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쿠데타와 조국대첩 ....조국의시간을 읽고나서
조국장관수사는 처음부터 민주정권전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4.19후에 5.16 반혁명쿠데타가 있었듯이
촛불혁명의 성과를 무위로 되돌리기위한 반혁명 검찰쿠데타였습니다.
책에서는 검언정카르텔과 촛불시민의 대립관계로 파악하고 있으나 그당시 정치적 정세를 보면 미국 네오콘과 아베정권도 이 쿠데타에 관여했습니다.
검찰쿠데타는 볼튼의 음모와 아베의 도발에 검언정카르텔이 야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볼튼의 사주를 받은 아베는 2019.7.5. 문재인정권을 교체해야 한일관계가 바로설 수 있다며 공개적으로 도발하고 소부장을 수출규제했습니다.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오만방자하고 불공정한 짓입니까?
수출규제는 검찰쿠데타를 고무하기 위한 무기였습니다.
일본은 1997년 IMF 협약에 한국의 수입선 다변화정책 폐기를 삽입해 한국경제의 소부장 대일예속을 항구화시켜 놓고서는 파렴치하게 악용한 것입니다.
사실 IMF외환위기의 제 1원인도 국내 재벌들의 일본 중간재의 중복 과잉 수입에 있었습니다.
조선일보등은 이제 한국경제는 길어야 4개월이라고 맞장구쳤습니다.
즉 4개월이면 정권을 전복할 수 있다는 매국적 망상이었습니다.
한국은 일본의 도발에 대해 미국에 중재를 간곡히 요청했지만 미국은 방관했습니다. 이에 정부는 미국과 일본에 대한 대응으로 지소미아 파기를 압박했습니다. 신의 한수였습니다.
조국 민정수석은 청송녹죽 가슴에 꽂고 더불어 들불이 되자는 죽창가를 SNS에 올렸습니다. 박지원의원이 말했듯이 당시 여당의원들은 아무도 일본의 주권침탈적 공격에 대해 공격하지않고 수수방관하고 있었읍니다.
결국 촛불시민들이 나서서 일본 상품 불매운동으로 대응했습니다.
즉 검찰쿠데타 이전에 미국 네오콘+ 볼튼 +아베정권 대 촛불혁명의 대립구도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하에서 2019.8.9. 조국장관이 지명되었고 국내 토착왜구들이 검찰을 앞잡이로 회유하여....언론사 사주들이 윤춘장을 면담..... 볼튼의 음모와 아베의 호각소리에 발맞추어 총궐기했습니다.
윤춘장은 대통령이 시국관리에 버벅댄다고 막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친일 검찰쿠데타입니다.
촛불시민들은 8. 27일 검찰이 동시다발적으로 압수수색 도발을 하자 '조국 힘내세요' '가짜뉴스아웃', '한국언론사망', '정치검찰아웃', 등을 실검으로 올려 보수언론에 대항하여 대항 담론을 주도하였고 검찰청앞에서 집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지소미아 파기로 한미일 안보동맹 전략에 차질이 생기고, 촛불시민들이 서초동에 운집하자 트럼프는 음모의 기획자 볼튼을 파면하고
2019.9.24. 3차 한미정상회담으로 문재인 대통령 지지와 연대를 재확인했습니다.
국내 토왜들은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으로 당황했고 일본은 뒤로 물러나면서 짖어대는 겁먹은 개가 되었습니다.
2019.9.28. 서초동에 200만 촛불시민이 조국수호 검찰개혁으로 결집했습니다.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적폐들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경악하였고 동요하던 자칭 전문가들은 눈치보기에 바쁘고 촛불시민들은 스스로 자신의 위력에 놀랐습니다.
원래 혁명은 예술이라고 하지만 서초십자가등 200만 촛불의 아름다움에 경탄하고 승리에 대한 연대적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6차 집회때의 울분과 분노가 안도,환희, 확신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촛불혁명이 민주노총 전교조등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퇴진행동이 플랫폼 역할을 한 반면에 검찰개혁집회는 개국본,클리앙, 82 쿡,북유게등을 비롯한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가 연대해서 플랫폼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도자와 선도조직의 수직적 통제가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 다중협력,다름같이 연결된 집단지성의 주도성이 강화되었습니다.
물론 플랫폼의 불안정성이란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습니다.
무대앞보다는 무대뒤 대중이 압도적이어서 촛불시민은 집단지성에 의거 스스로 집회를 이끌고 통제하였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촛불민주주의로서
Peer assembly 거버넌스의 원초적모습(prototype)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조국가족이 조작된 혐의, 가짜뉴스 로 고통받고 , 번들거리는 눈과 가학성 미소로 조롱당하고 . 3대에 걸쳐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절해고도의 혁명적 고독과 비장감이 심화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검찰청 및 언론사 항의방문등 어떠한 투쟁도 조직하지 않고 수수방관했습니다.
