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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 白頭大幹 ]
* 위 치 : 경북 봉화, 강원도 영월
* 산행일시 : 2023년 05월 21일
* 교통편 : 안내산악회 (좋은사람들)
* 산행코스 : (좌석리)-고치령(인증)-마구령(인증)-갈곶산(인증)-선달산(인증)-박달령(인증)-도래기재(약30km/12시간)
* 접속구간(약4km) 트럭 이동
* 산행시간 : 02:48~13:06 (산행 10:17분/휴식시간:1시간 21분)
* 산행속도 : 3.53 km/h ?
* 산행거리 : 31.57km
* 날씨 : 흐림
* 기온 : 11~21
* 약수터 정보 :
* 조망점 : 정상
* GPX 트랙 : 별도 첨부
* 100대 산 정보 :
* 산행난이도 : 고도차:중 , 거리:중상
* 주요 볼거리 : 능선길. 정상조망.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쪽으로 흐르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서쪽으로 기울어 남쪽 내륙의 지리산에 이르러
우리나라 땅의 근골을 이루는 거대한 산줄기의 옛 이름이다.
좌석리에서 트럭을 타고서 고치령으로 향했다.
오늘은 왠지 버스도 시끄럽고 해서 잠을 편하게 잘 수 없었다.
트럭으로 고치령으로 이동하는데 여자분, 새로 오신 분 먼저 선탑을 했고.
나중에 대간팀이 출발을 했다.
[고치령] 770m
죽령이 양남지방에서 서울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했다면, 마구령과 고치령은 소백산을 경계로 주민들이 북쪽과 남쪽으로 오가던 길이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떠도는 장돌뱅이들이나 인근 주민들이 넘나들던 곳이다. 고치령(고치재)이 생활도로로 왕성했던 것은 강원도와 기호지방을 잇던 죽령길이나 마구령길에 비해 고치령이 순흥도호부와 영월을 잇는 최단거리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신라시대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았던 일로 ‘절터고개’라 불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옛고개라는 뜻의 ‘고치’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고치령은 조선시대 때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복위를 꿈꾸던 이들이 넘나들던 길이다. 단종 은 영월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면서 고치령을 통해 양쪽의 소식이 전해졌다 한다. 결국 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고갯길을 넘던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고치령의 서낭당은 단종을 태백산 산신으로, 금성대군을 소백산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한다.
오늘은 5월이라서 전체적으로 초록초록한 산길이 좋다.
그렇지만 날씨가 흐려서 구름이 많은 관계로 일출을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아니 4시경에는 별이 초롱초롱 떠 있었지만 5시의 일출 시간이 다가오다 보니 안개로 인하여 일출이 불가능했다.
백두대간의 문제는 이렇게 능선길을 걷다 보니 조망이 많지 않다는 것이 흠이 아닌가 한다.
어떤 곳은 조망이 되지만 오늘은 봉우리 정상에서도 조망이 되지 않았다.
마구령을 넘어서 일출을 보지 않을까 했는데.
이곳까지 2시간 30분이 소요되고 시각은 5시 35분이 되었다.
이곳에서 후미를 기다리다가 사진을 찍고서 다시 출발을 했다.
먼저 간 사람들과 시간은 5분 정도 차이가 났고.
후미와도 5분 정도가 차이가 났다.
고치령에서 거리는 약 8km 정도 되었다.
마구령까지는 한번치고 올랐다가 내려오면 이곳 고치령에 도착을 한다.
길은 대체적으로 평탄하고 육산이다.
[마구령] 馬駒嶺 820m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 지역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고개로 경북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임곡리를 남북으로 이어주는 고개로,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던 길이라 하여 마구령이라 불린다. 동국여지승람(영천군 산천조)와 대동여지도에는 ‘마아령(馬兒嶺)’이라 적혀 있다. 현지 주민들은 ‘메기재’라 발음하는데, ‘메기’는 ‘길목’이라 할 때 쓰는 ‘목’의 사투리다.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는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명당으로 꼽히는 마을. 첩첩 산줄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펑퍼짐한 터가 있어 순흥으로 유배왔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대리는 현재 40가구 정도만 사는 한적한 마을이지만,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200가구가 넘었다. 1970년대 중반 화전민 이주정책 이후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잠깐 보여준 해...!
이미 일출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이렇게 해를 처음 보고서 하산해서 볼 수 있었다.
