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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도가 (원각사 정각스님 역)
증 도 가 *** 증도가는 다음 80개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1.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군 불 견가
君 不 見
2.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절학무위한도인은 부제망상불구진이라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3.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무명실성이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로다.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
4.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을 각료무일물하니 본원자성이 천진불이라
法身 覺了無一物 本源自性 天眞佛
5. 오음의 뜬 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오음부운이 공거래하고 삼독수포허출몰이로다
五陰浮雲 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6. 실상을 증득하여 인(人), 법(法)이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증실상무인법하니 찰나멸각아비업이라
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7.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리로다.
약장망어광 중생하면 자초발설진사겁이로다
若將妄語[言狂]衆生 自招拔舌塵沙劫
8.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돈각료여래선하니 육도만행이 체중원이라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 體中圓
9. 꿈속에선 밝게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세계가 없도다.
몽리엔 명명유육취러니 각후엔 공공무대천이로다
夢裏 明明有六趣 覺後 空空無大千
10.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무죄복무손익하니 적멸성중에 막문멱하라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 莫問覓
11.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비래에 진경을 미증마러니 금일에 분명수부석이로다
比來 塵鏡 未曾磨 今日 分明須剖析
12.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수무념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니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13.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 구하고 공 베품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이로다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14.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방사대막파착하고 적멸성중에 수음탁이어다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 隨飮啄
15.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제행이 무상일체공하니 즉시여래대원각이로다
諸行 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16.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결정설표진승을 유인은 불긍임정징이라
決定設表眞乘 有人 不肯任情徵
17.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 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직절근원불소인이요 적엽심지는 아불능이로다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 我不能
18.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마니주를 인불식하니 여래장리에 친수득이라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裏 親收得
19. 여섯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한 덩이 둥근 빛은 색이면서 색 이 아니로다.
육반신용공불공이요 일과원광색비색이로다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20.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정오안득오력은 유증내지난가측이라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21. 거울 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물 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경리에 간형견불난이나 수중착월쟁염득가
鏡裏 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22.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상독행상독보하니 달자동유열반로로다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23. 옛스런 곡조 신기 맑으며 풍체 스스로 느높음이여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 들 거들떠 보지 않는도다.
조고신청풍자고여 모췌골강인불고로다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24.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궁석자구칭빈하나 실시신빈도불빈이라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25.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빈즉신상피루갈이요 도즉심장무가진이로다
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臟無價珍
26.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무가진용무진하니 이물응시종불인이라
無價珍用無盡 利物應時終不吝
27. 삼신,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 땅의 인(인)이로다
삼신사지는 체중원이요 팔해육통은 심지인이로다
三身四智 體中圓 八解六通 心地印
28. 상근기는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상사는 일결일체료하고 중하는 다문다불신이라
上士 一決一切了 中下 多聞多不信
29. 스스로 마음의 때묻은 옷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지을 자랑할건가
단자회중해구의어니 수능향외과정진가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30.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라
종타방임타비하라 파화소천도자피로다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31. 내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해탈경에 들어가도다
아문흡사음감로 소융돈입부사의
我聞恰似飮甘露하야 銷融頓入不思議로다
32.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관악언 시공덕 차즉성오선지식
觀惡言이 是功德이니 此則成吾善知識이라
33. 비방 따라 원망과 친한 마음 일지 않으면
하필이면 남이 없는 자비인욕의 힘 나타내 무엇할 것인가
불인산 방기원친 하표무생자인력
不因[言山]謗起怨親하면 何表無生慈忍力가
34. 종취도 통하고 설법도 통함이여
선정과 지혜가 뚜렷이 밝어 공에 응체하지 않는도다
종역통설역통 정혜원명불체공
宗亦通設逆通이여 定慧圓明不滯空이로다
35. 나만 이제 통달하였을 뿐 아니라
수 많은 부처님 본체는 모두 같도다
비단아금독달료 하사제불체개동
非但我今獨達了요 河沙諸佛體皆同이로다
36. 사자후의 두려움 없는 설법이여
뭇 짐승들 들으면 모두 뇌가 찢어짐이라
사자후무외설 백수문지개뇌열
獅子吼無畏設이여 百獸聞之皆腦裂이라
37. 향상은 분주하게 달아나 위엄을 잃고
천룡은 조용히 듣고 희열을 내는도다
향상 분파실각위 천룡 적청생흔열
香象은 奔波失却威하고 天龍은 寂聽生欣悅이로다
38. 강과 바다에 노닐고 산과 개울을 건너서
스승 찾아 도를 물음은 참선 때문이라
유강해섭산천 심방도위참선이
遊江海涉山川하야 尋師訪道爲參禪라
39. 조계의 길을 인식하고 부터는
생사와 상관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자종인득조계로 요지생사불상간
自從認得曹溪路로는 了知生死不相干이로다
40. 다녀도 참선이요 앉아도 참선이니
어묵동정에 본체가 편안함이라
행역선좌역선 어묵동정체안연
行亦禪坐亦禪이니 語默動靜體安然이라
41. 창,칼을 만나도 언제나 태연하고
독약을 마셔도 한가롭고 한가롭도다
종우봉도상탄탄 가요독약야한한
縱遇鋒刀常坦坦하고 假饒毒藥也閑閑이로다
42. 우리 스승께서 연등불을 뵈옵고
다겁토록 인욕선인 되셨도다.
아사득견연등불 다겁 증위인욕선
我師得見燃燈佛하고 多劫에 曾爲忍辱僊이로다
43. 몇 번을 태어나도 몇 번이나 죽었던가
생사가 아득하여 그침이 없었도다
기회생기회사 생사유유무정지
幾廻生幾廻死오 生死悠悠無定止로다
44. 단박에 깨쳐 남이 없음을 요달하고 부터는
모든 영욕에 어찌 근심하고 기뻐하랴.
자종돈오료무생 어제영욕하우희
自從頓悟了無生으로 於諸榮辱何憂喜아
45. 깊은 산에 들어가 고요한 곡에 머무니
높은 산 그윽하여 낙락장송 아래로다.
입심산주란야 잠음 유수장송하
入深山住蘭若하니 岑[山+金]幽邃長松下로다
46. 한가히 노닐며 절 집에서 조용히 앉았으니
고요한 안거 참으로 소쇄하도다
우유정좌야승가 적안거실소쇄
優遊靜坐野僧家하니 [門+臭]寂安居實蕭灑로다
47. 깨친 즉 그만이요 공 베풀지 않나니
모든 유위법과 같지 않도다
각즉료불시공 일체유위법부동
覺卽了不施功이니 一切有爲法不同이로다
48. 모양에 머무는 보시는 하늘에 나는 복이나
오히려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도다
주상보시 생천복 유여앙전사허공
住相布施는 生天福이나 猶如仰箭射虛空이라
49. 세력이 다하면 화살은 다시 떨어지나니
내생에 뜻과 같지 않은 과보를 부르리로다
세력진전환추 초득래생불여의
勢力盡箭還墜하니 招得來生不如意로다
50. 어찌 함이 없는 실상문에
한 번 뛰어 여래지에 바로 들어감과 같으리오
쟁사무위실상문 일초직입여래지
爭似無爲實相門에 一超直入如來地리오
51. 근본만 얻을 뿐 끝은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유리가 보배 달을 머금음과 같도다
단득본막수말 여정유리함보월
但得本莫愁末이니 如淨瑠璃含寶月이로다
52. 이미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하여 다함이 없도다
기능해차여의주 자리이타종불갈
旣能解此如意珠하니 自利利他終不竭이로다
53.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 부니
긴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하릴 있을건가.
