌이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2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데 있어서 늘 방해거리가 있습니다. 그 방해거리를 사람들은 환경이라고 합니다. 주어진 환경이 여의치 못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신앙이 자라지 않은 것으로 핑계를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환경이 절대로 우리의 신앙의 성숙에 방해거리가 될 수 없고 도리어 1:12절에는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도리어 자신의 매임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환경이 우리의 신앙의 성숙을 방해하는 장벽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는데 방해거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도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방해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2:1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 합니다. 빌립보 교회라면 누가 보아도 기쁨이 넘치는 교회입니다만 그러나 빌립보 교회 안에도 자세히 보니 교인 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특히 4:2절에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 말은 빌립보교회 안에 직분자 간에도 갈등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권면이 뭡니까? 누가 잘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위로가 뭡니까? 누가 상처 주고 상처 받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교회생활 하다가 교인 간에 갈등 생기고 문제 생기거든 갈등 품지 말고, 문제 품지 말고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품고, 참고, 그 분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미국 뉴욕의 한 빌딩에 여러 명의 의사가 함께 개업을 하고 있는데 대다수가 유대인 의사라고 합니다. 그래서 비 유대인 의사는 유대인 의사들의 텃새에 배겨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한국계 여의사 한 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유대인 의사들의 행동에 전혀 개의치 않고 병원은 항상 환자들로 넘쳐 났습니다. 소문이 나니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 의사들의 텃세가 심한데 그곳에서 성공할 수 있었느냐? 유대인 의사들이 밉지 아니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분들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이라 도리어 친근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에게 엑스트라 마일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엑스트라 마일이 무엇입니까? 마 5:41절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이 여의사는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있으며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보여 주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신앙이 성숙하는 데는 환경이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방해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너희 자신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다. 본문 12절 끝 부분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미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이 시간적으로 세 가지의 차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먼저 과거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칭의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현재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에,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이미 받은 구원을 자신의 삶에 실제로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성화라고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미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는 천국에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땅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계속 진행되지만, 천국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됩니다. 미래적 의미의 구원을 다른 말로는 영화라고 합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칭의의 단계는 지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그들은 영화롭게 되어 그들의 구원을 완성할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있을 때뿐만이 아니라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 오해할 소지가 있는 구절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건데 또 무슨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가? 왜 이런 의문을 갖는가?’ 하면 구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일반 교인들은 구원이라고 하면 예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의미를 축소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구원이란 말은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회복의 전 과정’을 말합니다. 창 3장에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 한 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 죄를 담담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주로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반드시 그가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 것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지만 많은 경우에 제자답게 처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비굴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고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을 받고 세상을 향해 도전적인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제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자의 복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자들만이 구원받은 자의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적성숙을 말하는 것입니다. 엡 4:13, 15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갈 때까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하여 영적으로 계속하여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수준이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성장의 목표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닮도록 성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영적으로 성숙해 질 수 있습니까? 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게 하시나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 인간의 본성에는 이러한 거룩한 성품이나 또한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가 온전한 삶을 살도록 우리의 영적성장을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갈 수 있는 힘, 곧 에너지는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은 지금도 우리로 하여금 구원받은 자가 거룩한 삶을 살도록 우리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선한 목적에 부합한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을 주시고 또 그것을 행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선한 마음을 무시하고 소멸하지만 그러한 선한 마음의 생각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워렌 위어즈비’의 빌립보 강해에 보면 이 구절을 강해하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방편이 있다. 그 방편이 무엇인가? 바로 말씀과 기도이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만이 우리의 영적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적성장은 내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에 전념할 때 우리의 영적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엘리 제사장은 형편없는 성직자요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사무엘이 밤중에 와서 부르셨느냐고 물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해라 합니다.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의 조언을 따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하나님 말씀을 듣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교사들과 부모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꼭 주의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14절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다른 사람들 원망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시비도 걸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원망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을 약자 또는 피해자로 인식시킴으로써 상대방에게 죄의식을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이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원망이 전혀 수그러들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 해결보다는 원망을 통해 병적인 의존관계를 유지하려는 것이 더 큰 무의식적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기 전에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늘 물으셨습니다. 