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08. 31
누런 흙탕물이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한 적이 있다. 거센 장맛비로 수위가 한껏 올라간 한강 하구 풍경은 강물이 강바닥을 흐르는 게 아니라 하늘에 물길을 낸 듯했다. 2011년 7월 하순 인천공항에서 올라탄 버스 안에서 '이대로 살아 서울로 갈 수 있을까' 걱정했을 정도다. 서울 관악구엔 한 시간 만에 110.5㎜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가까운 우면산에 산사태가 생기면서 주민 18명이 숨졌다. 광화문과 청계천, 강남 포스코 사거리도 곳곳이 침수되거나 범람하고 정전 사태가 잇따랐다.
▶ 여름장마 뺨치게 더 드센 게 '가을장마'다. 여름철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완전히 물러간 7월 말~9월 사이에 생긴다. 기상학 용어는 아니지만 '2차 장마'라고도 한다. 경쟁자 없이 한여름을 지배하던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찬 바람에 맞서는 시기다. 슬슬 가을 기운을 몰고 오는 북 세력과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라도 치른 듯 한바탕 '유혈' 상처를 남긴다. 8월 말부터 나흘간 중부에 물 폭탄을 터뜨린 '1984년 대홍수'가 그랬다. 인명 피해만 186명에 이재민이 부지기수였다.
▶ 그때 군 기상 장교로 근무했던 반기성 케이웨더 예보센터장은 "북한이 우리한테 쌀이며 옷이며 구호품을 주겠다고 제안했는데 북한 구호품이 전달된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기억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두고 남북 관계를 개선한다며 정부가 북측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일산 제방이 무너지고 사망 163명, 이재민 18만명에 5000억원이 넘는 피해를 낸 '1990년 대홍수' 땐 유언비어마저 난무했다. "서울 강남 주민들을 살리려고 제방을 일부러 무너뜨린 것 아니냐"고 했다. 난폭한 가을장마로 민심까지 흉흉했다.
▶ 그제 기상청은 서울에 내린 기습 폭우를 제때 예보하지 못했다. 호우주의보 수준을 넘는 비가 이미 쏟아졌는데도 한 시간 넘게 주의보 발령을 안 해서 퇴근길 시민들이 골탕을 먹었다. "예보 아닌 실황 중계하는 기상청"이란 비판이 또 나왔다. 기상청 예보국장은 기자들에게 하소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당황스러움을 넘어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상상하지 못한 현상'인지라 '(우리가 알던) 지식과 상식에 대해 다시 생각 중'이라 했다.
▶ 1초에 5800조(兆) 번 연산 능력을 갖춘 수퍼컴퓨터도, 천리안 인공위성도 무용지물일 만큼 예보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다행인 건 이번 가을장마가 아직은 과거보다 피해가 덜하다는 점이다. 기상청 예보관들의 분발이 필요하다.
박은호 논설위원 unopark@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