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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경 이야기> 아버지 ① 허망
1977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첫 학교인 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이다. 주야간이 있는 학교라 학교는 항상 바쁘게 돌아간다. 일반 학교보다 조금이라도 아침 일찍 시작하고 오후에 또 야간 학생을 받아 늦지 않게 하교시켜야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편의에 따라 주야간을 교체시킨다. 물론 야간만을 고집하시는 선생님들도 있기는 하다. 월급은 같은데 근무시간이 짧아서이다. 맞벌이 교사로서 남자가 주간에 근무하고 여자가 오히려 근무시간이 짧은 야간에 근무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집에 아이들이 있어도 길면 오후에 2시간정도만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같은 누군가가 아이들을 돌봐주면 부부가 교대로 아이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수업시간도 조금씩 짧다.
그래서 7년간 여상에 근무하면서 야간 2년 주간 3년 또 야간 2년을 근무했다. 야간이라도 토요일은 오후에 수업을 시작하여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건넌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들어가 보니 주무시던 아버지가 이상해지셨다. 전에 사흘 만에 깨어나셨고 보름 후에 다시 그런 증세가 나타나시더니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갑자기 돌아가시고 장례까지 치르고 나서 우선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여자형제들하고 여행을 보내드렸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짐정리를 하면서 참 후회를 많이 했다. 하지만 후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는 영정사진 하나뿐인가 싶었다. 다행히도 사진첩에는 사진이 여럿 남았다. 틈틈이 직장에서 찍은 아버지 사진과 또 사진관에 가서 찍은 가족사진이 두 장 석 장이 나왔다. 이렇게 가실 줄 아셨는지 사진관 사진에 남은 아버지의 모습이 마냥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참 인생 허망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사십여 년, 67세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92년에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도 하나 둘 떠나고 이제는 넷이 남았다.
은행도 사무직과 기술직으로 크게 나눈다. 사무직은 행원부터 시작하여 승급이 여러 단계로 되어있다. 195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제일 높은 은행장을 두취(頭取) [우두머리 취체역(取締役)]라고 불렀다. 기술직은 아무리 오래 근무하여도 그냥 기술직이다. 단지 고원, 용원 그리고 참사라는 직급이 있다. 군대도 장교와 부사관(전에는 하사관)으로 나누는 것과 같다. 부사관으로 오래 근무하면 준위 계급을 준다. 은행에서는 준위 계급에 해당되는 직급이 참사이다. 말년에 참사가 되시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 졸업하시고 청소원으로 입행하여 운전을 오랫동안 하시었다. 그래서 종로구 중학동 2층집에 차고가 있고 승용차가 있었다. 물론 외국제 자동차이다. 그래서 외국제 자동차 이름을 그때 익혔다. 시보레(쉐보레), 캐디락, 닷지, 랜드로버, 지프 등등이다. 물론 긴급 연락용 전화기도 있었다. 벽에 붙은 붙박이다. 송화기는 전화기에 달려있고 수화기는 선으로 연결되어 귀에 갖다 대는 것이다. 전화를 걸 때에는 오른쪽에 손잡이가 있어 돌리면 교환원이 나와서 원하는 곳을 말하면 연결해준다. 물론 전화 걸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6.25 발발(勃發)후 산업은행과 한국은행에 있던 현금을 트럭에 싣고 부산으로 긴급 이송시키는 일을 아버지께서 하셨단다. 마지막 직책은 수위장을 하셨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부산으로 내려가셨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오지 못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피난도 못 가고 서울에서 지냈다. 식량이 부족하기도 했나보다. 그런데 큰이모가 망우리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다. 작은 누이와 내가 배낭을 메고 종로에서 청량리까지 전차를 타고 가고 거기서부터 걸어서 망우리 이모댁으로 갔다. 나는 배낭에 늙은 호박 큰 것 하나를 넣고 누이는 식량을 넣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죽을 쑤어 먹기도 했는데 나는 호박죽은 먹겠는데 콩죽은 못 먹었다. 그때 나는 8살 국민학교 1학년, 누이는 17살 여학생에게는 정말 무더운 여름이었다.