강월조송풍취 영야청소 하소위
江月照松風吹하니 永夜淸[雨+肖:하늘 소]何所爲아
54.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이슬,구름,노을은 몸 위의 옷이로다
불성계주 심지인 무로운하 체상의
佛性戒珠는 心地印이요 霧露雲霞는 體上衣로다
55.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도다
항룡발해호석 양고 금환명역력
降龍鉢解虎錫이여 兩[金+古]金環鳴歷歷이로다
56. 이는 모양을 내려 헛트로 지니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불시표형허사지요 여래보장을 친종 적이로다
不是標形虛事持 如來寶杖 親[足+從:자취 종] 跡
57.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 모양없음을 분명히 알았도다
불구진부단망하니 요지이법이 공무상이로다
不求眞不斷妄 了知二法 空無相
58.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무상무공무불공이여 즉시여래진실상이로다
無上無空無不空 卽時如來眞實相
59. 마음의 거울 밝아서 비침이 걸림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항사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심경명감무애하야 확연영철주사계로다
心鏡明鑑無碍 廓然瑩徹周沙界
60. 만상삼라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뚜렷이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만상삼라영현중이요 일과원명비내외로다
萬象森羅影現中 一顆圓明非內外
61.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하면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도다
활달공발인과 망망탕탕초앙화
豁達空撥因果하야 茫茫蕩蕩招殃禍로다
62. 있음을 버리고 공에 집착하면 병이기는 같으니
물을 피하다가 도리어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도다
기유착공병역연 환여피익이투화
棄有著空病亦然이니 還如避溺而投火로다
63.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취사하는 마음이 교묘한 거짓을 이루도다
사망심취진리 취사지심 성교위
捨妄心取眞理여 取捨之心이 成巧僞로다
64.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짓이로다
학인 불료용수행 진성인적장위자
學人이 不了用修行하니 眞成認賊將爲子로다
65.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손법재멸공덕 막불유사심의식
損法財滅功德은 莫不由斯心意識이라
66. 그러므로 선문에선 마음을 물리치고
남이 없는 지견의 힘에 단박에 들어가도다
시이 선문 료각심 돈입무생지견력
是以로 禪門엔 了却心하고 頓入無生知見力이로다
67. 대장부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이요 금강의 불꽃이로다
대장부병혜검 반야봉혜금강염
大丈夫秉慧劍하니 般若鋒兮金剛焰이로다
68. 외도의 마음만 꺾을 뿐 아니요
일찌기 천마의 간담을 떨어뜨렸도다
비단능최 외도심 조증락각천마담
非但能[手+崔:꺽을 최]外道心이요 早曾落却天魔膽이로다
69. 법의 우뢰 진동하고 법고를 두드림이여
자비의 구름을 펴고 감로수를 뿌리는도다
진법뢰격법고 포자운혜쇄감로
震法雷擊法鼓여 布慈雲兮灑甘露로다
70. 용상이 차고 밟음에 윤택함이 그지 없으니
삼승과 오성이 모두 깨치는 도다.
용상 축답윤무변 삼승오성 개성오
龍象이 蹴踏潤無邊하니 三乘五性이 皆惺悟로다
71. 설산의 비니초는 다시 잡됨이 없어
순수한 제호를 내다 나 항상 받는도다
설산비니 갱무잡 순출제 호 아상납
雪山肥[月+ 貳:]更無雜이라 純出[酉+是][酉+胡]我常納이로다
72. 한 성품이 뚜렷하게 모든 성품에 통하고
한 법이 두루하여 모든 법을 포함하나니
일성 원통일체성 일법 변함일체법
一性이 圓通一切性하고 一法이 [人人+扁:두루 변]含一切法하니
73. 한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고
모든 물의 달을 한 달이 포섭하도다
일월 보현일체수 일체수월 일월섭
一月이 普現一切水라 一切水月을 一月攝이로다
74.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하도다.
제불법신 입아성 아성 환공여래합
諸佛法身이 入我性하고 我性이 還共如來合이라
75. 한 지위에 모든 지위 구족하니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요 행업도 아니로다
일지 구족일체지 비색비심비행업
一地에 具足一切地하니 非色非心非行業이로다
76.손가락 퉁기는 사이에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찰나에 삼아승지겁을 없애버리도다
탄지원성팔만문 찰나 멸각삼지겁
彈指圓成八萬門하고 刹那에 滅却三祗劫이로다
77.일체의 수구와 수구 아님이여
나의 신령한 깨침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일체수구비수구 여오영각하교섭
一切數句非數句여 與吾靈覺何交涉가
78. 훼방도 할 수 없고 칭찬도 할 수 없음이여
본체는 허공과 같아서 한계가 없도다.
불가훼불가찬 체약허공물애안
不可毁不可讚이여 體若虛空勿涯岸이로다
79. 당처를 떠나지 않고 항상 담연하니
찾은 즉 그대를 아나 볼 수는 없도다
불리당처상담연 멱즉지군불가견
不離當處常湛然하니 覓則知君不可見이로다
80.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나니
얻을 수 없는 가운데 이렇게 얻을 뿐이로다
취부득사부득 불가득중 지마득
取不得捨不得하니 不可得中에 只 得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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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 도 가 해 설
1.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군 불 견가
君 不 見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대'라는 것이 자성을 가리킨다고 보아 '자성을 깨치지 못했느냐'고 보는 것이며, 또 하나는 바로 뒤에 나오는 '배움이 끊어진 하릴 없는 한가한 도인을 보지 못하였느냐'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를 자성이라 하여도 자성이 바로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이므로 별 관계가 없습니다.
2. 배움이 끊어진 하릴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으니
절학무위한도인은 부제망상불구진이라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배움이 끊어졌다' 함은 계(戒),정(定),혜(慧) 삼학의 수행을 다 마쳐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더 배울 것이 있고 공부할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배움이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배울 것이 더 떨어져서 다시는 더 배울 것이 없는 이것이 구경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증도가]의 증(證)이란 구경각을 말하며 구경적으로 자성(自性)을 깨쳐서 실지로 자성을 체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릴없다'함은 진여(眞如)를 말하니 진여를 바로 깨친 것을 가르킵니다. 배울 것이 하다도없고 하릴 없게 되면 자연히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닦아서 더 닦을 것이 없고 더 나아갈 수 없어 '배움이 끊어져 버려서 아무런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증도한 사람을 표현한 말로서, 선종에서 '깨쳤다'고 하는 그 깨침(悟)의 내용이 구경각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한가한 도인은 무엇을 하느냐?
'망상도 없애지 않고 참됨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흔히 이 구절을 잘못 보아서 '모든 망상이 없앨 것도 없고 참됨을 구할 것도 없다. 망상이 일어나도 이대로가 참됨이며 참됨과 망상이 본래 완전히 통해 있기 때문에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며 망상 내놓고 달리 참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잘못 해석합니다. 그렇게 보면 앞 구절의 '절학무위한도인'과는 근본적으로 반대가 됩니다. '절학무위퓻祁돛硬은 일체망념이 완전히 끊어져서 구경을 성취한 사람인데, 거기에 상대법인 참됨과 망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증도가]가 가운데서 영가스님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참됨도 서지 못하고 망도 본래공하다.[眞不立妄本空]' 참됨도설래야 설 수 없고 망상도 본래 공하여 찾아볼래야 볼 수 없는 참됨과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데서 하는 말입니다. 망상 이대로가 참됨이기 때문에 끊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절학무위한도인'을 모르는 것이고 영가스님의 뜻을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망상이 다 꼬態沮냅릿鵠없애려 하여도 없앨 것이 없고 참됨도 설 수 없다면 참됨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모두 참됨괴 망상을 찾아 볼 수 없는 경지에서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됨과 망상은 상대법이며 양변,변견이기 때문에 생사의 견해이며 생멸법입니다. 참됨과 망상의 양변이 완전히 끊어져야만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절학무위한도인'은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이며,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은 참됨과 망상의 양변을 다 버린 것을 말하니 그것이 곧 중도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증도가]를 이해하는 첫출발로서 근본 자세가 바로셨다고 보겠습니다.
3. 무명의 참 성품이 바로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로다.
무명실성이즉불성이요 환화공신이 즉법신이로다.
無明實性 卽佛性 幻化空身 卽法身
무명(無明)이라 하면 아직 생멸법인데 이것이 불성(佛性)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 하면 무명 이대로가 불성인 것이 아니라, 무명의 참 성품이 곧 불성이라는 것입니다.
