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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行日記
地中海 3개국(터키, 이집트, 그리스) 紀行
일시 : 1997년 5월 30일~6월 7일
주관 : 세진여행사
다른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3개국이라기보다는 주로 이스탄불과 카이로, 아테네의 3개 도시와 그 주변을 9일간에 걸쳐서 잰걸음으로 돌아본 셈이다.
5월 30일(금) 오후 : 이번에도 내자와 함께 오후 7시 25분 김포공항을 떠나서 첫 기착지인 이스탄불로 향했다. 서울 - 이스탄불7,961km, 비행 소요시간은 11시간 20분이라고 한다. 도중에 기내식을 2번 받아먹고 중국 대륙과 가스비해를 거쳐서 이스탄불에 도착한 것은 우리 시간으로는 오전 6시 30분인데 시차(6시간)관계로 현지시간은 5월 31일로 막 접어든 0시 30분이다.
곧바로 Korden Hotel에 들었는데 룸 리스트도 없이 개별적으로 호실(號室)을 배당받았다. 이번 여행은 다른 때의 여행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일행의 인원수는 20명쯤 되는데 각자의 이름이나 주소, 전화번호 등등 개인의 정보에 관한 것은 일체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우리 일행 중 일부에서 그것을 강력하게 주장해서 여행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한 젊은 여자의 언행에서 강하게 그런 경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서 가이드가 단체사진 촬영을 권고했는데 그 여자가 와해시켰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으로 여행하는 것이지 단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앞장서서 단체행동을 방해했다. 어느 외국인 회사에 다니는 직원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가끔 "I don't like it." "Why not." "Well I don't think so."등 짧은 영어를 섞어가며 가끔 일부 외국인이 잘 쓰는 어깨를 들썩거리는 몸짓을 섞기도 했다. 동행한 가족이 3∼4명인 듯싶은데 다른 가족들은 말수도 적고 조용하게 처신했는데, 특히 그의 어머니는 처신이 점잖아서 매우 원만한 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 젊은 딸이 뇌골스럽게 톡톡 튀어서 분위기를 흐려 놓았다.
5월 3일(토) 오전 : 7시 30분에 아침 식사를 하는데 빵과 약간의 소시지뿐이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호텔의 식사가 대개 그 나라의 경제 수준을 말해주는 듯한 느낌이다. 터키는 G.N.P는 3,000~3,500달러라고 하는데 상, 중, 하의 계층 간의 차이가 심해서 생활수준은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8시 40분 호텔 로비에 집합하자 현지 가이드인 한우리투어의 오현미 대표가 우리 안내를 맡는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30대 후반쯤일까 용모가 돋보이고 재기가 넘쳐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이스탄불은 3000년의 고도로서 유적이 많은 곳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은 수도를 앙카라로 옮겼지만 도시 규모는 터키의 제1의 도시라고 한다. 학창시절 우리가 배운 서양사와 외국 지리교재에는 이스탄불이 몇 번 이름이 바뀐 도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제 현지에 당도한 바에는 조금 더 자세히 그 내력을 익혀 두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은 아닐 듯싶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이 도시 이름이 Byzantium 이었는데 뒤에 동로마제국의 수도때에는Constantin대제(280~337)가건설한 도시라 하여 Constantinople로 바뀌었다. 그 뒤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서 동로마제국의 수도가 함락되어 이슬람의 손 안에 들어갔다. 이후 터키는 3대륙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친 국가로서 이슬람교를 주도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위협했다. 그런데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편에 들었다가 대패하는 바람에 많은 영토를 잃었다. 섬은 모조리 그리스에게 귀속되고 해양권마저 상실하고 국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제정(帝政)을 폐지하고 공화제를 펴면서 1923년에 1600년 동안의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옮겼다.
Constantinople이 Istanbul로 바뀐 것은 1930년이라고 한다. 다 잘 아는 것처럼 현재의 터키 영토는 대부분이 아시아에 속해 있고 일부가 유럽에 걸쳐 있어서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하는 셈이다. Istanbul은 '이스탄불'과 '이스탐불' 의 두 가지 표기가 있는데 여기서는 민중서관의「국어대사」전의 '이스탄불' 을 따르기로 한다.
