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의 신사참배 실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와중에서 감리교 신앙지 「청년」의 “기독교와 시국”이라는 글은
“조선기독교도는 황국신민으로 이상 제(諸)행사를 충성스럽게 행하여야 할 것이요 행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황국신민의 의무와 행사를 행하는 것과 종교를 신앙하는 신심과 하등의 틀린 점이 없는 것이다. -생략- 그러므로 황국신민으로 국가의 선조를 숭배하는 신사참배 곧 예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이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청년」, 1937년 7월호, 7.) |
라고 신사참배를 일본 측 입장에서 합리화하였다.
감리교회는 이미 양주삼이 “신사문제에 대한 통첩”(「감리회보」, 1936년 1월 10일.)에서 “신사의 봉사는 종교가 아니다.”라는 공문(김남식,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07.)으로 신사참배를 정당화함으로써 이 사건은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긍정적으로 인식시키는 단서를 제공하였다.
1938년 2월 9일에는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강한 평북노회가 노회장 김일선에 의해 소집되어 선천에서 모였다(김남식,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36.). 이 회의에서 일제의 강요에 의해 신사참배를 논의한 결과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라고 확인한 후 신사참배 결의하였으며, 총회에 상정하기로 하였다. 이로서 일이 쉽게 풀린다고 확신을 얻은 일제(日帝)는 한국 내 최대교단인 장로교 총회에 대하여 신사참배 수용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평양 기독교친목회’ 의 지도인물들인 오문환, 이승길, 김응순, 장운경 등을 1938년 5월에 일본에 다녀오게 하는 회유책을 썼으며, 6월에는 일본기독교 의장 도미다(副田滿)을 초청하여 평양시내에 있는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을 집합시켜 신사참배 강연을 듣게 했다. 그리고 주기철, 이기선, 김선두 목사 등 신사참배에 반대적인 목사들을 사전에 검속(檢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8년 9월 9일 제 27회 장로교총회가 평양 서문외교회에서 열렸다(김남식,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39.). 장로교총회에서 평양, 평서, 안주 삼노회 대표 박응율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 당연한 의무” 라고 하면서 참배 결의와 성명서를 채택을 제안하자 한국과 함께 살아왔던 장로교가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의를 하였다(“장로교 27회 총회 회의록”. 9.). 이어서 한번 굴복하기 시작한 한국교회는 기관, 지도자 할 것 없이 붕괴되어 갔다. 1939년 6월 8일 전북노회는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외집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교역자 등 150여명이 전주신사에 참배했다. 동년 9월 27일에도 진주의 27개 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였다.
한편, 신사참배 결정과 행동에 대해 반발하던 분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장로교 총회 중 크로더스 목사외 25명의 연서로 총회의 결의는 헌법에 위배된다는 항의가 거세게 일어나자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40년 7월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여 검거한 수가 2,000여명이나 되었고, 50여명이 순교하고 나머지는 해방 후 풀려났다. 감리교회에서는 목사직을 파면, 면직, 정직, 강제로 사임케 된 목사들이 50여명 있었다. 그러나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대표), 김기찬 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를 행하므로(댓글1) 신사참배 논쟁은 일단락되고 이후부터의 한국교회는 집회나 행사 때 마다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의 일환으로 실시하였다. 교회의 최고 상회기관인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매 총회 때마다 시행하여, 중요한 집회에서도 신사참배를 하므로 한국교회는 완전히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에 협조해 가는 배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김남식, 「신사참배와 한국교회」, 167.).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의 강도와 한국개신교의 배교의 수위는 더욱 높아지고 적극적이고 다양한 방법들이 동원되며 참배인원의 수가 대폭 증가하였다. 일제는 1940년 7월 30일 부여신궁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는바, 국체명징(國體明徵)과 내선일체의 선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총독 미나미 지로(南 次郞)는 내선일체의 역사가 멀리 백제시대에 소급한다고 해서 ‘일선동조동근론’(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을 주장하여 백제와의 교섭이 깊었다는 응인천황, 제명천황, 천지천황, 신공황후의 영을 모시게 하였다(飯沼二郞․ 한석희 공저, 남영환 역, 「일제통치와 일본기독교」(도서출판 영문, 1993), 253). 미나미와 총독부는 1941년 6월 17일 ‘국민총력 조선야소교장노회총 회연맹이사장(朝鮮耶蘇校長老會總會聯盟理事長)’의 명의로 ‘부여신궁 근로봉사단원 모집에 관한 공문’을 각 노회대표 앞으로 보냈고 1941년10월 30일 서울역을 출발하여 10월31일 7시 부여에 도착하여 노동봉사를 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근로봉사대원은 경성노회외 22개 노회에서 대표로 참석한 김형준 외 73명이 목회자들이었다. 감리교도 1941년 10월 9일 경기교구를 대표하여 27개 교회가 목회자로 구성된 노동봉사대원 51명을 신궁 건설에 참여케 하였고 1941년 1021일 교단연맹이사회에서는 5개 항목을 결의하여 각 교구와 교회에 하달한 내용 중에서 경기교구 외 다른 교구의 목사, 신도대표 각 4, 5인씩을 근로봉사 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3년 3월 3일에는 장로회총회 대표 김종대 등이 일본기독교 제1회 총회에 참석하여 이세신궁을 참배하였다. 이어 5월 11일 의산노회 소속 교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28명이 일본으로 성지참배를 떠나므로 한국교회의 신사참배는 절정에 다다랐고, 목사들로 하여금 우상숭배의 신당(神堂)을 만들게 하였다(곽형일,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원광대, 미간행 학위논문), 10-11. 재인용).
