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황은 1592년 7월 23일 고창의 김홍우ㆍ김광우ㆍ서홍도, 흥덕의 서연, 담양의 김언욱ㆍ김언희 등과 함께 가솔들을 이끌고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공의 자는 汝行, 호는 老坡, 무안 출신이다. 본관은 坡平으로, 文肅公 尹瓘의 후예이다. 공의 10세조 文顯公 尹珤는 鄭可臣ㆍ金周鼎 등과 함께 국사를 공의하였는데, 이름하여 三賢堂이라 칭하였다. 6세조 尹璜은 監司, 증조부 尹殷卿은 參奉이며, 아버지 尹時衡은 主簿이다. 공은 무안 옥산리에서 태어났다.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이 ‘하늘이 낸 효자’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또한 공은 성리설을 연구하고 실천하는데 주력하였다. 훗날 학문과 행실로 司宰監正에 제수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장성 남문창의에 참여하였다. 공은 각 지역에서 의병과 의속을 모아 장성 남문으로 운송하였다. 장성 남문의병이 제1차 서울로 진군할 때 출전하여 직산에서 왜적을 대파하였다. 공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영광 칠산해에서 순절하였다.
공의 문집으로 老坡實記와 三賢遺稿가 현전한다. 이 가운데 삼현유고는 노파 윤황(1562~?), 윤황의 동생 몽파 윤길(1564~1615), 윤황의 증손 잠정자 윤제민(1634~169)의 시문을 엮은 것이다. 삼현유고는 1986년에 파평윤씨 정장공파 옥동문중에서 국역ㆍ간행하였다. 수록 내용은 노파실기, 노파실기부록, 몽파실기, 잠정자시집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