진정 문제 해결을 원한다면 먼저 무력감과 의존성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못하게 하는 원망과 시비를 멈추어야 할 것입니다. 스스로 서길 원하는 자에게만 치유가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모든 일에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라고 합니까? 본래 희랍어에서는 제일 중요한 말을 앞에다 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 강조하는 말은 ‘모든’ 일입니다. 어떤 일, 어떤 경우든 간에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주시는데 그 능력은 반드시 기쁨과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빌 4: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그러니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영적성장을 방해하는 마귀 같은 세력은 항상 원망과 시비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 400년 광야생활입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을 하다가 망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다시 마음을 정리하고 마음을 굳게 먹읍시다. 원망과 시비를 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원망과 시비는 우리의 영적성장에 큰 걸림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일에 원망 시비하지 말고 너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까? 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작은 예수로 살아가야 합니까? 왜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까? 15-16절에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빛 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곧 이 세상에 하나님의 희망을 보여 주는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말씀이란 사실을 삶을 통해 보여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영적성장이란 무엇인가? 많은 교인들이 영적성장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영적성장이라고 하면 자기중심적인 행위, 곧 나를 기분 좋게 하고, 나의 문제가 해결되고 불행한 일로부터 단절시켜 주며, 나아가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아 교회 봉사하는 일군이 되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영적성장이 그런 것입니까? 영적성장이라는 것은 내가 기분이 나빠도, 내 문제가 해결 안 되어도, 내가 불행한 일을 당해도 그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아는 사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빛을 나타내 보여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어그러지다란 말은 비뚤어지다란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거스른다는 말은 거역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그들 가운데 빛을 발하는 자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고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15절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실 이 세상이 대낮처럼 밝다면 다른 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깜깜하기 때문에 빛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렇게 표현합니다. 오늘날처럼 세상이 삐뚤어지고 하나님을 등져 어두운 세상이기 때문에 밤하늘에 비치는 별들처럼 더욱 빛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어느 집사의 간증입니다. 건축업을 하다가 부도가 나서 재산을 다 날리고 싸구려 셋방을 구하러 가다가 골목에서 어린애가 뛰어 나오는 바람에 교통사고를 내었습니다. 다친 어린애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어린애를 안아 차에 싣고는 병원 응급실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이제 내 인생도 끝장이구나 싶습니다. 응급실에서 아이의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의 부모가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이의 부모의 태도입니다. ‘가해자가 누구냐?’ 묻지도 아니하고 곧장 딸의 병상으로 다가 서더니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합니다. 부부가 가해자에게 한 마디도 거친 말을 하지 않고 오래 동안 딸을 붙들고 기도 하더니 사고 경위를 물어 보더니 ‘제 딸 아이 때문에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하며 도리어 위로합니다. 자식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가해자에게 이렇게 대할 수 있는가? 이 분들의 행동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일 동안 아이가 의식 없이 누워 있는데 가해자로서 옆에서 지켜보면서 불교인으로서 살아온 자신이었지마는 하나님을 찾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이 어린 아이를 꼭 살려 주십시오.” 어린 아이는 3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고 몇 날 후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어린 아이와 손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어린 아이가 “아저씨, 꼭 한 가지 부탁이 있는 데요.” “그게 뭔데?” "아저씨도 이번 일요일부터 우리 교회에 나와서 같이 예배드려요.” “그래 알았다” 하고 건성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의 부모님들이 와서 자기 일같이 도와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도 다 있구나.’ 싶어 그 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와 지금은 사업도 회복하고 부부가 집사로 봉사하고 있다는 간증입니다. 영적성숙이란? 교회서 성경공부하고 제자훈련 했다고 다 영적 성숙한 것이 아닙니다. 듣고 배우고 깨달은 말씀을 세상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16절에 삶의 현장 속에서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을 보여 주는 상징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뭔가 일이 잘 안 될 때는 고후 4:8-9절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세상 사람들은 이 말씀을 역설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삶을 통해 역설적인 진리 곧 생명의 말씀임을 보여 줘야 합니다. 아프리카 토고 선교사의 보고에 의하면 토고의 훌라니 족들의 민속의식 중에 아들의 성년식을 가장 최고로 여긴다고 합니다. 성년식에서 아들은 매를 맞아 피가 나고 여기저기 상처가 남아 고통스러워하며 심지어는 의식을 잃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귀에 대고 속삭입니다. “절대 아픈 모습 보이지 말고 일어나 당당하게 걸어가라.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업신여기지 않을 거야.” 그렇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의 삶 가운데 지치고 힘들어 할 때 귀에 속삭입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절대 싸이지 않아, 꺼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절대 망하지 않아, 절대 비굴한 모습 보이지 말고 원망 시비 걸지 말고 일어나 당당하게 걸어가라.” 아멘. 왜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까? 바로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의 빛 곧 희망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16절 하반절에 “그리스도의 날”이 나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주의 날”이 있습니다. 서로 간에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리스도의 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에게만 해당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달음질하고 수고한 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상을 받는 날입니다. 반면에 살전 5:2-3 말씀처럼, “주의 날”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해당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한 마디로 “주의 날”은 불신자들이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벌을 받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날을 바라보면서, 달음질하며 수고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개척한 교역자로서 몸은 멀리 떠나 있지만 같이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간절한 바람이 무엇입니까? 17-18절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여 세상에서 빛들로 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삶을 살아가기만 한다면 자신의 어떤 희생이라도 치루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4:1절에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심정입니다. 저는 제게 목사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고 묻는다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기 위한 양치는 목자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될 때 목사의 목회의 보람인 것입니다. 교회가 천 명이 모이고 만 명이 모인다고 거기에 목회의 보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영적으로 성숙하여 교회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작은 예수가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환경이나 사람 때문에 영적성숙에 방해 받지 말고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지마는, 밤하늘에 비치는 별들처럼 세상에 빛을 발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자신이 생명을 바쳐도 하나도 아까운 것이 없고 도리어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합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들처럼 세상에 희망을 보여 주는 갈보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18절 끝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나와 함께 기뻐하라.” 