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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손, 굿뉴스울산 창간일지
여성 목회자로서 주를 섬긴 언약의 교회 20년간의 여정(旅程),
개척교회 연합해 전도할 때 시작된 굿뉴스울산 창간 간증
벌써 15년의 세월이 과거로 흘렀다. 국민일보 문서선교사로 5년간 전국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다 잠시 쉬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려 받으니 동아일보 복산 지국장의 전화였다. 그래서 티코를 타고 태화강을 건너 복산지국에 도착했다. 홍 국장이 건넨 커피믹스 한 잔을 받아들고 마주앉았다. 홍 국장은 “아까 교회 한 곳에서 연락이 왔는데 부흥회 전단지를 돌린다고 하더군. 박 전도사 자네가 가야 그 일이 처리될 거 같아 내가 불렀네. 자네가 알다시피 나야 동아일보 지국장이지 국민일보야 내가 잘 알 턱이 있나. 국민일보야 자네가 전문가 아닌가.” 그래서 나는 “알겠어요. 내가 가보죠.”하고 홍국장이 가르쳐준 언약의 교회로 차를 몰았다. 성신고등학교 정문을 지나 우측으로 핸들을 꺾고 조금 나가니 언약의 교회 종탑이 보였다. 차를 주차하고 2층으로 올라가 교회 문을 노크하니 안에서 두 명의 여자분이 나왔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하면서 인사하는 두 분의 환대를 받으며 예배당 안으로 들어섰다. 상가교회는 40 평 정도의 아담한 크기였고, 나는 장의자에 앉아 먼저 기도를 드리고 나서 두 분을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반가와요. 저는 이 교회를 담임하는 이금희 목사라고 합니다. 이분은 안명숙 집사입니다.” “예. 목사님. 반갑습니다. 저는 박정관 전도사라고 합니다. 국민일보에 전단(傳單)을 돌리신다고요? 한 번 보여주세요.” 이렇게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난 후 목사님이 보여준 전단을 받아 보았다. 거기에는 2주 뒤에 언약의 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린다고 인쇄돼 있었다. 두 분은 8000부 인쇄해 둔 부흥회 전단지를 가가호호 돌려야 하는지 신문에 삽지해얄지 갈피를 잡지 못해 전화한 거였다. 그래서 나는 자세한 설명을 해 드린 후 전단지와 삽지 비용을 받아와서 언약의 교회를 중심으로 인근의 몇 군데 국민일보 지국에 배부하며 잘 삽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내 나름의 개인적인 용무를 보다가 불현듯 언약의 교회 부흥회가 어찌 됐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오전 집회에 한 번 참석했다. 30여 명의 사람들은 뜨겁게 박수 치며 찬양을 불렀다. 집회가 시작되자 부흥강사는 힘찬 설교를 이어갔고, 참석한 사람들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설교가 끝나고 병자를 위한 기도 시간에 다 함께 치유를 위해 합심 기도했고, 상담받기를 원하는 분들은 강사와 면담하는 시간도 가졌다. 나는 집회 후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려 할 때 이금희 목사는 “곧 강사 목사님과 식사하러 가니 함께 가시면 좋겠어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면서 요청했다. 그래서 기다렸더니 참석자들은 모두 돌아가고 강사 목사, 이금희 목사, 식사 대접하는 안명숙 집사 등 3명이 남았다. 그런데 언약의 교회에는 차량이 없었다. 이 목사는 지체장애 5급이라 차를 운전할 수 없고, 안 집사는 면허증이 없었다. 할 수 없었다. 경차라 좁았지만 네 사람이 타자마자 티코는 정자 바닷가로 내달렸다. 그때 강사 목사가 툭 던진 말이 걸작이었다. “내가 부흥강사로 전국을 다니는데 현대자동차가 있는 이 울산에서 티코를 탈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하면서 껄껄 웃었다. 작은 티코는 바람을 가르며 휙휙 내달려 정자 바닷가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강사를 숙소에 모셔드려야 했기에 티코로 모셔드렸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남은 집회 시간에 차량 봉사로 자원해 섬기게 되었다.