앞 단에서는 '부제망상불구진'이라 하여 참됨[眞]과 망[妄]을 다 버려버린 쌍차(雙遮)로써 부정을 말하였다면, 이 단에서는 '무명의 참 성품성품이쌍차(雙遮)로써 부정을 말하였다면, 이 단에서는 '무명의 참 성품성품이품 불성이요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차원이 바뀐데서 쌍조(雙照)로써 긍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 단에서는 참됨[眞]과 망[妄]을 쌍차(雙遮), 부정하고 나서, 이 단에서는 불성(佛性)과 법신을 쌍조(雙照), 긍정하는 것입니다. 쌍조는서로 즉(卽)하
는 것이 근본이니 모든 것이 다 통함을 말합니다. 무명과 불성이 통하고 허깨비의 빈 몸과 법신이 통한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통하느냐 하면, 무명의 참 성품 이대로가 부처님의 성품이고 허깨비같은 빈 몸 이대로가 법신이라는 것이니 이것이 곧 쌍조(雙照)의 긍정의 세계입니다.
4.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법신을 각료무일물하니 본원자성이 천진불이라
法身 覺了無一物 本源自性 天眞佛
법신이라고 하면 무슨 물건이 있는 줄로 생각하기 쉬운데, 법신을 턱 깨치고 보니 거기에는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물건도 찾아볼 수 없다면 텅비어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거기에는 대광명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차(遮), 막아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고,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조(照), 비추어서 전체를 긍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의 중도(中道) 공식은 앞에서 차(遮)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조(照)하는 것이어서, 앞에서 부정을 하면 뒤에서는 반드시 긍정을 하여 부정은 분명히 긍정을 전제로하고 긍정은 부정을 전제로 해서, 쌍차쌍조(雙遮雙照)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 면만 강조해서는 중도 공식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허깨비 같은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하여 조(照)의 입장에서 긍정을 이야기하면, 법신이 또 흙덩이나 돌덩이처럼 무슨 물건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기 때문에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일체 망념이 다 떨어져서 한 물건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공공적적(空空寂寂)을 말합니다. 공공적적하다고 하면 또 오해하여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기 쉬우므로, 다시 공공적적한 이대로가 대광명체라는 말로서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고 하여 자성의 항사묘용이 현전하다는 것을 부정 뒤에 긍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5. 오음의 뜬 구름이 부질없이 가고 오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출몰하도다.
오음부운이 공거래하고 삼독수포허출몰이로다
五陰浮雲 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내가 법신을 깨쳐 '본래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임을 확실히 알고 보니, 오음의 뜬 구름이 공연히 왔다갔다하고 삼독의 물거품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며 생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음이나 삼독은 법성과 천진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음이나 삼독은 아직 중도를 깨치기 전 생멸의 쪽, 중생 쪽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실지로 중도를 바로깨쳐서 정각을 이루어 법신을 확철히 깨치게 되면, 한 물건도 없어서 오음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삼독을 찾아볼래야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삼독과 오음이 그대로 있다면 법신을 바로 깨친 것이 아니고 '자성이 천진불'임을 바로 안 것이 아닙니다.
6. 실상을 증득하여 인(人), 법(法)이 없으니
찰나에 아비지옥의 업을 없애버림이라
증실상무인법하니 찰나멸각아비업이라
證實相無人法 刹那滅却阿鼻業
오음이나 삼독은 거짓 모습[假相]이고, 불성이라든지 법성이라든지 자성이라든지 구경각이라든지 하는 것은 참모습[實相]을 표현해 말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인(人)과 법(法) 즉 주관과 객관이 없습니다. 여기서 증자를 쓰는 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깨침[悟]이라는 것은 증오(證悟)이지 해오(解悟)가 아니기 때문/에 '실상을 증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주관과 객관이 없어져서 인과 법의 양변을 여읜 중도실상을 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인과 법이 떨어진 곳을 알고 실상을 알려면 증오해야만 알지 해오로써는 도저히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상을 증득하여 주관이 공하고 객관이 공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찰나 사이에 아비지옥의 업이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아비(阿鼻)란 간단(間斷)이 없다, 쉴사이 없다는 뜻으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을 말하며, 아비업(阿鼻業)이란 아비지옥 곧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받아야 하는 죄업을 말합니다. 중생이란 여러 무수 겁을 윤회하면서 한량없는 죄를 지어 갈 곳은 무간지옥 뿐입니다. 거기는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지옥이며 죄의 고통이 쉬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아비지옥이란 꼭 땅 밑으로 들어가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생들은 앉으나 서나 가나 오나 언제나 자기가 계속해온 업에 따라 항상 쉴 사이 없이 업고(業苦)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몸 받고 있는 처소가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업이 남아 있으면 업을 따라 고(苦)가 따라 다녀서 전체가 뀀悧아비지옥입인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처소를 설정해서 아비지옥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있고 업보가 따라 갈 때는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 쉴 사이 없으므로 어느 곳에 있든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중생세계 전체가 아비지옥이고 아비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겠는가?
중생이라는 것은 처소와 때를 가리지 아니하고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자기의 업에 의해서 업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표방하는 것은 이 모든 업고를 완전히 룸 爭ぜ 영원히 자유를 얻는 것, 곧 해탈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해탈하려면 성불해야 하는데, 성불한다는 것은 곧 실상을 증득해서 주체와 객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아비업이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멸되어서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비업만 찾아볼 수 없고 중생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부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란 중생을 상대한 약이지 중생을 버리고 부처를 따로 취한다면 이것도 일종의 변견이 되고 맙니다. 실상을 증득하면 양변을 떠깅 중도를 바로 깨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중생을 찾아볼 수 없고 부처도 찾아볼 수 없으며 아비업도 절대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일 찰라간에 아비업이 없어져서 버린다고 했는데, 육조스님께서도 '미혹하여 들으면 여러 겁이 걸리고 깨친 즉 찰나간이라[迷聞이면 經累劫이요 悟卽刹那間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뜻입니다. 깨침에 무슨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닦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종에서 돈오(頓悟)라고 하는 것은 눈깜짝할 사이에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가 모든 것을 다 성취해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듬 퓐涇구경각을 성취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지만 이것은 그 닦는 방법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우리가 서울 가기 위해서 걸어간다면 한량없는 날들이 걸리지만 비행기를 타버리면 잠깐 사이에 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종에서 제시하는 방법에 따라서 공부할 것 같으면 일 찰나간에 구경각인 실상을 증득해서 아비업이 없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7. 거짓말로 중생을 속인다면
진사겁토록 발설지옥 보를 스스로 부르리로다.
약장망어광 중생하면 자초발설진사겁이로다
若將妄語[言狂]衆生 自招拔舌塵沙劫
'내가 만약 거짓말로 중생을 속이는 것이라면 내 스스로 진사겁토록 발설지옥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발설지옥이란 사람들이 거짓말을 많이 하면 죽어서 가는 지옥으로 그곳에서는 혀를 빼내어 쟁기질을 하는데 그 고통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선종에서는 인과 법, 즉 주관과 객관이 떨어지면찰나간에 견성성불(見性成佛)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이 거짓말이 아님을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는 사람은 이 말을 들으면 의심이 없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차원이 높은 이야기라서 이해하기 어렵고 자꾸 거짓말처럼 들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영가스님이 중생들이 너무나 딱하게 생각되어 자기말이 절대로 참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란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기는 하나, 어떻게 보면 영가스님이 참 딱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말이 어느 정도 권위가 설 것 같으면 누가 듣든가 말든가 상관않겠지만 오죽했으면 '내가 거짓말할 것 같으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혀를 빼는 지옥에 가서 고생을 받겠다'고 맹세까지 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남에게 내가 불신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당시만 하여도 선(禪)에 대해서 일반의 인식도가 낮고 이해를 잘못했지 때문에 선(禪)이란 것을 남에게 이해시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해서 이런 구구한 말씀을 하신 걸로 볼 수 있습니다.
8. 여래선을 단박에 깨치니
육도만행이 본체 속에 원만함이라
돈각료여래선하니 육도만행이 체중원이라
頓覺了如來禪 六度萬行 體中圓
육도(육도)란 육바라밀(六波羅蜜)을 말합니다. 바라밀이란 도(度)라든가 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하여 저[彼] 언덕[岸]에 이른다[到]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육도란 저 언덕인 해탈에 이르는 여섯가지 방법이니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만행(萬行)이란 육바라밀을 실천 궁행하여 보살도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확철히 깨친다고 함은 여래선을 깨치는 것인데 여래선의 본체 가운데는 육도만행이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나무를 벨 때 그 밑 뿌리를 자르면 전체가 다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마음의 근본자리를 바로 깨치기만 하면 육도만행을 닦고 안닦고 할 것 없이 모두가 원만구족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도만행을 달리 어떻게 닦으려 하지말고 영가스님 자기가 소개하는 여래선을 바로 깨치기만하면 전체가 모두 따라 욹쨈募잔것입니다. 근본을 바로 알면 지엽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니 지엽적으로 나아가 육도만행을 닦는다고 시간
을 허비하지 말고 근본적인 여래선을 바로 깨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9. 꿈속에선 밝게 밝게 육취가 있더니
깨친 후엔 비고 비어 대천세계가 없도다.