바울은 앞 절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 두 개를 사용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함께”라는 단어와 “기뻐하라”는 단어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함께”라는 단어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 되지를 못하고, 그들에게는 다툼과 허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은 “기뻐하라”는 단어를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서로 간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두 단어 곧 “함께”와 “기뻐하라”는 말씀을 늘 명심하기 바랍니다. 먼저 내가 예수님 안에서 기뻐하며, 그런 후에는 남에게도 나와 함께 기뻐하자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까지 항상 복종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어나가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원대로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신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귀한 성도들이요,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며 생명의 빛을 밝히는 귀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또다시 주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관제로 부으신 주님의 몸과 주님의 아픔을 기억합니다. 바울의 고백대로 나도 관제와 같이 성숙되기 원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아낌없이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고 전체를 희생시켜서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복음의 동역자 디모데 / 빌 2:19-24
여러분은 사람을 잘 믿는 편입니까? 아니면 의심부터 해보는 편입니까? 예로부터 믿을 수 없는 사람을 빗대어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못 믿겠다.”고 했습니다. 콩으로 메주를 빗는 것은 당연한데 그만큼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세대에서는 사람들 서로간의 불신이 정도를 지나쳤다고 여겨집니다. 스위스의 어느 심리학자가 많은 임상실험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한 가지입니다. 30여 세가 된 이 젊은이는 그 때까지 사랑을 받아 보지도 못했고, 사람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아 출신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의심을 가지고 대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 이유를 조사해 보니, 세상에서 너무나 심한 천대와 학대와 사기를 당해 왔던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그 부인의 고민은 자기의 사랑을 남편이 믿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3-4년의 노력 끝에 비로소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듯이 지금 이 시대는 불신의 장벽이 너무나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정치, 문화, 교육, 종교 등 어느 한 곳도 신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의 마음이 굳게 닫히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는 것은 신선한 것이겠지요.
함석헌 선생님의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시가 있습니다. 만리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여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생각할 때마다 이런 고마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행복한 생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이런 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행복해지고 힘이 솟아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생각할 때마다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상처만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솟고 원망이 일어납니다. 이런 사람은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생각도 하기 싫고 정말 꿈에도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지만, 우리의 만남과 헤어짐 가운데,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만나서 함께했던 시간들이 어떠했느냐에 따라서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진즉 헤어지지 못한 것이 원통할 만큼 쓰라리고 아픈 기억으로만 남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는 소중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만남입니다. 인생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를 이룹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팔자가 바뀝니다. 부모와 자식도 만남입니다. 잘못 만나면 평생 속앓이를 해야 합니다. 나이 들어서는 사위와 며느리를 들이는 만남이 있습니다. 새 식구가 자식보다 더 소중할 수도 있고 아니면 짐을 하나 더 떠안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좋은 동료나 상사 후배를 만나면 직장 생활이 행복합니다. 어떤 때는 월급은 많지 않더라고 동료나 상사가 더 좋은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함석헌 선생의 시에서처럼 만리 길 가면서도 모든 것을 맡기고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소중한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남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평생 좋은 만남, 축복된 만남을 주시길 바랍니다.
연말 연초에 소원카드를 추리에 다는데 주일학생들 대부분은 한 학년 올라가서 ‘좋은 선생님, 좋은 친구를 만나게 해주세요.’라고 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을 위해서 새 학년으로 올라갈 때쯤이면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도록 기도를 하면 좋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에는 새 학년을 올라갈 때마다 기대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게 될까, 어떤 친구들을 만나게 될까? 싫은 친구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맘에 드는 친구는 함께 하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돌아보면 어리고 젊었던 시절은 여러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격이나 생활환경 가치관이 다른 다양한 만남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이제 새로운 만남이라는 것이 흔하지 않습니다. 교제권이 뻔합니다. 더욱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는 더욱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하려고 해도 주변에 전도해야 될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깊은 만남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간적 여유도 없을 뿐더러 ‘자기’라는 틀이 너무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만남은 힘들지만 거부하지는 마십시오. 만남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풍요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만남은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러 나갔다 우연히 예수님을 만나고 그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루살렘에 갔다가 재수 없이 한 죄인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만남이 구레네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을 것입니다. 그 이름이 마태 마가 누가 등 모든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남, 그것이 우연이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든,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깨달았든지 만남을 통해서 우리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만남에 충실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무슨 축복을 그 뒤에 예비해 놓고 계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대중가요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사랑받으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나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그런 책이 있습니다. 칭찬 받고 싶지요. 칭찬받으면 신납니다. 칭찬받으려면 칭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고 싶은 데, 사랑해 줄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칭찬받고 싶은데, 칭찬해줄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랑받는 일, 칭찬받는 일이 어디에서 자주 생기면 좋겠습니까? 가정이지요. 집에서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칭찬받는 것이 최고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지도자가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지도자가 중요한 것 사실입니다. 지도자는 중요하고 또 그래서 대우를 받고 인정도 받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맡은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입니다. 말없는 다수의 성실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도 우리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도 그렇습니다. 지도자가 제대로 일을 하려면 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이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지도자 대우한다고 너도나도 지도자만 되려한다면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뒤에서 또는 밑에서 말없이 일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 그들이 중요하고 그들이 귀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교회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봉사하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배후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면 들어나지 않는 이 배후의 사역자들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을 때 교회가 은혜롭고 부흥하고 건강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모두가 교회에서 앞에 서서만 일하겠다고 하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떠들다가 세월 다 갈 것입니다. 