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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왕세계(1914년 갑인보)
駕洛國王世系(가락국왕세계)
一世 - 太祖皇太王(태조황태왕)
王姓金氏諱首露一云靑裔東漢光武建武十八年壬寅三月三日誕降于龜旨峰卽位于是月望日建國于弁韓地駕洛九干推戴也
왕의 성은 김씨로서 휘는 수로이며 또는 청예[1]라고도 한다. 동한의 광무제 때의 건무 18년 임인(42)년 3월3일 하늘로부터 구지봉으로 내려와 즉위하여, 이 달 보름(3월15일)에 변한의 땅에 나라를 세우니 가락 9간 들의 추대에 의한 것이었다.
[1]동국여지승람 고령현(高靈縣)편의 건치연혁
본래 대가야국(大伽倻國)이다. 자세한 것은 김해부의 산천 편을 보라.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도 한다. 그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대략 16대 5백 20년이다. 최치원(崔致遠)의 중[釋] 이정(利貞)의
전기를 살펴보면,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는 천신 이비가(夷毗訶)에 응감한 바 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金官國)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별칭이고
청예는 수로왕(首露王)의 별칭이라 하였다. 그러나 가락국(駕洛國) 옛 기록의 ‘여섯 알[六卵]의 전설’과 더불어 모두 허황한 것으로써 믿을 수 없다. 또 중 순응(順應)의 전기에는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正見)의
10대손이요, 그의 아버지는 이뇌왕(異惱王)이며, 신라의 영이찬(迎夷粲) 비지배(比枝輩)의 딸에게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으니,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할 것이 못된다. 신라 진흥왕이 멸망시
켜 대가야군으로 하였고,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고려 초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소속하고, 명종이 감무를 두었으며 본조 태종 때에 현감으로 고쳤다.
이 설화는 수로신화보다 늦은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서, 고령지방의 토착집단이 대가야의 정통임을 표방하며, 가야연맹의 주도적 존재로 대두하는 것을 반영한 설화로 보인다.
國號大駕洛都金官城故史或稱伽那迦邏金官駕洛封五伽倻以弁辰十二國爲藩漢史金官駕洛國爲弁辰之總王
국호를 대가락이라 하고 수도를 금관성이라 하니 역사책에서 혹 칭하기를, 가나/가라/금관가락이라 하고 5가야를 두었다. 변진 12국으로서 번한을 만드니 역사적으로 금관가락국이 변진을 거느리는 왕이 되었다.
梁書新羅傳新羅以百濟征高句麗不堪戎役襲百濟附庸於迦邏國
양서의 신라전[1]을 보면 신라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나, 신라가 백제를 갑자기 침공하자 백제는 가라국에 의지하게 되었다고 한다[2].
[1]양서(梁書)에 신라전(新羅傳)이라는 것은 없음. 梁書에서 고구려/백제/신라에 대한 내용은 ‘列傳第四十八 諸夷’에 나옴.
[2]아래의 내용에서 백제가 가랑(加良;가야)과 연합한 것을 의미한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 550년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지금의 천안 혹은 증평)을 뺏고,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지금의 전의)을 뺏는 등 공방전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두 성을 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
551년 백제는 고구려로부터 한강하류유역을 탈환하였으며, 신라의 진흥왕은 거칠부(居柒夫) 장군에게 명하여 고구려가 돌궐과 싸우는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영역인 한강 상류유역인 죽령(竹嶺) 이북 고현(高峴:지금의 철령) 이남의 10개 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게 하였다.
그리고 553년 7월에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점령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阿飡) 김무력(金武力)을 초대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이에 백제 성왕은 554년 가랑(加良;가야)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 전투에서 오히려 신주군주 김무력에게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으며, 백제군은 거의 전멸되었다.
[비고]가야의 멸망에 대한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삼국사기(1145년경 초간)에서 김구해의 금관국(가야)이 532년(법흥왕 때)에 멸망했고, 또 다른 하나는 삼국유사(1281~1283년경)에서 김구형의 가야가 562년(진흥왕 때)에 멸망했다고 한다. 그러면 562년에 멸망한 김구형의 가야와 백제와 연합하여 김무력과 553년에 싸웠다는 말이 되는데???---그렇다면 562년에 멸망한 가야의 김구형과 신라 장군으로 출정했던 김무력이 父子관계가 될 수 없다. --- 종합적 검토필요(김구해와 김구형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삼국유사의 기록이 틀릴 수 있고, 562년에 멸망한 가야는 김구형의 가야가 아닐 수 있다???)
壬寅滅音汁伐國乙卯與新羅戰于黃山破之國益强地方東至黃山河北至大良州西南際海西北至居陀州百濟爲界
임인(102)년 음즙벌국을 멸망시키고[1], 을묘(115)년 신라와 황산에서 싸워 이겨[2] 나라가 더욱 강성해져서 나라의 영역이 동쪽으로는 황산하(지금의 낙동강)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대량주에,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서쪽으로는 거타주에 이르러 백제와 접하였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편의 내용임.