몽리엔 명명유육취러니 각후엔 공공무대천이로다
夢裏 明明有六趣 覺後 空空無大千
육취란 육도(六道)로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을 말하니 중생은 지은 업에 따라 윤회 전생(轉生)하는 세계의 모양입니다.
대천(大千)이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의 뜻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쓰이는 말로서 수미산(須彌山)을 중앙으로 하여 일곱개의 산과 여덟개의 바다가가 둘러싸고 있으며 그 밖으로 철위산(鐵圍山)이 에워싼 공간을 한개의 소세계라 하며, 이 소세계를 천개 합친 것이 소천, 소천을 천개 합친 것이 중천, 중천을 천개 합친 것이 대천이니 이것을 삼천대천세계라고 합니다. 육취니 사생이니 삼천대천세계니 하는 것은 전체가 다 망상으로 일어난 업연(業緣)의 기멸(起滅)에서 생긴 이름들일 뿐 자성을 바로 깨친 대원경지에서는 부처나 조사도 찾아볼 수 없는데 하물며 육취인들 찾아볼 수 있으며 중생인들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육취라 하니 육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체만법 전체가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천당이니 지옥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나님이니 하는 것은 모두가 꿈속에서 하는 소리지 꿈을 바로 깨놓고 보면 부처도 찾아볼 수 없고 조사도, 중생도, 하나님도 외도도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삼천대천세계도 찾아볼 수 없어서 깨끗하고 깨끗하여 아무것도 설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설 수 없는 거기에서 진여대용인 대지혜광명의 항사묘용이 발현되게 되는 것입니다.
10. 죄와 복이 없고 손해와 이익도 없나니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묻고 찾지 말라.
무죄복무손익하니 적멸성중에 막문멱하라
無罪福無損益 寂滅性中 莫問覓
여래선을 확철히 깨쳐 돈오(頓悟)하면 모든 것이 원만구족한데, 거기에는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손해도 없고 이익도 없다는 말입니다. 비단 손해와 이익, 죄와 복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남, 옳고 그름의 모든 변견이 완전히 떨어지면 적멸한 성품이 발현하는 것이니 그 가운데서 무엇을 묻고 찾을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진 곳이 쌍차이며, 쌍차(雙遮)이면 쌍조(雙照)로써 거기에서 중도정견(中道正見)의 항사묘용이 발현함을 알아야 합니다.
11. 예전엔 때 낀 거울 미처 갈지 못했더니
오늘에야 분명히 닦아 내었도다.
비래에 진경을 미증마러니 금일에 분명수부석이로다
比來 塵鏡 未曾磨 今日 分明須剖析
진경, 때 낀 거울이란 중생의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써 맑은 거울 위에 먼지가 덮혀 있으면 거울 빛이 드러나지 못함과 같이, 중생의 근본 자성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 번뇌망상의 티끌이 꽉 차서 지혜광명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은 업을 따라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고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잘 몰라서 이 마음을 닦지 못했지만, 오늘에는 참됨도 버리고 거짓됨도 버리고 죄도 버리고 복고 버리고 옮음도 버리고 옳지 않음도 버려서, 모든 상대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였기 때문에 중도 정견이 발현하여 근본법을 분명히 밝혀 내었다는 것입니다.
12.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남이 없는가
진실로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나니
수무념수무생고 약실무생무불생이니
誰無念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앞에서는 때 낀 거울로써 나고 죽음의 망상을 말하고, 이 귀절에 이르러서는 무생법인을 이루어 대원경지를 분명히 성취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생각이 없으며 누가 나는 것이 없느냐'는 것은 때 낀 거울에서 때를 닦아 내면 그 사람이 확실히 무념의 경계를 성취한 사람이고 무생법인을 증(證)한 사람읕繭遮잔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곧 전체가 다 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쌍차(雙遮)하면 쌍조(雙照)가 됩니다. 모든 일체의 망(妄)이 다하면 이것은 나는 것이 없는 것이며[無生], 거기에서 항사묘용의 무진법문(無盡法門)이 난다는 것입니다.
실지로 무념(無念)을 성취하고 무생(無生)을 증했으면 그만인데 왜 또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하느냐하면, 혹 어리석은 중생이 잘못 이해하여 무생이나 무념에 응체하여 단견에 빠질까 염려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한 가지 말할 것은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을 '실지로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음도 없다'고만 해석한다면 이것은 전체를 까뭉게 버리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렇게 하면 뜻이 정반대가 되서 버려서 쌍차쌍조(雙遮雙照)가 되질 않습니다. 주의하여 해석하야 합니다.
13. 기관목인을 불러 붙들고 물어보라
부처 구하고 공 베품을 조만간 이루리로다.
환취기관목인문하라 구불시공조만성이로다
喚取機關木人問 求佛施功早晩成
기관목인이란 나무로 사람을 만들어 그 속에 들어가서 인형극하듯이 나무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기관목인에게 물어보라'는 것은 곧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부처구하고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룬다'하는 것은 흔히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나무 장승에게 물어 보면 부처를 구해 공을 베품들 어느 때 이루리오'하고 합니다. 결국 무생물인 장승에게 물어가지고는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만다는 말인데 그리되면 쌍차(雙遮)는 표현이 되지만, 앞 구절의 '약실무생무불생(若實無生無不生)'과 서로 연관시켜 보면 그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나는 것이 업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고 해석하니만큼 그렇게 되면 나무 장승이 말을 해야 합니다. 나무 장승이 말을 하지 못하면 나는 것이 없다면 나는 것이 없는 것 뿐이지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안되버리고 맙니다.
예전 스님네는 '나무 장승이 노래부르고 돌여자가 일어나 춤춘다[木人放歌石女起舞]'라고 했습니다. 결국은 참으로 나는 것이 없으면 곧 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나지 않은 것이 나는 것이고 나는 것이 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쌍차가 곧 쌍조이며 쌍조가 곧 쌍차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인 원융무애한 구경법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나지 않는 것과 나는 것을 분리하여 보면 변견이 되어 버리는 것이어서, 그것은 중도정견이 아니고 사견(邪見)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잘못 해석하여 나무 장승이 본래 말을 못하니 부처를 성취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것과 나지 않는 것을 분리해서 보는 변견에 떨어지게 되므로, '나지 아니하면 나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뜻과는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나무장승에게 물어보라. 나무 장승은 언제든지 대답하고 있고, 돌로 만든 여자는 언제든지 춤을 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부처를 구하여 공을 베품이 조만간에 이루어지리로다'한 것입니다. 곧 '참으로 나무 장승이 노래 부르고 돌 여자가 춤을 출 때 그 때가 불법을 완전히 성취한 때이다'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정말로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출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지만, 중생이란 것은 생명의 변(邊)에서 사량분별을 근본생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애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량분별이 다 떨어져 버리면 무정물(無情物)인 나무 장승과 돌 여자처럼 되어 영영 대무심(大無心)이 되어 버립니다. 대무심이 되면 그 때 비로소 참으로 진여의 무진묘용이 거기서 살아나게 됩니다. 그것이 나무 장승이 말을 하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는 경계의 소식이니 진여가 대용전창(大用全彰)한 시절로 보아햐 합니다.
또한 그것은 죽음 가운데서 삶을 얻고[死中得活],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大死却活]을 말합니다. 크게 죽었다고 하는 것은 나무 장승과 같고 송장과 같다는 말인데, 거기서 다시 살아날 것 같으면 이것이 진여묘용이 현전한 것입니다.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춤을 춘다고 하는 것은 크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비유해서 말한 것이며, '나는 것이 없으면 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대원경지의 경계를 그래로 표현한 것이니 그 뜻을 잘 알아야만 '나무 장승에게 물어보라'는 무정설법(無情說法)의 뜻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14. 사대를 놓아 버려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따라 먹고 마실지어다.