실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시끄러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난 날 교회에는 드러나지 아니하는 배후의 사역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사람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만난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여러분,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의 마음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감옥에 갇힌 사람은 밖의 일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바울의 관심은 오직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 소식이 궁금합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가 하나둘이 아닙니다만 그 중에서도 빌립보교회가 특별히 소식이 궁금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자신을 위해 기도하며 헌금도 보낸, 사랑이 많은 좋은 교회인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교회가 안팎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이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디모데를 보내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본문은 이 계획을 빌립보교회에 알리면서 디모데가 어떠한 사람인지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한 마디로 배후의 사역자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바울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런데 보면 항상 그는 없는 것처럼 일을 합니다. 앞에 서서 일 하는 사람은 항상 바울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그렇게 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웁니다. 그림자처럼 도왔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일 할 수 있었던 것은 배후에 디모데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디모데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가야할 텐데 디모데를 보냅니다. 그러면서 19-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3-24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여러분 내가 갈 곳에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본 적이 있습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추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내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자신 있게 보냅니다. 내가 책임진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믿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협력자는 무엇보다 먼저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좋은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일을 한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능력이 1이고, 돕는 사람은 0.5라고 합시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하면 능력이 1.5가 되는 것이 아니라 2나 3도 될 수 있고 0.5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을 맡겼는데 돕는 사람이 알아서 척척 잘하면 2나 3이 됩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일 때 능률은 극대화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겼는데도 더 신경 쓰게 만들면 이건 차라리 혼자 하는 것보다 못하게 됩니다. 믿을 수가 없을 때는 두 사람이 일하는데도 효과는 0.5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어떠합니까?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이 보실 때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바울은 딤전 1장에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여기 충성되이 여겼다는 말은 믿을 수 있다고 여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바울을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협력자입니다. 한번 일을 맡기면 틀림이 없어야 합니다.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대통령이 무엇을 맡기면 함부로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일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서 일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믿음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남대문 시장에 가면 순 진짜 참기름 집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가보지는 못했고 말만 들었습니다. 왜 순 진짜 참기름집이라 이름을 붙였겠습니까? 원래 참기름 가짜가 많습니다. 다른 기름을 섞습니다. 그래서 그냥 참기름 집이라고 하면 믿지 않을 것 같아 진짜라고 했고 그래도 믿지 않을 것 같아 순이라는 말을 또 붙였습니다. 그러니 믿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저 집은 진짜 참기름을 팔겠구나 하고 믿어지겠습니까? 한 때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도 “믿어주세요” 했던 분 있었습니다. 어떠했습니까? 믿어달라고 했다고 믿어졌습니까? 그 사람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끔 보면 하나님께 “하나님, 이것을 주세요. 이것만 주시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맹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서원하고 맹세까지 했는데 말입니다. 그 동안 너무나 신용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바치겠다고 맹세하고 자기 것을 챙겼고, 충성하겠다고 해놓고 열심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하나님,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을 없을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어떻게 신용하겠습니까? 돌이켜보면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믿음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22절에 보면 ‘디모데의 연단을 안다’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성경에서 보면 젊고 미숙했던 겁이 많고 수줍은 사람이었습니다. 육체적으로도 건강하지 못해 위장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단을 많이 받았고 그 연단을 바울에게서 인정받았습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여러 사건을 통해서 디모데의 됨됨이를 경험했습니다. 책망도 해보고 칭찬도 해보았습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경험했습니다. 이런 일 저런 일 다 지내보니 디모데는 역시 훌륭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믿고 인정하게 됩니다. 사람들이야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해야 합니다. 한결같음 모습으로 신실을 쌓아가야 합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주님의 협력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둘째, 디모데는 주님의 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1절에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 바울 주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함께 주님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똑 같았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두 종류의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은 자기의 일을 구하는 일꾼들이었고, 한편은 주님의 일을 구하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자기의 일을 구하는 일꾼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주님을 일을 구하는 일꾼은 극소수였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같이 교회를 섬깁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자기의 일을 구하는 일꾼이 있고, 주님의 일을 구하는 일꾼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실 때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의 일을 구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내 고집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내 이상을 실현시키려 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협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 뜻대로 안 되면 일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자기 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요 교회의 모든 일을 주님의 일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일은 주인 되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뜻에 예민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내 생각과 맞지 않아도 협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바울은 디모데는 자기와 뜻을 같이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뜻이 항상 같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과 디모데도 뜻이 다를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뜻을 같이 한 것은 디모데가 양보한 것입니다. 바울의 뜻에 자기의 뜻을 맞춘 것입니다. 내 뜻과 같을 때 협력하는 것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나하고 뜻이 같을 때 협력하는 것, 그것으로 협력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통 이야기입니다. 나와 뜻이 맞지 아니해도 협력해야 합니다. 내 뜻을 기꺼이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가 협력자입니다. 이런 마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셋째, 디모데는 바울을 잘 도왔습니다.
