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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A0. 여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됐었던 건지 모르겠다. 무신경하고 경건한 나의 가족들 때문인지. 친구란 놈들의 배신으로 인한 나의 하찮고 치졸한 분노 때문인지. 나 자신도 도저히 머리를 뒤흔들어도 알아낼 수가 없다. 나빠진 건강 탓인가? 아주 예전에 헤어진 항상 웃는 얼굴의 그 여자애 때문인가? 아님 살을 한꺼번에 뜯어내 버릴 것 같던 그 사정없는 햇볕 때문에? 그래... 아마도 그놈의 날씨 때문이었을 꺼다. 그때는 너무도 더운 여름이어서 나 자신도 정수리부터 타고 내려오는 땀 때문에 모든 것을 재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름이긴 하지만 그해의 여름은 서른도 되지 못한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길거리의 모두가 나에게 욕설을 퍼붓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여름이었다. 땀으로 뒤범벅이 된 육체를 이끈 채 흉폭 하게도 환한 세상으로 강요당했던 그해 여름은 나에겐 끝나지 않는 영원한 시간인 것만 같았다.
매장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 갈 만큼 힘이 들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내 머리 속에서 예상된 그것에서 아주 재미난 살붙임과 의외성으로 더해져 전혀 주제의 틀에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나의 계획에 놀랄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고전 소설을 만화영화로 만든 것처럼 색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대상에 있어서 여자와 남자는 확연히 달랐다. 변변한 연예 경험도 없는 내가 같은 또래의 여자를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반항하는 그녀의 많은 이야기와 눈물은 내가 그것을 더 관찰하기 위해 계획을 지연시킬 뻔 할 정도의 생동감이 있었다. 인간적인 호기심이란 것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에 사뭇 놀랐다. 삼일 전 그 뚱뚱한 샐러리맨에 비하면 이 여자의 경우는 마치 승부에서 진 것 마냥 그녀의 이야기에 내가 쩔쩔매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분명 내가 계획한건 살인이지 범죄가 아니다. 결국 내가 칼로 그녀의 배를 찌른 직후부터 나는 그런 감정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전세는 역전 되었고 나는 지나친 피로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단 한번의 칼질로 서서히 죽어가는 그녀를 지켜보았다.
두 번째 시체를 묻으며 나는 졸음이 왔다. 눈꺼풀을 뜨기가 너무도 힘들다. 며칠 동안 체력적으로 너무 많은 무리를 한 것이다. 이번에는 토막도 내지 못하고 그냥 묻고 말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너무 얕게 묻어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 땅위로 얼핏 보인 것이 걱정되기도 했으나 다시 그곳에 올라 갈 순 없었다. 그 순간 나에게 중요한건 수면 이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칼이 내 배에 들어 왔을 때 나는 그때서야 녀석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내 배를 쳐다보면서 나는 그놈에게 남은 힘으로 욕을 퍼부었다. 절대적인 내 사랑도 지금의 나를 구해줄 수 없다. 제기랄... 모든 것이 현실로 들어와 버렸다. 젠장할.. 저깟 미친놈 하나 때문에...
쫌만 있으면 지금 사귀고 있는 S가 청혼을 할 것이 분명하다. 부유한 가정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란 얼굴이 희고 어깨는 아주 적당히만 넓은 그런 남자. 어엿한 젊은 사장에다가 일류대학에 유학까지 다녀온 그런 S의 청혼을 코앞에 둔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원통하여 드디어 눈물이 나온다. 나도 해본 적 없는 욕설이 내 입밖에 나온다. 그게 소리로 저 녀석에게 들리는지는 지금 죽어가고 있는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저놈을 죽어가면서 마지막 힘을 짜내어 저놈을 저주할 수밖에 없다.