은행도 사무직 직원이 한 명씩 숙직 근무를 하면서 비상사태에 대비하여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대직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께서는 대직을 뿌리치지 않고 단골로 기꺼이 하셨다. 물론 대직비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셨다. 은행에는 사무직 일 이외에 자동차 운전, 경비(수위), 목공실, 인쇄실, 보일러실, 영선반, 전기실, 식당 등이 있었다. 그래서 은행에서 필요한 일들은 자체 내에서 해결하였다. 특히 인쇄물도 자체 내에서 만들어 사용하였다. 또 병원도 있다. 의사 선생님이 주 1회 오후 시간에 오셔서 몇 시간 진료를 보신다. 나의 큰아버지께서도 한번 진료를 받으러 오셨었다. 아파도 병원에 가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였다. 우리도 몇 번은 간 기억이 난다. 요사이는 병원에 가도 소독약 냄새가 거의 안 나지만 은행의 병원에 가면 소독약 냄새가 심했다. 아버지께서 퇴직을 하셨지만 내 결혼식 주례도 은행 이사님께 부탁을 하여 해주셨다.
우리집 경제권은 아버지가 갖고 계셨다. 우리들 학비도 아버지에게 타서 납부하였다. 아버지께서 1966년에 퇴직을 하시고 하남시 미사리에 신축한 은행 연수원에 관리를 맡아 촉탁으로 2년 더 근무하셨다.
여름이 되면 은행에서는 직원을 위한 휴양시설을 설치한다. 이름하여 강변 수영장이다. 강변에 흰 차양막과 탈의실을 설치한다. 점심식사 후 1시경 은행 버스가 직원들을 태우고 강변으로 출발한다. 그러면 그 버스에 직원가족들이 동승한다. 직원보다도 가족이 더 많다. 가족이란 전부 아이들이다. 항상 직원을 위한 고급 제과점 빵을 매일 30봉지(빵 2개씩 넣은) 정도씩 가지고 간다. 아이들은 물놀이 피서가 목적이 아니라 빵이 목적이다. 물론 음료수도 있다. 차양막을 지킨다는 이유로 우리도 장기간 텐트를 치고 강변에서 밥을 해 먹어가며 지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강으로 가더니 다음해에는 뚝섬 그리고 또 다음해에는 광나루까지 갔었다. 이유는 수질이 나빠져서 자꾸 상류로 이동을 한 것이다. 햇볕 뜨거운 여름에 며칠간 수영을 계속하면 등에 화상을 입어 허물이 벗겨진다. 여름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약도 없이 그냥 매년 그렇게 지내고 말았다.
은행에는 관사가 몇 군데 있었다. 제일 큰 곳이 종암동이다. 단독주택이 죽 들어서 있다. 이곳은 주로 사무직 직원용이다. 왕십리에도 있다. 이곳은 기존 건물에 여러 세대가 사는 커다란 집이다. 이곳은 기능직 직원용이다. 우리도 잠깐 살아서 안다. 장충단에도 있다. 이곳은 높은 축대 위에 있다. 살아보지 않아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중요한 고급 관사는 중학동에 있다. 우리가 살던 집은 차고가 있어야하기에 큰길가에 있었다. 우리집 건너편에 좀 큰 평수의 집들이 골목을 따라 죽 들어서 있다. 아마도 직급이 높으신 분들의 관사이었나 보다. 왕십리 관사에 살 때에도 학교는 은행 통근 트럭을 타고 다녔다. 코스에 따라 버스가 가는 곳도 있다.
나는 언제 어떻게 떠날까?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게는 희망사항이 될 수도 있겠다. 우선 오랫동안 아프지 말아야겠다. 일상생활로 회복이 어렵다면 굳이 연명하면서 오래 살 필요가 있을까. 제발 고통 속에서 오래 살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고 싶다.