이스탄불은 오랜 세월의 고도로서 유적이 많아서 이번 여행의 행선지를 그쪽으로 잡은 것이다. 터키는 6·25 한국동란에는 UN군의 이름으로 1만2천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그중 4천 명이 희생된 우리의 중요한 우방국가의 하나다.
터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 5천만 명을 헤아리는 대국이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종교는 이슬람교가 주종이고 유목민의 후예로서 다혈질이라고 한다. 저축성은 부족한 편이고 체념을 잘 하는 것이 이 나라의 국민성이라는 것이다.
나의 젊은 접장시절 재교육 강습회에서 어느 역사 강사가 원래 우리 민족과 몽골, 부탄, 터키, 헝가리 그리고 핀란드 등이 같은 우랄알타이계열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어떤지 모르겠다.
이스탄불에서 첫 번째로 들른 곳은 'Blue Mosque' 였다. 화면으로는 모스크를 많이 보았지만 직접 실체를 관람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사원의 원이름은 Sultan Ahmed 사원인데 푸른빛의 타일로 지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17세기에 Sultan Ahmed 1세가 St. Sophia Mosque와 맞먹으려고 세운 사원이라고 하는데 규모는 그에 훨씬 못 미치나 매우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원으로 그 이름이 높다. 하여간 높은 천정과 굵직한 원주가 특히 인상적이며 호화스러운 내부의 장식이며 장엄한 건축미에 감탄하여 마지않는다. 마침 신도들의 예배시간이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하루에 5번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1년에 1개월간은 '라마단' 이라고 하여 낮에는 금식을 하고 야간에는 취식(取食)을 하는 규율이 있다는 것도.
다음에 들른 곳은 St. Sophia Mosque 였다. 오랜 역사 속에서 훼손된 부분이 많은데 원래는 Blue Mosque 의 8배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고 한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25 년에 건축하였으나 두 차례의 화재를 당하여 다시 재건한 내력이 있는 사원이라고, 주랑(柱廊) 없는 Dome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라고 한다. UNESCO에서도 이 점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서 훼손된 부분의 복원에 착수하여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날도 머지않을 듯하다.
세 번째로 들른 지하 물저장고는 그 구조며 규모가 대단히 놀랍다. 이스탄불 구(區)의 급수를 목적으로 20cm에 불과한 높이에서 336개의 주랑을 거쳐서 19km나 떨어진 이곳 저장고까지 끌어왔다는 물이다. 세상에서도 가장 값이 비싼 귀중한 물일는지도 모른다.
5월 31일(토) 오후 : 우리나라에서도 '터키탕으로 잘 알려진 그 본고장에서 목욕탕의 실체를 관람하게 되었다. 호화스런 시설이며 큰 규모로 보아서 그들의 목욕문화가 짐작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터키탕' 대신 '토끼탕' 이라고 하여 일종의 퇴폐시설로 인식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터키 대사관 측에서 자기 나라의 건전한 목욕문화가 왜곡되었다며 항의를 해왔다는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가이드도 이 나라 국민들이 즐겨서 하루 종일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은 허다하지만 퇴폐적인 시설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 그렇지 대사관까지 나서서 항의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터키의 목욕처럼 나라에 따라서는 국민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문화가 있는 듯싶은데 중국은 음식, 일본은 의상 등이라고나 할까. 그건 그렇고 우리나라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널리 애창되고 있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라는 속요가 있다. 이 가사에 빗대면 터키는 “씻세, 씻세, 젊어서 씻세...…", 중국은 “먹세, 먹세, 젊어서 먹세..." , 일본은 “입세, 입세, 젊어서 입세………” 가 될 듯싶어 웃음이 나온다.
우리가 6·25 동란의 후유증으로 대단히 곤궁할 때 철학과 교수였던 김기석(金基錫) 박사가 어느 특강 시간에 앞서의 속요를 호되게 비판했다. 우리는 지금 밤, 낮 없이 일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가 어디에 해당한 말이냐고.