촛불시민이 우리가 조국이다. 조국수호를 외친 것은 촛불혁명을 사수하고 검찰개혁의 장수로서 뿐만아니라 ,유적인간(자연적 존재이자 사회적 인간)으로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결의였습니다. 촛불시민들은 노무현대통령, 노회찬 의원같은 지못미가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2019.10.5.일 제 8차집회에서 김민웅교수는 연단에서 “저들은 적폐이고 우리는 혁명입니다. 저들은 폐기된 과거이고 우리는 미래입니다. 저들은 몰락하는 시대의 잔재이고 우리는 어둠을 비추는 영원한 빛입니다.”고 하여 검찰개혁집회가 촛불혁명의 연장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촛불시민들은 NO아베,검찰개혁 ,언론개혁, 토착왜구 박멸 ,자한당해체등 사회혁명적 요구를 공유했습니다.
실제로 조국장관은 서초동 촛불집회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십자가를 보고 “죽을 힘을 다해 한걸음 앞으로, 이를 악물고”에서 보듯이 삶과 투쟁의 의지를 미력이나마 회복했습니다.
이러한 서초대첩과 반일 불매운동(시민들은 즐겨먹고 즐겨입던 아사히 맥주와 유니클로를 끊었다), 촛불시민의 자발적 방역투쟁으로 2020.4.15. 총선에서 180의석을 얻는등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친일검찰쿠데타를 제압했습니다.
180석 총선승리는 조국대첩의 피날레였습니다.
지금의 더민주당 의원들은 조국대첩으로 인해 의원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일부의원들은 친일검찰쿠데타라는 역사인식 부재와 기득권적 공정의 덫에 걸려 촛불시민의 개혁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무위적 무능(180석 의석을 가지고 수수방관)과 개혁부진(부동산 폭등, 선별지급, 검찰개혁 입법 부진 )으로 인한 민심이반과 선거전략부재로 인한 보궐실패는 당과 내각의 지도부가 책임져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조국에게 뒤집어 씌우고 있습니다.
친일 검찰쿠데타를 제압한 조국대첩을 어불성설 조국사태로 오도하고 이를 사과,반성한다는 것은 결국은 친일 검찰쿠데타를 인정하고 토왜의 논리에 동조하는 사상이론적 무장해제일 뿐입니다.
날강도.도둑들이 내세우는 공정의 깃발은 기득권의 포장일 뿐입니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트라쉬마코스는 당시 정의로 통칭되는 아테네의 사회윤리나 법이 사실은 강자의 이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아테네의 사회윤리나 법이 정의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다수결에 의해 심판받으나 아테네 시민은 진리에 의해 심판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오늘날 토왜가 주장하는 정의와 공정은 기득권의 포장일 뿐입니다.
소위 자유민주주의와 헌법주의는 정의와 공정이 아니라 강자의 기득권을 사수하기 위해 법률에 의해 강제된 반민주정신(남북적대,국가보안법,검언정기득권등)일 뿐입니다.
친일검찰쿠데타의 성공을 위해 공정이라는 명분으로 조국가족에 대한 혐의조작과 파렴치한 공격이 자행되었습니다.
공정이라는 명분으로 특수강간범 김학의가 비호되고 있습니다.
친일 검찰쿠데타가 공정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되고 있습니다.
특권화된 학벌사회 상층에 있는 소위 스카이 캐슬러라는 불공정집단이 저열한 시기와 질투에서 공정을 논하며 감히 촛불을 들었습니다.
지금 청년학생들은 더이상 조영래같은 노동자 전태일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노학연대는 상상조차하지 않고 있습니다. 노동자 전태일을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청년 전태일로 탈색시킵니다.
보편적 사회 정의를 위한 투쟁에는 눈감고 알바와 비정규직,실업으로 신음하는 수백만 노동청년들을 모른 체하면서 학벌,스펙,장학금을 가지고 공정을 논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며 이를 위해 촛불을 든다는 것은 웃기는 일입니다.
후발제국주의였던 독일과 일본이 식민지의 공정한 재분배를 외쳐대며 전쟁을 도발한 것과 유사합니다.
오늘날 검찰같은 날강도와 도둑들이 노획물,기득권의 공정한 분배,공정을 외치고 있습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고 공정한 권리였고 주장하는 것은 날강도,도둑들의 공정입니다. 최근 김 양호등 토왜 판사들도 식민지배의 법적 정당성을 공정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공정은 형식과 절차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 전제가 정의롭지않거나 , 오픈 액세스가 아니라 닫힌 것이라면 공정은 날강도의 공정이 되거나 아니면 소부르주아의 자기합리화로서 경쟁형식에 불과합니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공정은 공정이 아니라 기득권의 포장입니다.
대표적 소부르주아가 진중권교수입니다. 그가 조국교수에 대해 자기만의 알량한 지식의 잣대로 기회평등, 공정, 정의가 없다고하면서 윤리적으로 패닉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조국사태는 공정과 정의의 문제이지 이념이나 진영으로 나뉘어 벌일 논쟁이 아니다고 하면서 투쟁하는 대중보고 미쳐버린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하면서 진보가 기득권이 되어서 젊은 세대에게 미안하다는 등 가소로운 주장을 하였습니다.