자 이제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죽고 나서도 나의 아이들이 허망하다고 느끼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 비록 내가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 아버지는 다정하셨다’라는 아이들의 이야기나 또는 ‘우리 남편은 나에게 참 멋진 남자이었다’라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는 날까지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자. 나를 위해서 또 남은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자.
다시 나에게로 돌아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나?’ 생각해보자. 형제가 많기도 했고 아버지께서도 우리와 많은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셨다. 이것저것 생각해보니 우리에게 퍽 자상하게 신경 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처 따라가지 못했던 것 같다. 을지로 입구 사각형 은행부지 맨 안쪽 구석에 관사가 있었다. 처음에는 관리인들의 거처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필요에 의해서 가족들에게 임대를 해 주었다. 관리비는 일체 없고 전기 값만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화장실은 있으나 욕실이 없다. 작은 집이지만 방이 다섯 개로 우리 집이 세 방, 옆집이 두 방을 사용했다. 화장실은 푸세식이다. 몇 달 만에 한 번씩 청소원이 다닌다. 그러면 불러들여서 수거를 했다. 끝날 때까지 지켜 서서 퍼나가는 분뇨통 수를 세고 있어야한다.
여름에는 그냥 마당 수돗가에서 대충 씻었고 봄 가을 겨울에는 한 달에 한두 번 목욕탕을 가야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야간근무를 하시는 날에는 우리들을 은행 보일러실로 불러서 목욕을 하라고 하시었다. 하지만 쑥스러움이 많았던 청소년기에 그곳으로 가서까지 목욕을 자주 하지는 않았다. 한두 번 갔을 뿐이다. 아버지의 목욕비 절감을 우리는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연말이 되면 은행에서는 직원들을 위로하기 위해 작은 무대를 마련한다. 연예인 특히 가수들을 불러다 공연을 했다. 공연이라 악사들도 꽤 여럿이 왔다. 무슨 코미디언들도 오고는 했다. 또 평상시에도 영화를 상영하면 우리들에게 연락을 해서 쏜살같이 몰려가 영화도 자주 보았다. 영화 상영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스크린과 스피커만 설치하고 영사기와 필름만 빌려다가 돌리면 되니까 말이다. 우리는 공짜 구경을 하는 것이다.
집집마다 사진기가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라 우리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을지로 입구 근처에 있는 사진관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그 유명한 허바허바 사진관이다. 사진관은 2층인가 3층에 있었다. 그래서 가족사진이 몇 장은 남아 있다.
또 아버지께서는 은행직원들끼리라도 중국 음식점 가서 식사를 하시는 일이 자주 있으셨지만 늘 직원들하고만 잡수시는 것이 미안해서인지 가끔씩 식구들을 데리고 중국집으로 가곤하였다. 중국음식 이름도 생소한 것을 그때 많이 시켜주셨다. 명동 쪽으로도 갔지만 시청 쪽 반도호텔 옆 아서원으로도 갔었다.
은행에 식당이 있다. 직원들에게 점심 식사를 제공한다. 직원 수 만큼 준비를 하지만 직원들이 100% 식사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남은 음식을 그냥 버려야한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남은 음식을 깡통에 담아 집으로 넘겨주신다. 우리집 식구들이 그 음식을 자주 얻어먹었다. 주로 카레라이스이다. 밥은 없지만 카레 국물을 가져다주시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밀가루를 우선 불에 볶는단다. 그리고 고기와 감자 양파 파 등을 넣고 끓인 후 볶은 밀가루와 카레가루를 넣어 다시 끓인다고 하셨다. 집에서는 해 먹을 수 없는 음식을 별미로 자주 얻어다 주셨다.
집에서 개를 계속 길렀다. 검정색 세파트이다. 세파트는 자라면서 무척 커진다. 먹는 양도 적지 않다. 개 먹이도 버리는 음식을 깡통에 담아 담아오셨다. 은행 정문으로 가지고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은행 건물 뒤로 돌아오면 우리집 담장이 나온다. 담장으로 넘겨주시는 것이다.