말 그대로 협력자였습니다. 디모데는 주님의 협력자요 동시에 바울의 협력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성심껏 도왔습니다. 22절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느니라.”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며 순종했습니다.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바울은 이때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자식”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자식의 원뜻은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경쟁상대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아버지에게 즐겨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디모데는 언제나 바울의 말에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딤전 1:2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만난 이후 전도여행 대부분을 함께 다녔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갔을 때 거기 함께 갔었고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에도 동행했습니다.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는 물론 마지막에는 감옥에까지 따라갑니다. 그래서 늘 자식이 아버지를 시중들듯 곁에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아들, 아들노릇 하기 힘듭니다. 효도 하려면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멀리서 돈이나 부쳐드렸다고 효도 관광 보내드렸다고 효도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효도는 가까이서 모시고 섬겨야 합니다. 곁에서 봉하고 헌신해야 참된 효도입니다. 디모데는 늘 바울 곁에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도 곁에서 도웁니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아 손수 글쓰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편지도 대필을 합니다. 바울의 편지 중 대부분이 디모데가 대필한 것입니다. 바울이 불러주고 디모데가 받아썼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디모데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16장의 바울이 빌립보에서 핍박당한 일을 잘 압니다. 그런데 분명히 디모데가 그 때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 어디에도 빌립보 전도에 디모데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베뢰아, 고린도, 에베소, 바울이 가는 곳이면 그 어디든 함께 갑니다만 디모데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드러나지 아니하고 뒤에서 밑에서 숨어서 바울을 섬겼습니다. 배후의 협력자였습니다.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영광은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소리 없이 썩어지는 밀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어 바울의 사역이 이루어지고, 이런 사람이 있어 하나님의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내가 썩어지다고 해서 보면 썩어지지는 않으면서 썩어진다고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내가 썩어진다고 떠들기만 합니다. 썩어지는 데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썩어지면 됩니다. 말없이 썩어지는 손길들이 얼마나 아쉬운 때인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디모데가 없었더라면 바울의 사역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많은 서신서들을 어떻게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디모데는 귀하고 귀한 사람입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이 아주 유명한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모든 연주자 중에서 어느 분이 가장 중요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서슴없이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앞에 앉은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퍼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악장은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지휘자와 악수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그 자리를 원합니다. 그래서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는 구하기가 힘듭니다. 이름 없이 뒤에서 협력하는 사람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가 없으면 오케스트라가 되겠습니까? 세컨드 바이올리니스트뿐만이 아닙니다. 교향악단을 보면 팀파니, 북 치는 사람 있습니다. 곡을 다 연주해도 몇 번 나타나지 못합니다. 음악회 가면 정말 어떤 때는 이런 사람 안 됐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교향악단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웅장한 소리 어디서 나옵니까? 팀파니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한 두 사람 없어도 연주할 수 있지만 그 사람 없으면 연주가 불가능해집니다.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둥입니다. 기둥이 곧 바르고 튼튼해야합니다. 그래서 그 기둥이 지붕을 받쳐주고, 기 기둥을 통해 벽과 벽이 연결되고 결국 기둥을 통해 건물이 유지됩니다. 기둥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둥이 기둥으로 역할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둥 아래에 놓는 주춧돌입니다. 주춧돌이 튼튼하게 비쳐주지 아니하면 결코 기둥이 기둥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둥이 튼튼해도 주춧돌이 잘못되면 기둥이 잘못됩니다. 그러니 건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상 주춧돌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주춧돌은 땅 속에 묻혀 윗부분만 조금 보입니다. 교회에 정말 중요한 사람은 주춧돌 같은 사람들입니다. 배후의 협력자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신 은사에 따라 지도자가 되는 것도 귀하지만 디모데 같은 사람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배후에서 일하는 사람들, 배후에서 돕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보배와 같은 사람들이요, 하나님 보실 때 가장 귀한 일군들임에 분명합니다. 19세기 영국에 스펄젼 목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당시 마이크도 없던 시대에 매 주일 오천 명의 회중 앞에서 설교를 했던 설교의 왕자라고 불리던 목사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목사님의 그 능력 있는 설교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물었습니다. 그 때마다 목사님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예배당 지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바로 목사님의 강단 밑 지하실의 문을 엽니다. 그 곳에는 수백 명의 성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방이 나의 설교의 모든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여기 관계해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을 위해 평생을 기도해 오신 기도의 후원자 할머니 한 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는 교회에 다른 일 크게 한 것이 그러나 정성을 다해 목사님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한 평생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그 할머니의 장례식을 인도할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 나의 사역에 있어 가장 귀한 동역자 한 분을 잃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협력자들입니다.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희생하고, 나는 감추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말없이 배후에서 섬겨갈 것뿐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손길 손길들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가 힘차게 이루어져 갑니다. 주님의 교회에 신실한 협력자로, 동역자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일에 협력자로 세워주신 것 감사합니다. 주님의 협력자로 제대로 일하지 못한 허물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디모데와 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 되게 하시고, 주님의 일만 구할 뿐 아니라, 배후에서 희생하면서 말없이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가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그래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실한 협력자로, 동역자로 우뚝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 / 빌 2:25-30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란 제목의 책을 써서 우리에게 유명한 스티븐 코비 박사가 말한 ‘90:10의 원칙’이 있습니다. 90:10의 원칙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100이라고 본다면, 그 중에 10%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일들은 불가항력적이기도 하거니와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90%는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그 10%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서 옷을 차려입고 아침식사를 하는데, 그 식사 자리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잘못해서 커피 잔을 건드려 커피가 쏟아지면서 와이셔츠를 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이후의 상황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딸이 커피를 쏟아 와이셔츠를 버린 것을 보고 기분이 나빠 딸을 나무랄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왜 이렇게 칠칠맞게 방정을 떠느냐?’