S를 위해 그의 무례한 말과 행동들을 웃으며 받아들인 나에게 화가 난다. 그가 나에게 요구했던 섹스에 나는 지금 화가 난다. 그래 S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죽고 있는 지금 순간에서야 이제까지 가슴 속으로 부정해왔던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가 나와 관계하는 도중 흘린 습관적인 눈물에 내가 연민을 가졌던 것은 내가 그를 사랑해서가아니라 분명 다른 이유다. 분명 S는 이상하다. 나는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지금에야 인정하고 만다. 나는 S가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도 외롭고 못생긴, 돈이 필요할 땐 가끔 몸도 파는 여자인 나를 구원해준 그는 나의 영웅이었다. 나는 그가 내 몸에 어떤 것을 집어넣어도 그가 나를 발로 넘어뜨려도 나는 그에게 "사랑해요 S"라고 말할 뿐이었다. 젠장할. 그런데 결과는 이꼴이다 S고 나발이고 나는 지금 방금 술집에서 만난 이상한 놈에게 납치되었고 그놈은 지금 내배에 칼을 꽂아 넣었다.
피가 발목까지 흘러내린다. 지금은 아무 기억도, 내가 누구인지도 선명하지가 않다. 그놈이 나를 보고 있다. 이상한 기분이다. 마치 S와 섹스하던 그런 기분이다. 그놈은 S와 는 전혀 다른 인간이다. 그런데 나는 마치 S와 호텔방에서 하던 이상한 장난을 다시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설마 이것도 S의 장난일까.. 그럼 나는 죽지 않는 것인가. 나는 이게 모두 S의 연극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나는 혹시나 나를 쳐다보는 놈이 S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대한 행복한 표정을 지어내야만 한다,
발명
세상에서 정확것은 거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최소한 나만큼은 아주 조금씩 정확해 지고 있는 기분이다. 뚱뚱한 샐러리맨을 죽인 건 정확히 72시간 전의 일이다. 72시간 동안 나는 잠을 자고 TV를 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한 번하고 처음으로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왜 그 뚱뚱한 사내를 죽였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물론 우발적인 측면도 있었다. 늦은 밤 산에 들어가는 입구에서 만난 그 사내는 중학교 시절 나를 괴롭혔던 녀석의 얼굴과 많이 닮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사람은 언젠가 만난 적이 있는, 가령 비좁은 지하철에서 뚱뚱한 육체로 나를 압박했다던가 아니면 길거리에서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던 자신감 있는 몸집의 땀 냄새 나는 사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정확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72시간 전에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고 내가 술 취한 사내에게 갑자기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란 당시 살인이었다는 것이다.
내 생애 첫 살인 후 3일의 시간동안 나는 제법 건강한 사람들의 흉내를 낼 수 있었다. 아침 신문을 보고 자가용을 몰고 일이 끝나면 애인과 영화를 보는 그런 사람들 말이다. 나는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내 일이 있다. 살인은 분명 내 일이었다. 정말로 더운 여름에 나는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까지 갔었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의 흔한 이야기처럼 미쳐서 날뛰거나 자살을 결심하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그러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이 낡은 지하실에서 미치거나 죽어봤자 그건 나와 타자들 모두에게 크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된다면 슬퍼할 사람들은 물론 있을 것이다. 고향에 계신 작은아버지는 아마 자신의 짐을 끝내 제대로 짊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진짜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리고 나의 학교 친구들과 나의 좁디좁은 인관 관계에서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잠시 멍해질게 분명하고 맘 약한 이들은 울 수도 있다. 하지만 슬픔은 오래 가지 않는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가치관은 ‘슬픔을 딛고 행복해 지는 것’에 있다. 나에 대한 기억은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그들에게 조금씩 멀어져 갈 것이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 나와 같이 입학했던 한 녀석은 군복무 중 석유난로의 기름을 몸에 부어 불을 붙였는데 단번에 죽지 않은 녀석은 한 달 가량 썩어가는 몸을 고통스러워하며 세상에 이별을 고했다. 