[갈곶산] 966m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영주시 일대는 낮은 구릉 사이에 형성된 전형적인 농촌이다. 북쪽의 충북 단양군은 온통 산릉으로 뒤덮여 마치 드넓은 바다같은 모습을 한다. 갈곶은 ‘가리곶’이 본딧말이다. 노적가리처럼 ‘둥글둥글’하면서도 꾈(串)만큼 뾰족하다는 뜻이다. ‘갈(葛)은 음차한 것이다.
바다로 돌출한 육지로 꽂 보다 크면 반도라 하고 반도의 말단부를 "곶"이라 한다.갑(岬)=단(端)=관(꿰다 串) 장산곶,장기곶.호미곶.월곶.어랑단.수원단 등이 있다.
늦은목이에 도착을 했다.
이곳까지의 거리는 약 13.5km이고 3시간 40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곳이 오늘 산행하는 거리 중 절반 정도 되는데..!
지금껏 조금 쉬웠는데 이제부터 선달산까지는 가파르지는 않지만 경사가 있는 약 1.8km를 올라야 한다.
[늦은목이]
부석면 남대리와 물야면 오전리를 넘나드는 고개다. 차량은 오르지 못하는 곳이다. 종주자들이 구간을 끊거나 하룻밤 묵고 가기에 좋은 곳이다. 서쪽 100m 거리에 샘터가 있다. ‘늦은’은 ‘느슨하다’는 뜻이며 ‘목이’는 노루목이나 허리목 같이 ‘고개’를 뜻하는 말에 명사형 어미 ‘이’를 붙인 것이다. 따라서 ‘느슨한 고개’로 풀이된다. ‘낮은 고개’로도 볼 수 있다.
늦은목이의 샘터이다.
하지만 고인 물에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곳부터는 그래도 제법 연달래가 피어 있었다.
요즘은 일전에 산행했던 산행했던 큰재. 신의터재 까지 산행에서 정말 많은 연달래를 보았고.
저번주에는 지리산 능선에서 많은 연달래를 보았는데.
올해는 정말 연달래 풍년인 것 같다.
늦은목이에서부터는 이렇게 계단도 있고 조금씩 경사가 있어서 올라야 한다.
산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그늘사초를 만나면 정말 포근하다.
꼭 전원주택에 잔디를 깔아놓은 것 같은 편안함을 준다.
소나무도 있고 낙엽송도 있는 울창한 숲을 가지고 있는 강원도 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선달산에 가까워지니까 이렇게 안개가 또 드리운다.
선달산이다.
이곳에서 우리 회원 중 한 분이 오늘 완등을 하는 날이다.
[선달산] 1236m
소백산령에 속한 산으로 주위에 매봉산(梅峰山:1,268 m) ·어래산(御來山:1,064 m) ·봉황산(鳳凰山:819 m) 등이 솟아 있다. 북쪽 비탈면을 흐르는 수계는 옥동천(玉洞川)으로 흘러들고, 남서쪽 비탈면에서 발원하는 수계는 내성천(乃城川)으로 흘러든다. 남서쪽에는 소백산국립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 기슭에는 국민관광지인 오전(梧田)약수가 있다.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仙達山”, 먼저 올라야 한다고 하여 “先達山”,남쪽 기슭에 신선굴(神仙窟)이 있어 선달산이라 한다. 또한 선비의 기품을 닮았다고 해서 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 선달 先達
조선시대 미입사(未入仕) 무과출신(武科出身).
조선시대의 무관(武官)은 식년무과(式年武科)·증광무과(增廣武科)·별시무과(別試武科)·알성무과(謁聖武科)·중시무과(重試武科) 등을 통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나 한정된 정원 때문에, 급제하여도 상위 입격자인 갑과(甲科)·을과(乙科)는 바로 임관되어도 병과(丙科)의 일부는 임관되지 못하고 자리가 날 때까지 대기하는 예가 많았다. 그런 경우에 선달이라고 불렀다.
- 오전약수
물맛이 가장 좋기로 조선시대 최고의 약수로 뽑히기도 했다. 중종 때의 풍기 군수 주세붕은 오전약수를 마음의 병을 고치는 좋은 스승에 비길 만하다고 극찬했다. 오전약수 전설에 의하면 오전리의 후평장과 춘양면의 서벽장을 드나드는 보부상이 주실령을 넘어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약수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약수를 쑥밭약수터라고도 부른다. 또 옛날 이 근처에 살던 여인이 남자와 정을 통하기 위해 약수터를 찾았다. 그런데 그때까지 맑게 샘솟던 약수가 흙탕물로 변하고 뱀이 나타나 부정한 여인의 행위를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게 산꾼들이 함께 모였다.