[2]삼국사기 신라본기 지마이사금 4년편의 내용임.
至開國一百二十一年漢延熹五年十四國皆來朝賀尊王爲普州皇太王后爲普州皇太后
개국한지 121년이 되어 한나라 연희5년(162년)에 14개국에서 모두 사신이 찾아와서 왕이 보주황태왕이 된 것과 왕후가 보주황태후로 지위가 오른 것을 축하하였다.
是歲傳位于太子居登王與太后移御于水晶宮國初建宗廟于金官城西祀典重孟春三日七日仲夏重五仲秋五日十五日四仲冬
이 해에 왕위를 태자 거등왕에게 물려주고 태후와 같이 수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라를 세운 초기에 금관성의 서쪽에 종묘를 짓고 제사를 드렸는데, 1월(孟春) 3일과 7일 두 번, 5월(仲夏) 5일, 8월(中秋) 5일과 15일, 11월(仲冬) 4일에 지냈다.
至開國百五十八年漢獻帝建安四年己卯三月二十三日薨在王位百二十年 在太王位三十八年春秋百五十八歲 葬于納陵 ○納陵一曰首陵今金海府西郭外百步許龜旨峯南子坐
개국한지 158년이 되어 한나라 헌제의 건안 4년 기묘(199)년 3월23일 서거하시니, 재위한지 왕으로는 120년, 태왕으로는 38년이었고 나이는 158세였으며 장사는 납릉에 지냈다. ○납릉은 수릉이라고도 하며 지금 김해부의 서쪽 외곽에서 100걸음쯤에 떨어져 있는 구지봉의 남쪽 자좌이다.
○麗文宗置陵田充享禮知金州事金良鎰撰碑銘云今傳其文無其碑
○고려 문종(1046~1083)때 능의 경비를 충당할 밭을 배당하여 충실한 제사를 드렸으며, 지금주사 김양일이 비명을 찬술했다고 하며 지금 그 글은 전해지나 비는 없다.
本朝 仁祖丁亥後孫道伯許積 竪碑撰外裔全榮{滎}書先是士林修會老堂尊香火其後自 朝家設備致享
조선에 들어와 인조 정해(1647)년 후손인 관찰사 허적(1610~1680)이 비를 세우고 찬하였으며 외손의 후예인 전영(전형)이 글을 썼다. 이 이전에 사림에서 회로당을 보수하고 제사를 드렸으며, 그 후부터 조정에서 제사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英宗甲午御製致祭重修祭閣 正宗辛丑壬子並致祭寘陵監春秋二仲降香祝 御製會老堂懸版文
영조 갑오(1774)년 임금께서 치제를 하고 제각을 중수하였다. 정조 신축(1781)년과 임자(1792)년에 치제를 하고 능감을 두어 봄과 가을 2번 제사를 드리게 했으며 회로당의 현판문을 임금께서 지어 내렸다.
至 太王戊寅命建殿設齋室置寢郞降號 崇善殿竪神道碑後孫判書許傳撰外孫參判趙濟華書後孫本陵參奉金顯{氵+柱}篆
태왕(고종) 무인(1878)년에 이르러 전(殿)을 짓고 재실과 침랑을 두도록 명하였으며 숭선전이라는 호를 내렸다. 신도비를 세우고 후손인 판서 허전이 비명을 찬술하고 외손인 참판 조제화가 글을 쓰고 후손인 본릉 참봉 김현주가 제목을 썼다.
龜旨峯以王發祥之地 隆熙二年戊申竪碑曾曾孫前享官金雲培撰碑陰銘外孫奎章閣學士閔泳璘書後孫前郡守金鍾應篆隆熙三年己酉南巡時 命官致祭
구지봉은 왕의 발상지로서 융희 2년 무신(1908)년에 비를 세우고, 증증손인 전 향관 김운배가 비음을 찬술하고, 외손인 규장각 학사 민영린이 글을 쓰고 전 군수 김종응이 제목을 썼다. 융희3년 기유(1909)년 남쪽을 순시할 때 [순종이?] 관리에게 치제하도록 명하였다.
普州皇太后諱皇玉姓許氏許國君阿隃陀王長公主漢光武九年癸巳誕生年十六駕洛開國七年戊申秋七月七日乘大船載石塔至駕洛王親迎爲后延熹壬寅封普州皇太后后弟曰寶玉嘗來遊金官如桃山聖母而國人歎其歸也
보주 황태후의 휘는 황옥이고 성은 허씨로서 허국 임금인 아유타왕의 맏 공주이다. 한나라 광무 9년 계사(33)년에 탄생하시어 나이 16세 되던 가락국이 개국한 지 7년째인 무신(48)년 7월7일 큰 배를 타고, 석탑을 싣고 가락에 당도하였다. 수로왕이 친히 영접하여 황후로 삼고 연희 임인(162)년 보주황태후로 봉하였다. 태후의 동생은 보옥으로서 일찍이 도산성모[1]와 같이 금관국에 놀러 온 적이 있으며, 그가 돌아가실 때 나라사람들이 탄식하였다.