고, ‘너 때문에 옷 다 버렸지 않으냐?’고 나무랍니다. 그러자 호통으로 꾸지람을 들은 어린 딸은 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커피 잔을 식탁 가운데다가 놔야지, 식탁 가장자리에다 놓으니까 아이가 건드린 것 아니냐?’고 잔소리를 합니다. 그 일로 아내와도 말다툼까지 하게 됩니다. 화가 나서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니, 어린 딸은 밥도 먹지 않고 울다가 유치원 버스를 타려고 나갔는데, 그만 차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분이 상한 아내는 자기도 직장에 늦었다고 먼저 나가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아이를 차에 태워 유치원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유치원에 가는 내내 기분에 언짢아 아이와 대화도 없습니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가려다보니, 출근 시간이 촉박합니다. 그래서 과속을 하고 가다가 경찰에게 걸려 딱지를 떼었습니다. 부리나케 출근을 해 보니 이미 지각입니다. 직장 상사에서 늦게 출근했다고 기분 나쁜 소리를 듣고 책상에 앉았는데, 옷을 갈아입고 급하게 오느라고 서류 가방을 집에 놓고 안 가져왔습니다. 중요한 서류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또 상사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으니 하루 종일 일상이 엉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피곤한 몸으로 퇴근을 해 집에 와 보니 집안 분위기가 썰렁합니다. 딸아이는 아빠가 왔는데도 인사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아내는 아침에 싸운 것 때문에 밥도 해놓지 않고 인상만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이렇게 하루가 엉망이 되어버렸습니까? 아침부터 커피를 마시려는 것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커피를 쏟아버린 아이 때문입니까? 커피를 식탁 모서리에 갖다 놓은 아내 때문입니까? 아니면 과속한다고 딱지를 뗀 경찰 때문입니까? 다시 사건의 시작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아이가 커피를 쏟아 와이셔츠를 망쳐버렸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아이가 좀 조심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커피를 쏟아버린 후에는 그 일은 이제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문제는 커피가 쏟아진 후 보인 반응입니다. 그러면 상황을 조금 다르게 설정해 보십시다. 딸이 커피를 쏟아버렸습니다. 자기가 잘못한 것을 알고 딸아이가 울먹거립니다. 그때 아빠가 딸에게 ‘괜찮아!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 그러고는 아이를 다독거리며 얼른 수건으로 와이셔츠에 묻은 커피를 닦아내고는 방으로 들어가서 다른 셔츠로 갈아입고 가방을 챙겨 출근준비를 합니다. 아이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식사를 마치고 유치원버스를 타고 손을 흔들며 유치원에 가고, 자신도 출근하여 직원들과 유쾌하게 인사하며 업무를 시작합니다.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상관에게도 칭찬을 듣고, 기분 좋게 집에 돌아와 아내와 아이와 함께 행복한 저녁시간을 보냅니다. 여러분,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딸아이가 옷에 커피를 쏟아 와이셔츠를 버린 일은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미 일어난 후에는 그 상황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서 하루 종일 기분 나쁘고 일이 엉망이 되어버릴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분 좋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반응하느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 가운데 10%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90%는 내가 보인 반응에 따라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긍정적이고 좋은 반응을 보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90%를 기쁨과 행복으로 채우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늘 우리는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데, 행복한 삶을 위해서 행복을 만드는 것들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또는 우리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기분 나쁘지 않는 쪽, 행복을 위한 쪽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기분 나쁜 쪽을 택하려고 하면 ‘여보, 기분 좋게 생각합시다. 행복한 쪽을 선택하십시다.’ 그렇게 말하며 행복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선택이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한 삶과 신앙적 삶,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늘 물으며 살아야 할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우리가 지금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위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을 위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삶을 위해 신앙 생활한다는 말은 내 삶의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신앙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내 삶을 위해서입니다. 내게 조금이나마 유익이 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니까 건강해져서 좋습니다. 또는 건강해 질 것이라고 믿고 교회에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보다는 그래도 교회 친구들이 더 살갑고 나에게 잘 해 주니까 교회에 나와서 좋은 친구들 만납니다. 교회에 나오면 좋은 말씀 들으니까 내 삶에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말씀 들으러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사업이 잘 될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서 너무 힘들고 지쳐 마음에 평안 없이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에 나오면 마음이 평안하고 세상 걱정과 염려를 잊을 수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도 합니다. 신앙생활하면 가정이 늘 행복하고 자식들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정을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건강하지 못한 몸이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몸을 치료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실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 좋은 말씀을 들으니까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신앙 생활하면서 모든 일들이 잘 풀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한 마음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 불행이 떠나가고 행복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거기에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건강이 회복되지 않는다든지, 아니면 신앙생활 잘 하는데도 갑자가 병에 걸려 건강을 잃으면 더 이상 신앙 생활하는 의미가 없어졌기에 신앙생활을 그만 두기 쉽습니다. 사업이 잘 되고 직장에서 어려움이 없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사업이 잘 되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고 신앙을 포기해버립니다. 가정에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가정이 평안을 얻지 못하거나 가정의 행복이 위협을 당할 때면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내 삶의 유익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기분을 맞춰줄 때에는 방긋 웃고 재롱을 피우지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울면서 떼를 씁니다. 평소에 아무리 잘 해 주는 엄마라 하더라도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엄마 싫어, 엄마 미워!’라고 외치고 삐지기도 합니다. 그게 어린아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성장해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성숙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에서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섯 가지의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형제, 수고하는 자, 군사 된 자, 사자, 그리고 돕는 자입니다. 에브로디도에게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은 그의 다양한 재주와 바울에게 준 유익이 큰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여러 가지 면에서 칭찬합니다.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 가지 칭찬도 듣기 어려운데 계속해서 칭찬을 듣습니다. 먼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라고 합니다. 형제라는 말은 같은 신앙을 가지고, 같은 하나님을 섬겼다는 일체감을 말합니다. 형제라는 말은 가족의 일원으로 깊은 애정을 표현합니다. 신앙생활 하시는 분은 육신의 형제보다 영적인 형제가 더 가까운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는 ‘함께 수고한 자’라고 합니다. 동역자라는 말입니다. 