방사대막파착하고 적멸성중에 수음탁이어다
放四大莫把捉 寂滅性中 隨飮啄
나지 않는 것[無生]은 나무 장승과 같은 것이고 나지 않는 것이 없는 [無不生]은 진여의 항사묘용을 말함인데, 그러면 우리가 실지로 진여를 완전히 깨쳐서 무생법인을 증하고 항사묘용을 어떻게 해야하느냐?
'사대 오온을 다 놓아 버려서 붙잡지 말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자유자재 활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몸과 마음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오온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생멸하는 것으로서 거기에 집착하면 영원토록 이 남이 없음[無生]을 모르게 됩니다. 이 사대나 오온이라는 것은 우리가 꿈 속에서 거짓모습을 망견으로써 집착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사대가 본래 공하고 오온이 모두 공하여서 사대를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오온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대와 오온이 본래 공한 경계를
증해 버려야만 그것이 적멸입니다. 그옜居같은 대적멸 경계 가운데서 우리가 임의자재하게 노니는 것을 '수음탁(隨飮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무 장승이 노래하고 돌 여자가 일어나 춤을 추는소식을 알려면 오온을 다 버리고 사대에 집착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영원토록 이 소식을 모르게 됩니다. 사대와 오온을 다 버리면 이것이 대적멸 세계이며 그 가운데서 우리가 대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적멸이란 열반과 같은 말입니다. 열반이란 아무것도 없는 죽은 것이 아니라 대자유 대자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음탁(隨飮啄)'이란 대자유자재하게 활동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곧 '남이 없으면 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15. 모든 행이 무상하여 일체가 공하니
이는 곧 여래의 대원각이로다.
제행이 무상일체공하니 즉시여래대원각이로다
諸行 無常一切空 卽是如來大圓覺
일체의 모든 행이 영원한 것이 없고 일체가 공하여 아무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이것은 곧 여래의 대원각이라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하다'는 것은 마구니와 부처를 찾아볼 수 없는 데서 하는 말이며, 그러면 일체가 텅 빈 그것 뿐이냐 하면 거기에서 진여의 항사묘용이 현발하는 것이니, 대원각이 항사묘용이며 항사묘용 이대로가 '일체 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이 곧 공 아님이요 공 아님이 곧 공이며, 나는 것이 곧 나지 않음이요 나지 않음이 곧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말을 자꾸 되풀이 하는 것은 듣기가 귀찮지만 그것은 쌍차 이대로가 쌍조이며 쌍조 이대로가 쌍차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하니 일체가 공'이라 함은 쌍차를 말하고, '곧 이것이 여래의 대원각'이라 함은 쌍조를 말하고, '적멸한 성품 가운데서 자유자재하다'함은 쌍조를 말합니다. 다 버리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단멸공(斷滅空)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서 자유자재한 항사묘용이 현발하여 중도정견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16. 결정된 말씀과 참됨을 나타낸 법을
어떤 사람은 긍정치 않고 정에 따라 헤아림이라
결정설표진승을 유인은 불긍임정징이라
決定設表眞乘 有人 不肯任情徵
결정설(決定설)이란 근본적으로 변경시킬 수 없는 확실한 정설(定說)을 말합니다. [증도가]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성을 깨쳐서 성불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근본이기 때문에 결정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조사가 그 누구나 할 것없이 자기의 마음을 깨쳐서 성불하였지, 자기의 마음을 깎饗”泄않고 성불한 사람은 한 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쳐서 성도(成道)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본 생명선인 동시에 억천만겁이 지나도 절대로 변함없는 만고불변의
결정적인 근본 대원칙인 것입니다. 마음을 깨쳐 성불하기만 하면 일체가 다 원만구족하여 육도만행과 삼신사지(三神四智)가 다 갖추어져 있어서 다시는 더 밖으로 구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깨치는 법이 결정된 정설이며 따라서 참으로 진실한 최상승의 법문이라는 뜻으로 표진승(表眞乘)이라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보통 중삽萱멎근기가 여러 가지고 다르고 업이 두터워서 '결정된 정설인 최상승 법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를 합니다. '그것이 어찌 말이 되는 소린가, 마음을 깨친다고 부처가 되고 모든 것이 내 마음 가운데 다 갖추어질 수 있는가?'하여 긍정치 않고 자기의 정견(情見)에 따라 이리저리 헤매는 사람이 많다는 말입니다. 자기소견에 따라 칠전팔도하며 이리저리 따지기 때문에 중생들은 근본적인 최상승법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에게 이런 폐단이 많기 때문에 영가스님이 노파심절로 이렇게 말씀하여 경책하셨던 것입니다.
17. 근원을 바로 끊음은 부처님 인가 하신 바요
잎 따고 가지 찾음은 내 할 일 아니로다.
직절근원불소인이요 적엽심지는 아불능이로다
直截根源佛所印 摘葉尋枝 我不能
나는 지름길로 바로 질러가서 근원적인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으로 으뜸을 삼지 가지나 더듬고 잎을 따는 지엽적인 짓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누구든지 나무를 벨 때에 밑 뿌리만 끊어 버리면 전체가 다 넘어져서 가지나 잎은 저절로 따라 오는데 무엇한다고 잎을 자꾸 따고 가지를 끊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쓸데 없이 시간과 노력만 낭비할 뿐이지 절대로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근원을 끊는다'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견
성 성불 하는 바른 길을 말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고 저 육도만행을 닦는다든지, 뭘 한다든지 하는 것은 가지를 찾고 잎을 딴다는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언제든지 근원을 바로 끊는,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만 얘기할 뿐 가지나 더듬고 잎이나 따는 등 밖으로 구하면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뀀裏이러한 말들을 중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떻게 자기의 마음을 바로 깨치면 일체가 원만구족할 수 있느냐고 의심을 많이 합니다. 지금 이 [증도가]를 놓고 이야기해도 의심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 있듯이 '여래선을 깨치고 나면 그 가운데 육도만행이 원만구족해 있다'고 하여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다고 하여도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느냐고 의심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여래선이란 구경각을 성취한 것을 말합니다. 한 번 깨칠 때 다 깨쳐서 진여본성이 드러나 버리면 육도만행 뿐만 아니/라 삼신사지가 모두 구족해 있습니다. 이것은 근원을 바로 끊는 도리로서나무를 벨 때 그 밑둥지을 베면 전체가 다 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쉽고 빠른 이 길을 택할 뿐이요, 절대로 가지를 더듬고 잎을 따며 밖으로 불법을 구하려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18. 마니주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여래장 속에 몸소 거두어 들임이라
마니주를 인불식하니 여래장리에 친수득이라
摩尼珠 人不識 如來藏裏 親收得
마니란 인도말로써 여의(如意)라는 뜻이니, 마니주는 그 쓰임이 무궁무진해서 무엇이든지 내 마음대로안되는 것이 없다고 하여 이 구슬을 우리의 자성에 비유한 것입니다. 한 번 내 마음을 깨쳐 놓으면 일체 만법이 원만구족하여 여의자재(如 意自在)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마니주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마음 속에 마니보주(摩尼寶珠)를 다 지니고 있어 서 찾기만 하면 미래겁이 다하도록 이것을 활용하여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 을 터인데, 이 보배구슬이 자기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자꾸 바깥으로만 돌면서 경전을 본다, 육도만행을 한다, 뭘 한다 하면서 바로 찾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여래장 속에서 몸소 얻어 거두어 들여햐 한다'는 것입니다. 여래장이란 진여 불성을 말합니다. 여래장을 달리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하지만 여기서는 진여불성을 여래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나는 마니주를 다른 어느 곳에서 찾지 않고 다만 나의 자성 진여불성 가운데서 찾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참으로 영원하여 자유자재한 일체지(一切 智)를 성취하여 성불하려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구하지 말고 오직 내 마음 본성 가운데서 마니보주를 바로 찾고 바로 개척해서 이것을 우리가 영원토록 쓰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근원을 끊지 않고 바깥으로만 돌면서 가지를 찾고 잎만 따다
보면 결정설(決定設)을 의심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장, 진여불성 가운데 있는 마니주를 완전히 개척해 놓으면 어떤 쓰임이 생기는 것인가?