[1]桃山聖母; 출처는 모르겠으나 박혁거세를 낳았다는 서술성모(西述聖母)를 말하며 서술성모가 선도산(仙桃山)에 산다고 하여 일명 도산성모라고도 한다.
命其山曰長遊寺曰長遊村曰長遊慕其神聖以慰太后也
그 산(長遊山;佛母山)을 장유라 하고 절도 장유라 하고 마을도 장유라 부르도록 명령하여, 그 신성을 그리워하는 태후를 위로 하였다.
后生十子金海郡南有胎峯胎臺長太子二子從后國姓賜許氏七子厭世上昇一子居漆封君曰居漆君一女昔太子云
태후는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김해군의 남쪽에 태봉이 있으니[1] 이는 태를 모신 태대(胎臺)이다. 장남은 태자가 되고 두 번째 아들은 왕후나라의 성을 따라 허씨를 내렸으며, 7명의 아들은 세상을 싫어하여 하늘로 올라갔고, 나머지 한명의 아들은 거칠(居漆)로서 군(君)에 봉하여 거칠군이라 하였다. 한명의 딸은 석태자[2]에게 시집갔다고 한다.
[1]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마산시 합포구 진동면 태봉리로 되어 있음.
[2]신라의 4대왕 탈해이사금(57~80)이거나 또는 그의 아들
在后位百十四年在太后位二十八年東漢靈帝中平六年己巳三月朔日薨春秋百五十七歲 ○葬龜旨峯東子坐南距王陵二里許
왕후로 있은 지 114년이고 태후로는 28년을 지냈으며 동한의 령제 중평 6년 기사(189)년 3월 1일 서거하시니[1] 나이는 157세였다. ○구지봉의 동쪽 자좌에 장사지내어 남쪽으로 왕릉과 2리(800m 정도)쯤 떨어져 있다.
[1]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한다.
有陵表戊寅降殿號合享于 崇善殿如舊禮后之渡海王 命留天于望山島神鬼于乘岾以候之及后舟到泊處曰舟浦村下陸處曰夫人塘在熊川地贄送綾袴于山靈處曰綾峴在府南石塔今在后陵墻內隆熙戊申竪碑于夫人塘外裔輔國閔泳韶銘判書張錫龍撰
능에 묘표가 있고 무인(1878)년에 전호(殿號)를 내렸으며, 옛날의 예와 같이 숭선전에 함께 제사를 모셨다. 왕후가 바다를 건너올 때 수로왕이 유천간에게 명하여 망산도로 가게하고 신귀간에게는 승점(乘岾)으로 가서 기다리게 하였다. 또 왕후의 배가 도착하여 머문 곳을 주포촌이라 하고, 배에서 내린 곳을 부인당이라 하니 웅천땅에 있다. 비단바지를 폐백으로 보내어 산신령께 바친 곳을 능현(綾峴;비단고개)이라 하고 김해부의 남쪽에 있다. 석탑은 지금 왕후 능의 담장 안에 있다. 융희 무신(1908)년 부인당에 비를 세우고 외손의 후예인 보국 민영소가 쓰고 판서 장석룡이 찬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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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世 - 居登王(거등왕)
太王長子東漢建安四年己卯卽位蜀漢延熙十六年癸酉秋九月薨在位五十四年
태왕의 장남으로서 동한의 건안 4년 기묘(199)년에 즉위하여 촉한의 연희 16년 계유(253)년 가을 9월에 서거하시니 재위 54년이었다.
○謹按一譜下同庚辰卽位以世孫冊封太子己卯王子仙見塵世衰葬與神女乘雲離去王歎登都江石島巖招仙銘影幀後人名招仙臺一曰招賢又曰招七點山人神始作伽倻琴至今傳樂府
○삼가 한권의 보첩을 살펴보니 한나라 건안의 경진(200)년에 즉위하여 세손을 태자로 책봉하였다고 되어있다. 기묘(199)년에 왕자인 선(仙)이 속세의 세상을 바라보고 쇠약해져 장사지내니 신녀(神女)와 함께 구름을 타고 이별하여 가버려, 왕이 한탄하며 도읍의 강에 있는 석도암(石島巖)에 올라가 <아들인> 선(仙)을 불러다가 초상(影幀)을 새겼는데 후세사람들이 이름 붙이기를 초선대라 하고 초현[1]또는 칠점산이라 부른다. 인간과 신이 비로소 가야금을 만드니 지금 악부에 전해온다.
