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이어쓰기 과제 제출
여자는 티켓을 예매했다. 4월 첫 주 토요일, 유성에 있는 충남대학교의 정심화홀의 좌석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가 오는 공연은 놓칠 수는 없었다.
당일 아침, 근처의 모든 라일락 나무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9시경 꽃향기가 풀풀 날리는 아파트의 계단 앞에서 여자는 늙은 경비원의 인사를 받고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푸른 실크 블라우스에 블루진을 입고 카키색 바바리를 걸치고 나온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문 앞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가 만년교를 지날 때쯤, 기사가 정면을 응시한 채 물었다. 공연 보러 가시나 보죠? 여자는 안치환이 온다고 대답했다. 민중가요 부르는 사람인가? 여자는 그의 반말이 거슬려 대답하지 않았다. 게다가 민중이라는 말이 왠지 그녀의 가슴에 슬며시 날을 세웠다. 송곳처럼 여자의 가슴을 파고 든 것은 아니다. 여자는 그 말에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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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스마트폰이 울렸다. 조카 후니 문자였다.
약속 잊지않았죠?
그럼, 가는 중이야 5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아.
아저씨, 봉명동 카페 골목 입구에 세워 주세요.
오전 이른 시간인데도 청춘 남녀들이 팔짱을 끼거나 손을 맞잡고 거리를 걷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러 가는지, 아침 식사를 하러 가는지 몰라도 그들의 모습은 그대로 꽃이고 나비였다.
여자는 40년 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토론 동아리 활동하며 별을 마시던 시절. 통기타 선율 속에 생맥주를 마시며 만났던 친구들, 선배들. 밤을 새워 있었던 강론, 대화, 토론, 논쟁, 그리고 뜨거웠던 함성, 최류 가스와 벽돌, 그리고 죽음...... 또렷한 기억 속에서 감정은 하나하나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여자는 고개를 흔들었다. 옛일을 돌이키다 보면 결국 슬픔이 일어났다. 현재가 중요하다. 현재를 살자. 아모르 파티!
카페 루티나의 문을 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카페 안은 텅 비어 있었다. 후니가 반갑게 웃으며 큰 소리로 인사한다.
어서 오세요, 고모. 청바지 입으셔서 그런지 오늘은 완죤 여대생이네요. 함께 있으면 제 여친인지 알겠어요.
서른다섯이 넘은 나이에도 후니는미소년 인상 그대로였다. 잡티 하나 없이 투명한 피부와 맑은 눈, 오똑한 콧날, 갸름한 입술이 헤어스타일과 어울려, 아이돌 스타처럼 빛났다.
그래? 정말? 그럼 걱정 되는데? 네 팬들이 질투하면 어쩌냐? 그런데 넌 어떻게 그렇게 여전히 꿀피부니? 이제 서른 여섯이지?
아직 다섯이에요. 생일 안지났어요. 전 전담 피부과가 있어요. 정기적으로 가서 관리를 받아요.
후니는 Instagram 스타다. 팔로워가 엄청나다. 그래서인지 Instagram에 올린 사진을 보고, 피부과 병원 영업 담당이 제의를 해, 모델이 되었단다. 피부 관리를 해주는 조건으로, 관리 받은 후에, Instagram에 사진 올리면서 병원 이름만 올려주면 되는 거다. 이런 식으로 거래하는 곳이 사진관, 미용실, 성형외과, 의류업체 등등이란다.
후니는 비혼주의자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지만, 그동안 지켜보면 비혼주의자가 확실하다.
스팅의 목소리가 상어처럼 공간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후니가 고모를 위해 틀은 것이리라.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곡 [ if on a winter's night]이었다. 봄날의 햇살이 엷어지고, 흐릿한 날씨로 바뀌더니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찬 바람이 불어온다. 자신의 거실 소파에 묻힌 여자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달콤함이 훅 안겼다. 라마조코로 내린 원두커피, 미숫가루를 뿌려 먹는 우유 빙수, 그리고 마카롱과 제리치즈케익까지 후니가 테이블에 펼쳐놓은 향기였다.
고모 보내주신 시집 잘 읽었어요. 늦었지만 다섯번째 시집 출간, 축하드립니다.
정색을 하고 또박또박 말한다. 어른스럽다. 후니는 언어와 외국어 영역 1등급만 지원할 수 있는 예술대학 문창과 출신이다. 문학적 감각이 뛰어났다. 매 시집마다 감상평을 해 주는데 평론가들보다 실제적이었다. 여자는 느낌이 어땠냐고 물었다.
어떤 대답을 원하세요? 애독자의 대답? 문청의 대답? 둘다 해 드려요?
여자는 각오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 마지막 민중서정시인이라는 문단의 평답게 시가 여전히 뜨겁고 촉촉해요. 바람, 길, 물의 이미지 어울림으로, 변함 없는 세계, 과거의 슬픔에 잠겨 젖게 해요. 그런데 이제 조금 지루해요. 세상이 변하잖아요. 첫 시집 나온지 20년이 넘게 지났는데 변함 없는 세계라니, 고모도 살아 숨 쉬잖아요. 유령의 세계에 사시는 게 아닐 텐데, 늙기도 하고, 새로운 경험도 쌓일 거고요. 느낌은 기억에서 나오는데..... 고모가 지금 젤 좋아하는 곡 [ if on a winter's night]도 두번째 시집이 나온 후에 나온 거잖아요. 그전엔 [shape of my heart]를 좋아하셨죠.
충대 교문이 다가왔다. 여자는 교문을 향해 걸었다. 같은 방향으로 걷는 학생들이 많았다. 토요일이라 강의도 없을 텐데...... 그들 사이에서 여자는 청춘인 듯한 가벼움을 느꼈다
내가 다시 지금 시대를 청춘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사람이 될까? 내가 추구해온 생각, 사상, 예술은 어떤 모습을 띨까? 여자는 소름을 느꼈다 자기 자신이 유령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자는 지난 40년간 변함 없는 삶을 살아왔다. 6ㆍ29 선언 때도, 소련이 해체 선언을 했을 때도, 한강이 맨부커 상을 받고, 기생충이 아카데미 상을 받고,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었다는 발표가 나온 후에도, 여자의 시세계는 기법으로나 감성으로, 주제 소재의 범주면으로 변함이 없었다. 이것은 유령의 삶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시대에 멈춰진, 사물화된 영혼이기 때문이 아니였던가?
늘 무채색의 옷만 입던 여자는 오늘 녹청색 계열의 옷을 입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청춘은 세련된 디자인의 옷으로 싱싱하게 빛났다. 프리즘을 통해 쏟아진 색깔들처럼 캠퍼스는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여자는 후니의 말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의 시는 이러한 세상을 흑백으로만 나타내고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정서적으로 유령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안치환의 공연장 입구는 터널처럼 어두웠다. 여자는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캠퍼스로 쏟아져 나오고 들어가는 다양한 빛깔들, 저들은 모두 다리가 있다. 정심화 공연장 앞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60대들이다. 여자는 그들의 아래를 헤아리며 바라보았다. 발이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뒤로 돌아 캠퍼스를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