19. 여섯가지 신통묘용은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이요한 덩이 둥근 빛은 색이면서 색이 아니로다.
육반신용공불공이요 일과원광색비색이로다
六般神用空不空 一顆圓光色非色
육반신용은 여섯 가지 신통묘용을 말하는데, 이것은 육신통(六神通)이라 해도 괜찮지만 육신통을 따라 세울 것은 없고, 안(眼)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六根)의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진여불성 가운데 마니주를 찾으니 육근 이대로가 전체로 신통이며 모두가 진여대용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래장을 열어서 마니보주를 얻지 못하면 육근이 모두 여섯 가지 도적[六賊]이지만, 여래장을 열어 마니주를 얻어 진여자성을 깨치면 육근 전체가 육신통 즉 진여대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통한 전체 진여대용 이것이 공(空)이면서 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이란 일체 명상(名相)이 다 떨어진 쌍차(雙遮)를 말하고, 공하지 않다는 것은 단공(斷空)이 아니라 거기에 묘유가 있다는 것으로 쌍조(雙照)를 말합니다.
그래서 여섯가지 삳탤鍮용이 공했으면서 공하지 않고 공하지 않으면서 공했으며, 진공이면서 묘유고 묘유이면서 진공 "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쌍차이면서 쌍조이며 쌍조이면서 쌍차하여 차조동시(遮照同時)가 되는 것이니 중도의 참 정의를 우리가 여기서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론으로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니주를 완전히 얻고보면 '육반신용' 가운데서 중도의 대용(大用)을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여섯가지 신통묘용'이라고 하여 여섯가지가 각각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은 하나입니다.
비유하면 속에 불덩이는 하나인데 구멍이 여러 개 있어서 하나의 불이 여러 개의 구멍으로 비치는 것과 같으니 그 구멍마다 딴 불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덩이 둥근 빛'이란 자성을 말함이니 자성의 진여본성은 똑같아 둘이 아닙니다.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문(六門)을 통해서 비치는 신통묘용이 바로 자성이라는 한 덩어리 광명이 발하는 여러가지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여섯 가지 신통묘용'이 '한 덩어리 둥근 빛'이요, '한 덩어이 둥근 빛' 이 '여섯 가지 신통묘용'인 것입니다.
'한 덩이 둥근 몃岵멎색이면서 색이 아니다'란 말은 긍정을 먼저하고 나중에 부정을 한 것이라면 앞에 말한 '공하면서 공하지 않다'는 것은 부정부터 먼저하고 나중에 긍정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앞에서는 막고서 비추고(遮而照), 뒤에서는 비춰서 막은(照而遮) 것입니다. 이것은 곧 막고서 비추며 비춰서 막으니 막음과 비춤이 한 때[遮照同時]인 중도정의를 여기서 바로 알 수 있읍니다. 누구든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여래장 속에서 마니주를 얻게 되면 중도 정각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 오안을 깨끗이 하여 오력을 얻음은
증득해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도다.
정오안득오력은 유증내지난가측이라
淨五眼得五力 唯證乃知難可測
오안, 다섯 눈이란 첫째는 육안(肉眼)이니 우리들 중생의 육신이 가지고 있는 눈을 말하며, 둘째는 천안(天眼)이니 색계(色界)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안으로 멀고 가까움과 안과 밖,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며, 셋째는 혜안(慧眼)이니 이승(二乘)의 사람들이 가진 눈으로써 연기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며, 네째는 법안(法眼)이니 보살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체의 법문을 비춰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하며, 다섯째는 불안(佛眼)이
니 부처님이 가지고 있는 눈으로써 일체를 알며 일체를 비춰보는 눈이니 앞의 네 가지 눈을 모두 구비한 눈을 말합니다.
중생이 깨치지 못하였을 때는 육안은 육안대로 천안은 천안대로 각각 다르지만 확철히 깨치고 보면 다섯 가지 눈이 서로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앞에서 그것을 '여섯 가지 신통묘용'이 한 진여본성의 묘용으로써 그 비치는 문만 다를 뿐 그 근본 자체는 똑같다고 말한 바와 같이, 오안을 비록 각각 다르게 말하였지만 그 근본 자체에 있어서는 육안이 곧 불안이고 불안이 곧 육안인 것입니다.
육안이란 중생의 육안 이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성이 깨치면 육안 이대로가 불안이며 불안 이대로가 육안일 뿐, 육안 내놓고 따로 불안이 없으며 불안 내놓고 따로 육안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안 이대로 혜안이며 법안 이대로 불안이여서 오안 전체가 서로서로 융통자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오안을 차별적으로 보아서 육안을 버리고 천안을 얻고 그렇게 하여 단계적으로 올라가서 마침내 불안을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경각을 증하게 되면 단박에 오안을 모두 성취하게 되는 것
입니다.
영가스님은 바로 이 오안을 깨끗이 하면 오력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오력(五力)이란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의 하나로써 첫째는 신력(信力)이니 신근(信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삿된 믿음을 깨뜨리는 것이며, 둘째는 정진력(精進力)이니 정진근(精進根)을 증장케 하여 신테의 게으름을 물리치는 것이며, 셋째는 염력(念力)이니 염근(念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사념(邪念)을 깨뜨리는 것이며, 넷째는 정력(定力)이니 정근(定根)을 증장케 하여 모든 어지러운 생각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다섯째는 혜력(慧力)이니 혜근을 증장케 하여 삼계의 모든 미혹을 끊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가지 힘[五力]이라는 것도 각각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하는 힘을 말한 것으로써 그 한 힘을 자세하게 분석하여 말하자니 다섯 가지 힘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안이든 오력이든 전체가 다 진여대용인 것이니 실지에 있어서는 오직 여래장 속에 있는 마니주의 작용일 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쓰임으로 보아서 다섯 가지로 나눈 것이니 여럿으로 나누어 볼 때는 찬차만별의 작용으로 나눌 수도 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래장 속의 마니주, '한 덩이 둥근 빛'이 천자만별로 나타나는 것이지 다른 물건이 각각 따로 있어서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눈이 다섯 개의 눈이고 다섯 개의 눈이 하나의 눈이며, 하나의 힘이 다섯 개의 힘이며 다섯 개의 하나의 힘으로 원융 무애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원융무애한 진여대용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가?
'깨쳐야만 알 뿐 헤아리긴 어렵다'고 하였듯이 우리가 진여대용을 알려면 반드시 증해야 되고 구경각을 성취하여 체득해야지 해오(解悟)나 신해(信解)로써는 절대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선가에서든지 교가에서든지 증(證)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봐서는 구경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여대용인 오안과 오력을 얻으려면 오직 증(證)해서 중도를 정득각해야만 알지 그렇게 하기 전에는 누구도 절대도 이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영가스님의 이 말씀들은 자성을 깨친 대광명 가운데서 말씀한 것인데 눈감은 봉사가 어찌 이 대광명을 볼 수 있겠습니까?
눈을 감고 앉아서 아무리 진여가 어떻고 오안 오력이 어떻고 해보았자, 봉사는 봉사이기 때문에 그 근본 대광명은 보지 못하니, 오안을 쓸 수도 없으며 오력을 쓸 수도 없으니 오직 눈을 떠야만 합니다.
눈을 뜬다는 것은 제팔 아뢰야 근본 무명을 완전히 끊어야되는 것이니 이와 같이 구경각을 성취하기 전에는 실제로 눈 뜬 사람이 아닙니다. 제팔 아뢰야 무기무심(無記無心)의 마계(魔界)를 완전히 벗어나서 참으로 죽음 가운데서 삶을 얻고, 크게 죽었다가 다시살아나야만 눈 뜬 사람입니다.
진여본성을 확철히 깨쳐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성취해야만 부처와 조사가 전한 오안을 얻고 오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참으로 증(證)하지 않고는 어떤 공부를 한다하여도 절대로 공부라고 취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자주 되풀이 하겠지만 선종에서는 언제든지 깨치는 증오(證悟)만 말하지 이해하여 아는 해오(解悟)는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구든지 선종을 해오적(解悟的)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선에 있어서 외도적인 해석이며, 선종의 전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21. 거울 속의 형상 보기는 어렵지 않으나
물 속의 달을 붙들려 하나 어떻게 잡을 수 있으랴.