아마도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를 개척할 때 바울과 함께 동역했을 것입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 같이 수고했습니다. 동역자라는 말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에 대한 신뢰이고 칭찬입니다. 못믿을 사람이라면 동역자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합니다. 피를 나눈 전우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 중에 가장 강력한 표현이 전우입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라는 말은 가슴에서 나오는 신뢰와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의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는 보냄을 받은 대표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인정한 사람입니다. 사사로운 일군이 아니라 신임과 대표성을 겸비한 일군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입니다. 빌립보교회의 뜻을 따라 바울의 필요를 도왔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상태이고, 바울을 돕다가는 자신에게 어려움이 올 수 있는 때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입니다. 바울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 도운 요긴한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돕고, 교회를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섬긴 충성된 종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목회자에게 도움이 된다면 참으로 존귀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교회중심이어야 합니다. 혼자 믿고도 얼마든지 천국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교회를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나의 영적 필요도 채우지만, 여러 성도들을 위해 섬기고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신 것도 교회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직분을 받은 것도 교회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명예나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고하고 섬기기 위함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주위에 좋은 일꾼이 많아야 합니다. 기도로 후원하는 사람, 물질로 후원하는 사람, 말로 격려하는 사람, 지혜로 돕는 사람, 몸으로 돕는 사람, 마음으로 후원하는 사람. 예배 시간이면 말없이 앞자리에 와서 앉아주는 사람.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교회가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몫을 다 했으니 복덩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에바브로디도 같은 일군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앞 절에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칭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충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바울은 그 까닭을 여기서 밝힙니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계속해서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또한 어떤 병이 들었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 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을, 그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을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로마로 여행을 갔다 온 사람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들은 줄 알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때문에 그들이 근심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에 에바브로디도는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몹시도 근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근심한 것은 자기가 병들어 죽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근심하고 있음을 알고서 심히 근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들을 간절히 사모했던 것은 그들의 근심을 덜어주려 함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을 듣고,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걱정했습니다. 그들이 걱정하는 것을 알고, 에바브로디도가 심히 근심했습니다. 이는 바울의 마음에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들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그들에게 가면, 그들의 걱정은 없어질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도 그의 근심을 면할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마음에 있는 아픔도 사라질 것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좋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그들에게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들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바울도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우리도 따뜻한 마음, 다정한 마음, 사랑이 가득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기 바랍니다.
27절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심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러니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그를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물론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바울이 그를 돌려보내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죽을병에서 고쳐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셨다면, 그는 죽었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건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났습니다. 이에 바울은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뿐만 아니라 자기도 역시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앞의 근심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든 것에 대한 바울의 근심입니다. 뒤의 근심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을 경우 그를 잃는 데서 오게 될 바울의 근심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을 때,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근심했고 에바브로디도도 근심했고 바울도 근심했습니다. 만일 에바브로디도가 죽으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근심은 더하여질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바울의 근심도 더하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를 살려주셨습니다. 이에 그들 모두의 근심이 깨끗하게 전부 다 사라졌습니다. 따라서 바울 편에서 보면, 이는 하나님이 바울을 긍휼히 여기사 그의 근심 위에 더하여질 근심을 면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28절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급히 그를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냈습니다. 물론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이 자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더욱 급히 그들에게 보냈습니까?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그들은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된 것을 듣고서 근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살아 돌아온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을 때,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근심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에바브로디도도 근심했습니다. 또한 바울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과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하며 근심했습니다. 모두가 근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긍휼로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따라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보고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바울의 근심도 덜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더욱 급히 그를 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바울도 에바브로디도도 빌립보교회의 성도들도 자기 일만 돌보지 않았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들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바울은 그들 양자의 일을 돌보았습니다. 아무도 자기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한 마음, 곧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일에 온전한 본을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 따뜻하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기를 바랍니다.