마침내 언약의 교회 부흥 집회 일정을 무사히 끝마쳤다. 하루는 이금희 목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전도사님, 지난번 부흥회에 차량 봉사로 섬겨주어서 너무 감사해요. 교회에 시간 내서 한 번 오시면 좋겠어요” 그래서 언약의 교회에 도착했더니 이 목사는 손수 삼계탕을 끓여 대접했다. “목사님, 작은 교회를 이끄신다고 갖은 고생을 하시는데 제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얻어먹을 염치가 없습니다.” “아뇨, 너무 감사합니다. 개척교회에는 작은 봉사 하나도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 목사는 내게 수고했다고 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다. 그리고 간절히 부탁했다. “지금 저희 교회는 봉사자가 절실합니다. 언약의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겨주시면 너무 고맙겠습니다. 기도해 보시고 연락주세요” 그래서 나는 선물 받은 그 구두를 신고 언약의 교회 전도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15년 동안 섬겨오고 있다.
내가 이 곳 언약의 교회에서 15년간 여정에서 겪은 발자취를 서술하면 소설책 서너 권 분량은 될 것이다. 현재 내 나이 55세, 그러나 내가 살아온 세월은 허물 많고 부족해 부끄러운 고백에 다름 없다. 울산공업지구가 들어서던 1962년 무렵 우리 부모는 경북 영천서 가까운 임포에서 울산으로 이주했고, 5남매를 낳으며 맞벌이했다. 1968년 울산에서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 배곯은 적은 없었다. 6.25 전쟁 후여서 나보다 한 세대 위인 부모들이 고생했지만 우리 세대에는 어릴 때 조금 어려웠으나 고도성장기의 혜택을 맛보며 별 탈 없이 잘 자랐다. 한편 우리 가족들은 하나님을 몰랐지만 나는 울산고 2학년 때 친구 유승곤의 전도를 받고 울산그리스도의 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학생회와 주일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며 세례를 받았고, 그 교회 집사였던 박광자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애정 어린 관심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교회 집회 중에 방언을 받은 나는 등하교 하면서 교회에서 기도를 올렸다. 그 무렵 문화적 환경이 풍요롭지 못한 탓에 성탄절 같은 교회의 문화 행사는 당연히 고급하게 여겨졌고, 문학의 밤 같은 행사를 하면 친구들을 초대하고 전도하기가 쉬웠다. 한 마디로 세상 문화를 주도했던 교회문화였던 것이다. 아쉬운 고교 시절을 뒤로 하고 나는 지인의 권유로 서울 홍은동에 있던 총회신학교(합동보수)에 1987년도에 입학해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다. 군대를 전역한 후 어린 시절부터 신문 배달을 했던 나는 조선일보 수암지국의 총무로 사회에 첫발을 들였다. 학자금을 모아 서울의 신학교에 다시 진학한다고 계획했던 나의 길은 그 길로 계속 신문지국의 생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어졌다. 급기야 울산에서 경상일보라는 지역신문 지국장도 2년가량 했고,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 신문판촉까지 10년 정도 일했다. 그 사이 세월이 빠르게 흘러 내 나이 30살이 넘었다. 이러다가 신학교는 영영 가지도 못하고 졸업도 못하겠다고 생각할 무렵 울산신학교라는 곳에 편입해 야간에 공부했다. 그때 작은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최소한의 생활비가 될 거 같아 나는 국민일보 문서선교사에 지원서류를 접수했다.