경리에 간형견불난이나 수중착월쟁염득가
鏡裏 看形見不難 水中捉月爭拈得
'거울 속에 환하게 비친 내 얼굴을 본다'는 것은 자성을 바로 깨쳐서 오안과 오력을 자유자재하게 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확철히 깨쳐서 증지(證智)를 성취하면 대지혜 광명이 현전하는데, 자기 자성을 보는 것이 비유컨대 거울 속에 환하게 비친 얼굴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하다고 밝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볼 물건이 있고 볼 사람이 있어서 보는 줄 알면 큰 일이니, 여기서는 모든 주관과 객관이 다 떨어져 버린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별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따라가다가는 또 영원토록 자성을 보지 못하는 것이니 '물 속의 달을 붙들려하나 어찌 잡을 수 있으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경전에도 이러한 비유의 말씀이 있습니다만, 원숭이가 물 속에 비친 달을 잡으려고 달려들지만 천년 만년 잡으려 해 보았자 그 것은 헛일이니 어찌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물 속에 비친달이란 분별망상을 말하는 것이니 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가지고는 우리의 자성을 영원히 깨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성을 깨치려면 분별 망상뿐만 아니라 제팔 아뢰야의 근본 무명까지도 뿌리를 뽑아야지 그렇지 않고서는 영원토록 자성을 깨칠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별 망상과 티끌 그림자를 버리고 회광반조하여 진여본성을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외변으로 돌면서 헤매서는 안 되며, 근원을 바로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걷나니
통달한 이 함께 열반의 길에 노닐도다.
상독행상독보하니 달자동유열반로로다
常獨行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우리가 참으로 깨쳐서 증지(證智)를 성취하였는데 어째서 '항상 홀로 다니고 홀로 걷느냐'하면, 깨친 경계에서는 부처와 부처가 서로 보지 못하고 조사와 조사가 서로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佛佛이 不相見이요 祖祖가 不相逢이라]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일체의 명상(名相)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니, 천상천하에 오직 나 혼자 높아서 천하를 횡행하고 허공 위를 혼자 걸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 짝도 없고 걸림도 없이 자기 혼자 노닐게 되므로 서로서로 반려가 없습니다. 반려가 없다는 것은 절대로서 상대가 없다는 것이며 모든 명상의 양변이 다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려가 없다고 해서 혼자만 다니고 혼자만 걸으면 그만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깨친 사람들은 서로서로 손을 잡고 열반의 길에서 함께 노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빨리 알려면 '이것이 무엇인고'를 부지런히 해서 깨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영가스님이 이런 좋은 글을 만들어 놓고 내가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말해 보았자 쓸 데 없는 말일 뿐입니다. 오직 눈을 바로 뜨고 광명을 보아야 합니다.
23. 옛스런 곡조 신기 맑으며 풍체 스스로 느높음이여초췌한 모습 앙상한 뼈 사람
들 거들떠 보지 않는도다.
조고신청풍자고여 모췌골강인불고로다
調古神淸風自高 貌悴骨剛人不顧
홀로 다니고 홀로 걸어 열반의 길에서 노닐면 참으로 '곡조가 옛스럽고 신기는 맑고 풍채가 스스로 드높게 되는 것'이니, 이것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느냐 하면, 고불고조(古佛古祖)들이 맨손에 단도를 쥐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는 대기대용(大機大用)을 말한 것입니다. 그냥 운치가 좋고 풍채가 높다는 것이 아니라, 빈 손에 청룡도를 하나 들고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하게 써서, 죽이는 것만 마음대로 하느냐 하면 살리는 것도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역대의 조사들을 죽이려고 하면 한 칼에 다 죽여 버리고, 살리려고 하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 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을 한 날 한 시에 살릴 수 있는 살활자재(殺活自在)한 전기대용(全機大用)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처럼 살활자재한 전기대용이 현저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떤한가 하면, '얼굴은 초췌하고 뼈는 앙상해서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피부가 다 탈락되어 하나의 진실제 뿐[皮膚脫落盡 唯一眞實際]'이라고 함과 같이, 일체 번뇌망상은 피부가 탈락되듯이 다 끊어져 버리고 오직 진여본성의 뼈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모양이 초췌하다'는 것은 일체 망상의 모양이 다 끊어졌음을 말하고, '뼈가 단단하다'는 것은 금강반야가 현저하여 진여의 뼈가 단단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망정이 다 떨어져서 살활자재한 전기 대용이 현저하여 거기서는 부처와 조사도 찾아볼수 없고 중생과 마구니도 찾아볼 수 없는 인상(人相)과 아상(我相)이 다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냥 사람의 모습이 야위고 뼈만 앙상해서 사람들이 보기 싫다고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알면 피상적일 뿐만 아니라 영가스님의 참 뜻과는 정 반대가 되고 맙니다.
24. 궁색한 부처님 제자 입으로는 가난타 말하나
실로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치 않음이라
궁석자구칭빈하나 실시신빈도불빈이라
窮釋子口稱貧 實是身貧道不貧
'궁색한 부처님 제자'라 하니 무엇이 궁색하다는 말인가? 돈이 없고 옷이 없고 쌀이 없고 또 무슨 물거이 없다는 말인가?
예전 스님네 하시는 말씀이 '도를 배우려면 마땅히 가난함부터 먼저 배우라[學道先須學貧]'고 하였습니다. 중생이란 그 살림이 부자입니다. 8만 4천석이나 되는 온갖 번뇌가 창고마다 가득가득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고마다 가득찬 번뇌를 다 쓰지 못하고 영원토록 생사윤회를 하며 해탈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참답게 도를 배우려면 8만 4천석이나 되는 번뇌의 곳집을 다 비워버려야만 하는 것이니 그렇게 할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8만 4천석이나 되는 번뇌를 다 내버리고 나면 참으로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텅텅 빈 창고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은 실지로 진공(眞空)을 먼저 깨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가난한 진공(眞空) 이것은 가난한 것도 없는데서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도를 닦음에 있어서는 가난한 것부터 먼저 배우라는 것인데 그것은 번뇌망상을 먼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망상의 살림살이를 버릴 것 같으면 진여자성이 진공(眞空)임을 알게 되는데 그것을 아는 사람만이 참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일체 번뇌망상이 다해서 영원히 가난해 버리면 한 물거도 거기 설 수 없어서 '몸은 가난하나 도는 가난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 스님네는 가난한 것을 말할 때, '작년에는 송곳 세울 땅도 없더니 금년에는 송곳마저 없다'[去年無錐地러니 今年錐也無로다]'고 하였습니다.
작년에는 번뇌망상을 버리고 또 버려서 송곳 세울 땅도 없을 만큼 모든 망상이 끊어져 가난해졌지만 끈어졌다는 그 놈, 송곳이라는 물건은 아직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번뇌망상만 버리면 그만이지 금은보화는 도 닦는 이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상관없다는 말인가하고 혹 이렇게도 생각할런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도 참 좋은 말이지만 금은보화라는 패물을 가니고 있으면 재물에 대한 욕심이 늘 붙어 있어서 마음 속의 탐심을 버릴 수 없게 됩니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탐심을 버릴려면 바깥에 있는 물질적인 금은보화같은 물건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당(唐)나라의 방거사(龐居士)는 자기의 그 많은 모든 재산을 배에 싣고 가서 동정호(洞庭湖)에 버리고서는 대조리를 만들어서 장에 갖다 팔아다가 나날의 생계를 이어 갔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밖으로는 모든 물건까지도 다 버리는 동시에 안으로는 번뇌망상을 다 버리게 되면 안팎이 함께 가난하게 됩니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가난뱅이가 된다면 모든 것이 공해서거기에는 항사묘용이 현저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으니 이것이 곧 견성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은 안팎으로 가난한 것부터 먼저 배워야 합니다.
25. 가난한 즉 몸에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보(無價寶)를 감추었도다
빈즉신상피루갈이요 도즉심장무가진이로다
貧則身常披縷褐 道則心臟無價珍
'가난한 즉 몸에 누더기를 걸친다'고 하는 것은 안팎이 함께 가난함을 말합니 다. 안으로 번뇌망상이 다 떨어져서 탐심과 구하는 마음이 없어지니 밖으로야 무슨 금은보화가 필요하겠습니까?안과 밖이 함께 가난하면 어떻게 되느냐?
