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대부분의 미국 대학의 졸업식에서 자교 출신의 유명 인사를 초빙하여 졸업을 축하하는 연설을 한다. 모교 출신은 아니어도 가끔 다른 유명인사를 초대하기도 한다.
연사의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졸업생들을 격려하고 성원하며, 그들의 장도를 축하해주는 것이 관례이다. 딸아이의 『MIT』졸업식에 참석했을 때도 『Khan Academy』의 창업자가 했던 축하 연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30분 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며칠 전부터 집안에 때 아닌 「스티브 잡스」의 열풍이 불고 있다. 유치원에 다니는 손자가 학원에서 주관하는 영어 말하기 대회에 나간다고 장문의 글을 외워 제법 유창하게 말을 하고 부터이다. 내용을 보니 「잡스」가 지난 2005년에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행한 연설문이었다. 간간히 미국에 거주하는 사촌들을 만나면 의사소통을 영어로 한다기에 반신반의 했는데 실체를 대하니 그저 놀랄 뿐이었다.
거의 20여 년 전에 외손들을 맡아 양육하던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당시 초등학생이 영어 원서를 줄줄 읽고 유창한 회화를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이런 기억을 갖고 있던 차에 우연히도 어린 손자가 잊었던 추억을 깨워주었다. 이제 만 6살인 손자가 「잡스」의 연설문 일부를 달달 외워 제법 긴 문장을 막힘없이 말하는 것을 보면서 조기교육의 힘을 실감하였다.
1984년 1월 24일, IT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천 명 청중 앞에서 개인용 컴퓨터(personal computer) 시대를 열어젖혔다고 평가받는 『매킨토시』가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행사의 주인공이 바로 ‘매킨토시의 아버지’ 「스티브 잡스」였다. 이는 전혀 새로운 컴퓨터의 출현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스탠퍼드 대학』 졸업식 연설문은 단순하지만 잘 짜인 구조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우아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는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다. 두 번째는 애플을 창업하여 성공 가도를 달리다 해고로 좌절하는 이야기다. 세 번째는 췌장암을 진단받고 죽음과 마주 선 이야기다. 아쉽게도 병이 재발하여 6년 후에 사망했다.
사실 언제나 그가 강조한 말은 ‘다른 것을 생각하라(Think different)’였다. 다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규칙이나 통념의 틀에 매이지 않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세상은 흔히 미친 사람이나 부적응자, 실패자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고 인류를 진보시키는 이들은 바로 이런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잡스」는 말하였다. 그의 유명한 문구인 “항상 갈망하고, 항상 어리석어라(Stay hungry, stay foolish)”도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실패를 무릅쓰고라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추구하라는 조언이다.
또한 그가 강조했던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Technology married with humanities)은 보통 사람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문제 제기였다. 「스티브 잡스」가 2001년 뉴스위크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크라테스」와 오후를 보낼 수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기술을 내놓겠습니다(I would trade all my technology for an afternoon with Socrates).”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때, 기술은 우리의 심장을 노래하게 만들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우리 모두는 각자가 살아온 인생길에서 전환점이 있다. 당시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일이 세월과 함께 커다란 인생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이것은 긍정적일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는데 새삼 무슨 영향을 주었을까하고 생각하기 쉬우나 결국은 그런 전환점으로 인해 우리 인생의 가치와 그 결과마저 상이한 모습으로 남게 된다. 학교나 배우자의 선택 혹은 가까운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등은 매우 중요한 삶의 이정표로 남는다.
돌이켜보니 한 직장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정년으로 퇴임을 하는 것은 매우 자랑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다. 역시 졸업식 못지않게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인생의 큰 전환점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은 선친의 정년 퇴임식이다. 과거에는 교수의 숫자도 한정되어 지도교수님의 퇴임에 맞춰 임용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그러다보니 대개는 학위 과정을 마치고 나서도 근 20 년은 기다렸다가 자리를 얻게 되었다. 사실 어렵게 얻은 직위인데 어느 덧 세월이 흘러 퇴임을 한다니 모두 세월의 무상함에 아쉬움이 컸다.
고별 연설을 하시는 동안 내내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본인의 성장과정과 학문 및 문학을 하던 소회와 당부의 말씀으로 전개가 되었다. 온고지신(溫故知新)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한 평소의 소신을 피력하시고, 가정의 화목과 부모에 대한 바른 태도 등에 대한 내용으로 기억된다. 특히, 조모님에 대한 언급을 하시면서 본인 스스로도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시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이어서 내 자신의 정년 퇴임식을 떠 올렸다. 당시 만 54세였으니 한창 열정적으로 일을 하는 시기였다. 주어진 일에 몰두하며 겨우 아이들 대학 교육이나 마친 나이에 별다른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이 그냥 광야로 나서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퇴임에 따른 심적인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오랜 제복에 익숙했던 지라 매사가 다 생소한 기분이었다.
평소에 신세를 입었던 지인 및 가족들을 초빙하여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다. 마침 출간했던 책자도 준비하여 출판기념회를 병행하였다.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준 상, 하, 동료 여러분과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자리였다. 그 다음 날에 공식적인 퇴임식을 마치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다음으로 바로 오늘은 처남의 정년 퇴임식에 참석하였다. 재학 3학년 시절에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공직에서 봉직하다가 정년을 맞이하였다. 각 급 법원장을 거쳐 최근 몇 년 동안은 소액의 민사재판관으로 보통 서민을 위한 업무에 종사하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엄정하고 공사가 분명한 타고난 재판관이었다. 합리적인 재판 진행으로 소송 당사자들의 승복도가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쁜 업무 중에도 효성이 극진하여 노모를 봉양하고, 집안의 대소 행사를 주관하여 처리하는 모범을 보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아들과 조카가 나란히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그런 영향이다.
후배들에게 인문학적인 마인드를 간직하고 항상 무엇이 올바른 길인지를 추구하는 자세를 유지할 것과, 여행을 통해 향토 문화에 대한 이해를 펼칠 것을 주문하였다. 평소 인간 이해에 대한 관심을 그대로 보여준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잔잔하고 부드러운 행사였다.
이렇듯이 퇴임은 누구나 거치는 과정인데 지나고 나면 커다란 변화의 분기점이다. 그 후의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순전히 본인에게 달린 일이다. 새로 시작하는 심적인 준비 여부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하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이런 저런 말에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은 더욱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열정적으로 일과 삶을 사랑할 것, 외부의 온갖 ‘잡음’을 막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 그리고 그 목소리를 따를 용기를 낼 것, 진실하고도 보편적인 이 삶의 가치를 자신의 인생으로 보여준 것,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있게 될 것”은 「잡스」의 정신적인 유산으로 우리 모두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고귀한 가치라고 확신을 한다.
여하튼 최근에는 손자들 재롱으로 사는 재미가 쏠쏠하다. 『산타크루즈』에 거주하는 외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Spelling Bee』의 카운티 대표로 선발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평소의 독서 습관이 좋은 효과를 거둔 것이다.
아내도 「잡스」의 연설문을 암기하였다. 평소에 여동생과 더불어 여러 편의 시를 암송하여 낭송하더니 재미를 느낀 것이다. 더욱 손자의 조그만 성취에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더니 조그만 꿈을 이루었다. 살아가는 재미가 별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 곧 소소한 행복이라고 믿는다. 조그만 성취라지만 그 용기와 새로운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2023.1.30.작성/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