당시 급작스런 녀석의 죽음은 나와 친구들에게 정신적인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그리 친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세상이 끝난 것 마냥 울어대는 여자애들의 마음속에는 분명 슬픔이 있었을 것에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슬픔은 금방 잊혀진다. 그 금방이라는 것은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의 십분의 일정도 수준도 되지 못한다. 영안실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 늦은 밤 모인 우리 과 아이들은 방학동안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서로의 소식을 물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여름 밤 가로등불 아래서 약간의 모기떼와 섞여진 그 밤의 이야기들 속에서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은 이미 지나간 이야기다. 물론 죽은 친구의 부모와 애인은 평생 녀석의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의 기억이란 것이 그들에게 극복해야할 대상이라는 점에서 우리네들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더군다나 나와 같은 사람은 그런 부모와 애인 같은 평범한 존재까지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아마 그 뚱뚱한 샐러리맨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런 기분이 든다. 그는 분명 건장한 땀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키도 크고 젊은 시절 운동을 많이 했는지 어깨가 벌어져있고 그를 토막낼 때 살에 파묻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그가 제법 단단한 팔 근육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건강한 몸을 가진 샐러리맨이 나에게 죽임을 당했다. 신문에서 떠들어 대는 괴상한 과학적 통계확률을 낸다면 비쩍 마르고 겁이 많고 힘이 약한 내가 그 비계 덩어리를 죽일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할 것이다.
하지만 살인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물론 내가 사전에 꽤 많은 준비를 한 까닭도 있다. 나는 산 입구에서 사람을 위협해서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살인 장소로 유도할만한 길을 사전에 마련해 놓았다. 내 배낭엔 칼과 밧줄, 가짜 총, 삽, 파이프 등등이 필요한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저장돼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뚱뚱한 녀석이 죽어라고 반항을 했다면 72시간 전에 나는 내 생에 첫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가 어린애처럼 울지 않았더라면, 살려달라고 하면서 지렁이처럼 기어 다니지 않았다면, 복부에 칼을 찔러 넣었을 때 마치 애를 낳는 것과 같은(실제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해괴한 비명을 지르지 않았더라면, 그가 조금만 더 어른스럽게 대처했다면 당황한 내가 칼을 떨어뜨리고 도망갔을지도 모를 텐데 말이다. 그날 우리 둘 사이에 영화에서 나오는 격투 따위는 없었다. 나는 ‘이 사람은 살고 싶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살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칼을 쥔 채로 상대를 꽁꽁 묶어둔 상황에서 ‘모든 건 연극이었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다. 분명 그와 나는 둘 다 우리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에 와버렸다. 나머지 일들은 이미 많이 이야기와 TV를 통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둘 다 알고 있는 대로 했을 뿐이다.
그 후 보름 뒤에나 실현하기로 했었던 나의 두 번째 살인 계획은 첫 살인 후 72시간 이라는 생각보다 빠른 시점에 실현된다. 역시 날이 너무 더운 탓도 있지만 간만에 저녁을 든든히 먹어둔 영향도 크다. 오늘은 식욕이 당기는 날이다.
행복
여덟시가 다되어 간다. 하지만 나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여덟시에 한 약속은 이미 30분 전의 전화 한통으로 깨져버렸다. 나는 뛰어갈 필요도 없고 화장을 다시 고칠 필요도 없고 공중화장실에 들여 긴장을 풀기위해 담배 한 개를 필 이유도 없다. 6시에 집에서 출발하기 전에 나는 잠깐 울었다. 한참을 울고 다시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S와의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는데 S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일이 늦어서 오늘 저녁은 같이 못 먹겠다고, 미안하다고 말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전화를 끊고 약속장소로 가는 중이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나는 지금 배가 무척 고프고 이렇게 차려입고 집에 돌아가기가 싫다. 집에 가서 밥을 먹게 되면 울게 된다. 그래서 최소한 밥만은 혼자서라도 꼭 S와 약속한 그 레스토랑에서 먹어야겠다.