만당한 청중이 다들 그분 말에 숙연해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동란 직후는 아니라도 지금도 국가의 경제 사정이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나는 가락이 단순해서 젊은 시절부터 가사만 바꿔서 자주 애용하는 편이다. “노세, 노세… 대신 쉬운 말로 풀어서 "벌자(核), 벌자, 젊어서 벌자…”나 “읽자(讀), 읽자, 젊어서 읽자……”, “뛰자((跳躍), 뛰자, 젊어서 뛰자…” 등으로.
광장에는 이집트에서 탈취해 왔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크가 버젓하게 서 있고 독일 황제가 조공을 바친 표지판이 세계사의 변천을 말해주는 듯싶다. 오후 4시경에 이스탄불 시내의 벼룩시장을 관람하다. 유럽의 관광단인 듯한 일행도 많이 눈에 띄는데 관광단들이 거의 빠지지 않고 들르는 인기 있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금세공품들이 현란하다. 아마 우리 서울의 동대문, 남대문의 양대(兩大)시장 같은 곳인 듯싶다. 시내 구석구석 모스크가 눈에 띄고 그 모스크 주변에는 어김없이 많은 비둘기들이 날고 있어서 모스크와 비둘기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인상이 짙다.
한편으로는 동로마제국 시대의 유적인 성벽이 지금도 구석구석 남아 있고 그 밑으로는 집시들이 띄엄띄엄 성벽을 의지하고 초라하게 살고 있다.
6월 1일(일) 오전 : 9시에 흑해와 지중해로 통하는 보스포러스 해협의 다리를 건너서 위스퀴다르로 넘어왔다. 그동안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터키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
1. 일찍부터 이 나라는 주 5일제를 시행하여 관공서는 토, 일요일은 휴무다(그 무렵 우리는 주 5일제는 말도 꺼내지 않을 때여서 매우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2. 교육열은 희박한 편이고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서 자녀들을 일찍부터 장돌뱅이로 내돌리는 경향이 짙다(그러고 보면 이 나라에서는 앞서 언급 한 “벌자, 벌자, 젊어서 벌자……” 의 속요가 적절할 듯싶다).
3. 2차 산업은 별로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
4. 금융계는 Credit Card제로 성황을 이루는 편이지만 산업의 뒷받침이 없어서 경제는 역성장(成長) 쪽으로 흐르는 느낌이다.(지금 우리나라도 '신용 카드제 때문에 '신용불량자' 를 수백만 명이나 양산한다니 터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다).
5. 이슬람교의 교리상 모든 것은 알라신의 섭리로 여길 정도로 종교에 몰입하는 경향이 짙다(낙천적인 국민성도 그런 쪽에서온 것인지도 모른다).
앞에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다리를 건넜다는 말을 했는데 이 다리는 적교(弔橋)로서는 세계 4번째의 긴 다리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이 다리의 건설비를 투자해서 일본에 대한 선호도가 유별나다고 한다. 사실 이 다리는 아시아와 유럽의 두 대륙을 연결하는 매우 의미 있는 다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주 효과적인 투자를 한 셈이다.
지정학적으로 이스탄불은 유럽 대륙에 위치하고 위스퀴다르는 아시아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순식간에 양 대륙을 오고 간 셈이다.
원래 터키는 전에는 유럽 쪽에서도 모레아 반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어서 유럽 국가로서의 명분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차츰 영토를 잃고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겨우 Maritza강 동쪽의 2만4천평방km만을 유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터키 제1의 대도시인 이스탄불이 유럽 쪽에 있어서 유럽국가의 명분이 별로 무색하지는 않을 듯싶다.
위스퀴다르는 Silk Road의 종착지로서 '황금의 땅'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은 고색이 창연한 구 도시의 초라한 모습이 눈에 띄는데 해변의 신흥 주택가에는 우리 화폐가치로 80~150억원이나 나가는 고급 빌라들이 들어서서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큰데 놀랐다.