29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빌립보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빌립보교회나 에바브로디도나 바울 자신에게나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주 안에서”입니다. 그들은 주를 대하는 심정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해야 했습니다. 또한 “모든 기쁨으로”입니다. 조금이라도 에바브로디도를 탓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해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들에게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했습니다. 그들의 보냄을 받아,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로마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에바브로디도는 그가 맡은 일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기며, 그를 높여주어야 마땅했습니다.
30절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앞 절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해야 하고, 또한 더 나아가서 그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30절에서 바울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요약해서 밝힙니다. 먼저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다가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빙자하여 그의 유익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온전히 자기를 희생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바울은 도왔습니다. 바울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은 에바브로디도만이 아닙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바울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았습니다. 의사인 누가는 병약한 바울과 동행하며 그의 건강을 돌보았습니다. 실라와 디모데 같은 사람도 바울 곁에서 도왔습니다.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바울 되게 한 것은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목숨을 아끼지 않은 여러 동역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바울만 볼 것이 아니라 바울을 도운 존귀한 자들을 보아야 합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그 뒤에 희생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한 기업가에게는 훌륭한 경영 참모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장수에게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성된 부하들이 있습니다. 성공한 학자에게는 학문과 인격에 길잡이가 되어준 훌륭한 선생님이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희생적으로 도운 사람들이 귀합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나에게 존귀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도움이 된 사람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갈보리교회가 오늘이 있기까지 교회를 희생적으로 섬긴 분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희생을 아끼지 않은 존귀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도 존귀한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 원합니다. 아울러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바울을 섬기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했습니다. 빌립보와 로마 사이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대신하여,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섬기는 일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이처럼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또한 그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대신하여 바울을 섬기는 일에 죽도록 충성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며, 또한 그를 존귀히 여겨야만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주의 때문입니다. 이기주의로는 절대 남에게 존귀한 자라는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이기주의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자아입니다. 자기사랑이고 물질사랑입니다. 내가 제일이고, 내가 만족하고, 내가 잘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어떠했습니까? 물질 때문에 일한 사람도 아니고, 자기만족을 위해 일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일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부탁한 일을 했고, 바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신문에 날 일도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혔고, 로마 제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불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에바브로디도는 세상과 달리 바울에게 시중을 들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면 전혀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내 안에 내가 죽고 예수가 살아야 존귀한 사람이 됩니다. 엘리야의 종이었던 게하시는 물질 때문에 하나님과 엘리야를 욕되게 했고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받지 말라고 한 나아만 장군의 예물을 받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도 물질과 명예심 때문에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슬프게 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드리고도 하나님의 진노로 죽었습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삽니다. 자기를 내려놓으면 존귀한 자가 되고, 자기를 붙잡고 있으면 비천한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나를 높이면 높아지지만,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면 낮아질 뿐입니다. 내 일을 하면 낮아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 높아집니다. 존귀한 자가 되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존귀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공동체 의식, 지체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위하면 자기의 빛만 비춥니다. 공동체를 위하면 공동체의 빛을 비춥니다. 아무리 좋은 전등이라도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해와 달에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은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불의의 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비극이고 참으로 안된 일입니다. 그런 슬픔 중에도 가족들이 장기 기증을 결정하면 최고 5-6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얼마나 존귀한 죽음입니까? 나 한 사람이 죽고,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기 몸의 건강을 지키는 사람도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여간 노력하지 않으면 자기 몸도 지키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남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더욱 칭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존귀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상 주심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상주시고, 악인을 벌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언행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 그렇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때와 방법에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판단이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장에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주인인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진짜 주인이십니다. 육체만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육체와 함께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조품과 진품을 잘 분간하십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이 아닙니다. 사람의 눈은 속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세상이 주연을 주목할 때 하나님은 조연을 주목하십니다. 아니, 한번 지나가는 엑스트라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나의 기쁨에 참여할지어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습니다. 교회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아끼지 않았다면 반드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순간을 보지 말고 영원을 보아야 합니다. 발아래만 보지 말고 우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사람의 눈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뜻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교회에 유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면 세 가지 ‘뻐’자가 들어가는 삶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기뻐지고, 예뻐지고, 바뻐진다.”는 것입니다. 척만 하는 사람은 기쁨이 없습니다. 주의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척만 하는 신자는 예뻐지지 않습니다. 척만 하는 신자는 바빠지지 않습니다. 교회에도 수고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경꾼도 있습니다. 구경만 하면 좋은데 훼방까지 놓습니다. 그러나 척조차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이 존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서머나교회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일에 함께 하며 사랑하며 수고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아 하늘의 상으로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함께 수고하고 힘써 섬김으로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순간을 보지 않고 영원을 바라보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