S와 나는 요즘 심각한 위기에 빠져있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위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던 간에 지금의 상황은 나에게 가장 큰 위기임이 틀림없다. S에게 새 여자가 생긴 것 같다. 아마 오늘 약속을 깨버린 것도 그 새 여자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마음속에 욕지거리가 밀려오지만 오늘은 일단 참는 수밖에 없다.
S는 지금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것이다. 나와 새 여자를 저울질 하면서 어쩌면 이제 나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내가 승리할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강력한 무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내가 이기는 것이다. 그 여자는 S를 가질 자격이 없다. S는 나의 것이고 나의 미래다. 남의 것을 탐하는 자는 이길 수 없다.
그 여자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할 줄 알고 누구에게나 상냥한 그런 여자다. 좋은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였으며 아직 서른이 되려면 한참 먼 나이다. 그녀는 S와 함께 있으므로 해서 자신이 행복해 지려고 한다. 대화를 하려고 하고 책을 읽으려고 하고 S의 일이나 취미를 이해하고 싶어 한다. 그녀는 여성스럽고 얌전하며 좋은 부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건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S가 내 것이라는 사실 밖에 없다. 시골의 조그만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스무 살에 서울로 와서 공장과 술집에서 일을 배웠고 10년 후인 지금도 그 일을 하고 있다. S는 분명 앞으로 나의 10년을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해줄 사람이다. 볕이 잘 드는 좋은 아파트에서 우리는 새 인생을 설계할 것이다. 그 아파트에는 얼마 전 잡지에서 본 홈씨어터라는 것도 설치되 있을 것이고 손뼉을 치면 형광등이 저절로 켜지는 곳일 것이다. 나는 S로부터 내 가게를 하나 받을 지도 모른다. 물론 S가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명품매장이란 곳에 우수고객이 되어있을 것이고 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부잣집 아줌마들과 돈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S는 내 미래다. 나는 그 미래를 위해 투자했다.
내가 처음 S와 잠자리를 같이 했을 때 나는 S를 소유했다고 생각했다. 잘생긴 외모에 사업가의 능력과 더불어 부유한 부모까지 둔 S는 성격 장애가 있었다. 그는 여자와 똑바로 이야기 하지 못했다. 여자와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내가 S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만남이 순전히 잠자리만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S는 나에게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는 잠자리에 있어 좀 괴팍한 측면이 있었지만 나는 참을 만 했다. S에게서 내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S는 착한 사람이다. 그는 발로 나를 때리는 것을 좋아하고 내 얼굴 상처에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서 관계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항상 관계가 끝난 다음에 나를 끌어안고 울어주는 사람이다. 나는 그럴 때면 괜찮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당신이 이런 행동을 평생 동안 할 수 있는 유일한 여자는 나라는 사실을 명심시킨다. 우리의 관계는 아름답다. S는 내 몸을 사랑하고 나는 S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S의 후배라는 그 여자가 나타났을 때 나는 그년이 우리의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관계를 깨뜨릴 수 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S의 욕망을 채워주려는 여자는 나밖에 없다.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여자는 나밖에 없다. 하지만 점점 S에게 오는 그년의 전화가 많아지면서 나는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잘 자라난 아름다운 그년은 S와의 잠자리를 수긍할 만큼의 능력이 없다. 이것은 그년에겐 S이외의 다른 대안들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 S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 만의 하나 S가 그년을 위해 자신을 바꾸려고 한다면 나의 대안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나는 다시 10년 동안의 세계로 가야한다. 아니 그 세계까지도 이제 늙어버린 나를 받아줄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나는 몇 달 전부터 피임약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오늘 아침 생리가 없었다. 나는 언젠가 S가 나에게 심각한 이야기를 할 경우 우리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지 않는 게임을 할 수 있다. S는 따뜻한 사람이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은 심각한 불행을 만드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S는 모질지 못한 사람이다. 우리의 아이를 위해 바른길로 생각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나에게 청혼을 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만나자는 S와의 오늘 저녁 약속이 어쩌면 내가 예견해온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까닭인지 S는 나오지 않겠다고 했다. 머 괜찮다. 어차피 우리의 행복한 미래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사실 아이가 뱃속에서 좀 자란다음 알게 되는 것이 S의 바른 선택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니까....