겨울이 되면 은행이라는 커다란 건물에 난방을 하여야한다. 난방용 보일러가 아주 큰 것이 있다. 지하에 있다. 연료가 석탄이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면 석탄이 트럭으로 들어온다. 보일러실 위 지상에는 맨홀이 있다. 그 맨홀 위로 석탄을 쏟아 붓는다. 그러면 지하 보일러실의 석탄저장고로 떨어진다. 한꺼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아저씨들이 일일이 부삽으로 퍼서 맨홀로 떨어뜨려야한다. 그래서 그 근처는 항상 시커먼 석탄 찌꺼기로 지저분했다. 보일러실 아저씨들이 장작으로 우선 불을 지피고 그 위에 석탄을 물에 개어서 또 화구로 퍼 넣는 것이다.
겨우내 사용할 장작도 통나무를 사다가 은행 안 공터에서 장작으로 쪼개는 일을 며칠간 계속한다. 그러면 장작에서 나무껍질이 많이 떨어져 나온다. 나무는 주로 소나무이다. 우리는 겨울용 땔감으로 그 나무껍질을 주워 리어카로 실어다가 우리집 창고에 가득 쌓아두고 겨우 내내 사용을 했다. 일요일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나무껍질을 날랐다. 이 일은 정문을 통과해서 큰길로 나와 골목안의 집으로 끌고 들어와야 한다. 창피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난방비를 아끼게 되었다. 물론 부엌에서 취사용으로 사용하고 난방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저녁이면 우리 방 아궁이에 형제가 번갈아가면서 풀무를 돌려 불을 땠다. 저녁에 불을 때고 잤지만 아침이 되면 방이 식어 춥다. 그러면 또 아침에도 불을 땐다. 내가 그 일을 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나이였다. 내 아래에는 네 살 터울의 여동생과 여섯 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은 여자 막내 남동생은 남자 막내이었다. 둘 다 막내 대접을 받았다.
아궁이 문이 넓어서 나무껍질을 넣기는 좋지만 찬바람이 들어가 방도 빨리 식나보다. 나무껍질이 통나무 같지 않아 오랫동안 타는 것이 아니라 쉽게 불이 삭으러들어 방이 쉽게 식는다. 그래서 아궁이 문을 함석으로 만들어 막고 자기도 했다. 나무 장작시대가 지나고 들어온 것이 연탄, 십구공탄이다. 을지로 집에 살 때까지는 구공탄이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우리도 나무를 사다가 장작으로 패기도 하였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든다. 우리는 조금만 샀다. 그리고 나무껍질을 땐 것이다. 나무를 때 조리를 하면 장작불이 남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 장작불을 꺼내어 마당에 놓고 커다란 쇠그릇으로 덮는다. 정말 바람이 들지 않게 꼭 덮는다. 그러면 숯이 된다.
또 톱밥도 많이 긁어왔다. 톱밥을 커다란 통에 넣는다. 그리고 기다란 무를 사다 절였다가 그 톱밥 속에 켜켜이 넣는다. 그렇게 숙성시키면 톱밥으로 단무지가 된다. 김치도 담가 먹지만 단무지도 담가 먹었다. 빛깔은 사먹는 것만큼 노랗지는 않았지만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김장도 꽤 많이 하여 땅에 묻고 겨우내 꺼내 먹었다. 냉장고가 있다. 아주 작고 투박하다. 전기용이 아니라 얼음 사다가 위 칸에 넣으면 냉기가 아래로 내려오는 식이다. 그래서 사실 거의 사용하지를 않았다.