[1]招賢; 어진 사람을 부르던 곳이란 의미
漢書卞韓國有瑟其形如筑辛亥滅甘文國己巳新羅王子昔于老使于洛還朝爲島倭襲殺王怒斬二百級又沙伐梁叛滅之壽一云二百三歲 ○陵都西野麓近世一譜爲道王
后諱慕貞父泉府卿申輔一云以后遺命火葬東史申輔妻太后出來時媵臣
한서에 변한국[1]에는 슬(瑟;거문고)이 있는데 모양은 축(筑;거문고)과 같다. 신해(231)년에 감문국을 멸망시켰다[2]. 기사(249)년에 신라왕자 석우로[3]가 낙(가락)에 갔다가 조정으로 돌아오다가 섬나라 왜가 습격하여 <석우로를> 죽이자, 왕이 노하여 200여명의 왜인을 죽이고 또 사벌양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멸망시켰다. 나이는 한편으로는 203세라고도 한다. ○능은 도읍의 서쪽 야산 기슭 근방이고 세보 중 어떤 보첩은 도왕이라고 한다. 왕후는 모정으로서 천부경 신보의 따님이며 한편에서 말하기를 왕후는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 역사서에는 신보의 부인은 태후가 올 때 태후의 몸종이었다고 한다.
[1]이런 책은 없음. 아마도 後漢書卷八十五 중 東夷列傳第七十五에 있는 辰韓의 내용을 말하는 것 같음.
[2]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조분이사금 편에 나옴.
二年秋七月以伊湌于老爲大將軍討破甘文國以其地爲郡.
2년(231) 가을 7월에 이찬 우로(于老)를 대장군으로 삼아 감문국(甘文國)을 토벌하여 함락시키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
[3]석우로는 10대 나해이사금의 아들임(신라본기 나해이사금편). 249년은 12대 첨해이사금 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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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世 - 馬品王(마품왕)
居登王子延熙癸酉卽位晋元康元年辛亥春二月薨在位三十八年一云母后本神女琉冕庚辰歲孕王九年戊子誕王五十二年春三月三日與父王離塵同爲上昇有史蹟晋元康庚戌薨在位三十七年 ○陵無傳一云成王
后諱好仇宗正監趙匡孫 趙匡妻名慕良亦太后媵臣壬子薨 ○陵王陵同原無傳
거등왕의 아들로서 연희 계유(253)년에 즉위하여 진나라 원강 원년 신해(291)년 봄 2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8년간이었다. 혹은 말하기를 모후는 본래 신녀였는데 류(유구국?)나라에서 벼슬을 하였다고 하며, 경진(200)년에 왕을 임신하여 9년 무자(208)년에 왕을 낳고 52년(나이 또는 재위?) 봄 3월3일 부왕(거등왕)과 같이 속세와 이별하여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또 다른 사적에는 진나라 원강 경술(290)년에 돌아가셔서 재위가 37년이었다고 한다[1]. ○능은 전해지지 않고 성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호구이며 종정감 조광의 손녀이다. 조광의 부인의 이름은 모량으로 역시 <허>태후의 몸종이었으며 임자(292)년에 돌아가셨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이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1]삼국유사에는 291년 1월 29일 돌아가셨다고 되어있다. 누군가가 아들 거질미왕이 291년에 즉위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맞추기 위해서 마품왕은 290년에 돌아가셨다고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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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世 - 居叱彌王(거질미왕)
諱一云居叱今勿麻品王子元康辛亥卽位丁巳伊西古國叛遣將滅之壬申日本國請婚不納歸于新羅晋永和二年丙午秋七月薨在位五十六年一云德王
后諱阿志阿干我躬孫一云永和丁未薨 ○陵祔王陵同原無傳
휘를 거질금물이라고도 한다. 마품왕의 아들로서 원강 신해(291)년에 즉위하여 정사(297)년에 이서고국의 반란에 장수를 보내어 멸망시켰다[1]. 임신(312)년에 일본국이 청혼하였으나[2] 받아들이지 않자 신라로 돌아갔다. 진나라 영화 2년 병오(346)년 가을 7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57년간이었다. 또는 덕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아지이며 아간을 지낸 아궁의 손녀이다. 또는 영화 정미(34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에 붙어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례이사금편
伊西古國來攻金城我大擧兵防禦不能攘忽有異兵來其數不可勝紀人皆珥竹葉與我軍同擊賊破之後不知其所歸人或見竹葉數萬積於竹長陵由是國人謂先王以陰兵助戰也.
이서고국 (伊西古國)이 금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우리 편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막았으나 물리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군사가 왔는데, 그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그 사람들은 모두 귀에 대나무 잎을 달고 있었다. 우리 군사와 함께 적을 공격하여 깨뜨린 후 어디로 간지를 알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대나무 잎 수만 장이 죽장릉(竹長陵)에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앞 임금이 음병(陰兵)으로써 싸움을 도왔다.고 하였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이사금편
三年春三月倭國王遣使爲子求婚以阿湌急利女送之.