그래서 합격됐다는 통보를 받고 티코를 직접 운전해 국민일보 본사에서 치러진 임명장 수여식 감사예배에 참석했다. 그때 국민일보를 창간했던 조용기 목사가 직접 설교했고, 임명장을 수여해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는 울산에서 매주 월요일마다 새벽에 출발해 국민일보 부산지사에서 아침 직원예배를 같이 드렸고, 울산과 전국적으로 다니며 문서선교사로 활동하게 됐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방송채널이 많지 않았고, 인터넷도 활발히 보급되지 않아 신문시장은 한창 성장세였다. 또 그만큼의 경쟁이 치열하기도 했으며 후발주자였던 국민일보도 판매신장에 많은 공을 기울였다. 나는 국민일보 대구지사에 출근해 경주를 비롯한 포항지역의 여러 교회에서 소개를 받아 부수 확장에 애썼다. 나는 부산 포도원교회 김문훈 목사 집회에 6개월가량 따라다니며 참석했다. 그래서 목사님의 후의로 포도원교회에서 문서선교사로 2년가량 활동하기도 했다. 그 당시 김문훈 목사 집회에 운전비서로 섬기며 여수시 연합집회, 속초시 연합집회, 홍천시 연합집회 등 부흥회 때 국민일보를 많이 소개받았다. 또 목사님의 배려로 장학금을 받고 부산의 총회신학교(합동개혁)에 다닐 수 있었다. 이렇듯 내가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잠언 16장 9절을 곱새겨보게 된다. 내가 불신 가정에서 자라서 비신자들의 삶의 풍경과 정서를 잘 이해할 수 있고, 또 내가 예수님을 영접해 신앙생활을 하니 교회의 분위기와 정서를 십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굿뉴스울산의 편집장이 되어 이렇게 수기까지 적고 있으니 ‘문서선교의 길이 주님의 뜻인가 보다’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다.
이제 ˹굿뉴스울산 창간일지˼에 대해 말할 차례다. 우선 굿뉴스울산의 창간배경과 발행인 이금희 목사의 이야기를 전한다. 굿뉴스울산 발행인 이금희 목사는 서울예고, 계명대 미대를 졸업하고 옷 장사를 하면서 한 달 매출만 수천만 원에 이를 정도로 장사에 수완이 뛰어났다. 교회 다니는 사람을 어리석게 여길 정도로 세상에 빠져 살다가 우연히 믿음 생활을 시작한 뒤로 열심히 주를 섬겼다. 그러나 하나님의 숱한 부르심에도 목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은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차들이 쏜살같이 달리는 도로 한복판에서 거짓말처럼 한 발짝도 떼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차에 치여 비명횡사하는구나 생각하는 극적인 그 순간 ‘주여, 순종하겠습니다!’ 외마디 비명 같은 서원을 내뱉었다. 바로 그때 발이 떼졌고 횡단보도를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이렇게 언약의 교회를 담임하게 된 이금희 목사는 20여 년 전 목회 초기에 중직자를 비롯한 80여 명의 성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는 쪽과 말아야 한다는 쪽으로 성도들은 양분돼 서로 갈등했다. 결국 사람들과의 갈등 끝에 목회를 그만둔다고 마음먹은 이 목사는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모든 사람을 다른 교회로 가라고 선포해버렸다. 그때부터 노숙자, 알콜중독자, 결혼 못한 청년들이 들어와 예배를 마치고 교제 시간에 들어가는 식대만 해도 수백만 원에 이르렀다. 10년 전 나는 경북기독신문 울산주재기자로 10개월 간 일했던 적이 있다. 그때 대판 12면의 지면 중에서 2개면에 울산지역 교계뉴스를 전했고, 지대(紙代)로 매월 100만 원의 문서선교비를 지불했다. 광고가 부족할 때면 모자라는 금액을 자진해 희사(喜捨)한 사람이 언약의 교회 이금희 목사다. 개척교회에서 무모하다는 소리도 제법 들었던 10개월의 과정을 거치자 하나님은 굿뉴스울산을 창간하라고 명하셨다.
이금희 목사는 “하나님, 이 작은 개척교회에서 어떻게 신문을 창간하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저에게 이것을 명하시니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라고 질문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금희 목사에게 “내가 교회의 부흥을 약속해줄 테니 신문을 창간해 문서선교의 항해를 시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언약의 교회라는 조그마한 개척교회에서 굿뉴스울산이 창간되었다. 굿뉴스울산을 창간하기 전, 언약의 교회는 지역의 서너 군데 교회와 연합하여 매주 수요일마다 노방전도를 했다. 개척교회 전도를 돕는 전도팀과 더불어 수요일마다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며 순회하며 교회끼리 힘을 합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전도지와 전도 용품을 나눠주며 일 년 동안 연합하며 영적인 일들을 도모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굿뉴스울산을 창간하게 됐다. 전도팀의 일원이었던 권사 한 사람은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계속 강권하신다며 300만 원을 헌금해 그 돈이 창간의 종잣돈이 됐다. 이런 형편이었기에 모두 다 무모한 도전이라 여겼고, 신문에 종사하는 당사자들조차 때로 힘겨워 이 일을 계속해 나가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그럴 때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위로와 은총을 베풀면서 용기를 내어 다시 이 일을 계속하도록 채근하셨다.