레스토랑에 들어온 나는 잡지에서 보아두었던 S와 같이 꼭 먹고 싶었던 어려운 말로 쓰인 스테이크를 S를 닮은 점원에게 주문한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비록 S는 일 때문에 못 오지만 내 아이가 있으니 행복하다. 그게 S의 아이라서 더 행복하다. 나의 행복을 막을 수는 없다. 모든 게 잘되어 가고 있다. 음식이 맛있다 오늘은 식욕이 당긴다
임박
샐러리맨을 죽인 지 삼일이 지났다. 나는 매우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무언가를 집중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많은 일에서 해방될 수 있다. 특히 나의 첫 살인의 경우 그것은 분명 내 인생의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머래도 사람을 죽였으니까. 내가 그 살인을 계획하면서부터 살인을 행하고 지금까지, 나는 죽을 것만 같은 더위 속에서 건강하고 있다. 그 뚱뚱한 인간을 죽였던 것을 생각하면 어쩔 땐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도덕적 관념에 대해 깊은 사색에 빠지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즉 삼일전의 경험은 나에게 이 더위 속에서 피부에 들이닫는 수많은 뜨거운 자외선을 튕겨내 버리고 나를 미치지 않고 정상적인 일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나는 지극히 만족한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의 살인을 할 계획이 없다. 나는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다. 지금하고 있는 이 아르바이트조차도 전혀 힘들지가 않다. 한 시간 동안 웃으면서 혼자 식사를 하던 여자가 나를 부른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용돈을 받으러 가는 거 마냥 헤헤거리면서 테이블로 간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손님.”
유아
S가 휴대폰을 받지 않는다. 조금씩 짜증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머 그래도 괜찮다. 오늘 나는 행복하니까 하지만 나의 지금 기분상태를 S에게 보고하고 싶은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혼자서는 완벽하지 못하니까... 최소한 지금같이 행복한 순간에 S가 없는 것은 큰 유감이다.
그런 기분에 와인을 좀 많이 마신 듯 하다. 술집에서 일했던 여자답게 술에 약하지 않은 나이지만 와인만은 잘 마시지 못한다. 양주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알콜이 들어간 음료에 불과한데 나는 와인을 먹으면 알지 못하는 기분에 쌓여버린다. 그 이유는 내가 S와 같이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먹고 나면 내가 주위를 문득 둘러보곤 하는 것에 있다. 주위에는 우리와 같은 연인들이 있다. 비싼 정장을 입고 머리가 단정한 남자들과 얼굴이 희고 상냥하게 미소를 머금은 예쁜 여자들이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 그들은 곧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에 대해 이야기도 하며 자신의 감정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들 모두 교양이 있으며 좋은 부모를 가지고 있다. 남자는 스스로 미래에 대한 자신이 있고 멋진 직업이 있으며 여자는 자신의 매력에 대한 자신이 있고 아무에게나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너무나도 적당한 존재라서 그들의 사랑을 막을 어떠한 경제적이거나 도덕적인 걸림돌이 없다. 이런 곳에서 와인을 먹으면 나도 마치 이 주변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너무 행복해 진다. 나 또한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가슴 속에서 끓어오는 행복이 주체할 수 없게 되어 나는 그만 취한 상태가 돼버린다. 이럴 때면 S의 발에 맞았던 기억도 다 사라지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저 S를 바라만 봐도 행복하다.