3년(312) 봄 3월에 왜국 왕이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였으므로 아찬 급리(急利)의 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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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世 - 伊尸品王(이시품왕)
諱一云伊麻一云伊尸品懷居叱彌王子永和二年丙午卽位義熙三年丁未薨在位六十二年 ○陵無傳一云明王
后諱眞信父司農卿克忠一云義熙丁未薨 ○二陵在金海陵洞異國兵禍每因金氏陵號而不知葬法疑有古品物寶藏入寇輒掘陵故蓋致失陵
휘는 이마, 또는 이시품회라고도 한다. 거질미왕의 아들로서 영화2년 병오(346)년에 즉위하여 의희 3년 정미(407)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62년간이었다. ○능은 전하지 않고 명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진신으로 사농경 극충의 따님이다. 의희 정미(40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두 능은 김해의 능동에 있었으나, 다른 나라(일본?)와의 전쟁이 있을 때마다 김씨의 능호가 붙어 있어서, 장례의 법을 모르고 고물건이나 보물이 있는 것으로 여겨[1] 도둑(왜구?)들이 자주 능을 도굴하고 다시 덮어 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1]옛 장례의 법에는 물건이나 보물을 넣지 않았던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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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世 - 坐知王(좌지왕)
諱一云金叱伊尸品王子義熙丁未卽位戊申日本始置營于對馬島洛羅二邦自是爲憂王寵一宮姬忠臣朴元道諫且筮得解卦曰解而拇朋至斯孚王乃辭之擯女于荷山島國大治宋永初二年辛酉夏五月薨 在位十五年一云神王
后諱福壽父大阿干道寧 ○陵幷無傳
휘는 또는 김질이라고도 한다. 이시품왕의 아들이며 의희 정미(407)년에 즉위하였다. 무신(408)년에 일본이 대마도에 병영을 설치하자 가락과 신라의 두 나라가 이것으로 인하여 우려하였다[1]. 왕이 총애하는 궁희가 한명 있었는데 충신 박원도가 간하면서 또 점을 쳐서 괘를 풀어 말하기를 ‘점을 풀어보니 엄지손가락 한 쌍이 쪼개졌다가 다시 붙었다,’고 하니 왕이 이에 여자를 물리쳐 하산도로 보내고 나라를 크게 다스렸다. 송나라 영초2년 신유(421)년 여름 5월 돌아가시니 재위는 15년간이었다. 신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복수이며 대아간을 지낸 도녕의 따님이다. ○능은 둘 다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편
七年春二月王聞倭人於對馬島置營貯以兵革資粮以謀襲我我欲先其未發揀精兵擊破兵儲舒弗邯未斯品曰臣聞兵凶器戰危事況涉巨浸以伐人萬一失利則悔不可追不若依嶮設關來則禦之使不得侵猾便則出而禽之此所謂致人而不致於人策之上也王從之.
7년(408) 봄 2월에 왕은, 왜인이 대마도(對馬島)에 병영을 설치하고 무기와 군량을 쌓아 두고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서 그들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우리가 먼저 정예군사를 뽑아 적의 진영을 격파하고자 하였다. 서불한 미사품이 말하였다.
신(臣)이 듣건대 무기는 흉한 도구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다.라 합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서 다른 사람을 정벌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이기지 못하면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으니, 험한 곳에 의지하여 관문(關門)을 설치하고 그들이 오면 막아서 쳐들어와 어지럽힐 수 없게 하다가 유리할 때 나아가 그들을 사로잡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른바 남을 유인하지만 남에게 유인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왕이 그 말에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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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世 - 吹希王(취희왕)
坐知王子辛酉卽位癸酉與百濟通和甲申日本犯境王拒之堅守萇山居漆國等設備後鷄林數被邊患宋元嘉二十八年辛卯春二月薨在位三十一年一云惠王壬寅薨
后諱仁德父角干進思一云思申 ○二陵無傳
좌지왕의 아들이다. 신유(421)년에 즉위하여 계유(433)년에 백제와 화친을 맺었고[1], 갑신(444)년에 일본이 변경을 침입하자[2] 왕이 이를 막아 지키고 장산에 거칠국 등을 설치하여 방비하였다. 후에 계림(신라)이 여러 번 변경을 침입하여 근심하였다. 송나라 원가 28년 신묘(451)년 봄 2월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1년간이었다. 또는 혜왕이라고도 하며 경인(450)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3]. 왕후의 휘는 인덕이며 각간을 지낸 진사 또는 사신의 따님이다. ○두 능은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편을 베낌
十七年夏五月未斯欣卒贈舒弗邯秋七月百濟遣使請和從之.