휴먼시아장로교회를 빌려 2013년 1월 13일 드렸던 창간예배는 군종감 출신의 이원호 목사(대련남산교회)가 설교했고, 김상식 목사가 색소폰 연주를 하는 등 뜻있는 사람들의 동참이 이어졌다. 2016년 3주년 감사예배가 아름다운침례교회에서 드려졌는바 기독문화선교회 서정형 대표의 소개로 탤런트 이영후 장로를 강사로 초빙해 예배를 드렸다. 이영후 장로는 이 고단한 사역을 연약한 여성목회자의 힘으로 어떻게 감당할지 마음아파하며, 따뜻한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고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굿뉴스울산은 재정압박이 심해지고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는 발행인 이금희 목사는 빚을 내가면서까지 이 사역을 지속해 왔다. 굿뉴스울산이 창간 7주년 감사예배를 에바다농아교회에서 드린 후 그동안 누적됐던 재정압박에 시달렸고, 곧바로 코로나19로 3년간 세계적인 팬데믹으로 모든 일상이 셧다운되다시피 했다. 우리는 ‘차라리 지금이 우리가 쉬어가는 시간이구나’ 하며 그동안 문서선교에 매진하며 힘들었던 영육 간의 휴식을 취하며 재기를 도모해 왔다.
작은 개척교회에서 10년 동안 지령 30호를 기록하며 대판 12면 30만 부의 신문을 발행해왔다. 우리가 어려워질 때 함께했던 모든 사람이 떠나갔고, 물레방아의 물처럼 종이신문의 지면도 과거의 것으로 흘러갔다. 그럼에도 인터넷상에는 수만 개의 글, 사진, 동영상들이 우리의 전리품으로 남아있다. 굿뉴스울산은 유튜브 굿뉴스방송국을 5년간 운영해왔다. 엊그제 구독자 12,000명이 됐고, 누적 조회수가 400만을 기록했다. 10년간 문서선교의 현장을 이어온 우리에게 하나님은 유튜브 굿뉴스 방송국을 통해서 비상하라는 약속처럼 우리는 현재 이 채널을 활기차게 운영하는 중이다. 바라건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이사장과 좋은 후원 이사들이 세워진다면 문서선교만 아니라 유튜브 방송 채널로 웅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매체로 우리는 개척교회를 돕는 문서선교와 영상선교를 펼치고, 어린이 기자단과 청소년 기자단을 세워 미래 세대에 우리가 체득한 노하우를 전수할 것이다. 또 유튜브 아카데미를 통해서 영상 기술을 가르쳐 주고, 도서출판 굿뉴스를 통해서 자서전을 쓸 수 있도록 지도하며, 글쓰기 교실을 통해 아이들과 성인들에게 글을 다루는 노하우를 제공하고자 한다. 또 블로그나 카페를 운영해 홈페이지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미디어 선교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가질 때 우상숭배척결 등 개인적인 성결이 우선됐고, 더불어 그들이 합심기도를 드릴 때 블레셋의 침략으로 풍전등화 같은 위기의 순간을 맞닥뜨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도자 사무엘에게 믿음으로 의탁하자 하나님은 우레를 발해 블레셋에 혼란을 일으켰고, 블레셋이 어지럽게 도망가자 이스라엘은 끝까지 추격해 그들을 진멸했다. 그런 다음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서 돌을 세워 에벤에셀 기념비라고 명명했다. 그런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굿뉴스울산은 여태껏 문서선교를 감당해 온 발자취가 에벤에셀의 기념비처럼 하나님께 가납되기를 희구하고 있다.
박정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