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청주지역사건 종합
[제공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국민보도연맹사건>
한국전쟁 전후하여 청주시내 청주약국 건너편에 CIC사무실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청주CIC는 충북경찰국으로 이동하여 상주했으며, 헌병대와 함께 청주경찰서에도 드나들었다.
6월 28일경 내무부 치안국에서 충북경찰국에 보도연맹원 소집과 사살에 대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청주경찰서로, 그리고 다시 각 지서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연행된 주민들이 청주경찰서 체육관인 무심전에 감금되었다가 3~4일 후 청주형무소와 미원초등학교로 이송되었다.
이후 CIC와 헌병의 지휘 하에 경찰에 의해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등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분터골에서는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형무소사건>
청주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벌어지던 시기에 청주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재소자들이 집단희생되었다. 전쟁 전 청주형무소의 수용가능인원은 500여 명이었는데, 1949년 8월 당시 재소자 수는 963명이었으며 전쟁 발발 당시에는 1,6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중 절반인 800여 명이 정치범이었다. 청주형무소에서는 1950년 6월 30일부터 7월 7일까지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1,200여 명이 충북지구CIC, 8사단 16연대 헌병대, 경찰에 의해 청원군 남일면 분터골, 남일면 화당교, 남일면 쌍수리 야산, 낭성면 도장골, 가덕면 공원묘지 등에서 희생되었다.
청주형무소 학살은 크게 세 시기로 집중되어 나타났다.
첫째는 6월 30일로, 새벽 1시 충북지구CIC와 16연대 헌병대가 여순사건관련자 36명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면서부터 학살이 시작됐다. 이들은 남일면 화당리 화당다리로 이송되어 총살당했다.
둘째는 7월 2일부터 5일까지로, 청주형무소 재소자 800여 명이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등에서 총살당했으며, 셋째는 7월 6일과 7일로, 형무소에 감금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 400여 명이 같은 장소에서 총살당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청주에 진입한 때는 7월 13일이었다.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 청주형무소에 감금되었던 인사들이 1950년 9월 24~25일 형무소 안과 당산에서 집단희생되었는데, 당시 퇴각하던 인민군은 형무소에 불을 질렀다. 같은 시기 청주내무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무심천에서, 청주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산성리 토굴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인민군이 퇴각한 시기는 9월 25일이었다.
<부역혐의 피해>
청주지역에서도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이 연행된 사실은 증언으로 확인된다. 충북경찰청 경무과 근무자 윤씨(윤태훈, 27세)에 의하면, CIC, 헌병, 도경찰국 사찰과가 합동으로 부역혐의자를 잡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연행된 주민들이 집단희생된 사실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상 청주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