안과 밖이 함께 가난해서 철두철미하게 진공(眞空)을 성취하면 거기서 항사묘용의 다 쓸 수 없는 보고가 열린다는 것입니다. '도를 얻은 즉 마음에 값할 수 없는 보배'를 지니는 것입니다. 삼천대천세계가 아무리 크고 넓다하지만 설사 그것을 억천만개를 합한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무진장의 '값할 수 업는 보배'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들 마음 속에 천상천하에 비교할 수 없는 값진 보배를 가지고 있느니 만큼 하루 빨리 개척해서 그것을 마음대로 써야 할 것입니다.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한 것부터 배워서 밖으로는 물질을 버리고 안으로는 번뇌망상을 버려야 합니다. 만약 욕심을 가지고 도를 얻으려는 사람은 말로는 동으로 간다고 하면서 몸은 서쪽으로 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자는 '도를 배우려면 먼저 가난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는 고불고조(古佛告祖)의 말씀을 철칙으로 삼아 공부해야 합니다. 그와 같이 수행하여 안팎이 가난해진다면 참으로 무진장의 값할 수 없는 보배를 얻어서 천하에 둘도 없는 큰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꼭 믿고 명심하여 대중들은 열심히 정진합시다.
26. 무가보는 써도 다함이 없나니
중생 이익하며 때를 따라 끝내 아낌이 없음이라
무가진용무진하니 이물응시종불인이라
無價珍用無盡 利物應時終不吝
이것은 우리 진여자성의 쓰임[用]을 말합니다. 일체만물을 이롭게 하고 일체시(一切時)에 응하여 쓰더라도 끝내 아끼는 것이 없어 영원토록 다함2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가?
27. 삼신,사지는 본체 가운데 원만하고
팔해탈 육신통은 마음 땅의 인(인)이로다
삼신사지는 체중원이요 팔해육통은 심지인이로다
三身四智 體中圓 八解六通 心地印
삼신(三身)이란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을 말하고 사지(四智)란 대원경지(大圓鏡地),평등성지(平等性地),성소작지(成所作智),묘관찰지(妙觀察智)를 말합니다.
삼신과 사지를 성취하면 이를 부처라 하는데, 우리가 마니주를 완전히 알아서 자성을 바로 깨치면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해서 다시는 더할래야 더할 것이 없고 덜래야 덜 것이 없는 구경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값할 수 없는 보배는 써도 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 어떤 사람은 '깨쳤다고 해서 삼신,사지가 그대로 원만구족할 수 있나?'하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증지(證智)라는 것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고, 깨친 것 돈오(頓悟)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돈오(頓悟)를 한 사람은 삼신,사지가 원만구족 안할래야 안할 수 없습니다.
이런 좋은 마니보주를사람사람이 다가지고 있건만 이것을 모르고 깨쳐서 쓸려고 하지 않으니 이보다 한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삼신,사지가 원만구족하면 팔해탈과 육신통이 그 가운데 다 갖추어 있다는 것입니다.
팔해탈은 진여해탈의 경계를 여덟가지로 분류한 것인데 각각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여의 대용인 줄 알면 됩니다. 육신통이란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신족통(神足通),숙명통(宿命通), 타심통(他心通), 누진통(漏盡通)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 체득을 해보아야 아는 것이지 말로만 해서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항상 '...이것은 무엇인고'를 부지런히 해서 자성을 하루 빨리 깨쳐야 합니다. 금강산이 좋다고 아무리 말해 주어도 '어디 그런 좋은 산이 있을라고! 거짓말이다.'하면서 가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영원히 금강산을 보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삼신,사지와 팔해탈,육신통이 구족한, 값할 수 없이 귀한 마니주가 사람 사람에게 다 있어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의 조사들이 모두 다 개발하여 다함이 없이 썼는데도, 이것을 믿지 않고 거짓말이라고 의심하다가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고 미래겁이 다하도록 중생그대로 남게 됩니다.
28. 상근기는 한 번 결단하여 일체를 깨치고
중,하근기는 많이 들을수록 더욱 믿지 않는도다
상사는 일결일체료하고 중하는 다문다불신이라
上士 一決一切了 中下 多聞多不信
참으로 영리한 상근기의 사람은 이런 좋은 법문을 한번들으면 일체가 이해되어 버려서 다시는 더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리하지 못한 중,하근기의 사람은 값할 수 없이 귀한 마니주가 자기 마음 가운데 있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 주어도 믿지를 않고 의심만 한다는 말입니다.관운장이 안량과 문추의 목을 베듯이 한꺼번에 해치워 버려야지 이리저리 빙빙 돌면서 허송세월해서야 되겠습니까?
29. 스스로 마음의 때묻은 옷 벗을 뿐
뉘라서 밖으로 정지을 자랑할건가
단자회중해구의어니 수능향외과정진가
但自懷中解垢衣 誰能向外誇精進
신신명의 '참됨을 구하려 말고 망령된 견해만 쉴 뿐이라[不用求眞唯須息見]'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마니주는 본래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데 오직 때 묻은 옷, 즉 번뇌망상 때문에 쓰지를 못하는 것이니, 때 묻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번뇌망상,분별취사심만 쉬어 버린다면 그것을 쓴다해도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해가 시방세계 비치고 있지만 해를 보지 못하는 것은 구름이 가려 있기 때문입니다. 해를 억지로 볼려고 하지 않아도 구름만 걷히면 해는 저절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와 같이 오직 때묻은 옷만 벗어 버리고 망상을 쉬어버릴 뿐입니다. 도를 성취한다 하여 겉으로 육도만행을 한다 무엇을 한다 하여, 가지를 더듬고 잎이나 따는 등 공연히 쓸 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30. 남의 비방에 따르고 남의 비난에 맡겨두라
불로 하늘을 태우려하나 공연히 자신만 피로하리라
종타방임타비하라 파화소천도자피로다
從他謗任他非 把火燒天徒自疲
저 사람이 비방하고 욕하는 것을 가리지 말고 탓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좋은 마니주가 있다고 입이 아프도록 말해줘도 도리어 반대하고 욕하는 것은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이지 알고서는 그렇게 욕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불을 들고 하늘을 태우려는 사람과 같이 헛되이 스스로만 피로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진여자성을 깨쳐서 마니보주를 얻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고 성불한다는 이 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아무리 자기가 비방하고 반대를 해 보아도 정법인 진여자성에는 아무런 방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법문을 비난하지않고 들어서 아는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31. 내 듣기에 마치 감로수를 마심과 같아서
녹아서 단박에 부사의해탈경에 들어가도다
아문흡사음감로 소융돈입부사의
我聞恰似飮甘露하야 銷融頓入不思議로다
이 법을 모르는 사람은 욕을 하고 비방을 하지만 아는 사람은 남이 욕하고 헐뜯어도 마치 감로수를 마시는 것과 같아서 팔만사천가지 병이 눈깜짝할 사이에 다 나아버린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음과 동시에 삼신,사지와 팔해탈,육신통이 원만구족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중생이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할 수 없는 부사의 대해탈경계로 우리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상승 무상묘법을 듣고 비방만 하지 말고 부사의해탈경계에 들어가서 일체중생과 더불어 화장찰해(華藏刹海)에서 영원토록 자유자재하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 자꾸 비방하고 반대하는 것은 옛날이니 지금이나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도 그랬고 육조스님,영가스님 당시도 그랬으며 현재도 그렇습니다. 이 불법(佛法)이란 것이 하도 신기하고
묘한 것이여서 중생이 알기 어렵고 믿기 어렵기 때문에 비방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들어서 영가스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2. 나쁜 말을 관찰함이 바로 공덕이니
이것이 나에게는 선지식이 됨이라
관악언 시공덕 차즉성오선지식
觀惡言이 是功德이니 此則成吾善知識이라
부처님께서는 오역죄(五逆罪)를 짓는 것보다도 정법(正法)을 비방하는 비방하는 죄가 더 크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오역죄를 지은 죄는 참회하면 다시 돌이 킬 수 없지만, 정법을 비방하면 불법에 인연을 끊어 버려서 그 사람은 영원토록 성불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 죄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비방하여 불법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