17년(433) 여름 5월에 미사흔(未斯欣)이 죽어, 서불한을 추증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이에 따랐다.
[2]삼국사기 신라본기 눌지마립간편
二十八年夏四月倭兵圍金城十日糧盡乃歸.
28년(444) 여름 4월에 왜의 군사들이 금성을 열흘 동안 에워싸고 있다가 식량이 다 떨어져 되돌아갔다.
[3]삼국유사에는 ‘元嘉二十八年辛卯二月三日崩’이라고 되어 있어 취희왕의 돌아가신 해가 451년이나 다음의 질지왕의 즉위연도가 451년이라고 되어 있으니, 취희왕의 돌아가신 해를 450년으로 억지로 꿰어 맞추고자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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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世 - 銍知王(질지왕)
吹希王子一云銍智辛卯卽位南齋書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詔曰伽倻王荷知海外奉贄授輔國將軍本國王丁卯獲白雉遣新羅國初太王一子于進禮城設王宮太子壇設瞻星臺王就幔殿合婚處建寺曰王后王祀皇太后于金城齋永明十年壬申薨在位四十二年一云辛未薨諡莊王
后諱邦媛父沙干金相一云壬申薨 ○陵無傳
취희왕의 아들이다. 또는 질지(銍智)라고도 하며 신묘(451)년에 즉위하였다. 남제서에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왔다.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가야왕 하지가 바다건너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드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고하였다.’고 되어있다[1]. 정묘(487)년에 흰 꿩을 사로잡아 신라로 보냈다. 나라의 초에 태왕(수로왕)의 한 아들을 진례성으로 보내어 왕궁과 태자단을 건립하고, 첨성대를 설치하였으며, 왕이 천막으로 만든 집(幔殿)에 들어가 결혼한 장소에 절을 세워 ‘왕후왕사’라 하였다[2]. 황태후는 금성재로 모셨다. 영명10년 임신(492)년 돌아가시니 재위는 42년이었으며 또는 신미(491)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하며 시호는 장왕이다. 왕후의 휘는 방원이며 사간을 지낸 김상의 따님이며 임신(492)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능은 전하지 않는다.
[1]南齊書卷五十八, 列傳第三十九 蠻 東南夷편에 나옴
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
‘가라국’은 ‘삼한’의 종자이다. ‘건원’ 원년(479)에 나라의 왕 ‘하지’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조서를 내려 말하길 널리 헤아림은 높은 곳에서 시작하니 먼 이가 감화 되었다. ‘가라왕 하지’가 동쪽의 먼 바다 밖에서 정성으로 폐백을 받드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을 내린다. 로 되어있고 위 본문에는 공물을 바쳤다는 글이 생략되어 있음.
[2]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내용과 유사함.
銍知王一云金銍王元嘉二十八年卽位明年爲世祖許王玉王后奉資冥福於初與世祖合御之地創寺曰王后寺納田十結充之.
질지왕(銍知王) 김질왕(金銍王)이라고도 한다. 원가(元嘉) 28년에 즉위하여 이듬해에 시조(始祖)와 허황옥 왕후(許黃玉王后)의 명복(冥福)을 빌기 위하여 처음 시조(始祖)와 만났던 자리에 절을 지어 왕후사(王后寺)라 하고 밭 10결(結)을 바쳐 비용에 쓰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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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世 - 鉗知王(겸지왕)
銍知王子齋永明壬申卽位新羅智證王始定國號丙戌滅小伽倻梁普通二年辛丑薨在位三十年一云諡肅王
后諱淑父角干出忠 ○陵一云在居漆國內山以上八代陵無傳
질지왕의 아들이다. 제나라 영명 임신(492)년에 즉위하였다. 신라의 지증왕이 비로소 국호를 정하고[1] 병술(506)년 소가야를 멸망시켰다. 양나라 보통 2년 신축(521)년에 돌아가시니 재위는 30년간이었다. 시호는 숙왕이라고도 한다. 왕후의 휘는 숙으로 각간을 지낸 출충의 따님이다. ○능은 거칠국내에 있는 산에 있다고 하나 이상 8대의 능은 전하지 않는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4년(503년)편의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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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世 - 子 讓王(양왕) <子 世宗, 武力王, 武得>
諱仇衡鉗知王子普通四年辛丑卽位甲戌百濟數伐新羅王子武力將兵在外大破濟兵殺濟王明穠在位十二年壬子傳位于世子仇亥王將與世子入于知品川世子乃傳位於弟武力王乃率世子世宗妃嬪及宗廟樂器移御于太王之水晶宮以終
휘는 구형이고 겸지왕의 아들이다. 보통4년 신축(521)년에 즉위하였다. 갑술(554)년에 백제가 여러 번 신라를 침범하므로 왕자 무력장군과 병사가 밖에서 백제병사를 크게 무찌르고 백제왕 명농(성왕)을 죽였다[1]. 재위는 12년간이며 임자(532)년에 왕위를 세자인 구해왕(=세종)에게 물려주고 <구형왕은> 세자들과 같이 지품천(지명, 아래에 설명 나옴)으로 갔다. 세자(구해=세종)는 이에 동생인 무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왕(양왕,구형왕)은 세자인 세종(구해)과 비빈을 거느리고 또 종묘악기(제사용 비품)를 가지고 태왕(수로왕)의 수정궁으로 옮겨서 종말을 고하였다[2].