곳곳에 이렇게 크고 화려한 연달래가 피어 있다.
정말 크고 한아름 되는 연달래도 제법 많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강원도 고산지대다 보니 나무 들고 굵고 큰데.
이 연달래도 크고 굵어서 화려한 연달래 꽃을 볼 수 있었다.
그늘사초의 숲길을 걷는 것은 참 좋다.
일전에 겨울에 왔었는데.
이 길이 그 길인가..!
생각도 나지 않는 그런 길이다.
이렇게 오늘은 연달래의 꽃길을 걸어본다.
아쉽다면 가면서 조망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늘진 숲길..!
초록초록한 숲길에 풀네임이 짙게 난다.
곳곳에 야생화도 있어서 눈이 호강한다.
곳곳에 야생화도 있지만 그동안 구별이 힘들었던 더덕도 캘 수 있었다.
박달령에 도착을 했다.
이곳은 마지막 옥석산에 올라야 하는 고개이다.
[박달령] 朴達嶺 1009m
선달산과 옥돌봉 중간지점에 위치한 박달령은 경상북도 봉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사연을 만들며 넘었을 박달령은 현재 임도가 개설되어 있고, 고갯마루에는 산령각이 있어 매년 4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 부보상(負褓商)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전해지며 그 부보상에 의하여 발견된 약수가 오전약수라고 전해진다. 2005년 12월 현재 고갯마루에는 산령각과 함께 정자가 있어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 박달의 뜻
배달(倍達)→백산(白山)의 다른 표기이다.
백산(白山)→백달(白達:밝달 .박달)→배달(倍達:ㄱ탈락)
배달은 백달의 음운변형이고, 박달은 백달의 모음변형이며, 백달은 백산의 다른 표기이다.
박달나무는 배달민족의 나무라는 뜻이며 우리는 백산(=배달)민족.곧 백두산 민족이다.
(대종언어연구소=박대종)에서 옮김
- 배달
배달은 고대 한국을 가리키는 말로 倍達이라는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나 순 우리말로 추측된다. 배달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朝鮮)·한(韓)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말의 어원은 확실하지 않으며, 고대로부터 계속 이어졌다는 증거 또한 없다. 일제 강점기 무렵에는 주로 단군 또는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고, 이후 개념이 확대되어 한국, 특히 한민족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9년에 공개된 《환단고기(桓檀古記)》에서 최초로 ‘배달’을 ‘환웅이 다스리는 나라’, 즉 신시(神市)라고 주장한 이후 이 주장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배달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규원사화》에서는 ‘박달(朴達)’ 또는 ‘백달(白達)’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檀’, 즉 박달나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인식은 가장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규원사화》는 박달을 국가명으로 보지 않고 단군의 ‘단’을 의미하는 용어로만 사용되었다.
김교헌은 1914년 《신단실기(神檀實記)》에서 단군이 세운 국가, 즉 고조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조선을 단국(檀國)과 동일한 의미로 보았으며 배달이 단, 즉 박달의 어원이라고 보는 점은 《규원사화》와 동일하나 박달을 나무 이름이 아닌 고유 용어로 파악하였다.
최남선은 1918년 《계고차존(稽古?存)》에서 역시 박달의 어원으로 보고 있으나 그 본래 의미는 ‘백산’이라는 지명이라 보았다.
안호상은 1964년 《배달의 종교와 철학과 역사》에서 박달·배달을 두고 ‘밝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으며 ‘한밝산’이라는 지명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유립은 1979년 《환단고기》에서 ‘신시(神市)’를 가리켜 배달이라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비판도 거세다. 배달을 두고 상고시대부터 이어져 온 말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이 용어의 연원은 일제 강점기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이 용어의 근거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있어 왔다.
신채호는 〈전후삼한고〉에서 배달의 말의 연원을 어윤적의 《동사연표(東史年表)》라고 들며 그 전래 과정을 통해 볼 때 믿기 어려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단군의 檀에 대해서도 壇을 사용하여 배달과의 관련성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다.
- 박달령 산령각
박달령 산령각은 선달산(先達山)과 옥돌봉(玉石山) 중간에 위치한 박달령 고갯마루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산령각은 노후되어 1994년도에 중수한 산령각이다. 매년 4월 초파일에 오전리 마을에서 박달령을 찾는 사람들의 안녕과 마을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고, 자연에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는 고사(告祀)를 지내고 있다. 산신(山神)에 대한 고사는 오래전부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공존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토속신앙이다. 특히 사람의 통행이 빈번한 고갯마루에 세워진 산령각은 마을어귀에 세워진 성황당(城隍堂)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사찰에 세워진 산신각(山神閣)과도 다른 의미의 성황당이 박달령 산령각이 아닐까 생각된다. 박달령을 넘나들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안식처로서 통행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고 이웃의 행복을 위해 고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린 개방된 신앙공간이 박달령 산령각이다.