첫댓글 댓글1) 이들은 야스쿠니 신사와 이세신궁을 참배하였는바, 야스쿠니 신사란 국가에 유공(有功)한 인물들, 국가에 목숨을 바친 군인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사이며, 이세신궁(伊勢神宮)은 일본 최초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가미)을 모시는 신사이다.
<-- 결국 1938년 27회 장로교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결정과 김종우 양주삼(감리교대표), 김기찬 홍택기(장로교 대표), 이명직(성결교 대표) 등이 한국교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를 행하므로
한국으로 치면 현충사와 단군을 실제 신으로 떠받는 행태이군요. 미신이 힘을 얻으니 저렇게 신사참배가 되나 봅니다ㅠㅠ
@노베 공감합니다.
총독 미나미 지로
미나미 지로(일본어: 南 次郎, 1874년 8월 10일 ~ 1955년 12월 5일)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가이며 병과는 육군 기병이었다. 1936년부터 1942년까지 제7대 조선총독을 역임하였으며, 총독 재직 중 조선인에게 내선일체와 창씨개명령을 시행하였다. 1940년 1월 그는 창씨개명은 강제성이 아니라 자율성에 맡긴다고 발표하였으나 창씨개명은 강제로 단행되었고, 창씨개명 정책에 대한 혼선과 조선인의 반발로 1942년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A급 전범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다.
출처 및 더 많은 내용 보기 --->
https://ko.wikipedia.org/wiki/%EB%AF%B8%EB%82%98%EB%AF%B8_%EC%A7%80%EB%A1%9C
검색해 보니 내선일체를 강력하게 추진한 인물이군요, 창씨개명도ㅠㅠ
@노베 우리 입장에서는 전범입니다. 전범으로 처우를 받기는 했군요.
일선동조동근론(日鮮同祖同根論)
총독부가 일본인 학자를 동원하여 ‘일선동조동근론(日鮮同祖同根論, 일본과 조선의 역사의 뿌리가 같고 조상은 하나라는 의미)’을 내세우며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전통을 일본보다 열등한 것으로 왜곡하거나 소멸시키는 한편 일본문화를 도입하여 우리 민족의 일본동화정책을 펼쳤다.
정치, 사회적인 친일이 종교에까지 확장된 버전이 신가참배라고 생각합니다. 저 시절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국체명징
"국체명징(國體明徵)"이란 천황을 현인신(現人神 ,살아있는 신)으로 하고 군신일체, 충효일본의 국체, 만세일계의 황통(皇統 황실을 잇는 혈통)을 절대부동으로 하는 국제 관념을 온 국민에게 배양하는 것을 의미하여 천황 국가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게 하는 것을 지도 정신으로 한다고 강조한 것이 국체명징이다.
어려운 용어를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사참배의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고 햔대의 한국교회도 금전 등 우상 같은 것을 숭배하지 않도록 늘 각성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네, 매우 옳으신 댓글입니다.
신사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신을 모시고 섬기는 것인데요. 우리 안에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것도 섬김 받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창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아멘!
황국신민으로서 국가의 선조들을 참배하는 신사참배가 기독교의 예배와 다를 바 없으니 신사참배가 당연한 것이라는 논리는 너무도 허술하고 사악하기까지 하네요. 조선인이 어찌 일본인과 같이 황국신민이 되고, 국가의 선조가 같다고 생각했는지...억지 춘향이 따로 없네요. 이세신궁 참배는 더우기 어이가 없고 저들의 속내를 노골적으로 관철시키는 짓이 아닐 수 없네요.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가 보잘 것 없어서 어떻게서든지 백제와의 연결고리를 가져보려고 애를 쓰는데, 부여에 신궁을 건축한 것이 너무도 맹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을 자신들의 조상들의 땅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탐내고, 질투하고, 학대하던 만행을 또 다시 잊으면 안되겠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악하고 야비했으며, 조선의 개신교 목회자들은 비열하고 멍청하고 순진하기까지 했군요. 그들이 죽기 전에 회개는 했나 모르겠네요.
아픈 역사를 잘 알려주셔서 감사하고 경각심을 가집니다.
시원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천황가와 백제 연관은 이전 천황도 인정을 했는데요. 그것으로 내선일체와 신사참배를 합리화하는 것은 dog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