나는 지금 S가 보고 싶다. 너무 행복해서 그를 사랑하고 싶은데 S는 계속 내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근데 저기 S를 닮은 웨이터가 있다. 마른 몸에 조금 작은 눈 그리고 높은 콧대만 본다면 저 웨이터는 영락없는 S다. 그의 이름표에는 ‘서진’이라고 적혀있다. 그래 서진... 나는 서진을 불렀다. 지금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음식을 마지막으로 먹으면서 나는 서진이라는 웨이터와 말을 좀 해야겠다.
서진
나를 부른 그 여자는 이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다. 좀 못생긴 얼굴에 필요 이상으로 큰 키를 가진 이 여자에게는 사람의 호감을 끄는 건강한 웃음이 없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미소는 남들의 호의를 끌어내는 가진 사람들의 연습된 미소가 아니라 자기 기분대로 히죽거리는 보기 싫은 것이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런 미소가 싫다. 그리고 더운 날씨 때문인지 입은 그녀의 어깨가 드러나는 옷마저 눈에 거슬린다. 이 가게에 오는 가진 여자들은 더위를 타지 않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 여자에게 살인을 권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최소한 이 여자는 이런 더위를 느끼면서 민소매를 입고 주체할 수 없는 미소를 띠우지는 않을 것이다.
술이 취한 여자는 나에게 애인이 있냐고 묻는다. 나는 없다고 대답했지만 그녀는 지금 내 이야기가 너무도 듣고 싶으니 헤어진 애인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했다. 그때 내가 왜 그런 쓸모없는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술 취한 유아라는 여자에게 내가 매력을 느꼈을 수도 있고 또 혼자 와인을 먹다가 취해버린 것에 연민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분명 그때 유아란 여자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대화
남자는 자기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게가 문을 닫을 때가 다 되서 그런지 나 이외에 다른 손님은 없다. 서진이라는 종업원이 앞자리에 앉아 다짜고짜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내가 그에게 말을 시켰던가?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지금 술기운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다. 남자는 자신의 첫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첫사랑 같은 건 없다. 솔직히 그런 기억 따위는 없다. 나는 실제로 아버지를 비롯한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 몸에 자신의 물건을 넣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게 끝나면 좀 쉬었다 다시 넣기를 원할 때도 있고 아니면 다시는 원하지 않고 다른 여자에게로 가버릴 때도 있다. 나는 그들을 믿지 않는다. 물론 상황에 따라 나를 계속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제껏 나를 계속해서 필요로 하는 사람을 따라나선 적은 없다. 그들은 건강하니까... 언제나 건강하고 밝은..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면 나를 버릴게 틀림없다. 아니면 내가 그들을 버리던가. 하지만 S는 다르다. S는 미래란 것을 약속해 주는 사람이다. 내가 S를 계속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평생. 그래서 나는 S의 태도에 상관없이 그를 사랑할 수 있다. 첫사랑이 있다면 내겐 S다.
처음에 S와 닮았다고 생각했던 이 서진이라는 사람은 보면 볼수록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다. S보다 얼굴이 좀 길고 입술이 도톰하다. S보다 좀 더 말랐고 좀 더 피곤해 보인다. 하지만 목소리만큼은 확실히 S와 닮았다. 그는 말을 할 때 마다 셔츠의 목을 매만진다. 좀 더운가 보다. 그를 보고 있으니 이 레스토랑의 냉방은 내가 느끼기에도 좀 더운 것 같다. 누가 에어컨을 좀더 세게 틀어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나는 술기운 때문에 그런 말을 부탁할 기운이 없다. 서진이란 사람은 꽤 잘생긴 듯 하다. 하지만 키는 좀 작다. 그리고 손이 참 곱게 생겼다. 이런 남자들은 대게 나 같이 생긴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키가 큰 까닭도 있겠지만 외소해 보이지만 강한 성격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남자들은 건강한 체격이지만 금방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나 같은 여자를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서진과 같은 스타일을 좋아 한다. 왜냐하면 S가 꼭 그렇기 때문이다.
“그 여자애 이름도 손님처럼 유아였어요.”