서낭신은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으로서 최근까지 가장 널리 제사지내던 신이다. 성황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 하나 분명치 않으며 한국 고유의 민속신앙으로 보인다. 성황당은 서낭신의 봉안처인 동시에 거소로, 보통 신수(神樹)에 잡석을 쌓은 돌무더기거나 신수에 당집이 복합되어 있는 형태로 고갯마루, 한길 옆, 마을과 사찰 입구 등 전국 도처에서 발견되는 민간의 보편화된 신당(神堂)이다. 서낭신앙에는 내세관이나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이상이 없고 다만 현실생활의 문제로써 액,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는 마을수호의 관습에서 비롯된다.
지금도 고향마을에 더러 남아 있거나 없어진 마을이 많이 있는 성황당(城隍堂)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박달령 산령각도 성황당과 괘를 함께하는 측면이 많이 있다. 그 성황당이 1960년대 후반부터 많은 수난을 당했다. 신앙을 떠나 마을사람들의 공동체 형성의 공간이라는 긍정적인 면은 깡그리 무시되고 미신이라는 이름하에 많이도 때려 부셨던 메카시즘의 광풍이 몰려와 수많은 성황당이 폐쇄되는 운명을 맞았던 시절이 있었다. 농촌부흥의 기치를 내건 새마을운동이었다.
이제 옥솔봉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마지막 오르막길 옥돌봉에 거의 다 도착을 했다.
이곳은 신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많은 숲이라고 안내표지판이 있었다.
옥석산이다.
더덕을 캐고 하다 보니 일행들과 많이 떨어졌었는데 이곳에서 만났다.
[옥돌봉] 玉石山 1222m
춘양 북서쪽 16km, 봉화 북쪽 14km 지점에 있다. 정상은 둔봉(鈍峰)을 이루나 능선이 방사상(放射狀)으로 뻗고, 특히 남쪽으로 뻗은 말단봉은 노암(露岩)의 대지를 나타내며, 남사면 일대는 수십 갈래의 깊은 계곡이 발달하여 아름답다. 옥석산은 남류하는 낙동강과 북서하는 남한강의 분수령이 된다.
특히 이 지역은 옛날 금강송의 주산지였다고 한다. 조선 수군의 거북선과 군함들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시대에는 전략물자였음이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 산에서 나무를 베어 춘양에서 집하한 후 운송했다 해서 춘양목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산림청에서 설치한 안내문에는 1980년대 까지도 그 귀한 금강송들이 제법 있었으나 솔잎혹파리로 인해 소나무 숲은 점점 쇠퇴하고 신갈나무가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가고 있다고 적고 있다.
- 토종 '금강 소나무'
예부터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간다'고 전해진 '금강소나무'는 토종의 대명사로,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면서부터 세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금강소나무는 줄기가 곧게 자라며 꼭대기를 올려다 보면 좁은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나이테가 촘촘하고 나무에 윤기가 나 한눈에 봐도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다른 소나무보다 몸통이 굵고 재질까지 단단해 최고의 목조 건축자재로 이름 높았고, 조선시대 이래 궁궐을 짓거나 임금의 관을 짜는데 주로 쓰여 왔다. 이런 까닭에 숭례문의 주요 뼈대 또한 금강소나무로 지어졌고, 숭례문 복원엔 수령 100년 이상에 지름 1m 안팎의 대형 금강소나무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북동부는 금강소나무가 가장 울창한 지역이다. 금강소나무의 금강은 금강산에 자라는 형이라 해 붙여진 이름. 금강산 일대에서 자라난 금강소나무는 태백산령을 따라 남하했고, 봉화·울진 등지의 비옥한 동해안 내륙지역에서 최우량 형질로 거듭 태어났다.
봉화 춘양면 서벽1리는 최고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손꼽히는 곳. 일제 강점기 때 춘양의 우수한 금강소나무들이 춘양역으로 모여 반출됐는데, 형질이 너무나도 좋아 '춘양목'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정도다. 현재 서벽리 문수산 자락에는 1천500여 그루의 금강소나무가 살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남벌된 탓에 수령은 20~80년에 불과하지만 모든 금강소나무마다 페인트로 번호를 새겨 놓고 있다. 2001년 문화재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된 이후 이곳에서 반출되는 모든 금강소나무는 숭례문 복원 같은 문화재 보수와 재건용으로만 쓸 수 있도록 한 것. 영주국유림관리소가 금강소나무숲을 제대로 느끼며 산책할 수 있게 1.5km의 탐방로를 조성, 곳곳에서 토종 소나무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500년 된 철쭉을 보러 가는 계단이다.