또 남자 녀석들이 드나드니 방고래가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몇 해 여름 지나고 다시 방구들을 정비한다면 정말 난리가 난다. 방안의 모든 것을 들어내고 방을 뜯어 고치는 것이다. 대공사가 시작된다. 무너져 내린 고래를 정비하고 넓은 돌로 고래를 덮고 사이사이 편편하게 돌을 깔아 넓은 큰 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위에다 시멘트를 바른다. 방바닥용 넓은 돌은 따로 사와야 한다. 물론 넓기는 하지만 표면은 울퉁불퉁하다. 바닥을 두껍게 바르면 견고해져 오래 가지만 방이 쉽게 더워지지가 않는다. 그렇게 공사를 하고는 며칠을 두고 말려야한다. 마르면 한지로 초배를 하고 또 말린 후 장판을 바른다. 장판은 두꺼운 한지에 기름을 먹인 종이이다. 장판을 바른 후 또 어느 정도 말린 다음 흰 콩을 사다가 아주 푹 삶아서 자루에 넣고 장판 위를 문지르면 콩기름이 나온다. 그렇게 장판 위에 여러 번 콩기름으로 칠을 하는 것이다. 전체 공사가 대략 보름 이상 걸리는 것 같다. 대공사가 마무리 되면 다시 가구를 들여다 놓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냄새는 오랫동안 가시지 않는다. 뭐 화학적으로 해로운 공기는 아니지만 콩기름 냄새가 한참 갔다. 그때 처음으로 온돌방의 구조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열기가 어떻게 방을 통과하며 재가 어디에 쌓이고 오랫동안 방구들이 유지되는지도 보았다. 방바닥 종이 장판이 그래도 또 해어지면 나중에는 장판만 바꾸고 콩기름 대신 ‘니스’라는 페인트 같은 도료가 나와 칠했다. 방바닥도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방구들 정비와 시멘트 바르는 일 같은 큰일은 전문인을 불러다가 하지만 장판 같은 일은 우리들이 했다. 힘이 드는 일은 작은 형이 주로 하고 우리는 보조로 쉬운 일을 많이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종이 장판이 아니라 비닐 장판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0년도 더 지났다. 이제는 우리 차례가 다가오는 것이다. 무엇을 남기기보다 무엇이 남을까? 나는 자식들한테 무엇으로 남을까? 나는 잘 살아가고 자식들하고 잘 이야기하며 잘 지내고 있는가?
‘무엇이 남을까?’라고 말했지만 사실 ‘무엇을 남겨야하나?’가 아닌가? 자서전은 아니지만 환갑문집이 남아있다. 아이들이 볼 것은 아니지만 ‘수능 독일어 완성’과 ‘독일어 본고사 문제 해설집’도 출간을 했다. 또 독일 현지 어학연수에 다녀온 후 교육부에 제출한 ‘독일어과 교원 국외연수 보고서’도 있다. 한정판으로 시와 산문의 만남 낭송 집에도 여덟 번 참여 출간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나 가족사진이다. 결혼 전부터 찍은 나의 사진과 결혼 후 찍은 사진이 수도 없이 많다. 근래에는 동영상도 여럿이 있다. 좋게 보면 하나의 영화이다. 연출과 대본은 없지만 생생한 것이 더 실감이 난다. 그래서 앞으로는 동영상을 많이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래 찍으면 용량이 커져서 사용하기 불편하다. 5분 이내가 좋을 것 같다.
이제는 참 좋은 세상이 되었다. 어떻게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남겨지는가도 중요하지 않을까?
해외 입양아들이 결국은 생모를 찾아 한국으로 들어오지만 찾기는 정말 어려운가보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 근거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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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즘 기준으로 보면 정민 형도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셨군요. 셋째아들인 저도 부모님을 돌아가실때 까지 모셨는데, 아버님은 1981년 76세로, 어머님은 훨씬 장수하셔서 1997년 93세로 돌아가셨죠. 그동안 어머님 생각은 가끔씩 했지만 정민 형 덕분에 잊고 있었던 아버님에 대한 추억에 잠시 잠겨보았습니다. 살아계실때 좀 더 잘해드렸어야 했는데 후회가 많습니다. 저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시간을 갖게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시 부모님을 생각하셨다니 글쓴 보람이 있군요. 누구나 갖는 부모님에 대한 후회, 끝이 없지요. 정말 허망했습니다. 어여쁘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