남자는 어느새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나는 열성적으로 떠드는 그에게 조그만 호의를 보여야만 할 것 같아 한마디를 거든다. 사실 나는 그가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었다.
“헤어진 이유가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데요.”
“요점은 그 여자애가 너무 건강하고 밝았던 거에 있었습니다. 제가 그 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건강한 심신을 가진 밝고 이쁜 여자 애였는데 저는 그게 싫었었나 봅니다. 그때 전 솔직히 TV 청소년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비정상적으로 밝은 성격의 그 애가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헤어지고 나서 저는 몇 년 만 있으면 그 여자애도 세상을 남들처럼 인식 할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자기 연습장에 위선이나 슬픔 따위의 단어를 낙서할 수 있을 조그만 정도까지로 말이죠. 그때는 저 같은 사람을 만나도 잘 사랑할 수 있을 거니까 지금 이 애를 만난 건... 그러니까.. 시기를 잘못 탔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기를 잘못 탔다... 머 그럴 수도 있다 내가 S를 만났던 건, 시기를 잘 타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남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으나 나는 건강하고 밝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남자들은 대개 그러지 않는다. 건강하고 밝은 것은 남자에게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들이 여자에게는 외모로 나타난다는 것에 있다. 남자는 여자의 내면을 알 수가 없다. 나는 아무리 꾸미고 노력했어도 그런 여자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선택은 남자가 한다. 나는 선택받기 불리한 위치에 있는 여자다. 만약 밝고 건강한 여자가 싫다는 이 서진이라는 남자를 내가 예전에 만났다면 남들과 틀리게 나를 선택했을까....
“물론 다시 만날 생각도 해봤죠. 헤어지고 2년 정도 됐을 때에 저는 갑자기 그 애가 보고 싶어 예전 이메일 주소를 가지고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검색을 해봤습니다. 근대 그게... 너무 똑같더라구요... 그 거부감이 드는 밝고 어리고 건강한 웃음이요. 저는 그 애의 환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자기의 학벌이나 배경이란 것이 얼마나 경쟁력이 없는지 알게 될 거라고... 그래서 실패도 해보고, 남자에게 울어도 보고, 사람들의 이기심을 인정하게 될 거라고... 근대 저는 좀 놀랐습니다. 홈페이지 속에 그 애는 예전과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거든요. 그 애 과거 꿈에 비해선 형편없는 곳이지만 한 전문대학에 진학도 하고 수영도 배우고 있더라구요. 홈페이지에 제가 생각한 위선이나 슬픔 따위의 단어는 없었어요. 저는 연락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마 평생 그 애와 나는 다른 길을 가겠죠. 그 애도 달라지지 않을 거고 아마 저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걸 아니 좀 슬프더라구요. 사실 저는 좀 달라지고 싶었거든요.”
죄값
유아라는 손님은 ‘재미있는 이야기네요’하고 말했지만 표정은 그 반대였다. 나는 이야기를 마치고 이 여자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왠지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 멍청히 태양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떠들고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경우 떠들고 증오하고 사랑하고 살인해야 한다. 시원해지기 위해서 나는 내 방식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바보 같은 이 여자는 내가 그녀의 애인을 닮았다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술이 취한 채 반쯤 엎드려 있다. 나는 이 멍청한 여자에게 같이 술이라도 먹으로 가자고, 이야기를 좀 더하고 싶다고 말한다.
일이 마치길 기다린 후 나를 따라 나선 이 여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알고나 있었을까? 나는 그냥 막연히 알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는 가게의 손님들처럼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최소한 그것으로 죄값은 명백하다.
나는 비틀거리는 그녀를 등에 업었다. 몸이 따듯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더워졌다. 여름을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만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나와 그녀는 아마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일 것이다. 그해 여름은 밤공기 까지 더웠다. 나는 산 입구에 다가서자 그나마 조금 시원해 진 것을 느낀다. 빨리 끝내야겠다. 오늘은 일찍 자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