550년이 된 봉화 우구치 철쭉이다.
봉화 우구치 철쭉
보호수 : 국가산림문화자산 제2019-0007호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 산 1-1
규격 : 나무둘레 105cm * H5m
봉화 우구치 철쭉은 우리나라의 오래된 철쭉 중 하나로서 산림청에서 2006년부터 보호수로 지정. 관리하고 있으며 국립수목원이 수령 측정결과 55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백두대간 마루금 철쭉 군락지와 함께 매년 5월 초중순이면 철쭉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등 생태 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산림청으로부터 2020년 1월 8일 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우구치 철쭉을 보고 나면 이제는 내리막이며 약 2km 내리막이 시작된다.
도래기재로 내려가는 길에도 이렇게 철쭉이 있는데.
이곳은 아무래도 고도가 낮아서 그런지 이미 꽃이 떨어지고 없었다.
이렇게 도래기재에 도착을 했다.
이것으로 전체 약 26km를 7시간 46분 정도 소요되었다.
[도래기재] 763m
도래기재는 춘양면 서벽리와 우구치리를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에는 금정굴로 불리는 터널이 있어 사람과 차량이 통행하였으나 근래에 폐쇄되고 현재는 고갯마루를 관통하는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과 경북 봉화군 춘양면을 이어주는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인 88번지방도가 지나간다.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름을 따와서 도래기재라고 한다. 도래기 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驛)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導驛里)라 부르다가 이것이 변음이 되어 현재는 도래기재로 통용되었다. 재넘어 우구치는 골짜기 모양이 소의 입모양을 닮아서 우구치(牛口峙)라 불린다.
산행 중 만났던 야생화입니다.
감자난초
고추나무 꽃
금강애기나리 (금강죽대아재비)
꽃마리
노린재나무
둥굴레
말발도리
미나리냉이
민백미 꽃
층층나무
벌깨덩굴
벼룩나물
병꽃
삿갓나물
선밀나물
애기나리
오미자 (산오미자)
은대난초
은방울꽃
쥐오줌풀
쪽동백
천남성
큰앵초
풀솜대
피나물
함박꽃
GPS 트랙
본 산행의 트랙
좌석리에서부터 트랙 (트럭으로 이동)
설명이 포함된 트랙
봉우리 및 재등의 설명이 포함된 트랙
거리 및 인증지 등의 설명만 포함된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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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갈곶산-선달산-박달령-도래기재 구간을 아직도 마무리 못한게 벌써 9년이 흘렀네요.
갈곶산 오르다 멧돼지 한테 놀랐던 기억도 나네요.
저는 대간 시작한게 근10년이 다되가는데 언제 마무리 할지 모르겠습니다. ^^
그렇군요..!
어느 분도 보면 좋은 날 좋은 곳에만 가다보니
몇 곳 남지 않았는데 하세월이던데요.
산행은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즐기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는 계속 2주에 한번씩 가다보니 벌써 7월이면 백두대간이 끝나가네요.
뭔지 모르고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걸었는데.
나중에 다시 가보고 싶은 곳에 가봐야 겠어요..!
@누리사랑 어느 분인지 저랑 비슷한 분이군요.
한번 꽂히면 그산만 주구장창 오르게 되더군요.
그래서 지리산도 화대종주 열댓번 하고, 다해서 40-50번 이상 오른거 같은데 정규탐방은 다 가봤지만
그외(?) 코스는 거의 못 가봤네요.
누리사랑님도 설악에 꽂혀 있잖아요? ^^
@동편 어떻게 알았어요.
저는 이번주에 설악산가고 또 6월에 신청했어요..!
마음에 드는 산이 있는 것 같아요..!
화대종주 많이 했네요.
저는 2~3년에 한번씩만 하려고요..!
몸이 버티지 못할 것 같서요..!
조망은 없지만 조용하고 초록 초록한 길에 연달래가 흐드러져 넘 아름답네요
산은 각자 자기 방식대로 즐기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네..
백두대간길은 조망이 많지 않더라구요.
대간길 정맥길..!
다 이렇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산행하는 날 감사하게도 꽃이 많이 있어서 즐거운 산행길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