정의당의 소부르주아들은 좌익소아병적 입장에서 조국은 개혁가가 아니다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진중권같은 소부르주아들은 철학의 빈곤과 박제된 감성으로 인해 촛불시민의 투쟁을 이해할 수도 , 공감할 수도 없으며 단지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래서 미처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불공정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구조 때문이며 주로 친일적폐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입니다.그리고 우리사회 대표적 불공정집단은 스카이 캐슬러입니다.
그런데도 진중권교수는 이같은 구조의 문제를 조국교수 개인의 문제로 뒤집어씌우고 있습니다.일본의 문재인 정부 교체, 수출규제라는 주권침탈적 불공정 도발이 먼저있었는데 이에 호응한 친일검찰쿠데타가 공정한 것입니까?조국사태라니 어불성설입니다. 조국대첩입니다.
진보가 기득권이 되었다는 주장은 청년세대의 계급적 분노를 촛불정권과 조국교수에 뒤집어 씌워 신자유주의적 양극화를 은폐하고 청년세대의 이반을 가속화시키고자 하는 교묘한 책략입니다. 진보가 기득권이 된 것이 아니라 진보는 아직도 검언정 카르텔, 스카이 캐슬같은 기득권을 허물지 못했습니다.
조국장관의 반성과 개혁의 방향
조국장관은 심적으로 엄청나게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정의와 공정을 주장하면서도 과분한 혜택을 받았고 ,진보학자로서 언어와 실제 삶과 행동이 일치하지 못했으며 ,개혁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는데 아이문제에 대해 불철저한 안이한 아버지였고 당시 존재하는 법과 제도를 따라서 적법하고 합법일지라도 그것이 기득권유지가 되어 흙수저 청년들에게 미안하고 가슴아프다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강남성에 대한 성찰과 개선의 노력이 취약했다”고 번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 성찰과 별도로 먼저 강남좌파와 강남성이란 규정은 폐지되어야 합니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란 규정으로 충분합니다.
강남좌파란 부르주아가 만든 언어의 덫일뿐입니다.
토왜가 진보민주진영을 고립, 분열, 갈라치기 위하여 만든 강남좌파,먹물,가난하게 살기 같은 언어의 덫은 즉각 폐기되어야 합니다.
레닌도 체게바라도 엘리트 출신이라 한국에선 강남좌파,먹물로 매도될 것입니다.고행, 금욕, 가난은 종교의 기준이 될 수 있지만 , 진보운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사는 세상,아름다운 나라를 위해 부와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계층과 계급의 역량(지식, 힘, 자산등)을 결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더불어 촛불”이 되는 것 이것이 모든 것입니다.
단지 더불어 촛불이 되었을 때만이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감각을 나의 감각으로 전유할 수 있고 인간의 감각이 인간적 감각이 될 수 있습니다.
촛불은 공감입니다.
당시 존재했던 입시제도의 관행과 법과 제도를 따라 자녀들이 대학에 들어간 것은 개인적 반성이나 공정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성찰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지식이 생산의 주도적 요소가 된 인지자본주의하에서 오픈소스, 프리소프트웨어등 지식의 커먼즈가 주장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조국교수처럼 법을 전공한 요하이 벤클러 교수가 2006년 네트워크의 부에서 커먼즈기반 동료생산(commons based on peer productioncution) 으로 개념화했습니다.
대학의 서열화 특권화에 기반한 입시의 공정이 아니라 대학교육이 오픈과 프리가 되어야 합니다.
장학금의 공정한 분배가 아니라 등록금이 폐지되어야 하고, 스펙과 수시, 정시의 공정이 아니라 입시제도 자체가 폐지되어 입학자격시험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고교평준화가 아니라 모든 대학의 서열화가 폐지되고 평준화되어야 합니다. 대학교육이 오픈 액세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학에 가지 않는 노동청년에게는 충분한 소득의 일자리와 배움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집을 살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 아니라 추미애 장관이 말하듯이
누구나 집걱정없이 살 수 있도록 주거공간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공정을위해서는 스카이학생과 동문들은 스카이캐슬 해체투쟁에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기득권을 폐기하는 정의로운 공정입니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녀간의 동일노동 동일 임금이 되어야 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에 공감하고 차별임금 철폐를 위해 파업투쟁에 나서는 것 이것이 정의로운 공정입니다.
유럽의 68혁명처럼 청년학생들이 중고등학생들이 노동자들이 다같이 들고 일어날 때 이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명문 소브르 대학처럼 스카이 캐슬도 역사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지금은 집단지성 시대,P2P 네트워크 시대입니다.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식독점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스카이캐슬은 시간의 문제일 뿐 필연적으로 해체될 것입니다.
노동자 전태일은 말했습니다. 덩어리가 있어 부스러기가 있다고 자신은 이 덩어리에 뭉치지않고 이 덩어리를 해체하겠다고 했습니다.
검찰, 스카이캐슬등 기득권자가 주장하는 공정이란 기득권의 덩어리를 지키거나 아니면 이 덩어리에 빨리 뭉치기 위해 징징대는 백색소음일 뿐입니다.
공정이 아니라 공감이 필요합니다.
산업시대의 호모 이코노믹스가 가고 p2p시대 호모 엠파티쿠스가 오고 있습니다.