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왕은 유리명왕의 다섯 째 아들이자 유리명왕의 제2왕후 송씨 소생이며, 이름은 해색주(解色朱)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즉위에 대하여 “대무신왕의 아우이며,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아직 나이 어려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왕으로 세웠다.”고 쓰고 있다.
그의 개인 신상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대신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한 것을 보면 그가 대무신왕의 동복아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따라서 그 역시 대무신왕과 마찬가지로 유리명왕의 제2왕후 송씨 소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민중왕이 왕위에 오른 것은 대무신왕이 생을 마감한 서기 44년 10월이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우선 그해 11월에 죄수를 사면하고, 이듬해 3월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풂으로써 새로운 왕의 즉위를 알렸다.
그러나 서기 45년 5월에 동부 지역에 큰 홍수가 나는 바람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유랑민이 늘어나는 등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민중왕은 국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한다. 하지만 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기 46년 겨울에는 설상가상으로 위나암에 전혀 눈이 내리지 않아 백성들은 겨울 가뭄에 시달린다. 이 같은 국가적 어려움은 민중왕을 고통스럽게 하였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민중왕은 서기 47년에 병으로 드러눕는다.
이렇게 어려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그해 10월에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나라에 투항했다. 이 때 투항한 사람들은 아마도 한나라에서 멀지 않은 고구려 변방에 살고 있었던 듯하다. 또한 먼저 낙랑으로 갔다는 기록으로 봐서는 낙랑과 근접한 지역이었을 것이므로 당시 고구려 변방이던 요서 지역의 주민들일 것이다.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고구려 조정은 이들에 대해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고, 그 틈을 이용해 잠우락부의 대가 벼슬에 있던 대승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주민들과 함께 한나라에 투항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국가의 위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중왕은 서기 48년 병이 악화되어 죽음을 맞는다.
그는 생전에 사냥을 하다가 민중원에 있는 석굴에 자신을 묻어줄 것을 유언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그를 민중원이 석굴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민중왕(閔中王)이라 하였다.
2. 고구려 묘호와 능 위치에 관한 짧은 논고
민중왕의 묘호는 그이 능이 조성된 ‘민중원’에서 따온 것이다. 고구려 28왕의 묘호 중에서 능의 위치를 그대로 묘호로 사용한 예는 총 12왕이다. 그리고 민중왕은 그 첫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민중왕 이외에도 능이 있는 지명을 그대로 묘호로 사용한 경우는 모본왕(5대), 고국천왕(9대), 고국원왕(10대), 동천왕(11대), 중천왕(12대), 서천왕(13대), 봉상왕(14대), 미천왕(15대), 고국원왕(16대), 소수림왕(17대), 고국천왕(18대) 등이다. 즉, 민중왕이 민중원에 묻힌 것처럼 모본왕은 모본에, 고국천왕은 고국천에, 산상왕은 산상에, 동천왕은 동천에, 중천왕은 중천에, 서천왕은 서천에, 봉상왕은 봉상에, 미천왕은 미천에, 고국원왕은 고국원에, 소수림왕은 소수림에, 고국양왕은 고국양에 묻혔다는 뜻이다.
이처럼 28왕 중 12왕의 묘호가 능이 있는 지명과 동일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같은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의 어느 시대, 어느 왕의 묘호에서도 이런 경우는 찾아볼 수 없으며, 백제나 신라, 왜 등 당시의 어느 나라에서도 이 같은 일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능이 위치한 지명을 묘호로 삼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제10대 산상왕본기에는 “31년 여름 5월, 왕이 죽었다. 산상릉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산상왕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능호와 묘호가 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은 능이 있는 지명은 곧 능호로 사용됐고, 그 능호는 다시 묘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말하자면 고구려 28왕 가운데 12왕은 묘호와 능호가 같다.
동서양의 어느 역사책을 뒤져봐도 능호를 묘호로 사용한 경우는 고구려의 12왕밖에 없다. 이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고구려 시대 당시 동북아시아의 모든 국가는 삼황오제와 하ㆍ은ㆍ주 시대에 태평성대를 이룬 왕들의 정치를 모범으로 형성된 이른바 ‘왕도정치’ 이념을 구현하고 있었다. 때문에 비록 형식적인 차이가 다소 있긴 했지만 당시의 모든 국가에서 왕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은 동일했다. 이는 왕을 세우는 것과 왕에 대한 예의가 동일했다는 뜻이다.
왕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란 신하 된 자로서 왕에게 어떤 예를 갖추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관례를 의미한다. 이 관례에는 왕을 대하는 신하의 언어와 말투, 왕과 왕족의 혼례, 왕과 왕족의 상례, 이미 죽은 왕에 대한 호칭 등이 당연히 포함되었다. 그리고 그 상례를 대표하는 것은 능과 능호였으며, 죽은 왕에 대한 호칭은 곧 묘호이다. 이 묘호는 그 후손들이 제사를 올릴 때 사용하는 공식적인 존칭어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묘호의 제정은 많은 논의와 특별한 절차를 거쳐서 이뤄졌다.
이것이 왕도정치를 추구하던 당시 동북아시아권의 모든 국가에서 공통적으로 시행되던 와에 대한 일반 관례였다. 그리고 고구려 역시 이 국가들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고구려라고 해서 이 일반적인 관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유독 고구려에서만 능호가 곧 묘호로 기록된 사례들이 발견된다. 그것도 무려 12번이나 반복되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의문점을 풀어줄 열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제19대 광개토왕릉의 비문이다.
광개토왕의 정식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이 명칭의 맨 앞 세 글자, 즉 ‘국강상’은 그가 묻힌 지명이며 동시에 능호이다. 그래서 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국강상에 묻혀 있으며, 땅의 경계를 넓게 열어 평안을 가져다 준 좋고 위대한 왕.’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고구려 묘호 양식이다. 이 광개토왕의 묘호를 바탕으로 고구려 묘호를 분석해 보면 우선 능의 위치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으로 치적, 그리고 약칭할 수 있는 명칭, 마지막으로 일반적인 관용어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를 간략하게 기호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묘호=능 위치(또는 능호)+치적+약칭+일반 관용어
이것을 광개토왕의 묘호에 대입해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국강상(능호)+광개토경(치적)+평안(약칭)+호태왕(일반 관용어)
따라서 광개토왕의 묘호를 약칭할 때는 ‘평안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뒤에 붙은 ‘호태왕’은 어느 왕에게나 붙였을 법한 일반적인 관용어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볼 때 현재『삼국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고구려 묘호는 잘못된 것이 대다수이다. 특히 묘호의 맨 앞에 붙는 능호를 묘호로 착각하고 약칭 기술한 12왕의 묘호는 완전히 엉터리라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초가 된『구삼국사』의 편자들은 고구려 묘호의 특징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편한 대로 묘호의 앞머리만 따거나 묘호의 일부분만을 따서 기록했던 것이다. 아마 이것은『구삼국사』를 편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러한 신라인들의 무성의한 편찬작업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고구려 28왕의 묘호조차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잘못 전달된 묘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또 후대에도 그 묘호를 그대로 물려주어야만 하는 불행한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능이 조서오딘 곳의 지명을 알았다는 것은 능을 찾아낼 수 있는 단초를 얻은 것이므로 그저 안타까워하고 있을 일만은 아닌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