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와 풀밭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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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신현정
나는 분명히 모자를 쓰고 있는데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한다
그것도 공작 깃털이 달린 것인데 말이다
아무려나 나는 모자를 썼다
레스또랑으로 밥 먹으러 가서도 모자를 쓰고 먹고
극장에서도 모자를 쓰고 영화를 보고
미술관에서도 모자를 쓰고 그림을 감상한다
나는 모자를 쓰고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까지 했다
모자를 썼으므로 난 어딜 조금 가도 그걸 여행이거니 한다
나는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으련다
이제부터는 인사를 할 때도 모자를 쓰고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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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한 줄 신현정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末端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따라만 가면 된다 뒤뚱뒤뚱 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되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꽥꽥.
신현정 시인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첫 시집 <대립對立>(1983년)을 낸 후 20여 년의 공백을 거친 후, <염소와 풀밭>(2003년), <자전거 도둑>(2005년), <바보사막>(2008년)을 펴냈고, 생전에 준비하였으나 타계 후에 출간되어 유고 시선집이 된 <난쟁이와 저녁식사를>(도서출판 북인, 2009년)이 있다. 서라벌문학상(2003), 한국시문학상(2004), 한국시인협회상(2006)을 수상하였다. 2009년 10월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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