[1]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편
十五年秋七月修築明活城百濟王明穠與加良來攻管山城軍主角干于德․伊湌耽知等逆戰失利新州軍主金武力以州兵赴之及交戰裨將三年山郡高于都刀急擊殺百濟王
15년(554) 가을 7월에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성왕]이 가량(加良)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新州) 군주 김무력이 주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가 급히 쳐서 백제 왕을 죽였다.
[2]본문대로라면 왕위는 구형->아들 구해->구해의 동생 무력이고
가족관계는 구형의 아들은 구해와 무력이고 구해는 즉 세종임.
[비고]가야의 멸망은 삼국사기에는 532년이고 마지막왕이 구해라고 하며, 삼국유사에는 562년으로 마지막왕이 구형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구해를 구형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형(삼국사기에는 구해)이 다스리던 가야가 532년에 멸망하고 무력(삼국유사에는 구해)이 다스렸다고 주장하는 가야가 562년에 멸망하니, 이러한 햇수의 차이 30년을 억지로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 구해는 구형의 아들이고 무력은 구해의 동생이라고 해야 들어맞으니 필자인 휘운배가 가설(假說)을 세우고 억지로 맞다고 주장하고 있음.
史稱傳位于弟者史之傳誤而世子仇亥之於武力之謂也 王曰讓王仇亥曰世宗武力王之上諡也
역사서에서는 말하기를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다고 하나 역사서가 전하는 것은 틀렸다. 세자 구해(=세종)가 무력에게 물러준 것을 말한다[1]. 왕이라고 할 때는 양왕이라 하며, 구해를 세종이라 하는 것은 무력왕이 선왕을 위해 올린 시호이다.[2]
[1]즉 ‘동생에게 물려주었다는 것은 양왕이 구해에게 물러 준 것이 아니고, 양왕의 세자인 구해가 동생인 무력에게 물러 준 것을 말한다.’라는 뜻
[2]여기서는 구해=세종
○陵在駕洛國知品川王山東庚坐今山淸郡西二十里壘石爲邱四面皆七級制度朴古如箕子陵
○능은 가락국의 지품천 왕산동쪽의 경좌에 있는데 지금의 산청군 서쪽 20리 쯤이다. 돌을 쌓아 4면의 경사로 되어 있고 7층의 계단으로 그 제도(형식)가 기자릉과 같다.
○在位一曰四十二年丁丑薨春秋六十九是在王位十二年及傳位後三十一年在上王位至壬午革國合歷歲也
○재위는 하나의 설로서는 42년이고 정축(557)년에 돌아가시어 나이는 69세였다. 이는 왕위로서 12년과 왕위를 물려준 후 31년간 상왕으로 지내다가 임오(562)년에 이르러 나라가 바뀌었으니 이를 합한 기간이다.
山曰王山臺曰王臺寺曰王山寺卽讓王父子世宗二王之遺蹟也 王山下有宗廟舊趾是知宗廟樂器太子妃嬪移御太王之水晶舊宮一曰興武王遺趾則非也興武乃追諡也 豈有王號於山名射臺也 又非復國則焉有創始祖廟哉
산은 왕산이라 하고, 대는 왕대라 하고, 절은 왕산사라 하니 즉 양왕과 부자(父子)인 세종의 두 왕의 유적이다. 왕산아래에 종묘의 구 터가 있는데 이는 종묘악기로 알려져 있으며 태자와 비빈이 태왕(수로왕)의 수정궁으로 옮긴 것이다. 또 다른 말로는 흥무왕의 구 터라고 하나 이는 틀렸다. 흥무는 추가로 내린 시호이다. 어찌 왕호를 산에 있는 사대에 이름붙이겠는가. 또 나라는 회복되지 않았는데 시조의 종묘가 만들어 질 수 있는가.
陵東距金官三百里陵舊失傳至朝鮮正宗戊午始復陵自營邑報京司越六年 純祖癸亥京鄕雲仍建陵齋講堂廟舍門樓有司禁樵焉
능은 동쪽으로 금관(김해)와 300리 거리에 있으나 예전에는 실전되어 오다가 조선 정조 무오(1798)년에 이르러 비로소 능을 복구하고, 이를 관리하는 읍에서 서울에 보고하였다. 6년 후 순조 계해(1803)년 서울과 지방에서 후손들이 능의 제실과 강당과 종묘와 문루를 짓고, 유사들을 두었으며 나무하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1].