11시경에 다시 이스탄불로 넘어와서 토프카프 궁을 관람했다. 모하메드 2세가 건립한 호화스럽기 이를 데 없는 왕궁인데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전용되어 있다. 보석이 가득 박힌 황금 옥좌를 비롯하여 자기류, 금세공품, 보석류 등이 무진장이라는 느낌이다. 대담한 추측이라는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이곳의 소장품을 시가로 환산하면 터키 전 국민이 120년은 충분히 먹고 지낼 수 있다고 한다. 터키 전 국민 5천만 명이 말이다.
이런 자원들이 관광 수입의 원천이 되고 있다니 터키로서는 지극히 다행한 일일 듯싶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번 여행에서 이집트나 그리스에 견주어서 터키는 솔직히 역사적으로 기대치가 가장 떨어지는 나라였다. 그만큼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적었다고나 할까, 아니면 내가 터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 적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엄한 모스크와 토프카프 궁의 소장품을 보고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다른 두 나라와 견주어서 별로손색이 없는 것으로.
가이드도 권고하고 이곳 박물관 건물을 배경으로 단체사진 촬영을 시도했지만 앞에서 언급한 튀는 여자가 훼방을 놓아서 무산되고 말았다.
6월 1일(일) 오후 : 점심 식사 후 케말 파사(아타튀르크) 공항으로 나왔다. 이 공항은 터키의 근대국가 건설의 영웅이며 국부인 Kemal Pashaa (1881~1938)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분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Pasha는 이름이 아니라 군사령관, 고급 관료의 뜻이고 Ataturk는 국부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1935년까지는 Kenial Pasha로 그 뒤 작고할 때까지는 국부인 Kemal Ataturk로 호칭했다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쇠퇴한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청년 터키당’을 이끌고 민족운동을 폈다. 그리고 1차대전 후 그리스와 싸워서 승리한 후 1925년 공화제를 펴면서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조국인 터키와 결혼했으므로 그 이상 결혼이 필요가 없다며 한평생을 독신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청렴과 근검(勤檢)을 신조로 국토와 주권을 회복하고 터키의 근대화에 진력했다. 아라비아 문자를 폐지하고 로마문자로 국자(國字) 개혁을 한 것도그의 뜻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5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는데 영웅이며 국부이기 전에 고매한 인격자이며 애국자였다는 말에 크게 감동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향기는 ‘인격의 향기’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어느 나라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영웅이나 국부는 고사하고 범부(凡夫)도 못 되어 두고두고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면 우리나라에도 Kemal Pasha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한번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고 또 간절하다.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번 여행에서는 일행의 명단도 없고 개별적인 의사나 소개도 없어서 분위기가 경직된 느낌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 분과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전상기(田相淇)씨는 부여 출신으로 중앙농협회장을 역임한 분이었다. 지금 서울 송파구 잠실 3동에서 분재원을 경영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나와는 사돈지간이어서 여행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나라 고대의 한일교류사에도 조예가 있어서 그 방면의 역저(力著)도 몇 권 남긴 분이다.
김문희(金文姬) 양은 처음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여행하는 여자 대학생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살고 있는 대전 시내의 충남대학교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였다. 몇 해 동안 서로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직장을 옮긴 뒤로는 지금은 소식이 끊긴 상태다.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이승헌(李承憲)사장 내외분도 지금은 소식이 끊어졌지만 한동안 교류가 이어졌던 분이다. 아드님이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연수 중이라고 했는데 지금쯤은 중견 외교관으로 활동 중일 듯싶다.
오후 3시 30분 이스탄불을 떠나서 카이로로 향했다. 항공기에서 내려다본 터기의 산야는 척박하다는 느낌이었다. 6·25 동중에는 U.N.군의 일원으로서 우리나라에 파병한 우방이어서 척박해 보이는 산야에도 마음이 쓰였다.
첫댓글 『땅이 그리워 내친 걸음에』여행일기 중에서 터키 이스탄불 부분만 옮깁니다.
엄청 가고 싶은 도시 이스탄불이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