[1]숭선전지에는 1803년의 일에 대해 나타나 있지 않음.
○雲培謹按一譜云讓王辛亥冬燕子樓鳴驚動長安王命毁樓有太祖王牒曰燕子卽壬子傳國羅王不逆天此乃禪位而啓傳國之兆云
○운배가 삼가 살펴 보건대 어떤 보첩에서 말하기를 ‘양왕의 신해(531)년 겨울에 연자루에서 우는 소리가 나서 장안(나라의 수도, 김해?)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왕이 연자루를 부수어 버리라고 명했다 한다. 태조왕(수로왕?)의 글에서 말하기를 연자라는 것은 임자(532)년에 나라를 신라왕에게 바친다는 뜻이니 하늘을 거스르는 일을 하지 않아 이에 선위하여 나라를 바칠 조짐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한다.
又按王之傳位誣以革鼎先之者三國史法興王本記繼之以輿地勝覽玆後作史者因之尤之者禪坦瑛掇俚訛爲秘函而三王考趙鎭寬王陵碑序銘李秉鼎撰王陵祠碑及畵像碑銘誣罔天人誣斷王統三史僞歎可勝誅哉國史有錯家譜正之者竊有望於來賢也
后諱桂花父{分/叱}水伊一云丁卯薨
또 생각해보면 왕(구형왕)이 왕위를 <신라에> 전해 주었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나라가 다시 바뀐 것이다. 옛 사람들이 삼국사기의 법흥왕 본기[1]를 계승하여 여지승람에 어렴풋이 나타내었으나, 후세의 역사가들이 <거짓말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2]. 더욱이 중 탄영이 속된 것과 거짓을 가려내어 써서 비밀함속에 넣어 삼왕고 라는 책 속에 실렸고, 조진관이 쓴 왕릉비명의 서문과 이병정이 찬술한 왕릉사 비와 화상비명도 거짓으로서 하늘을 속이고, 사람들은 거짓으로 왕통을 끊어버리고 삼국사가 허위로서 한탄스러우니 다 없애야 할 것이다. 나라의 역사서에는 착오가 있고 가정의 보첩이 올바르니 가만히 현명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왕후의 휘는 계화이고 뿐수이의 따님이다. 정묘(547?)년에 돌아가셨다고도 한다.
[1]삼국사기 신라본기 법흥왕 편
十九年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以國帑寶物來降王禮待之授位上等以本國爲食邑子武力仕至角干.
19년(532)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가 왕비와 세 아들 즉 큰 아들 노종(奴宗), 둘째 아들 무덕(武德), 막내 아들 무력(武力)을 데리고 나라 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본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아들 무력은 벼슬하여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2]어떤 근거로 이를 거짓말이라고 하는지? 위의 삼국사기보다 더 오래된 正史가 없는 이상 삼국사기를 신뢰해야 하지 않는가. 모두들 개인의견을 가질 수는 있으나 틀렸다고 하기에는 곤란함.
[참고]삼국유사에서 가락국의 멸망에 대한 내용은 구형왕에 대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다.
仇衡王金氏正光二年卽位治四十二年保定二年壬午九月新羅第二十四君眞興王興兵薄伐王使親軍卒彼衆我寡不堪對戰也仍遣同氣脫知爾叱今留在於國王子上孫卒支公等降入新羅.
구형왕은 김씨이며 정광 2년에 즉위하여 치세는 42년이다. 보정 2년 임오(562)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니 왕은 친히 군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적병의 수는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對戰)할 수가 없었다. 이에 동기(同氣;형제) 탈지이질금(脫知尒叱今)을 보내서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고, 왕자와 장손(長孫) 졸지공(卒支公) 등은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
○陵王陵同原云未詳
○왕후의 릉은 구형왕릉과 같은 언덕이라고 하나 알 수 없다.
○雲培謹按戊午邑儒閔景元所發坦瑛秘函弓劍若錦袍王所御也繡裳影幀王與后也此記粧撰須辨眞贋作今日大訓河圖則不得不求古而返正焉
○운배가 삼가 생각해 보면 무오(1798)년 읍의 유학자인 민경원이 발견한 탄영의 비함(秘函)속의 활과 칼과 약간의 비단으로 만든 옷은 왕의 것이었다는 것과 수를 놓은 치마의 영정은 왕과 왕후이라는 이러한 기록은 꾸민 것이니(粧撰) 모름지기 진위를 밝혀야 할 것이다. 오늘날 크게 교훈을 주는 하도[1]의 그림같은 것을 어떻게 하든지 구하여 올바른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1]河圖; 중국 황하에서 나왔다는 신비한 그림. 우주순환과 인생의 이치를 나타내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